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괴뢰군 연혁) 40, 제5차 2단계 공세 부대별 활동경위

전선지구의 북한군 활동

북한군 제1군단(8,9,47사)는 문산남방 고양일대에서 재반격을 개시 아군을 포위하려 했으나 실패하고 후퇴

제8사단으로 후퇴엄호토록 하고 제19사 47사를 임진강 북안으로 철수시킴

5월 30일 임진강을 완전하게 도하 개성 장단 북방일대에 집결하여 재정비, 동강북안 일대에 진지를 구축

북한군 제3군단(1,15,45사단) 5월 16일 이후 제5차 제2단계 공격전투에서 동군단 방어정면을 중공군에게 인계

일부병력을 제5군단 정면 설악산 및 대봉을 연하는 선에 진출

제2, 5군단 진출로 포위된 국군부대를 섬멸시도

제2,5군단은 후퇴하면서 제15사단으로 지연작전을 수행케 하고 군단주력을 말휘리 방면으로 북상

제5군단은 4월 23일 제5차 1단계 공세에 실패하자 차기 공세를 위해 부대를 정비

5월 16일 제2단계 공격이 개시되자 중공군 20군과 협동, 현리-추평리 일대 아군을 포위 하여 한국군 3군단에 심각한 피해를 줌. 이후 오류동 막동을 경유 남하하고 선두부대는 22일에 하진부리로 진출

북한군 제2군단(2,13,27사)은 4월 하순경 제7사 포병 및 제41사 보병을 편입시켜 편성을 강화하고 4월말 주둔지이던 회양지구를 출발, 5월 16일 설악산 일대에서 제5차 2단계 공격작전에 참가

제3군단에게 동지역을 인계하고 5월 18일 마잔리 진동리 망대암리를 점령, 간성리 경유 단림리를 차단, 5월 22일 곡팔 부근까지 남하했으나 한국군의 반격으로 후퇴 북상. 이후 설악산 가리봉일대에 재배치

후방지구의 북한군 활동

제6군단(18,17,36사 26여단) 해주-연백지구를 중심으로 황해도 지구의 경비를 담당

북한군 제4군단(4,5,26,105, 3사?)은 신안주-평양-남포 일대에 배치 황해 연안선을 경비

제7군단(7,24,37)은 원산항을 중심으로 배치 일부병력을 전선부대에 차출 보충하고 원산항일대에 경비

제8군단(42, 46, 63여단)은 4월 말경 제42사단을 제2군단으로 차출 그 외부대를 제7군으로 이속하고 군단장 이하 소대장에 이르는 간부들은 신병을 징집훈련차 만주로 입북

(한국전쟁 당시 만주지역의 한인들이 징집되었다는 내용에 대한 추가적인 사실확인 및 연구가 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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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뢰군 연혁) 39, 제13기 전투(5월 1일-5월 30일)

공산군은 4월 23일 23시를 기해 공격을 가했으나 4월 30일경에는 전반적인 후퇴를 개시함

5월 16일 18:00를 기해 제5차 제2단계 공세를 개시해 옴

이번 공세의 특징은 종전에 지역적 점령을 목적으로 했던 것과 달리 한국군 주력부대의 섬멸을 기도함

중공군을 동쪽으로 대거 이동시킴.

