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 중국 관계(박영실) 21 정전회담 수용과 중국의 주도권 확보

김일성 모택동.jpg

한국전쟁에 대한 정치적 주도권이 소련에서 중국으로 넘어간 것

한국전쟁의 군사적 주도권은 인천상륙작전을 계기로 소련에서 중국으로 넘어갔다는 것을 언급했다.

소련은 군사적인 주도권을 중공군에게 넘겨주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이후에도 정치적 주도권은 그대로 유지했다. 전쟁 당시 정치적 주도권이란 전쟁을 계속할 것인가 말것인가를 결정하는 것이다.

한국전쟁의 휴전은 미국과 소련의 합의에 의해서 이루어졌다. 소련은 자신들이 한국전쟁과 무관하다는 것을 애써 주장했으나 결국 미국의 요구에 의해 정전협상에 동의했다.

당시 소련은 정전에 반대했다. 미국을 괴롭힐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가장 고통스러웠던 쪽은 중국과 북한이었다. 직접적인 피해를 당하지 않던 소련이 전쟁을 계속하자고 했으나 중국과 북한이 견디기 어려웠다.

전전회담 시작은 스탈린의 허락에 의해서 가능했다. 중국과 북한은 회담 진행과정도 소련이 주도하기를 바랐다. 그러나 스탈린은 정전회담 진행에 대한 권한을 마오쩌둥에게 위임했다. 1951년 6월 30일 스탈린이 마오쩌둥에게 보낸 전문에서 정전회담은 북한과 중국이 주도해야 한다고 지적했다(박영실 169). 그리고 정전회담 서명은 북한군 총사령관 김일성과 중국인민지원군 사령관 펑더화이의 명의로 할 것을 지시하면서 총지휘권을 마오쩌둥에게 위임했다(심지화편, 조선전쟁, 아국당안관적해밀문건, 중책, 839쪽)

원문에서 표현이 어떻게 되어 있는지 모르겠으나 총지휘권을 마오쩌둥에게 위임한다는 것은 매우 큰 의미를 지닌다고 하겠다. 여기서 총지휘권이란 말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지 잘 모르겠다. 좁게 해석하더라도 스탈린이 말한 총지휘권이란 한국전쟁에 대한 중국의 정치적 권한을 인정하는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결국 군사적인 감독권에 이어 정치적인 권한까지 중국에 넘겨준 것이다. 이는 소련이 한국전쟁의 배후가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기 위한 의도에서 출발한 것이라고 보여진다. 그동안 소련은 한국전쟁과 직접적인 관련이 없다는 것을 주장하기 위한 행동을 계속했었다.

스탈린으로 부터 정전회담에 대한 주도권을 확보한 마오쩌둥은 베이징에서 모든 것을 지휘했다.(박영실 170)

정전협상의 진행과정에서 중국과 북한의 입장차이가 발생했다.

북한은 정전회담이 북한의 위신을 떨어뜨리지 않고 명예를 훼손하지 않는 과정을 거쳐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중국는 미국에게 양보를 해서라도 정전협정을 체결하려고 했다.

중국은 미국의 요구를 받아 들여 현재의 전선을 군사분계선으로 결정할 수 있다고 김일성에게 통보했으며, 김일성은 중국의 이런 제안을 수용할 수 없었다.

김일성은 박헌영과 회담중 “내가 차라리 중국인의 도움을 받지 않고 전쟁을 계속하는 것이 낫지, 이런 양보는 하기 싫다, 나는 차라리 다시 유격전쟁을 시작하겠으니, 당신들은 지하상태로 들어갈 준비를 해라. 우리가 하고자 하는 것은 이런 조선이 아니다.”라고 토로했다고 한다.

김싱럿은 스탈린의 지시에 따라 정전에 대한 의견을 마오쩌둥에게 제시했지만, 최종적인 결정은 마오쩌둥이 했다.

한편 이때까지 소련은 여전히 한국전쟁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 북한과 중국은 소련이 정전회담 과정에 참여하기를 바라고 있었다. 중국은 1951년 9월 8일 스탈린에게 소련의 군사고문 83명을 조선의 중국인민지원군 부대에 파견하여 업무를 도와줄 것을 요청했다.(심지화 편, 조선전쟁, 아국당안관…, 하책 1019)

2019년 12월 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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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 중국 관계(박영실) 20, 소련의 북한 지원, 공군

스탈린 김일성.gif

전쟁을 준비하면서 북한은 소련에게 공군 강화를 요청했다. 소련은 북한이 공군을 확보하게 되면 한국전쟁이후 대마도로 진출할 것을 우려해서 공군을 강화시키지 않았다는 것을 <괴뢰군 연혁>을 통해서 알아 보았다.

소련이 공군을 강화하기로 한 것은 낙동강 전선에서의 패배가 가시화 되면서 부터였다. 만일 처음부터 공군력을 충분하게 강화했더라면 북한군이 초반 전투에서 그렇게 어려움을 겪지 않을 수 있었다. 소련이 북한군의 공군을 강화시키지 않은 것에 대한 비판은 별로 없다. 그러나 소련이 가장 크게 잘못한 것 중의 하나로 공군력을 제대로 강화시키지 않은 것이라고 지적할 만하다.

