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괴뢰군 연혁)21, 남침 제2기 전투(1950.6.28-7.15)

한강선에서 일시적으로 국군에게 저지당한 북한군은 4-5일간 정비와 후방보급 보충을 완료하고 한강도하 작전을 감행했다.

주력은 경부선으로 지향했으며 일부는 원주 일부는 동해안선으로 계속 남하했다.

북한군 제1사단은 수원-이천, 수원-이천을 거쳐 함창으로 공격

제3사단은 의정부 서울 수원 평택 천안을 경유 금천 방향으로 공격

제4사단은 주력으로 의정부-서울-수원 대전을 향해 남진

제6사단은 수원평택으로 남하

제6사단 중 옹진을 점령한 부대는 김포-영등포-평택을 점령하고 공주방향을 지향함

제105 전차 사단이 선두에서 남하

제10사단은 서울-천안 경유 조치원으로 향함

북한군 제2사단은 가평-청평-경안리 방면으로 진출, 춘천-안성-진천선까지 진출

제12사단 홍천-원주, 제천으로 향함

제15사단은 여주를 점령후 괴산으로 압력

제5사단은 삼척-울진방향으로 공껴

북한군 공군은 YAK-9, YIL-10 전투기 211대, 병력 2,000명을 보유하고 지상군을 지원하면서 평택이북을 폭격했으며 한국군 비행장과 군사시설을 목표로 삼음

북한군 총사령부는 1950년 7월 전선부대 지휘를 위해 전선사령부를 설치 서울에 주둔시키고 지휘

7.15일까지로 구분한 이유는 정확하게 알 수 없다. 제2기로 나누었지만 정확하게 어떤 개념인지는 불분명하다. 충청도 지역까지 진출을 고려한 것으로 보인다.

Posted byadmin2019년 10월 1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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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뢰군 연혁) 20. 제1차 남침 제1기전투(1950.6.25-28)

<괴뢰군 연혁>은 남침 제1기 전투를 6월 25일부터 연합군이 반격을 실시해서 한만국경으로 진격하는 기간까지를 제1차 남침으로 정리했다.

그리고 그 기간을 모두 8개의 기간으로 나누었다. 이 포스트에서는 6월 25일부터 28일기간까지를 정리했다.

1950년 6월초 북한군의 전력

보병 10개 사단(1,2,3,4,5,6,10,12,13,15) 전차 2개사단(105,16), 고사포 1개연대, 내무성 경비대 1개 철도사단 및 3개 경비여단

육군총사령부는 제1, 제2 집단군으로 편성

평양지구에서 북한군 제1군단 제2군단(2,5,12) 가 편성

1950년 6월 10일 총참모장 강건은 예하 각사단 및 여단장을 비상소집하고 비밀회의를 열어 6월 23일까지 전투배치를 위한 이동을 완료하라는 명령을 하달

6월 18일 ‘김일성’명의로 언제든지 전투를 할 수 있는 준비를 갖추라는 훈령을 하달

1950년 6월 23일 북한군은 병력을 38선데 깁결배치완료, 평화통일 총선거 실시, 조만식 선생과 김상용 이주하 양인의 교환과 같은 기만술책을 사용

제1기 전투

의정부에 주공으로 주문진, 춘천, 고랑포, 개성, 옹진 방면을 조공, 해상으로 강릉, 삼척, 임원진등지에 상륙을 감행 일제히 침략

의정부 방면

제3, 4사단 및 105 전차사단(총 34,000명, 포 514문 전차 86대 자동포 48대 보유)

개성 정면

제6사단, 병력 9,000명 포 154문, 자동포 16대, 전차 20대

고랑포

제1사단 병력 12,000 명 포203문, 포 406문, 자동포 32대

옹진방변

제6사단 및 38경비 제3여단(병력 10,000명, 포 102문)

강릉지구

제766군부대, 지구 유격대 약 600명 및 포 54문

당시 남침에 참가한 병력은 총 107,000명 포 1,582문 전차 120-130대

자동포(써머호트) 128문

의정부 방면의 제3,4사단은 전곡-동두천을 경유 한국군 제7사단 정면을 돌파 의정부를 통과 6월 28일 03:00 돈암동에 침입

제6사단은 사리원에 집결, 개성-문산으로 한국군 제1사단 정면을 돌파-수색으로 침입

제1사단은 남천에 집결-고랑포방면으로 임진강 도하-장단-문산-서울로 침입

제5사단은 화천에 집결-주문진돌파- 강릉-삼척을 돌파-강릉남척 임원진으로 상륙한 유격대와 합류

서울을 점령한 후 북한은 최고사령관 명령서 7호(1950.7.5)를 발령하여 제3,4사단 및 제105 전차 사단을 표창했다.

