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 중국 관계(박영실) 9 소련군의 북한군 작전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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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영실은 한국전쟁 초기 북한의 작전적 능력이 매우 부족했다는 것을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북한의 작전적 능력부족 문제와 초기 작전에서 소련의 군사고문단이 개입했다는 주장은 이전에도 밝힌바 있다. 북한에 중국군 출신 사단들이 들어와서 배치하는 것 부터 이미 향후 작전을 어떻게 수행할 것인가를 면밀하게 고민한 흔적이 보이기 때문이다.

p.64

슈티코프의 보고에 따르면 “전투작전이 개시되고 가 부대가 전방으로 진격하면서 상부에서 하부까지 각 참모부 간에 통신이 두절되었다. 따라서 인민군 총참모부는 전쟁 당일 어떤 사단과도 안정적인 교신을 할 수 없었기 때문에 전투를 통제할 수 없었다”고 상부에 보고하였다(국편, 한국전쟁 문서와 자료, 62-64)

북한이 서울을 점령한 후에도 김일성은 독자적으로 작전을 수행하지 못하고, 군사고문단을 소련에 요청했으며, 강건은 “군사고문없이는 부대를 지휘할 수 없었다”는 지적도 하였다.

정준병은 북한군 지도부는 10-13개 사단 2개군단 1개 군급의 병종 제대별 연합 합동작전 계획을 수행할 능력을 보유하지 못했기 때문에, 북한군의 전면 공격용 작전계획은 소련 군사고문단에 의하여 작성될 수 밖에 없었고 북한에서 이루어진 작전은 번역된 작전의 한계라고 평가하였다.(정병준, 북한의 한국전쟁 계획 수립과 소련의 역할, 역사와 현실 66, 2007, 386)’

p.65

북한의 초기전쟁과 관련하여 작전을 기획하고 진행한 주체는 소련 고문단이었다. 각 사단의 작전계획 수립과 지형정찰과정에 소련 고문이 참가하였고 이후에도 전쟁 중 북한내 조직개현에 관한 주요 사항들은 북한 측이 소련 고문단에게 조언을 구한뒤, 이들의 의견을 반영하여 결정하였다. 7월 3일 김일성과 박헌영은 슈티코프에게 군 지휘부의 개편과 관련하여 조언을 부탁하였다. 슈티코프는 바실리예프와 의논한후 김일성에게 제안했다.

슈티코프와 바실리예프가 제시한 안은 다음과 같다. 첫째, 사령관, 군사위원회 위원, 참모장으로 구성된 군사위원회가 이끄는 2개 군단을 조직할 것, 각 군단에는 4-6개 연합부대를 배속시킬 것, 둘째, 전선사령관, 참모장, 전선군사회원회 위원이 이끄는 전선사령부를 조직할 것, 전선사령부의 설립은 총참모부가 책임질 것, 셋째, 민족보위성은 축소된 형태로 남겨둘 것, 넷째, 군 총사령관으로 김일성을 임명할 것 등이었다. 김일성은 이에 동의했고 새로운 조치를 7월 4일 또는 5일에 있을 군사위원회에서 발표하기로 했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주재 소련대사가 소련 내각회의 의장에게 보낸 전문, 전선 상황에 대해 북조선 지도부와 나눈 대화에 대하여 No. 439, 1950년 7월 4일>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전쟁 문서와 자료> 2006, 70-71

북한은 계속해서 소련의 군사고문단에게 도움을 요충했다. 북한은 소련 총군사고문이 자신의 그룹과 함께 전선 사령부에 남아 있을 것임을 확신하면서 새로 창설되는 군부대에 소련 군관들을 배속시켜 줄 것을 요청했다. 슈티코프는 군단에 2명씩 군관을 고문으로 배치하고, 병종 예하 군사고문으로 군관그룹 25명과 함께 바실리예프 장군을 전선참모부에 남겨 두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특히 북한군에 배치된 소련 군사고문들은 민간인 복장으로 근무해야 하며, 이들을 부대내에서는 특파원으로 부프며, 부대 밖으로의 외출을 엄격히 금지할 것이라고 스탈린에게 보고했다.

