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 중국관계(박영실) 15, 조중연합사령부-1 설치경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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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인민지원군이 북한으로 진출하면서 조중연합사령부 구성에 대한 논의가 이루어진다.

스탈린은 중국지원군에 대한 지휘는 중국군 지휘관이 담당해야 한다는 견해를 밝혔다. 박영실은 이런 이야기를 당연하다고 했지만 스탈린이 당연한 이야기를 이렇게 한 것은 이유가 있을 것이다.

10월 8일 박일우는 션양에 도착하여 중국의 참전을 요청하면서 김일성이 위치한 덕주에 중국군 지휘본부를 설치해야 한다고 언급했다. 이는 중국군이 북한지도부의 지휘를 받을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양진삼. 전쟁기 중국지도부와 북한지도부 사이의 모순과 갈등, 국방부 군편, 한국전쟁사의 새로운 연구, 589-590)

이후 중국은 스탈린에게 작전지휘권에 대한 문제를 제기했으나, 스탈린은 이에 대한 확답을 하지 않음.

(스탈린이 처음에는 중국군이 지휘권을 가지는 것이 좋겠다고 하다가 나중에 확답을 하지 않은 이유는 무엇일까?)

10월 21일 김일성과 펑더화이가 대유동에서 만났을때에도 군사지휘권에 관한 논의를 회피

11월말 김일성과 슈티코프는 연합사령부 구성문제와 관련하여 펑더화이는 연합사령부 구성문제를 11월 이후에나 진행하자고 언급

조선 노동당 정치위원회는 김책을 연합사령부 부사령관으로 결정

(김책을 부사령관으로 임명했다는 것은 북한이 중국군에 대한 지휘는 중국군이 하는 것으로 인정했다는 의미로 받아 들일 수 있을 것임)

김일성은 마오쩌둥에게 박헌영을 파견해 연합사령부 구성문제를 논의하려 하지만, 마오쩌둥은 김일성이 직접 방문하기를 요청

12월 1일 김일성은 슈티코프와의 대담에서 연합사령부 사령관은 중국인이 되고 부사령관은 북한에서 담당하는 것으로 언급

(김일성이 슈티코프에게 이런 내용을 언급한 것은 당시에 중국과 소련간에 북한에 대한 주도권 문제가 완전하게 해결되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 해석가능)

12월 3일 김일성은 베이징을 방문하여 마오쩌둥, 저우언라이, 가오강과 회담하면서 다음과 같은 내에 합의

ㅇ 연합사령부 설치에 합의

ㅇ 연합사령부의 사령원 및 정치위원은 펑더화이, 부사령원은 김웅, 부정치위원은 박일우로 결정

ㅇ 저우언라이는 ‘중조쌍방연합지휘부의 성립에 관한 중조쌍방의 협의’초안을 작성

12월 5일 김이리성은 라주바예프에게 회담결과를 통보

ㅇ 마오쩌둥은 연합사령부를 서두르고자 하지 않았다

ㅇ 유격투쟁을 38선 남쪽으로 활성화시키는 것을 요구

ㅇ 중국은 전투가 38선에서 멈추는 것에 동의하지 않음

ㅇ마오쩌둥은 전쟁의 과오를 비판하는 중앙위원회 전원회의 개최를 제안

12월 7일 김일성과 펑더화이는 양자회동에서 연합사령부 설치에 합의

12월 8일 저우언라이가 연합사령부의 설치에 관한 전문을 작성

12월 상순 ‘연사’라고 간략히 불리는 북한군과 중국인민지원군의 연합사령부가 설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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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 중국 관계(박영실) 14, 중공군 참전이후 북한과 소련의 반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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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차 전역이후인 11월 14일 김일성, 슈티코프, 펑더화이는 회의에 참전했으며, 여기에서 펑더화이는 북한군과 중국인민지원군이 더욱 긴밀하고 일치된 작전을 진행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자신과 김일성 슈티코프가 좀 더 자주만나야 한다는 희망을 표명했다. (박영실 106, 국편, 203-206)

슈티코프는 11월 21일 김일성을 방문하여 바실리에프가 소련으로 소환되고, 총군사고문으로 라주바예프가 도착할 소식을 알렸다.(국편, 215) 여기서 바실리예프와 라주바예프의 교체가 어떤 의미인지를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소련은 바실리예프가 작전지도를 잘못했다는 것을 인정하고 문책성 인사를 한 것인지도 모른다.

12월 1일 스탈린은 제1차 전역에서 중공군이 성공한 것에 대한 축하편지를 보냈다.

