(괴뢰군연혁)15, 38선 불법침범, 1949년

<괴뢰군 연혁>은 1949년 5월부터 한국군의 경비상황 및 전력을 확인하기 위해 874회의 걸친 불범침범을 자행했으며, 연병력 81,937명이 동원되었다고 한다. 횟수와 연동원 인원을 어떻게 산정했는지는 불확실하다.

<괴뢰군 연혁>은 이런 북한의 불법남침을 개성지구, 춘천지구, 옹진지구 3가지로 크게 구분하고 있다.

모두 8번의 대표적인 사건들을 기술하고 있다

제1차 개성 사건(1949년 5월3일- 5월8일)

백천사건(1949년 5월17일-5월20일)

제2차 개성사건(1949년 7월 25일-8월3일)

관대리 사건(1949년 8월 6일-8월11일)

사직사건(1849년 6월 12일)

제1차 옹진사건(1949년 5월 21일-6월 30일)

제2차 옹진사건(1949년 8월 4일 – 8월 7일)

제3차 옹진사건(1949년 10월 14일-10월 20일)

모두 8번의 사건을 대표적으로 기술하였으나 군사적 충돌의 규모가 크지 않았다. <괴뢰군>연혁은 피해규모에 대해서는 별로 언급을 하지 않았다.

부르스커밍스는 한국전쟁의 기원으로 1949년의 군사적 충돌의 확대를 언급기도 했다. 물론 이런 이론은 이후에 소련의 문서고가 열리면서 부르스 커밍스의 주장이 틀린 것으로 평가되기도 했다.

그러나 한국전쟁을 다루면서 1949년의 군사적 충돌에 대해서는 크게 다루지 않는 것이 일반적이다. 정치적으로는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는 시기라고 할 수 있다. 이 시기의 남북간 군사적 충돌을 어떻게 평가할 것인가는 여전히 정리되지 않을 것 같다.

<괴뢰군 연혁>은 북한이 먼저 도발했다고 하지만 남한이 먼저 군사적으로 도발한 경우가 많은 것이 사실이다. 그런 연유로 부르스 커밍스가 한국전쟁의 기원을 1949년의 상황을 언급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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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뢰군 연혁) 14, 강동정치학원

(괴뢰군 연혁) 14, 강동정치학원
<괴뢰군연혁>은 북한의 유격부대를 양성한 강동정치학에 대해 아주 간략하게 언급하고 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그들은 4280(1947)년 5월 제주도 사건 동년 11월의 여수 순천반란 사건을 기회로 이와 호응하여 조직적인 후방요란을 목적으로 남한 일대에 침투시킬 유격대를 양성하는 기관을 강동에 설치하고 이를 강동정치 학원이라고 호칭. 남한에서 월북한 좌익 극열 분자 혹은 남한에서 유인 월북당한 좌경적 남녀 청소년들은 이학원에 강제 입교시켜 3-6개우러간 유격전수을 습득시킨 후 주로 동해안 태백산맥을 이용하여 남침시킨 거승로 이학원에서 파견된 유격대는 개전까지 10차에 걸쳐서 총병력 약2,385명의 훈련된 유격대를 남침시켰던 것이다.”(46)

강동정치학원을 이끈 것은 박병률이라고 소련파였다. 1990년대 한소수교를 하고 나서 소련에 있던 한인들 중에서 북한의 정부수립이나 한국전쟁에 참가했던 인사들이 한국을 방문한 적이 있었다.

1993-4년쯤에 경남대극동문제연구소에서 박병률을 위시해 소련에 있던 북한인민군 고위직들을 초청해서 세미나와 증언을 한 적이 있었다.

그때 박병률을 보았다. 인물도 훤하게 생겼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때 자신이 강동정치학원을 수립해서 유격대를 양성했다는 것을 증언했다. 그러면서 남한에 와서 지형을 살펴보니 자신이 잘못생각했다고 했다. 그는 소련에서 빨치산 활동을 했고 이를 바탕으로 유격대원들 교육을 시켰는데 한국의 자연조건은 소련과 너무 달랐다는 것이다. 유격대원들이 생존하기 어려운 자연조건이었다고 하면서 자신이 남으로 보낸 유격대원들이 모두다 죽었을 것이라고 하면서 눈물을 흘리는 것을 보았다.

실제로 한국전쟁을 개전이전에 유격대가 많이 파견되었으나 그리 중요한 역할은 제대로 하지 못했다.