초기단계에서 소련군은 북한군의 작전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인다. 소련군이 북한군의 작전에 어느정도까지 영향을 미쳤는지 전쟁의 단계에서 얼마나 영향을 미쳤는지에 대해서는 추가적인 연구가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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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 중국관계(박영실)8, 전쟁발발의 책임 문제

스탈린 모택동.jpg

중국과 소련은 한국전쟁 발발 상당 이전부터 한반도 문제를 전쟁으로 해결할 수 밖에 없다는 것에 동의를 한 것으로 보아야 한다 그것이 묵시적인 것이었는지 명시적인 것이었는지는 불명확하다. 그러나 이제까지 나타난 스탈린과 마오쩌둥의 서신과 전문을 보면 그들의 관심은 한반도에서 전쟁을 하느냐 마느냐가 아니고 언제 하느냐 그리고 그 결정적인 조건을 무엇인가 하는 문제였다 .

1949년 5월 17일 마오쩌둥이 코발료프를 통해 스탈린에게 보낸 편지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우리는 한달후에 북한으로 파견될 예정인 200명의 군관들에게 보충훈련 과정을 이수시키고 있습니다. 만약 남한과 북한 사이에 전쟁이 발발한다면 우리는 가능한 앞서 언급한 사단에 식량과 무기를 공급할 것입니다. 만일 미군이 철수하고 일본군도 남한에 투입되지 않는다고 할지라도 우리는 이러한 상황에서 북한이 남한에 공격을 개시하도록 권유하는 대신에 더욱 더 적당한 시기를 기다리라고 조언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러한 공격이 있을 경우 맥아더는 일본군과 장비를 신속히 남쪽으로 재투입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만약 1950년 초의 정세가 유리하게 돌아간다면 우리는 북한의 남한 공격개시도 가능할 것으로 가능할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그리고 일본군이 한반도 상황에 개입할 경우 즉시 우리는 우리의 군대를 보내 일본군을 격퇴시킬 수 있을 것입니다”(박영실 58 재인용

이 서신의 전체적인 취지는 이미 한반도에서의 전쟁을 상정하고 있다. 만일 중국이 북한에 조선인 출신 부대를 이관하는 것이었다면 군관 200명에게 보충훈련을 시키는 것과 같은 행동을 하지 않았을 것이다. 당시 중국이 북한에 군대를 넘겨주는 것 자체가 한반도에서의 전쟁을 미리 상정한 것으로 보아야 한다.

이와 관련하여 Tsui David는 ‘중공군의 한국전쟁 참전2, 1949년 5월부터 1951년 7월까지’(전략연구 36, 2006, pp.167-8)에서 중국이 북한의 남침계획을 알고 있었다고 밝히고 있다.

가오강의 경호부장이던 웨이는 데비빗 쑤이와의 인터뷰에서 “공산당 중앙위원회 동북지역국은 전쟁시작 훨씬 이전부터 김일성이 남침할 것이라는 점을 알고 있었다. 김일성은 션양을 거쳐 베이징을 방문할 때마다 가오강의 집에 머물렀을 정도로 그와 절친한 사이었다 따라서 중국은 이미 1949년 이전부터 북한의 무력통일 계획을 알고 있었고, 그 준비에 동참해 왔었다”고 증언했다는 것이다.

한편 이와 관련하여 스탈린이 중국에게 한국전쟁에 관한 위임을 했다는 주장도 있다.

시모토마이 노부오는 ‘북한정권탄생의 비밀’(기파랑) 89-90에서 스탈린은 세계정치의 원칙적 과제는 소련과 상담하는 것을 조건으로 아시아 개별문제는 중국의 지도에 맡기기로 결정하였다고 하면서 이런 원칙이 1949년 7월 중공중앙 대표단 단장으로 모스크바를 방문한 류사오치와 스탈린의 회담에서 대체로 합의된 것으로 보인다고 했다. 당시 아시아를 잘 알지 못하는 스탈린은 생각지 않던 중국혁명의 성공에 도취하였고, 아시아에 대한 중국공산당의 주도적 역할을 마오쩌둥에게 맡겼던 것으로 보인다고 한 것이다.

시모노마이 노부오의 주장은 한국전쟁에 대한 중국의 책임을 더 강조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스탈린이 아시아를 잘 알지 못했다고 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본다. 소련은 이미 할힌골 전투와 하산 전투등을 통해 일본과 전투를 수행했고, 중국 혁명이후에도 여순에 대한 권리를 지속적으로 요구했다. 이런 점에서 스탈린이 아시아에 대해 잘 알지 못했다고 하는 주장은 타당한 근거가 없다고 할 것이다.