이를 위해 북한군 제6군단을 예성강구 유역에서 이동시켜 제1군단의 병력 보충 및 간접지원 토록 함

제1군단은 의정부 이서지구를 담당하고 중부 및 중동부 지역에는 중공군이 배치되어 한국군 부대의 섬멸을 목적으로 침공함

동부지구는 북한군 제2군단을 전선에 투입시켜 해안지구를 담당케 하고 서림리 부근으로 이동 속사리를 향하여 남침을 개시

북한군 3군단은 설악산 지구에서 예비부대로 배치

적은 5월 16일 18시 중공군 12군 27군 으로 감대리 부근으로 공격개시

5월 17일 1개 사단이 상남리로 침입하여 한국군 3군단의 후퇴로를 차단하여 국군주력의 섬멸을 기도함

5월 18일 한국군 3군단을 추격하던 적은 일부가 광원리 풍암리에 침입

동해안 지구의 한국군 제1군단은 양양을 포기하고 강릉 북방선으로 후퇴 적을 견제함

5월 20일 하리현 삼거리에 침입한 적은 21일 속사리 하진부리 선까지 침투

서부및 중부지구에서 공격을 개시하던 적은 쳥평, 가평, 춘천 정면에 강력한 침공을 감행

한편 아군은 반대로 중부 서구 양지구에서 양지구에서 일대 반격을 개시했으며 이에 중동부 및 동부지역의 적은 23일을 기해 총후퇴를 함

적은 5월 16일 공격당시 5-7일 분의 식량만 소지하여 더 이상의 공격은 불가능한 상태

제5차 제1단계 공세에 참가한 북한군 부대

접촉부대 총 12개 사단 71,000명

제1군단 12,500명

제8사단, 2,900명, 제19사단 6,800명, 제47사단 2,800명

제2군단 21,700명

제2사단 6,300명, 제13사단 9,500명, 제27사단 5,950명

제3군단 17,779명

제1사단 4,700명, 제15사단 5,585명, 제45사단 7,494명

제5군단 19,490명

제6사단 6,045명, 제12사단 5,113명, 제32사단 8,332명

후방예비병력

제4군단(3개사 1개여단) 27,900명

제6군단(3개사 1개여단) 26,200명

제7군단(3개사단)

제8군단(2개사 1개여단)

항공 (3개사 1개학교)4,350명

해군(2개기지 1개학교) 2,050명

포병(4개연대 2개학교) 4,850명

기타(5개사 1개여단) 33,700명

계 147,050명

총계 218,569명


우리는 지속가능한 삶을 살고 있는가

모두들 자신의 삶에 불만들이 많다. 그렇지만 하나 분명한 것은 우리는 지금 지나칠 정도로 물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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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뢰군 연혁) 38, 부대별 활동경위(제5차 공세 1단계)

먼저 전선지구의 활동을 다음과 같이 정리했다.

북한군 제1군단(8,19,47사)는 4월 23일 23:00 8사단을 선봉으로 문산을 경유 서울을 지향하여 남하

이후 제8사단을 경의선로로 서측 제47사단은 동동 제19사단을 후방으로 하여, 마포강 방면으로 우회하여 한강교량을 위협

제47,19사단으로 서울을 공격 4월 26일까지 점령, 4월 30일까지 부대를 재정비, 5월 초 한강도하 남침을 기도

서울을 목전에둔 북한군은 아군의 반격으로 목표달성에 실패

북한군 제3군단(1,15,45사단 69여단)은 주력을 광치동 한천리 지구에 집결하고 공격을 개시했으나 양구부근일대에서 아군의 포사격에 진출이 고착되어 방어로 전환

금강산 일대에서 휴식중이던 제5군단(6,12,32사)은 제7군단으로부터 제32사단을 배속받아 남하를 개시 4월 30일 인제부근 및 한석산 일대에서 아군과 접전

후방지구

북한군 제4군단 (4,5,105사단 및 26여단)은 평양을 중심으로 대동강 이북 황해안 경비를 담당

북한군 제6군단(17,18,36사) 황해도 일대에 부대를 배치하고 제1군단에 인원 및 기타보급을 보충하고 연안 경비를 계속.

회양일대에서 북상 집결중이던 북한군 제2군단(2,9,10,13,27사)는 약 2개월간 휴식 및 재편하고 4월 30일 재편을 완료하고 차기전투에 참가 준비

제7군단(7,24,37사) 원산 회양 북방 홍천지구 일대에서 원산항을 포함한 동해안 일부의 방어임무를 담당

제8군단(63여단 42사 37사)은 예하부대를 함흥일대에 배치, 원산, 영흥, 북청간 해안선 일대의 경비를 계속함.

1개 철도사단이 평의선, 평원선, 함경선의 각 중요 철도를 경비토록 함

(이제까지 중공군 개입이후의 한국전쟁은 모두 중공군 중심으로 기술했다. 그러나 중공군이 전선의 주공격이었다면 북한군은 강력한 보조적 역할을 했다. 그런 의미에서 북한군의 활동에 대한 관심이 더 필요하다)


우리는 지속가능한 삶을 살고 있는가

모두들 자신의 삶에 불만들이 많다. 그렇지만 하나 분명한 것은 우리는 지금 지나칠 정도로 물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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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뢰군 연혁)37, 제4장 정전회담 이후, 제12기 전투

<괴뢰군 연혁>은 전투를 단계별로 나누기보다는 기간별로 나누었다. 제12기는 1951. 4.1-4.30 한달간의 기간에 벌어진 전투를 의미한다.