박병률도 이후 숙청 대상이 되어 다시 소련으로 망명을 해서 여생을 소련에서 살았다.

당시 박병률과 같이 식사도 하고 사진도 찍도 했는데 사진이 어디에 있는지 찾을 수가 없었다.

<괴뢰군 연혁>에서 강동정치학원에 대한 기록은 매우 간단하다. 아마도 유군본부 정보국이 이책을 작성할때 까지만 해도 강동정치학원에 대해서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던 것 같다.

2019년 10월 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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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뢰군 연혁)13, 동북의용군 문제

이번 포스트에서는 중국의 국공내전에 참가했던 동북의용군이 북한 인민군에 편입되는 과정에 대한 내용이다

조선의용군 조직

중국 산서성 연안에서 공산주의 운도을 하던 한국인들이 태행산 군정학교 한국인 학생들과 합해 조선의용군을 조직했다.

동북의용군의 조직

제2차 대전 마지막에 소련군이 만주로 들어오자 중국군과 조선 의용군도 만주에 들어와 1945년 9월 만주의 한국인을 규합하여 남만주 봉천 대석교를 근거지로 하는 3개지대를 편성하고 동북의용군이라고 호칭했다.

제1지대는 9,500명으로 길림 반석 봉천 일대에 주둔

제2지대는 6,000명으로 북만주 하얼빈 일대에 주둔

제3지대는 9,500명으로 길림 일대와 간도일대에 주둔

이후 각지대는 하얼빈에 제1단, 길림에 제2단, 목단에 제3단을 설치, 이후 장춘에서 인민해방 독립 제11사단으로 개편. 1949년 1월에 제164사단(김창덕 지휘)으로 개칭, 동년 8월 23일 회령 경유 나남에 입북하여 인민군 5사단으로 개편

이와 별도로 봉천지구의 의용군은 인민 해방군 제4사단을 조직,1949년 1월 166사단(방호산 지휘)으로 개칭, 1949년 7월 경부터 10월초까지 신의주로 들어와 인민군 제6사단으로 개편

동북의용군 입국한 숫자는 28,000명에 달했다.

동북의용군으로 들어온 사단은 5사단과 6사단이며, 12사단(전우 지휘)은 1950년 5월 초에 들어왔다.

이렇게 보면 중국에서 들어오더라도 5,6 사단과 12사단은 차이가 있다. 김종필은 자신의 자서전에서 중국의 인민해방군 한인부대가 들어오는 시기에 따라 전쟁이 일어나는 시기가 정해질 것이라고 언급한 바 있다. 원래 연초에 들어오면 북한이 3-4월에 남침을 감행할 것이라고 했으며, 늦어지면 6월 정도에 전쟁이 발발할 것이라고 평가했다.

현재 김종필이 보고했다는 정보분석 보고서는 남아 있지 않다. 만일 그렇다면 김종필은 인민해방군 한인부대인 12사단이 북한에 들어오는 시기를 전쟁발발의 가장 중요한 요인으로 판단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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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뢰군 연혁)12, 소련 군사대표단의 주요활동

<괴뢰군 연혁>은 북한에 들어온 소련의 군사대표단의 활동을 다음과 같이 5지로 나누어 설명하고 있다. (40-43)

1, 북한전차병 양성, 1, 기계화부대 연료문제, 3, 북한 공군문제, 4, 보병사단육성, 5. 합동연습 등이다.

하나씩 정리해보고자 한다.

1 북한 전차병 양성

1949년 1월 말부터 ‘몽고’의 전차요원 1500명을 동원하여 북한 전차병 양성을 위한 요원으로 활용했다. 크바노프가 소련의 전차반입을 책임졌고 스티코프가 연료문제를 담당하여 2개 사단의 전차부대를 편성

1944년 독일 전선에서 사용하던 T-34 형의 일종인 32ton 中형 전차가 배치. 동전차는 장갑판에 특수합금을 사용했고 30마일 이상의 속도 85미리 포 한문과 중기관총 3정으로 장비되어 있었음

북한 전차부대의 3/4를 차지

2 기계화부대 연료문제

블라디보스톡에는 연료가 전무했으며 화래(태?)의 년 석유 생산량은 200만톤에 불과

소련의 태평양 연안에는 제유공장이 없었으며 망산에 제유공장과 석유 수송관을 설치

연료부족 문제를 보충하기 위해 군사대표단은 동북 부천 김호 연변에 또하나의 제유공장을 설치하고 그 일대에 다량으로 매장되어 있는 역청탄의 액화를 개시함