한국전쟁 발발과 관련한 날짜에 대해서는 박영실의 책 60쪽에 정리된 바와 같이, 김일성은 5월 29일 슈티코프에게 6월 30일쯤 시작하는 것이 바람직하는 것이 언급했다가, 다시 6월 21일에는 웅진반도에서의 국지전보다 6월 25일 전 전선에서 전투를 개시하는 것을 제안했다. 스탈린은 여기에 대해 즉각 전선에서의 즉각적인 대대적인 진군을 지지했다고한다. 이완범 ‘625전쟁에 대한 중국의 개입과 중국에 미친 영향)(군사 제63호, 195)

한편, 토르쿠노프의 책 106쪽에는 스탈린의 남침구상이 매우 구체적으로 정리되어 있다

스탈린은 먼저 인민군이 38선에 집결하여 남한에 대해 평화통일을 제안한 다음, 만일 남한이 이를 거부하면 즉시 웅진반도를 점령하고 남한에 대해 평화통일을 제안한 다음, 만일 남한이 이를 거부하면 즉시 옹진반도를 점령하고 남한이 반격하면 바로 주변으로 전선의 폭을 넓혀나간다는 3단계 작전지침을 제시했다. 이런 계획에 따라 김일성과 스탈린은 1950년 여름 인민군 총동원령을 내리기로 합의하였고, 소련은 북한에 소련 고문관을 파견하여 작전계획을 수립하기로 합의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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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 중국 관계(박영실) 7 한국전쟁 결정 시기에 관해(선지화의 주장관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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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쟁 연구에 언제 결심했는가에 대한 문제는 매우 중요하다. 전쟁의 기원에 관한 가장 중요한 요소이기 때문이다. 이제까지의 연구를 보면 스탈린이 최종 결심을 언제했는가로 귀결되는 것 같다.

그런데 스탈린이 언제 최종 결심을 했는가 하는 문제와 함께 한반도문제를 전쟁을 통해 해결하기로 했는가 하는 문제도 동시에 규명해야 한다. 사실 최종 결심시기보다 더 중요한 것은 원칙적으로 한반도 문제를 전쟁을 통해 해결하기로 했느냐 아니냐가 더 중요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제까지의 연구는 주로 스탈린이 언제 최종 결정을 했는가에 촛점이 맞추어져 있는 것 같다.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원칙적인 해결원칙이 대화냐 아니면 상호 공존이냐 전쟁이냐로 가닥을 잡는 것이 더 중요하다. 해결원칙이 전략적 결정이라면 언제 전쟁을 하는가하는 문제는 전술적 수준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현재 스탈린이 한국전쟁을 50년 1월에 최종결정했다는 견해는 선지화의 주장인 듯으로 보인다. 그러나 그 최종결정이라는 것을 뒷받침하는 소련 정치국 회의록이 아직 발견되지 않았다.

에치슨의 연설이 스탈린의 결정에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는 것도 실상은 전술적 차원의 문제라고 볼수 있다.

스탈린이 50년 1월에 전쟁을 결정했다는 것은 전쟁을 수행할 수 있는 각종 여건이 성숙되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지 그 이전에는 전쟁을 전혀 생각하지 않고 평화적인 해결을 추진하다가 갑자기 그때 전쟁으로 한반도 문제를 해결하려고 한 것으로 볼 수는 것다고 하는 것이 타당한 설명일 것이다.

한국분단이후 냉전이 본격화되면서 스탈린은 한반도에서 미국의 영향력을 축출하기 위한 노력을 경주했다. 그것은 한반도에 일본이 진출한 것이 소련에게 심각한 안보위협으로 작용했다는 역사적 경험도 강력하게 작동했다.

선지화가 스탈린이 한국전쟁에 개입했다는 것을 증명하는 자료로 제시하는 자료인 1950년 8월 27일 체코슬로바키아 대통령 고트발트(Klement Gottwald)에게 보낸 극비전문은 스탈린이 한반도 문제를 군사적을 해결하려고 했다는 전략적 의도를 보여주고 있다. 선지화의 주장과 전혀 다른 해석의 여지가 있는 것이다.

이 극비전문에 의하면 스탈린은 미국이 한국전쟁에 개입할 것을 예측할 뿐 아니라 희망했다는 것이다. 한국전쟁으로 미국이 유럽으로부터 멀어지면 이것은 국제적인 권력의 균형을 이룰 수 있다는 것이다.