공산군의 당시 활동을 다음과 같이 정리하고 힜다.

서부에서는 중공군의 남하 집결과 아울러 예성강 이서지구에서 주공부대의 재정돈 배치를 완료

동부에서는 북한군 3군단으로 지연작전을 계속하면서 인제북방에서 정비 중인 북한군 제5군단에 제7군단으로부터 제32사단을 배속하여 공격준비를 갖춤

그 동쪽에는 제69여단으로 충당시킴

이와함께 공군과 기계화부대도 증강하여 전선의 각비행장을 정비

4월 23일 23시를 기해 서울 정면을 주공으로 가평 정면 현리 정면의 세곳에 대해 중점적인 공격을 감행

공산군은 공격개시후 전반적인 공세를 취하지 않고 4월 30일에 각각 일부 병력으로 공격을 했으며 각 주력은 38선의 진지에서 남하하지 않았음

제5차 제1단계에 참가한 적부대 규모는 다음과 같음

제1군단 총 18,380명

제8사단 3,900명

제19사단 8,980명

제47사단 5,500명

제3군단 총 19,930명

제1사단 3,750명

제15사단 4,700명

제45사단 9,300명

제69사단 2,080명

제5군단 총 22,800명

제6사단 6,500명

제12사단 6,500명

제32사단 9,800명

총계 9개사단 1개여단 총 61,010명

후방예비병령

제2군단(5개사단) 18,150명

제4군단(3개사단 1개여단) 27,750명

제6군단(3개사단 1개여단) 26,200명

제7군단(3개사단) 24,500명

제8군단(2개사단 1개여단) 23,500명

항공(3개사단 1개학교) 4,350명

해군(2개기지 1개학교) 2,050명

포병(4개연대 2개학교) 4,850명

기타(4개사단 1개여단) 40,160명

계(23개사단 4개여단 5개학교) 총 17만 560명

북한군은 낙동강전선에서의 패배와 한만국경선으로의 퇴주과정에도 불구하고 총 23만명 정도의 병력을 유지하고 있었다. 물론 편성율은 불비했지만 그정도 병력수준을 확보하고 있었다는 것은 주민동원이 상당한 규모에서 진행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공동성명 초안] 경찰과 한국도로공사는 여성톨게이트 수납원에 대한 폭력을 중단하라!

김천 한국도로공사에 농성 중인 여성노동자들에 대한 기본적 인권은 보장돼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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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뢰군 연혁)35, 제3장 제2절 괴뢰군의 최후공세, 제3절 마리끄의 정전호소

51년 5월 16일 적은 제5차 2단계 공세의 막을 올렸다. 공세는 서울-춘천을 지향했으며 서울 북방 32마일 및 동해안으로부터 내부로 65마일 지점에 위치한 가평부근까지 확대되었다.

38도선 이북에 있던 한국군부대를 공격목표로 선정했으며, 인제 부근에 포진한 한국군에 공격을 가했다. (제3군단)

적은 중공군 5개군과 괴뢰군 3개군단으로 한국군을 공격했다. 한국군은 적의 압도적인 병력과 우회포위 공격으로 인해 혼란에 빠졌으나, 미 제2사단의 영웅적인 방어전투로 위기를 탈출하고 부대 재정비를 실시할 수 있었다.

이후 적은 하진부리 청평 고양선까지 진출하였으나 아군의 반격으로 공격개시 1주일 만에 15만명이 손실을 달하고 공세는 막을 내림

(여기서 북한군 3개군단의 활동에 대해서는 상술하지 않았다)

5차 2단계 공세가 실패로 돌아가자 소련의 유엔안전보장이사회 대표가 51년 6월 23일 한국전쟁의 정전을 다음과 같이 제의

1 참전국 대표는 38선에서 전투행위를 즉시 정지할 것

2 한국에 있는 모든 외국군은 철수시킬 것

3 유엔군은 휴전조약에 관하여 토의할 것

미.영측은 소련의 제안에 관해 다음과 같은 문제에 대한 설명을 요구함

1 누가 교전국인가 ? 중국은 교전국인가 ? 소련인가

2교전국측은 유엔 감시국측 정전과 군대철퇴를 감시하는 것을 용인하는가? 공산군이 비밀리에 군사력을 강화하고 비행하는 것을 용인하는가?