역청탄 채굴을 위해 북한범죄자(유형, 강제노동)를 이용, 연 12.5만톤을 생산

1949년 말-1950년 봄사이에 북한군을 위한 연료를 어느정도 확보했으나 더 많은 석유를 위해 탄영공동 경영 석유회사로부터 구입

1950년 초에는 10만톤의 석유를 망산에 저장

*지명에 대한 추가 정리 및 위치확인이 필요

3 북한 공군 문제

소련은 강력한 공군을 북한에 제공할 수 있었으니 북한이 지나친 행동을 할 것을 두려워해 제공하지 않았다고 기술하고 있다.

군사대표단의 한 사람이 챠쟈로프에게 북한군에게 강력한 전차부대는 창설해 주면서 공군을 등한시 하는 이유를 물었을 때 챠쟈로프는 다름과 같이 대답했다고 기술하고 있다.

“우리는 조선인에 대한 확실한 인식을 가져야 한다. 우리 군사대표단의 할일은 적 진영을 타파할만한 강력한 근대 육군을 육성하는데 있는 것이지 마술사가 제자들에게 그 비밀의 실마리를 풀어주듯이 우리 소련의 극동 정책을 하나라도 가려쳐 주는 짓을 해서는 안된다.(40) 만약 인민군에게 장갑부대와 동일하게 강력한 공군을 갖게한다면 그들은 순시에 부산을 함락시키고 대마해협의 최강 진지에 진공하여 일본 침략의 토대로 화하고야 할 것이다.

소련은 아직도 전쟁을 조발할 의사는 없다. 인민군에게 1000대의 비행기를 제공하는 것은 결코 곤난한 것이 아니며 조종사도 부족하지는 않다(41)”

결국 북한의 공군력 부족은 한국전쟁 초반부터 북한군이 신속하게 진출하는데 상당한 장애로 작용했다. 이제까지 북한군의 공군력 부족을 소련의 전략전 구상 때문이라고 하는 견해는 별로 보지 못했다. 북한군이 초반의 승기를 제대로 활용하지 못한 이유는 미군에게 제공권을 완전하게 압도당했기 때문이라는 점을 생각해보면 소련이 북한공군을 제대로 육성하지 않은 것이 초기 전투 패배의 결정적 이유라고 하겠다.

이후 김일성 지속적으로 공군력을 요구했으며, ‘몰로토프’는 공군 1개대대 즉 전투기 및 전폭기 150대만을 제공했다.

4 보병사단 육성

길림에 주둔하고 있던 동북의용군을 인민군으로 전환시켜 골간으로 삼고 국내 농촌 청년을 모집하여 1949년 2월말까지 6개 사단을 편성. 그 중에는 2차대전시 스탈린그라드 대독전에 참가했던 한인부대 5,000명도 포함됨.

1950년 3월 기계화부대 제16사단이 편성되었으며, 기총을 장비한 대형트럭 100-150대와 오토바이 승용차 약 10대가 배치됨

5 합동연습

소련군사대표단이 북한에 들어온 지 2개월 경과한 1949년 2월말 대략의 편성을 완료한 인민군은 보병 2개사단 전차부대 및 기계화부대 각 1개 사산이 참가하여 연합대연습을 실시

연습과제는 적진돌입과 적 후방부로의 침투였고 성과는 극히 양호했다 함

소련 군사대표단은 1950년 6월 개전에 앞서 소련군사대표단은 보병 10개사단(20만) 각종포 1643문 전차 500대 항공기 211대 함정 30척을 양성하고 소련으로 복귀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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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뢰군 연혁) 11, 소련군 대표단의 활동

소련군 대표단의활동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정리하고 있다(38-40)

소련은 1949년 3월 26일부로 소련군대가 만주로부터 철수하였다고 5월 22일 발표

1948년 6월 7일 소련은 북조선 주둔 소련군을 감소시킴과 동시에 북조선 주둔 사령관 “끄로뜨코프”중장을 귀환시기고 새로이 마르클로브(Marklov)소장이 지휘하는 소수 부대만 잔류하게 되었다고 발표

1948년 12월 25일에는 잔류부대도 완전히 철수했다고 선언

그러나 대다수 소련군은 인민군의 고문이라는 명목하게 잔류하고 있었으며 장비의 대부분을 북한군에게 이양

북한 민족보위상 최용건이 자랑스럽게 말한바와 같이 소련이 성의 넘치는 원조로 조직정비된 북한군의 병력은 보병 3개여단, 1개 동립혼성여단, 38경비 2개여단, 조만 국경 경비대, 전차연대, 비행연대로 구성