만일 스탈린의 전문이 사실이라면 스탈린은 처음부터 미국을 전쟁에 끌어들이려고 했던 것으로 보아야 한다. 스탈린은 한반도에서 전쟁을 이미 오래전부터 결심하고 있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한 해석이고, 문제는 미국이 제대로 한반도 문제에 대응하지 못하도록 하는 것이 중요할 전술적 고려사항이었을 뿐이다.

이런 자료들은 처음부터 스탈린이 한반도 문제를 군사적으로 해결하려고 했다는 증거자료로 해석되는 것이 더 타당하다. 즉 유럽에서 미국의 압력을 제거하기 위해 한반도에 전쟁을 일으켜 미국을 극동에 붙잡아 놓으려고 했다는 것이다.

김일성은 1950년 3월 30일 모스크바를 방문해서 4월 25일 귀국했다. 양자의 비밀회담의 구체적인 내용에 대해서는 밝혀지지 않았다. 그러나 1966년 소련외교부가 브레즈네프 등 지도자들에게 보고한 ‘조선전쟁에 관한 배경 보고’에 따르면 스탈린이 전쟁개전에 대한 초안을 최종 승인한 것은 1950년 3월과 4월 에 이르는 모스크바 방문기간이라고 한다.

그리고 소련공산당 중앙위원회에서 북한업무를 담당한 트카첸코는 에치슨의 프레스 센터 연설이 스탈린의 결정에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고 하는데 이것은 전술적인 수준에서 시기를 결정하는데 영향을 미쳤다고 보아야 하는 것이지 한국전쟁 자체를 할 것인가 말것인가를 결정하는 것으로 이해하기는 어려운 듯 하다.

이제까지의 한국전쟁은 북침인가 남침인가 하는 문제를 거쳐 누가 결정했는가 하는 문제로 귀결되었다. 소련과 중국이 한국전쟁 결정에 공동의 책임이 있다는 전통적인 입장에서, 최근 들어서는 소련이 결정했고 중국은 그에 따라갔을 뿐이라는 주장이 대두되었다. 중국은 주도적인 입장이 아니라 그냥 따라갔을 뿐이라는 주장은 선지화로 대표된다. 그 과정에 선지화는 한국전쟁에 대한 결정의 시기를 1950년 1월로 뒤로 미루어버렸다.

그러나 전쟁자체에 대한 결정은 이미 오래전부터 스탈린과 마오쩌둥 사이에 논의되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한 증거들이 더 많은 것 같다. 결국 해석의 문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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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 중국 관계(박영실) 6 북한과 소련의 전쟁논의 1949년 3월 방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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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의 전쟁준비는 1949년 들어 본격적으로 이루어졌다. 박영실은 김일성의 소련 방문기간 중인 1949년 3월 7일 스탈린에게 남침의사를 타진한 것부터 언급하고 있다.

“1949년 3월 7일 김일성, 스탈린에게 남침의사 전달. 스탈린은 남한에서 먼저 전쟁을 시작한다면 북한의 전쟁개전에 동의하지만 북한에서 먼저 주도적으로 전쟁을 시작하는 것에 반대하였다.”

(상기 내용은 박영실이 토르쿠노프 저 ‘한국전쟁의 진실과 수수께끼’ 44-45, 김광린 역, ‘소련의 자료로 본 한국전쟁의 전말, 27-28쪽을 인용한 것이다. 이 기술은 별 의문의 여지없이 스탈린이 전쟁을 승인하지 않았다는 것으로 받아 들여진다. 그러나 전쟁의 속성을 생각해보면 스탈린의 이 언급을 전쟁을 허가하지 않았다는 것으로 해석하는 것은 지나치게 단순한 접근이 아닐 수 없다.)

만일 남쪽이 전쟁을 시작했다면 그에 대해서는 스탈린이 전쟁의 개전에 동의하고 말고할 문제가 아니다. 만일 남쪽이 전쟁을 개시했다면 북한은 자위적 조치를 위해 당연히 방어적 성격의 전쟁을 하지 않을 수 없다. 이렇게 보면 스탈린의 ‘북한이 먼저 주도적으로 전쟁을 시작하는 것에 대해 반대하지만, 북한에서 먼저 주도적으로 전쟁을 시작하는 것에 대해 반대하였다’라는 말은 이미 이당시에 스탈린과 김일성이 전쟁의 개시에는 동의했으나, 전쟁의 개시 방법에 대해서는 일방적인 공격으로 보이지 않도록 하라는 지침으로 이해하는 것이 오히려 타당하다 하겠다.