“소련군이 최고급으로 무장한 독일군과 작전을 전개하여 얻었던 현대전쟁의 풍부한 경험, 그리고 동시에 우수한 장비를 갖춘 현대화 군대로 변한 것과 똑같이 중국군대는 현대화되고 우수한 장비를 갖춘 미군과의 반격작전에서 틀림없이 현대전쟁의 풍부한 경험을 얻을 것이고 그들도 현대화되고 우수한 장비를 갖추고 강력한 위력을 보이는 군대로 장차 변할 것”이라는 내용이었다.(박영실 107, 심지화 107)

한편, 중국의 성과에 대한 북한은 스스로의 힘에 의해 주체적으로 전쟁을 진행햐야 한다는 입장이었다.

1950년 10월 21일 당 중앙위원회 3차 전원회의에서 김일성은 “현 정세와 당면과업”이라는 보고를 통해 “전쟁에서 승리하자면 자력갱생의 혁명정신을 높이 발휘하여야 하고, 누가 어떻게 도와주든지간에 우리 문제는 우리 자신의 손으로 해결하며 자체의 힘으로 모든 애로와 난관을 극복하고 당 앞에 나선 당면한 혁명과업들을 성과적으로 수행해 나가지고 하였다.”(박영실 109, 박득준, 김정봉 편집, 조선통사, 하 평양, 사회과학출판사 1987, 445)

이미 당시에 북한은 중국이 전쟁에 참여하고 나서 북한 내정에 간섭할 수도 있다는 우려를 하기 시작했다.

모든 군사행동에는 분명한 목적을 설정한다. 중국의 한국전쟁 참전시 군사적 목적을 어디까지로 설정했는지에 대해서는 별로 주목을 하지 않았다.

박영실은 마오쩌둥의 군사적 목적이 한반도 통일이라는 데이빗 쑤이의 주장을 정리했다. 중국의 군사적 목적에 대해서는 새롭게 정리할 필요가 있는 듯하다.(박영실, 109, 데이빗 쑤이, 중공군의 한국전쟁 참전 7, 개입결정의 실현, 전략연구, 통권 46호 2009, 24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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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 중국관계(박영실) 13, 중국의 한국전쟁 참전과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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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영실의 책에서는 중국의 참전과정이 어떻게 이루어졌는지 분명하지 않다.

지금까지 확인할 수 있는 것은 중국은 스스로 참전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는 것

북한은 미군의 공습이 본격화되면서 중국의 개입이 필요하다는 것을 인식하고 소련에 중국 참전여부를 물어본것

소련은 인천상륙작전 이후 중국의 참전을 요청했으나 중국은 소련의 요청을 거부하는 듯한 태도를 보이다가 참전을 결정한 것

중국이 소련의 권유를 거부하다가 참전을 결정한 이유는 알려진 바 없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저번 포스팅에서는 한반도에 대한 우선적 권리를 소련이 중국에 양도한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는 저의 해석을 제시한 바 있다.

소련은 국공내전이후에도 여순지역에 대한 권리를 주장한 바 있다. 제정러시아의 만주 여순 대련지역에 대한 조차권을 연상시키는 주장이다. 그런 점에서 볼 때, 중국의 참전은 한반도에 대한 우월적 권리를 소련으로 부터 양도받기 위한 과정이 필요했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북한이 직접 중국에 참전을 요청했지만 이는 소련이 승인하지 않았으면 어려웠을 것이다.

“김일성은 도움을 기다리다 지쳐 직접 중국에 지원을 요청하기로 결정한 것이다. 9월말 김일성은 동북변방군 사령관들을 만나도록 북한의 내부상 박일우를 안동으로 파견하였다”(박영실 87)

공식적인 참전 결정이전 중국의 움직임

1949년 김일성이 조선인 출신 군인들의 입북을 요구할 때 마오쩌둥은 한반도에서 전쟁이 발발하면 지원해주겠다는 의사를 표명

전쟁개전후 조직된 동북변방군은 참전결정직후 중국인민지원군으로 바뀌어 전투에 투입

동북변방군의 훈련과 준비완료시점을 9월말까지로 정함. 이에 대해 박영실은 중국이 8월 중순부터 이미 전쟁에 참전할 계획이 있었던 것으로 봄(박영실96)

8월 31일 저우언라이는 각부대 선임장교들과 회의를 열고 미군을 상대로 전쟁을 치를 때 1년간 예상되는 사상자수를 예측, 사망자 6만명, 부상자 14만명을 예측(박영실 97, 베이비스 헬버스템, 513쪽)

중국은 인천상륙작전이 시작되자 마자 즉각 선발대를 파견하여 당시 전황을 살펴보았다.(박영실 88) (자선문 조용전 저, 윤영무 옮김, 중국인이 본 조선전쟁-판문점 담판, 한백사, 1991. 92쪽)

박영실은 중국의 한국전쟁 참전을 위한 과정을 다음과 같이 정리하고 있다.