북한 주둔 소련군의 철수화 함께 1948년 12월말 모스크바를 떠난 소련군 대표단 대표단 일행이 1949년 1월에 평양에 도착

일행은 크라노프(Kranov), 챠토코프(Chotokov), 가라제프(Garazev), 챠자로프(Chazarov) 및 북한 주재 소련대사(Stikov)를 수반으로 대령 12명 중령 20명으로 구성

이들 대부분은 장갑전술의 전문가였으며, 챠자로프는 수륙양용 부대의 전문가였으며, 정보전문가들도 있었음.

북한군의 조직을 위한 계획은 1948년 12월 중순 모스크바에서 이미 토의되었음

소련 무력상 부르가닌을 의장으로 하는 토의에서 소련 공산당 볼세비미 정치국원 말렌코프(Malenkov) 환시리에피스키(?)(Hansilvsky) 장군, 코바이프(Kovaiv) 장군, 해군 육전대 참모과장(Gaovov) 그 밖에 중공과 북한 괴뢰집단의 대표 및 적군기술 부대들의 대표들이 참석

북한군 건설의 기본방침은 주로 부르가닌(Bruganin)이 연구. 그는 기계화에 중점을 두고 최신식 장갑차를 배치할 것을 강력 주장했다. 그러나 석유문제가 해결이 되지 않아 중간 중자 및 무거울 중자급의 화포가 기계화되지 못했다,

이 계획에 의하면 북한군의 훈련은 18개월이내에 완료하여야 한다고 되어 있었다고한다.

소련 군사 대표단은 이런 명령을 받고 1949년 3월부터 북한군 훈련에 참가했다.

<괴뢰군 연혁>은 소련군사대표단의 활동과 그 배경을 비교적 자세하게 정리했다. 아쉬운 것은 근거와 참고자료를 제시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1948년 12월 북한군 강화를 위한 회의가 소련 무력상 주관하에 이루어졌다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아직 다른 글에서 소련 무력상 주관하에 그런 계획이 만들어졌다는 것을 교차검토할 필요가 있다고 보인다.

이 회의에 중공의 대표들이 참가했다는 기술은 매우 중요한 것 같다. 한국전쟁에 대한 책임이 누구에게 있느냐를 따지는 과정에서 매우 중요한 대목이 될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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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괴군 연혁) 10, 북한이 소련. 중국과 맺은 비밀조약 및 소련으로부터 지원받은 금액

경제분야에 대한 준비과정에 이어 북한과 소련과의 군사협정 체결에 대한 내용을 기술하고 있다

1949년 3월 소위 내각 수상 김일성을 포함한 북한 대표는 소련을 방문하여 3월 17일 모스크바에서 소련으로부터 무기를 반입하기로 하고 소련과 비밀협정을 체결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가. 6개 보병사단을 장비할 수 있는 군사시설과 무기를 추가 원조할 것(당시 있던 3개사단과 1개 독립여단을 포함)

나. 3개 기계화부대를 장비할 수 있는 군사시설과 무기를 추가원조할 것

다. 7개 기동보안대대를 장비할 수 있는 무기와 시설을 원조할 것

라. 북한공군이 충분히 훈련되었을 때 하기 비행기를 원조할 것

ㄱ. 정찰기 20대

ㄴ. 전투기 100대

다. 폭격기(중경) 30대

마. 105명내지 120명의 군사고문을 1949년 5월 1일부로 5월 20간에 파견할 것

바. 1949년 5월 20일 가지 10억환에 해당하는 물자를 반입완료할 것

소련과의 군사비밀협정에 대한 내용에 이어 북한과 중공과의 방위협정을 다음과 같이 소개하고 있다

1949년 3월 18일 북한대표 일행은 모스크바에서 소련의 주최하에 조중상호 방위협정을 체결했는데 그 요지는 다음과 같다.

가. 양측한 어떠한 성질의 침략에 대해서도 공동방위한다. 또 어떠한 제국주의 세력이든 북한 또는 중공의 일방을 공격하는 경우 양측은 그 제국주의 세력에 대한 공동전쟁에 공동의 행동을 취한다.