김일성 방소 당시 소련에 북한에 제시한 각종 원조는 바로 이미 전쟁을 시작하기로 결정한 다음 이를 위한 준비차원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3월 17일날 ‘소련방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간의 물품거래 및 대금 결제에 관한 의정서’가 체결되었는데 이 의정서의 핵심은 대북군사원조로, 소련은 무상원조가 아닌 차관형식으로 군사무기, 장비를 제공했다, 이에 대해 박영실은 “이는 북한의 대남 공격용 무장을 강화하기 위한 목적에서 이루어진 협정이었다. 김일성은 1949년 4월 28일 구체적으로 필요한 무기목록을 소련측에 제시하였고, 이 무기들은 6월부터 본격적으로 북한에 제공되었다.”라고 하면서 정병준의 ’38선 충돌과 전쟁의 형성’(295-6)을 인용했다.

한편 박영실은 ‘김일성이 1949년 스탈린과의 남침논의에서 자신의 의견을 접고, 다시 북한의 남침 당위성을 강조한 것은 1950년 1월 17일 북한대사 리주연의 중국대사 취임식 연회자리에서였다’(53)라고 밝히고 있다. 김일성이 3월부터 약 10개월간 남침에 대한 입장을 밝히지 않았다고 해서 남침에 대한 생각을 포기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션즈화의 ‘마오쩌둥 스탈린과 조선전쟁’(212)에서는 김일성이 예전에 모스크바를 방문하여 스탈린과 면담했을 때, 스탈린의 의견은 남한으로 진격할 필요없이 한국군이 북한을 공격하면 그때 반격하면 된다고 하였지만, 이승만은 북한을 공격하지 않았고 이로 인해 한반도의 해방과 통일이 지연되고 있다고 강조하였다고 밝히고 있다.

김일성의 이런 발언은 여러가지로 해석될 수 있는 여지가 있다. 첫째 부르스 윌리스가 한국전쟁의 기원으로 제기했던 1949년 38선에서 벌어진 일련의 전투가 실제적으로는 전쟁의 성격으로 인식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즉 한국전쟁이 1949년의 충돌이 누적되고 확대된 결과라는 주장이 성립하기 어렵다는 것을 김일성의 발언을 통해 알 수 있는 것이다.

오히려 1949년 3월의 소련방문에서 이미 김일성과 스탈린은 한국전쟁을 어떻게 발발하도록 할 것인가하는 점에 대한 계획을 수립한 것으로 보는 것이 오히려 타당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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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 중국관계(박영실) 5 조선인들과 중국인민해방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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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북지역의 조선인들로 구성된 중국인민해방군의 동북야전군 독립사단도 있었다.

1947년 5월 30일자 선양 주재 미국 영사관의 보고에 따르면 만주의 국공내전에서 공산당이 우세한 원인중의 하나가 조선인 부대의 도움이라고 언급(미 국무부 간, 이영희 편역, 중국백서, 전예원, 1982, 434)

국공내전기 재 중국 조선인들은 그들 스스로 중국내 소수민족이 아니라 중국에 거주하는 조선인이라고 생각

김일성도 이들을 동북에 거주하는 북한 국적주민으로 생각

따라서 한반도 해방뒤 중국 인민해방군에 소속되어 있던 조선인들의 귀국은 조국으로의 귀환

1945년부터 49년 초까지 이루어진 재중국 조선인의 제1차 입북은 그 규모와 시기가 다양하여 정확한 숫자를 확인하기 어려움

1949년 7월에 진행된 2차 입북은 김일성의 지시에 따라 이루어짐

1949년 4월 30일 김일성은 중앙위원회 위원이라 조선인민군 정치국장인 김일을 베이징에 파견

김일은 마오쩌둥에게 중공군에 소속된 조선인 사단을 이전시켜달라고 요청

마오쩌둥은 3개 사단중 무단과 창춘에 주둔한 2개사단은 이전할수 있으나, 국민당군과 전투중인 1개사단은 전투종결후 최소한 1개월후 돌려보내겠다고 언급