1949(50?)년 10월 4일 북한의 직접적 도움 요청과 소련의 권고로 마오쩌둥은 중앙정치국 회의를 주제하면서 군대파병과 북한에 대한 군사적 원조문제를 토의했다.

의견은 북한에 대한 파병을 유보하자는 입장과 군대를 파병하여 적극적으로 북한을 원조하자는 입장 두가지로 나뉘어졌다.

이후 10월 5일 항미원조보가위국 결정으로 중앙군사위원회 작전부는 참전 명령을 작성

10월 8일 중국공산당 중앙정치국에서 중국군의 6.25 전쟁 참전을 결정

10월 11일 스탈린과 저우언라이 회담에서 소련 공군의 준비부족으로 파병할 수 없다고 하자, 12일 마오쩌둥은 가오강에게 출동중지를 명함

10월 13일 중앙정치국 긴급회의에서 소련 공군의 지원이 없더라도 참전하는 것으로 결론

션양에서 돌아온 박일우는 중국의 작전계획을 보고. 중국지원군은 대략 26만으로 북중국경선 3개방면에서 10월 15일부터 20일까지 집결지역으로 출발할 예정이며 집결지역은 박천, 희천, 강계임

10월 14일 스탈린은 김일성에게 중국인민군과 관련된 문제는 김일성과 중국측에서 공동으로 결정해야 하며, 중국군에게 필요한 기술장비는 소련이 제공한다고 약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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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과 중국관계(박영실)12, 중국의 참전결정과 소련의 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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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참전과 관련하여 북한 소련 중국의 입장이 매우 엇갈린다.

중국은 처음부터 한국전쟁에 참가하려고 하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박영실의 정리에 따르면 북한은 중국의 전쟁개입에 부정적인 입장이었다. 이후 8월이 지나면서 김일성은 소련의 슈티코프에게 중국참전의 필요성을 언급한다. 그 과정에서 김일성은 중국의 참전이 제3차 세계대전을 초래할 수 있다는 걱정을 했다고 한다. 당시에 김일성이 제3차 세계대전을 우려했다는 것은 이상하다. 김일성이 할 걱정이 아니었다. 오히려 스탈린이 걱정했어야 할 문제다.

소련의 중국개입에 대한 입장과 태도는 매우 애매모호하다. 유엔군이 38선에 가까이 오면서 중국의 개입을 요구하는 것 같다. 그전에는 소련이 중국의 개입을 달가워하지 않았던 것 같다.

중국은 소련이 중국개입을 요구하자 뒷꽁무니를 빼는 것 같은 태도를 취한다. 그 이전의 적극적인 참전의지를 보인 것과는 매우 대조적이다.

3국의 입장과 관련하여 박영실이 정리한 자료를 재정리해보고자 한다.

“개전초기부터 북한에서는 미군의 공습으로 인한 피해가 확산되자 중국에 지원을 요청하자는 논의가 있었다. 그리고 6.25전쟁 직전에 중국역시 북한에 지원의사가 있다고 밝혔다”(박영실, 79, 국편, 86)

김일성은 슈티코프에게 미군 비행기의 폭격으로 인해 북한의 능력만으로 승리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상실하고 있다며 중국에 도움을 요청할 것인지 여부를 고민하고 있다는 의견을 피력(국편, 88)

김일성 이외에도 박헌영 등이 슈티코프를 방문하여 중국군 개입에 관한 의사를 타진한다. 마치 중국의 개입을 소련으로부터 허락 받고자 하는 것 같은 분위기라고 여겨진다.

9월 21일 허가이가 슈티코프를 찾아가 조선도동당 정치위원회 회의내용을 전달했다. 그 내용은 김일성이 당분간 중국정부에 도움을 요청하는 것을 보류하고 스탈린에게 서한을 보내 중국군 지원요청에 대한 의견을 물어보자고 했다는 것이다.(국편, 146-147)

박영실은 북한의 이러한 태도에 대해서 첫째, 중국과 동맹조약 같은 구속력 있는 조약을 체결한 적이 없으므로 명분이 없었다. 둘째, 중국이 한반도로 진입할 경우 미국의 대대적인 개입으로 전쟁양상이 달라질 것을 우려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두가지 이유 모두 전쟁에서 패배할지도 모르는 북한의 행동을 설명하는 것으로는 부족하다.