소련 공군 151 전투비행사단은 1950년 7-8월 기지를 연해주에서 션양과 단동으로 옮겨 중국 동북지역을 방어하는 임무를 담당하고 있었다

1950년 9월 소련 정부는 평양을 수호할 목적으로 소련 공군을 파견할 계획을 세웠다.

9월 23일 소련 국방상 바실리예프스키의 스탈린에 대한 보고서에 따르면 소련정부는 연해주 비행장에 주둔해 있는 LA-9 40대로 편성된 304 비행연대를 10월 1-2일 평양에 파견키로 결정했다.

9월 25-30일 비행 정비부대, 적기탐지를 위한 4대의 전파 탐지기 를 평향에 수송하기로 했다.

계획에 따르면 304연대는 10월 3일 평양수비임무에 착수할 예정이었으나 그러지 못했다.(전현수, 소련 공군의 한국전 참전,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한국전쟁사의 새로운 연구 1,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2001, 638쪽)

10월 18일 소련 국방상의 명령에 따라 28전투항공사단이 야오양 비행장에서 새로 편성

11월에는 소련군 상하이 방공작전집단군에 소속되어 있는 50전투 비행사단이 안샨으로 이동

소련은 중국으로 비행사단으로 이동하면서 다음과 같은 사항을 조치했다.

첫째, 중국으로 파견하는 소련 비행사단, 중국에 주둔한 벨로프의 비행사단을 중국 소유로 이전. 소련 비행사단을 중국 비행사단으로 간주하여 중국 국적기의 일련번호를 매김. 중국인들이 비행교육을 완료한 후에는 소련 비행사를 본국으로 돌려보냄

중국과 소련이 비행단 이전 협약을 맺어, 협약에 서명하는 순간부터 모든 물자를 중국 소유로 간주

연료를 포함한 일체의 비용은 중국이 부담. 이 불자에 대한 지불은 1950년 2월 14일 소련정부와 중국 정부간 협정에 따라 무기와 구수기재의 기준 가격을 실제 전달된 날짜로 산정(국편, 1950년 10월, 113쪽)

1950년 11월 15일자 소련군 총참모장 명령에 따라 11월 15-24일 중국 션양에 64 전투비행군단 작전그룹이 창설

11월 20-25일 사이에 전속된 28, 50, 151 전투비행사단, 81 독립통신중대는 64군단 창설의 모태가 됨. 군단 지휘소는 션양, 이후 종전까지는 단동에 위치, 초대 군단장은 베로프 소장(전현수, 643)

제64군단의 역할은 미공군 방어였다. 최초 임무는 중국 지역의 주요시설과 압록강 교량 및 수력 발전소 방어, 이후 작전반경을 평양-원산 라인으로 확대했으나 1953년 7월 27일 전투종료시까지 작전지역은 극히 제한적(기광서, 역비논단: 흐루시초프 회고록과 한국전쟁, 역사비평, 통권 55호 2001년 여름)

소련은 공군이 참전한 이후에도 그들의 활동을 매우 제한했다.이는 소련공군이 참전했다는 사실이 알려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서였다.

올린이:admin2019년 12월 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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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 중국 관계(박영실) 19, 소련의 북한 지원, 군사고문단

스탈린 김일성.gif

한국전쟁기간 동안 소련이 북한에게 지원한 내용 중 주로 군사고문단에 대해 정리하려고 한다.

1946년 9월 스미르노프를 시작으로 1949년 4월 21일 슈티코프, 1950년 2월 23일 바실리예프 중장이 고문단장과 대사관 무관을 겸함, 전쟁중인 1951년 1월부터 라주바예프 중장이 고문단장을 역임

소련 군사고문단은 전쟁준비부터 관여했다. 북한의 남침계획은 군사고문단이 작성한 계획으로 진행되었고, 전쟁수행과정에서 군사고문단의 역할을 컸다. 군대건설 과정, 지휘관 양성등 핵심적인 역할을 담당

전쟁개시전 1950년 5월 16일과 전쟁기간 중인 11월 29일 결정된 소련각료회의 법령에 따라 북한군에서 활동하던 소련 군사고문관, 교관 및 군인 복무자는 246명으로 규정되어 있었으며, 이중에서 군사관리에 대한 경험이 있으면서 극동전장이란 현지조건을 잘알고 있는 장교는 부족했다함(올레그. 벨로슬롯쩨프, 262쪽)

스탈린이 군사고문단에게 지시한 내용은 북한의 전쟁준비 및 작전에 관해 협조하라고 했음.

그러나 6.25 개전초기에 북한지도부가 소련군사고문단에게 전선을 따라 이동할 것을 요청했을때 이를 거부했음. 초기전역에서 북한군이 성과를 제대로 거두지 못한 이유도 북한군 총사령부의 작전지휘 능력 부족때문일 확률이 높다. 그런 점은 ‘소련이 기술한 한국전쟁’에 잘 나타나 있다. 소련군은 초기에 북한군이 제대로 지휘를 잘 못했다고 평가하고 있는 것이다.