마오쩌둥이 김일 통해 김일성에게 언급한 내용을 보건데 이미 한국전쟁에 대한 교감이 있었다는 것을 보여줌

당시 한반도 전쟁에 대해 세밀하게 준비할 것을 권유

만일 전쟁이 개시되어 일본이 남한을 돕는 상황이 전개될 경우 중국도 군대를 파견하여 북한을 돕겠다는 의사를 표명

만일 미국이 철수하고 일본군의 지원도 없다면 남한을 공격하지 말고 유리한 상황이 조성될때가지 기다릴 것을 권유

만일 북한이 이를 어기고 북한이 남한을 공격하면 맥아더가 일본에 있는 부대와 무기를 한반도로 이동시킬 것이므로 남쪽 지역으로 이동하여 작전중인 중공군은 신속하고 효과적인 지원을 할 수 없다고 강조

1949년 7월 동북군구에 속한 2개사단이 북한으로 귀국

선양의 중국인민해방군 소속 제166사단 총원 10,320명(6사단)

장춘의 중국인민해방군 제164사단 10,821명 (5사단)

1950년 제3차 입국, 린뱌오가 중국혁명전쟁이 종결되었으므로 1개사단 또는 4-5개 여단을 북한으로 돌려보내자고 건의

1949년 12월 25일 린뱌오는 중국 인민해방군내 조선이니 병사가 1만 6천명이 4개대대 27개 중대 9개 소대로 편성되어 있으며, 이들 중 일부가 조국으로의 귀환을 요구하고 있다고 총참모장인 니에룽전에게 보고

마오쩌둥은 이내용을 소련측에 전달

스탈린은 1950년 1월 8일 북한의 입장을 알아보라고 전문을 보냄

김일성은 이들 부대가 북한에 돌아오기를 기대하고 있었고, 이를 위해 중국에 대표 3명을 파견하여 중국정부와 담판할 계획이었으나 이들 부대가 돌아왔을때 주둔지역을 찾기가 어려워 1950년 4월까지만이라도 머무를 수 있도록 중국정부에 요청할 생각이었다고 기술(션즈화, 최만원 역, 마오쩌둥 스탈린과 조선전쟁, 364)

(션즈화의 기술은 기존의 내용과 차이가 있다. 김종필은 자신의 회고록에서 북한에 조선부대가 들어오는 시간에 따라 전쟁이 일어날 것이라고 평가했다. 따라서 1950년 4월까지만이라도 머무를 수 있도록 요청할 생각이었다는 말은 앞뒤가 맞지 않는다)

1950년 1월 14일 김광협을 중국으로 파견, 북한에 여유분의 무기가 없으므로 중국측의 해결을 요구

니에룽전은 1월 21일 이 내용을 중공중앙위원회에 보고하고, 이후 1만 4천명의 조선인 출신 군인들은 무기와 장비를 갖추어 북한으로 입국

1950년 4월말 철도병단 제4지대의 1천명이 항저우에서 스지아장(석가장)에 도착 보름후 입북

우한의 제1군단 제3사단 400명은 다른 철도병들과 합류 1천여명이 되자 6월 중순경 입북, 6.28일 평양 도착

중국인민해방군 제4야전군 49군 야전병원의 여성 311명도 광시성 꾸리에서 정저우를 거쳐 4월 5일 입북

전쟁 기새선 북한군내 재 중국 조선인 출신 군인비율

6월 25일 아침 남진 보병21개 연대중 47%가 조선인 부대

미국의 맥아더 정보참모부는 이들이 북한군과 협동작전을 수행하려면 1950년 하반기는 되어야 가능하다고 판단

개전이후에도 조선인 출신자들의 귀국은 계속

1950년 7월 션양에서 혼성연대 조직(심양조선혼성단), 이후 인민군 제17기계화사단이 됨

1951년 이후 인민군 장교들이 만주 농촌지역에서 직접 인민군을 모집

1951년과 1952년 각각 한번씩 5-7천명정도를 모집

이들 중공군 소속 조선인 부대의 귀국은 다양하게 해석될 수 있다. 중국이 한국전쟁을 위해 적극적으로 지원해준 것으로도 파악할 수 있다. 션즈화를 중심으로 한 연구자들은 사실보다는 해석에 치중하고 있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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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 중국관계(박영실) 4 중국내전기 북한의 중국지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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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과 중국과의 관계에 대한 일반의 인식은 사실과 매우 다르다. 통상 북중관계를 한미관계와 유사하게 인식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북한과 중국의 관계를 조금만 더 자세히 들여다 보면, 북한이 중국에 종속적인 관계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북중관계의 성격을 파악하기 위해서는 중국내전기 북중관계에 대한 이해가 있어야 한다.