오히려 소련의 지시가 없었기 때문이라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스탈린은 먼저 9월 16일 마오쩌둥에게 중국군의 배치가 가능한지 그리고 김일성이 망명정부를 세운다면 허락할 것인지를 문의하는 전문을 보낸다(박영실83, Chen Jian, China road to the Korean war, New York, Columbia University Press, 1994, p.161)

10월 1일의 전문에서 스탈린은 슈티코프의 전문을 받고 지시를 하달하는데 거기에는 소련군의 전략적 작전적 지도에 잘못이 있었다는 것을 지적하고 있다. 그리고 결론적으로 중국군과의 협의를 강조한다 (국편, 559)

이후 중국이 소련의 직접참전 요구를 받아들이지 않자, 10월 2일경 소련 전문가들의 대략적인 철수계획을 전달한다. (국편, 561)

스탈린은 10월 14일 마오쩌둥으로 부터 참전결정 소식을 듣게 된다.

이제까지 중국군의 한국전쟁 개입을 주로 중국의 내부적 상황만을 주로 고려했었다면 중국과 소련과의 관계에서 어떤 역학관계가 있었는지는 잘 다루어지지 않은 것 같다. 오히려 중국과 소련이 어떤 역할을 하는가를 정리하는 과정으로 중국이 참전 여부를 늦게 결정한 것으로 보아야 하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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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과 중국관계(박영실) 11, 인천상륙작전과 중국과 소련의 전략적 입장 변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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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은 한국전쟁의 발발조차 제대로 통보를 받지 못했지만 한국전쟁 진행과정에 대해 매우 적극적인 입장이었다.

중국은 한국전쟁 발발하자 마자 한반도에 투입할 준비를 갖추고 있었고 북한에게 조언을 하기도 했다.

가장 대표적인 조언은 미군의 상륙작전에 관한 내용이다. 중국은 7-9월 사이 세차례에 결쳐 북한 지도부에게 미군의 상륙작전에 대해 언급했다. 마오쩌둥은 7월 중순과 하순 그리고 9월 중순 세차례에 걸쳐 북한에게 적들이 해상으로부터 인천과 서울로 진입해 인민군의 뒷 길을 끊을 위험이 있으므로 인민군은 이에 대한 충분한 준비를 해야 하며 북쪽으로 철수해서 주력을 보존하고 장기전에서 승리할 준비를 해야 한다고 충고했다. (박영실 76, 김경일 지음 홍면기 옮김. “중국의 한국전쟁 참전기원-한중관계의 역사적 지정학적 배경을 중심으로” 논형, 2005, 395쪽)

한편 김일성도 미군의 상륙작전에 대해 알고 있었다. 1950년 8월 26일 슈티코프에게 전화를 걸어 미국이 인천과 수원지역에 해병대를 상륙시키려고 하고 있으며 이지역에 대한 방어를 강화하기 위해 필요한 조치를 하고 있다고 알렸다.(박영실 77)

이와함께 북한은 유엔군의 인천상륙작전에 대한 준비를 했지만(박영식 77) 낙동강에서의 전력집중과 시간적 촉박함, 장비와 부대의 부족으로 제대로 대비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미군의 상륙작전에 대해 소련이 어떻게 생각했는가에 대한 자료를 추가로 확인할 필요가 있다. 박영실의 책에서는 소련이 김일성의 문제제기에 어떻게 대응했는지는 밝혀지지 않고 있다.

여기서 추론할 수 있는 것은 소련이 한반도에서의 작전을 놓고 중국과 경쟁을 벌였던것이 아닌가 하는 것이다. 세계대전을 승리로 이끈 소련군의 자존심으로 볼때 중공군의 조언은 건방지게 보였을 수도 있는 것이다. 이와함께 전쟁이후 한반도를 소련의 영향력하에 두려고 했던 스탈린의 구상으로 볼때 중국의 개입을 용납하기 어려웠던 것이다.

스탈린은 중국의 한국전 개입은 마지 못할 최후의 예비책으로 보았을 수도 있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인천상륙작전은 한반도에서 소련과 중국의 전략적 균형이 바뀌는 분수령이 되었을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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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 중국 관계(박영실) 10, 북한이 중국의 지원을 받지 않으려한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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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쟁 초기에 북한은 중국의 지원을 받지 않으려 했다고 한다. 반면 중국은 북한에게 적극적인 지원을 하려고 했다는 근거가 많다. 북한이 그런 태도를 취한 이유는 무엇일까 ? 그 이유를 제대로 설명한 것을 보지 못한 것 같다.

p.66

개전초기 김일성은 소련 고문단과 스탈린에게는 전쟁과 관련한 사안에 대해 문의하고 도움을 청한 반면에, 중국의 마오쩌둥에게는 전쟁의 개전시기도 알려주지 않았다. 중국은 북한의 개전소식을 전쟁발발 3일째 되는 날, 북한의 영관급 연락장교의 연락으로 알게 되었다.