나. 중공 공산당은 1949년 7월 1일부터 8월 31일까지의 기간중 만주로부터 무기와 병력을 북한으로 제공한다.

다. 북한은 만주에 있는 일본기술자와 고용원, 만주에 있는 일본군수품 사용에 관하여 최우선권을 보유한다.

이어서 북한과 소련과 경제 문화 협정에 대해서 기술하고 있다. 그 협정으로부터 북한이 소련으로부터 받은 경제원조를 다음과 같이 정리하고 있다.

1946년 74억 루블

1947년 14.5억 루블

1948년 26.5억 루블

1949년 34.7억 루블

1950년 68.4억 루블

이렇게 지원받는 금액은 218.4억 루블이었다.

Posted byadmin2019년 10월 1일Posted in북괴군 연혁, 한국전쟁 초기단계Leave a commenton (북괴군 연혁) 10, 북한이 소련. 중국과 맺은 비밀조약 및 소련으로부터 지원받은 금액Edit(북괴군 연혁) 10, 북한이 소련. 중국과 맺은 비밀조약 및 소련으로부터 지원받은 금액
(북괴군 연혁)9, 북괴의 침략준비, 경제분야
군사적인 준비에 이어 비군사적 전쟁준비에 관한 기술을 하고 있다. 제일먼저 경제적 준비를 언급하고 있다.

침략적 경제적 준비라는 항목에 침략적 경제태세의 확립과 괴뢰 인민 경제 계획의 수행 두 가지로 나누어 기술한고 있다.

제1항 침략적 경제태세의 확립

1946년 3월 5일 개인 소유토지의 무상 몰수를 감행. 5정보 이상 소유한 지주의 소유지를 전부 몰수하였으며, 5정보이하 토지소유자들로부터도 각종 구실을 붙여 소유지를 몰수

총 1,000,325 정보를 몰수

지주들을 거주지로부터 축출하고 인민윈원회는 가축과 농업기구 주택 및 건축 대지 일체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을 강탈

1946년 6월 27일 발표된 농업현물세 법에 의하면 곡물 공출량은 수확량의 25%라고 추정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실제로는 75-90% 많을 경우 100%에 달함

소련은 1946년 8월 북조선 인민위원회로 하여금 중요산업 국유화 법령을 발표케하고 산업기관 일체를 장악케함.

1032개에 달하는 기업소 광산 발전소 철도 운수 체신 응행 기관은 물론 산업 및 문화기관까지 무상으로 흡수

제2항 괴뢰 인민 경제계획의 수행

1947년 1948년 각 1개년 계획과 1949-50년도 2개년 계획의 3차 계획 진행

북한 주둔 소련군이 북한에 있는 공장 시설의 대부분을 자국으로 철거해감

1947년 인민경제계획에서는 기업소의 복구와 철도 시설의 개선, 석탄 생산량의 재고, 국가 산업망의 확장에 두었으나 실패함

1947년도 계획은 다시 1948년도에 답습하게 됨

1948년 전년도 대비 총 41% 증가시킬 것을 예상하면서 노동력을 착취

1947-48년 2개년 동안 복구공사를 완료하고 1948년 9월 인민공화국을 수립

그 이후 북한 괴뢰집단의 생산 중점적 방향은 다음과 같음

첫째, 공업 생산품의 대량증가를 기하되 국유화된 공작의 복구로서 침략적 군비와 밀접한 관계를 가지는 체철 제강기계 부속품 화학 조선업, 철도 자동차, 운수업 경공업을 발전시킬 것을 계획

둘째, 일단 유사시 직접 군수품화 할수 있는 섬유 피혁 제화 및 기타 경공업의 발전을 주장

농업부분에 있어서는 관계시설을 확장하고 미곡의 수확고를 높여 전쟁에 필요한 충분한 식량의 저축을 기함

1949-50년 인면경제 제2개년 계획에 따르면 공업 생산은 일제시인 1943년도 수준에 이를 것을 목표로 함

1943년 일제 패망전 공업 생산비율 중 금속 공업이 35.1%란 최우위에 있었으나 해방후 비율은 18.7%로 3위였음

그러나 2개년 인민경제 계획의 종료시는 그 비율이 29%로 증가가 예견

1946년 생산량을 100으로 한다면 1949년 제철 생산은 55.529로 작성되어 있었으며, 그 대분이 소련으로 운반되어 탱크로 바꾸어 나왔음. 이는 북한의 침략준비가 경이적으로 수행되었다는 것을 여실히 증명하는 것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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