2019년 10월 1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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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뢰군 연혁)19, 육군본부가 파악한 남침 직전 북한의 전투력

1949년말 육군본부 정보국이 발행한 자료에 의하면 북한군의 병력및 장비는 다음과 같다. 당시 발행한 자료의 행방은 확인할 수 없다. 1958년에 <괴뢰군 연혁>을 발행할때 참고한 자료라고 한다면 남아 있어야 하는 것이 정상인데 그 이후 육군본부의 자료에 대해서는 제대로 정리가 되어 있지 않은 것 같다. 문서 목록을 본 적이 없다.

병력은 총 174,000명 그중 인민군이 91,598명 보안군이 60,428명, 기ㄸ타 의용군과 잡군(유격대)로 되어 있다.

장비는 다음과 같다.

소총 : 75,653정

기관단총 : 30,099정

중기관총: 2,287정

76미리 유단포(?) : 218문

82미리 박격포 : 603문

120미리 박격4포 126문

122미리 유단포 : 73문

자동차 : 1693문

전차: 120대

장갑차 : 60대

경비정 : 30척

비행기 : 62대

당시 육군본부가 파악한 북한의 비행장은 38선부터 시작하여 해주, 감포, 신막, 옹간, 평양(3개소), 안주, 원산, 연포, 함흥, 길주, 중강진, 신의, 회문, 청진, 회령, 하길지 등 19개소였다.

이와함께 육군본부는 북한군이 다음과 같이 행동할 것이라고 판단했다.

1950년 춭기를 계기로 적정에 급격한 변화가 예상되며, 북한은 남한 후방을 교란하고 북한군의 남침을 위한 구체적인 조건을 조성함과 동시에 전기능을 동원하여 남침준비를 한다음, 38선 일대에 걸쳐 전면공세를 취할 것임

이후 1950년 1월 육군참모총장 대리 신태영 소장은 유엔 한국위원단에 다음과 같이 보고했다.

북한군 전차 130대, 비행기가 120대로 각각 증가했으며 북한군의 침략기획이 거의 완료되어 있다고 보고했다.

신태영 참모총장 대리는 대한민국이 약한 징후만 보이면 언제든지 공격할 것이라고 보고했으나, 당시 주한군사고문단장 ‘로버츠’ 장군은 이런 평가에 동의하지 않았으며 오히려 한국군의 국력이 북한군에 비래 훨씬 강하다고 주장했다.

1950년 신성모 국방부 장관은 외국신문기자 회견 석상에서 북한 괴뢰군이 대거 38선에 이동함으로써 남침의 위협이 더욱 긴박하다고 강조했다(59)

외신기자들에게 언제 언급했는지는 불명확하나 그 시기로 보아 1950년 6월정도로 추정할 수 있을 것 같다.

1950년 5월 12일 군제연합 한국위원단과 외무부 장관과의 회견에서 당시 육군본보 참모부장 김백일 대령과 정보국장 장도영 대령은 북한군의 전력을 다음과 같이 소개했다.(59-60)

총병력 : 182400명

인민군(6개사단) 95400명

보안군(3개사단) 24000명

공군(1개사단) 1800명

기갑(1개사단) 10000명

해군(2개사단) 15100명

37미리 고사포 34문

85미리 고사포 12 문

45미리 반전차로 586문

76미리 유단포 464 문

82미리 박격포 1,223문

120미리 박격포 172문

76미리 자주포 176문

차량 및 전차

전차 173대

장갑차 69대

비행기 197대

경비함 30척

개전후에 파악한 바에 따르면 개전전에 파악한 숫자보다 훨씬 많았다고 한다.

육군본부는 당시 전차의 전술적 활용에 대해 폭넓은 이해를 하고 있었으나 북한이 보유한 전차의 성능에 대해서는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 종류를 소련제 중형 경형, 일본제 경형 그리고 약간의 소련제 중형 전차를 보유하고 있는 것으로 파악하는 정도였다.