김일성은 6.25 전쟁을 준비하면서 모든 필요한 준비는 소련으로부터 지원받기 때문에 중국의 도움을 받고 싶지 않았으나, 전쟁이 시작되자 중국의 도움이 필요하다는 것을 인식하게 되었다. 특히 일부 북한 지도자들은 미 공군의 대대적인 폭격 등을 목격하고 이후 상황을 우려하였다.

7월 5일 김두봉은 김일성을 방문하여 소련이 미국의 폭격에 대한 대응작전을 어떤 방식으로 실행할 것인지를 물었고, 박헌영 역시 소련 항공대가 북한을 엄호하도록 소련 정부에 공식적으로 요청할 필요가 있다는 것과 중국군의 파병지원을 제기하였다.

p.67

스탈린은 중국에게 북한에 대표를 파견해 줄 것을 요구하였고,.. 중국도 저우언라이의 위임에 따라 중화인민공화국 대리대사를 통해 북한을 위해 전쟁에서 필요한 것은 어떠한 것이라도 도울 준비가 있다고 김일성에게 전달했다.(국편) 마오쩌둥도 전쟁이 개전한다면 북한을 돕겠다는 의사를 밝혔지만 김일성은 북한의 직접개입을 꺼려하고 있었다.

중국측 연구자들은 미군이 참전하기 전까지 중국은 전쟁에 개입할 의사가 없었다고 주장한다(박영실 68).

그러나 사실 중국은 전쟁초기부터 즉각적인 준비를 한다. 첫째는 중국 국내에서 항미원조운동을 진행할 것이고, 다른 하나는 동북변방군을 구성해서 직접적인 군사대비태세를 취한 것이다.

저우언라이는 마오쩌둥의 지시에 따라 7월 7일 국방보위문제에 관한 제1차 회의를 소집했다. 이회의에서 중원지역의 국방기동부대 제13병단아래 제 38, 제39, 제40군을 북상시켜 조중변경지역에 집결하여 동북변방군을 조성하고, 이 조직은 동북변방을 보위하고 필요하다면 북한주민을 지원토록 결정한 것이다.(박영실 69)

중국의 적극적인 준비에도 불구하고 북한의 반응은 매우 차가웠다.

동북 변방군이 조성된 후 1950년 8월초 군단장 덩화가 한국전쟁에 대한 정보를 얻기 위해 북한지역으로 진입하고자 했다. 그러나 압록강을 건너 안동이라는 마을에서 더 이상 내려갈 수 없었다. 북한측이 중국 측 인사들을 전투지역 근처에 접근할 수 없게 했기 때문이었다.(박영실 70, 데비비드 핼버스템, 정윤미 이은진 옮김, 콜디스트 윈터, 2009, 512쪽)

1950년 9월 8일 저우언라이는 로신과 코토프 및 코노프 등 군사고문관과 면담을 하는 자리에서 한반도 상황에 대해서 잘 알지 못하며 북한과 접촉할 수 없다고 언급했다. 한반도 전투상황을 관찰하기 위해 중국 측 군사요원들을 북한에 파견하려 했으나 평양에서는 어떤 반응도 보이지 않고 있다며 불만을 토로했다. (박영실 72, 예브게니 바자노프 나딸리아 바자노바. 김광린 역, 110)

한편 북한도 중국에 도움을 청해야 할지에 대해 고민하고 있었다, 김일성은 슈티코프에게 문의했지만 슈티코프는 대답을 꺼렸다고 한다. (박영실 72)

(박영실은 슈티코프가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고 하는 근거는 밝히지 않고 있다. 이유도 불분명하다. 슈티코프는 왜 그런 태도를 보였을까?)

북한은 왜 중국의 전쟁개입에 부정적인 반응을 보였을까?

추측가능한 이유 첫째. 중국의 티베트 공격을 들 수 있지 않을까 한다. 중국의 티베트 공격은 북한에게 중국이 북한으로도 침공할 수도 있다는 의심을 하게 했는지 모른다.

둘째, 소련이 가능하면 중국의 개입없이 전쟁을 종결짓고 싶어했는지 모른다. 한반도를 자신들의 완충지역으로 확보하고 싶어했다는 것이다. 이는 러일전쟁이후 계속된 소련의 지정학적 이해관계와 일치한다고 보아야 한다. 웨더스비 교수도 소련의 한반도 개입을 일본의 진출 방지와 긴밀하게 연결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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