북한과 중국 공산당과의 관계를 다음과 같이 정리했다.

1945년 8월 15일 일본천황 항복선언이후 중국에서 제2차 국공내전이 발생

1945년 말 김일성은 직접 단동으로 가서 수만명의 중국인 부대들을 신의주를 거쳐 린지앙과 창바이 지역으로 철수하도록 지원

1946년 초 김일성은 마오쩌둥이 파견한 특사를 만난후, 각종 무기와 화약, 탄약, 의약품등의 군사물자를 중국으로 보내고, 산동성에 있던 팔로군을 배로 태워 남포항을 거쳐 북만지역으로 이동

1946년초 국민당이 미국의 지원하에 중국의 동북지역 점령

1946년 6월 16일 중국 공산당은 동북의 공산당 지도부를 재정비

린뱌오를 중공중앙동북군 서기 및 동북민주연군 사령 및 정치위원으로 임명

가오강, 펑전, 뤄롱한, 천원을 당의 부서기 및 군 부정치위원으로 임명
동북의 끊어진 도로와 철길을 대신해 북한지역 이용을 북한정권에 요청, 북한은 이를 수락

중국은 ‘평양리민공사’라는 상설기관을 평양에 설치, 내부적으로 ‘조선주재 동북국판사처’라고 명명

중국의 동북해방작전에 필요한 물자수송과 인원수송을 담당
1946년 주리즈와 샤오징광이 부임하여 지휘

9월 샤오징광이 중국으로 귀국후, 주리즈가 전권업무를 수행
1946년 7월 – 1949년 2월까지 업무를 수행

업무량 증가와 함께, 남포, 신의주, 만포, 라진에 4개의 분판사처를 둠
‘조선주재 동북국판사처’(평양리민공사)의 업무는 그게 다름 다섯가지였음

1 중국 공산당군 부상병 치료와 전략물자 이전사업 담당,

1만8천명의 부상병과 가족을 북한으로 철수, 85%이상의 전략물자를 압록강 동쪽의 북한지역으로 이동 보관
2 물자수송과 국경을 넘어온 인원 수송임무

북한의 수로와 육로 4개선을 이용

제1선 동북의 단동으로 부터 신의주, 남양, 동북으로 가는 경로

제2선 동북의 통화, 지안, 만포 경유, 동북의 투먼으로 가는 육로

상기 두 육로는 북한의 북부와 중국 동북의 남만, 북만을 연결

해상수송은 중국 다렌과 남포, 다렌과 라진을 연결하는 통로를 이용, 남포항과 라진항은 겨울에도 얼지 않기 때문에 직접철도와 연결하여 물자를 운반

3 중국이 필요로 하는 전략물자를 구입하여 전달

북한은 146차량의 물자를 제공

4 북한과 중국 양국간 우호합작관계를 수립하고 공고히하는 역할

조선주재 동북국판사처를 통해 압록강 공동운행, 중국의 수풍발전소 전력사용, 우편통신분야의 합작을 비롯 20여가지의 협정을 체결

북한은 중국에 무연탄, 수산물 등 일용필수품과 군수물자로 류산, 염산, 류안폭약, 질안폭약을 제공

5 중국에 무기공급

1946년초 마오쩌둥은 천윈을 파견하여 무기공급 요청

김일성은 10만여정의 무기와 탄약을 중국에 보냄

국민당군이 장춘, 심양을 점령하여 남만과 북만을 연결하는 통로가 막히자 남포와 신의주 만포, 남양을 중국 팔로군의 전략적 통로로 제공
군복, 신발 , 의약품 및 황색폭약을 제공

1947년초 왕이즈가 저우바우중을 대신 김일성을 방문, 부상병 2만명과 가족 후방인원, 2만통의 전략물자를 소개하기 위해 북한지역 이용요청, 김일성은 이를 허락

1948년 2월 수풍발전소의 전기를 중국 안샨 변전소로 보냄

북한은 일본이 남긴 무기를 동북인민해방군에게 넘겨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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