당시 북한군의 동향에 대해 한국군 수뇌부가 어떤 인식을 가졌는가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초전에서의 패배이 이후 한국군 수뇌부가 주장한 북한군의 기습남침주장에 상반된 근거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게 본다면 한국전쟁 발발이전에 육군본부 수뇌부가 보여준 북한군의 전력 증강에 대한 정보수집과 판단은 매우 의미가 있다. 비교적 정확하게 북한의 전쟁준비와 남침의도를 파악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할까? 그리고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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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뢰군 연혁) 18, 북한군 남침 계획에 대한 예측과 남침시간

1949년 이후 육군본부는 북한의 공격을 다음과 같이 예상했다.

제 1안

주공 : 철원 정면(주로 경원선에 연해 철원-전곡-의정부선)

조공

가. 영안 개성 방면 : 견제

나. 옹진 정면 : 전략적 수세

다. 강원도 정면 : 전략적 수세

라. 후방 : 요란 공작

제2안

주공 : 개성 정면 주로 경의서ㅗㄴ

조공 : 연안 정면 철원 정면 : 견제 공격

제3안

주공 : 장단 정면(구화리 서방 – 장단, 문산 선)

이상의 세가지 방안을 놓고 제1안이 가장 가능성이 높다고 판단했다. 이와함께 북한군은 38도선을 돌파한 후 한강선까지 신속히 남하아여 국군의 주력을 서울 이북지역에서 결정을 강요하고 단시일내에 수도 서울을 수중에 넣으려고 할 것이라고 판단했다.

서울 점령후 북한군은 최대 2개월내에 남한 전지역을 완전히 점령하려고 시도할 것이라고 보았다.

전쟁준비를 위해 북한의 참모총장 강건은 1950년 6월 10일 각 사단장과 비상비밀회의를 개최하여 언제든지 전투에 돌입할 수 있는 태세를 갖출것을 지시했다. (55)

이와함께 6월 초순부터 38선 일대에 병력을 배치하기 시작하여 7월 23일 경에는 보병 7개사단 전차 2개 사단을 38도선 일대에 집결완료 시켰다.

이렇게 병력이동 배치를 완료한 북한군은 1950년 6월 25일 05:30분을 기하여 38도선 전지역에서 포천 의정부 정면을 주공으로 주문진, 춘천, 고랑포, 옹진, 개성 정면을 조공으로 서울 점령을 목표로 남침을 개시하는 한편 제766부대 (회령군관학교 생도대)와 유격대를 안인리에 상륙시켰다.(57)

여기서 공격 개시시간을 05:30분이라고 적시한 것은 기존의 04:00 주장과 다르다. 통상 새벽 4시에 공격을 했다고 하는 것은 국군이 기습을 당해서 불가항력이었다는 주장의 근거로 사용된다. 그런데 1958년도에 출간된 육군 정보국의 자료는 05:30분을 공식적인 남침시간으로 지적하고 있다.

만일 그렇다면 새벽 4시 주장은 그 이후에 이루어졌을 경우가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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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뢰군 연혁)17, 북한의 남침시기 판단 문제

한국전쟁이 발발할 무렵 북한이 당시의 정세를 어떻게 보았는가 하는 내용이 기술되어 있다. 먼저 <괴뢰군 연혁>은 북한의 작전계획서를 입수하지 못했으나 단편적으로 입수된 자료를 바탕으로 소련군에 의해 남침작전이 계획되었다고 보고 있었으며(53) 남침 개시시기를 침략준비의 진전과 관련하여 1950년 춘기 아니면 6월 말까지로 예정했다(53).

남침 개시시기를 1950년 춘기 혹은 6월말로 본점은 김종필 자서전 내용과 동일하다.

당시의 상황에 대한 육군본부 정보국의 평가는 다음과 같다

첫째, 소련은 직접적으로 북한을 엄호하고, 인접 중국의 후원을 절대적으로 보았다.

둘째, 북한은 미국 무장으로 간섭하지 않을 것으로 보았다.

셋째, 남한내 반공정책이 효과적으로 진전되어 북한이 파견한 유격대나 지방공비가 거의 섬멸당하는 상황이었다.

넷째, 북한 내부에서도 독재정책으로 인한 제모순이 폭로되지 시작하여 일반적으로 민심의 동요가 심해가고 있었다.

다섯째, 1950년 5월 30일 대한민국 선거에 여당인사들이 낙선하고 중간파 인사들이 많이 당선되어, 북한군이 남침하면 조속한 시일내에 지지를 얻을 수 있을 것이라 오산했다.

당시 육군본부 정보국은 상기 다섯가지를 북한이 1950년 6월 25일을 기해 남침하게된 이유로 보았다.