3 공산국측은 포로교환 교섭에 응할 것인가?

이에 대한 소련의 대답은 다음과 같았다.정전교섭에 참가할 자는 유엔군 대표 한국군 대표 북한군 대표 중공 의용군 대표이다
교섭은 전투행위를 중지시키는데 한 할 것이며, 정치적 또는 영토문제는 무관함
전투를 재개하는 문제 협의도 사령관에게 위임할 것
소련은 한국전쟁을 평화적으로 해결하는데 관하여 더 이상 고려하고 있지 않다.
정전후 한국의 정치적 문제는 한국인 통치자에게 위임할 것
소련은 이상제안에 관해 중공의 의견을 감시하고 있지 않다.
미국의 에치슨 국무장관은 중공군이 압록강 이북으로 철퇴하는 것만이 문제 해결의 관건이라고 주장

한편 중국은 북경방송을 통해 정전협상에 응할 의사가 있음을 밝힘


우리는 지속가능한 삶을 살고 있는가

모두들 자신의 삶에 불만들이 많다. 그렇지만 하나 분명한 것은 우리는 지금 지나칠 정도로 물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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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뢰군 연혁) 34, 제3장 제1절 괴뢰군의 패인(51.3)

근거를 알수 없으나 <괴뢰군 연혁>은 인민군 총사령부가 51년 3월 한국전쟁의 전투단계를 4단계로 구분하여 평가한 내용을 기술하고 있다.

이에 따르면 4단계는 다음과 같다.

제1기 인민군의 공격

제2기 아군의 상륙작전과 인민군후퇴

제3기 분산된 아군의 후퇴이동

제4기 총공격

여기에서 제1기의 실패를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1 정치적 실패

ㄱ. 유엔군의 즉시참전

ㄴ. 후방지역에 북한의 공작원 3,000명이나 잠복하고 있었으나 활동하지 못하고 오히려 북한의 후방지역인 사리원 지구에서 노동자가 집단적으로 폭동을 일으켰다.

(사리원지역의 노동자 폭동은 잘 알지 못한다. 추가적인 확인이 필요)

2 북한군 자체의 실패

인민군 본부가 국군과 유엔군의 정보를 정확하게 판단하지 못했고, 인민군 전선부대는 비조직적으로 남하만 치중했다

3 인민군 관하부대들은 명령을 받고 명령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어떤 내용인지 구체적인 사안을 확인할 필요)

4 기동력이 없었다.

(전차와 자주포의 효과적인 활용을 못했다는 것으로 이해)

5 인민군은 한국군을 포위하는 방법을 모르고 남하만 했다.

(작전술적 운용을 하지 못했다는 것으로 이해, 그러나 6사단, 12사단, 5사단, 낙동강에서의 작전은 이와 다름. 아마도 38선 초기전투에서 그럴 수 있을 것임. 이점에 관하여 소련군의 한국전쟁기술에서 북한군의 작전적 운용에 대한 지적과 유사함)

  1. 인민군은 남진하는대신 국군을 격파했어야 하나 이를 이행치 못했다.

(남진하느라고 국군부대를 제거하지 못했다는 것을 의미, 이것은 우리도 유사한 잘못을 저지름, 소위 말하는 유생역량말살)

7 시간은 중요하다. 그러나 서울 점령후 1주일을 쉬었다.

  1. 인민군 각부대의 협동작전이 결여되어 있었다.

  2. 인민군은 참모부와 관하부대의 연락이 긴밀하지 못했다

어떤 사단 지휘소는 군단 지휘소 후방에 위치한 경우도 있었다.

  1. 정찰활동을 효과적으로 수행하지 못했으며 무전연락활동은 국군에게 방해당했다.

  2. 보급에 있어서 전표제도는 부적합했다.

직사포탄을 청구했는데 고사포탄이 도착한 경우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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