마지막 다섯번째 선거와 관련해서는 다른 자료에서 많이 인용하지 않고 있다. 김종필과 박정희가 작성했다는 정보보고서도 동북의용군의 북한귀한과 관련한 시기를 중요한 요소로 판단했다.

김종필과 박정희가 판단한 동북의용군의 귀환과 관련한 내용도 그것이 전쟁시기의 결정에 얼마나 결정적이었는지 생각해 볼 여지가 있다. 1949년말까지 이미 동북의용군 출신의 2개사단 병력이 들어왔기 때문이다. 제5사단과 제6사단이 그것이다. 1950년에 들어온 것은 춘천 홍천의 북한군 제2군단에 배치된 제12사단이다.

북한이 시기를 판단하는데 있어서 오히려 남한내 정세의 변화가 더 큰 역할을 한 것으로 볼 수도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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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뢰군 연혁)16, 한국전쟁 기원의 주요 쟁점

<괴뢰군 연혁>의 내용중 특이한 내용들을 북중관계 및 북소관계에 관한 내용이다.

일전에 언급한 것과 같이 1949년 1월 하얼빈에서 북한과 중국이 동북의용군을 북한으로 송환하기 위한 회의를 했으며 이때 소련 대표단 전원이 참석했다는 내용이 있다(12)

이 내용에 대해 추가적인 출처를 확인하고 있으나 아직 다른 출처를 찾지 못했다. 중국의 선지화가 쓴 ‘천조’라는 책에 한국전쟁에 대한 자세한 자료가 제시되어 있으나 1949년 1월의 하얼빈 회의는 언급하고 있지 않다. 여기서 재미있는 것은 소련 대표단 전원이 참석했다는 것이다. 소련이 그 당시 이미 동북의용군의 복귀와 관련한 내용에 깊숙하게 개입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 이렇게 보면 이미 이 당시에 소련이 한반도에서의 전쟁상황에 대한 준비를 하고 있었다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이제까지 자료에 따르면 스탈린은 1949년 9월 정도가 되어서야 한국전쟁에 대한 생각을 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통상적인 정설이다. 그러나 <괴뢰군 연혁>은 그런 통설을 다시 생각하게 하는 구절이 있는 것이다.

특히 1949년 3월 북한과 소련의 군사비밀 협정이 맺어졌다는 것은 1949년 소련을 탈출한 칼리노프(북한주재 특별군사고문단)가 주장한 내용이다. 그는 조소 경제문화교류협정과 더불어 비밀군사협정이 체결되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소련 해체 이후 러시아외교아카데미의 바자노프 교수와 러시아국제관계대학 토르쿠노프 교수의 연구에 의하면, 김일성이 스탈린에게 무력에 의한 남북통일 방안을 제기하고, 스탈린이 이에 반대한 사실이 밝혀졌다고 평가된바 있다.

<괴뢰군 연혁>은 조소간 군사적 협정의 내용을 매우 구체적으로 언급하고 있어서 바자노프교수와 토르쿠노프 교수의 주장을 추가적으로 비교해 볼 필요를 느끼게 만들고 있다. 중국의 선지화 교수도 바자노프와 토르쿠노프 교수의 주장을 그대로 인정하고 있는 것 같다.

<괴뢰군 연혁>은 조소간 군사협정과 경제문화협정을 분명하게 분리하여 다루고 있으나 그간의 연구에서는 군사협정에 대해서는 명확하지 않다.

관련 자료는 다음과 같다. 찾아보아야 한다.

한국전쟁,문서와 자료,19501953년 (국사편찬위원회 편, 국사편찬위원회, 2006)
「한국전쟁과 소련의 역할: 1949년 3월 조소 양국 정부의 협상을 중심으로」(전현수,『대구사학』,2010)
한편, 가장 관심이 가는 문제는 북한과 중국의 방위협정이다.

모스크바에서 1949년 3월 18일에 체결되었다는 조약과 관련된 내용은 다른 곳에서 찾을 수 없다. 선지화의 <천조>에서도 1949년 3월 18일 북한과 중공의 방위협정과 관련한 내용을 다루지 않고 있다.

<괴뢰군 연혁>는 1949년의 조중 및 조소의 군사협정을 매우 자세하게 언급하고 있다.


우리는 지속가능한 삶을 살고 있는가

모두들 자신의 삶에 불만들이 많다. 그렇지만 하나 분명한 것은 우리는 지금 지나칠 정도로 물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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