문제는 이 당시에 왜 소련군사고문단이 북한군의 요구에 따라 전선으로 이동하지 않았나 하는 것이다. 이것은 자칫 북한군의 남침 뒤에 소련군이 직접 개입하고 있다는 것을 노출하지 않으려고 했기 때문일 것이다.

소련군의 개입을 은폐하려고 했던 시도에 대해서는 (국방부 군편, 한국전쟁사의 새로운 연구 1, 신범식, 소련의 북한지원, 2001년, 573쪽)

소련군사고문단은 스탈린의 지시에도 불구하고 북한군을 지원하고자 했다. 1950년 9월 15일부터 10월 25일 사이에 북한군의 피해가 심각해지자 퇴각하는 북한군 사단에 모스크바의 허락없이 고문단을 파견하기도 했다는 것이다.

(사료의 확인이 필요)

김일성은 군사고문단이 북한군과 함께 이동하면서 작전을 지도하기를 요청했다. 스탈린은 소견군사고문을 타스 통신사 기자신분으로 위장하여 전방사령부에 배치하고 일선부대에는 배치하지 않도록 한 것

이와함께 슈티코프에게 군사고문들이 포로가 되지 않도록 조심하라는 주의를 하달(션즈화 저, 최만원 역, 247쪽)

한편, 38선 이남에 고립된 북한군을 지원하던 소련고문들로 일부는 전사하거나 행방불명되었다. 대부분은 후퇴하는 북한군과 함께 압록강 근처 혹은 중국이나 소련으로 철수했다.(안승환, 군방부 군편, 한국전쟁사의 새로운 연구 2, 2002, 455쪽)

당시 만주지역의 소련군사고문단의 활동에 대해서는 다음자료 추가로 참고 (올레그 O. 벨로슬롯쩨프, ‘소련군인의 6.25 전쟁(1950-1953년) 참가, 대한민국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러시아 연방 국방부 군사사 연구소편, 6.25 전쟁 연구경향 및 사료해제, 국방부 군사편찬 연구소) 2009, 263쪽)

소련 군사고문단의 역할여하에 따라 한국전의 운명은 바뀔수도 있었다. 스탈린은 전쟁이 발발하면서 소련이 북한군의 뒤에 있다는 사실을 감추는데 주력했으나 초기작전이후 북한군의 작전적 지도 능력부족이 문제가 되면서 점차적으로 소련군사고문단들의 활동의 범위를 넓혔다.

소련 군사고문단의 활동이 적극적으로 이루어지면서 한국전쟁의 초기작전 구상은 소련군에 의해 좌지우지 되었다고 보는 것이 합리적이다.

적어도 인천상륙작전이후 중공군이 참전할 때까지는 소련군사고문의 역할이 컸다고 할 것이다. 중공군이 참전을 결정해놓고 소련과 실랑이를 벌인 것도 한반도로 진입했을때 누가 작전의 주도권을 잡는가 하는 문제라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이렇게 보면 1950년 낙동강 전선에서의 작전수행도 소련군의 작전지도에 따른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인데 여기서 잘못한 부분, 즉 작전부대의 분산운용과 같은 것은 소련군 군사고문단이 책임져야 할 것으로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소련군이 기술한 한국전쟁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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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 중국 관계(박영실) 18 중공군 참전이후의 북중소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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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문 1 스탈린과 마오쩌둥의 관계

한국전쟁중 마오쩌둥과 스탈린이 어떤 관계였는지를 보여주는 전문이 있다.

중공군은 제4차 전역부터 작전인원을 전방지역에 순차적으로 배치하는 윤번작전을 실시했다. 그런데 이런 부대 운용의 방법을 마오쩌둥은 스탈린에게 보고한 것이다. 당시에 이런 부대운영의 방법까지 스탈린에게 보고할 필요가 있었는지는 의문이다.

박영실의 책 125쪽에는 작전수행 방법의 변경으로 윤번작전이 갖는 의미와 내용에 대해 마오쩌둥이 보고한 전문을 게재하고 있다. 이문서는 션즈화가 발간한 자료집 중책 707쪽 모택동의 건군이래 모택동문고 제2책 북경 중앙문고출판사 1988, 151쪽에 있다.

이런 부분까지 보고한 것을 어떻게 해석할 수 있을까?

의문 2 조중연합사렵부 구성이후의 북중관계

1966년 8월 9일 소련외교부에서 작성한 6.25 전쟁에 관한 보고서에는 중국인민지원군이 주둔하고 있던 기간동안 중국인이 북한의 내정에 간섭하는 일이 허다하였다고 지적하였다.

중국은 부사령관인 박일우를 이용하여 김일성에 반대하도록 선동했다는 것이다.

(심지화 편, 조선전쟁 아국당안관적해밀문건 하책,대북. 1992, 1347쪽)

박영실을 조중연합사령부 창설이후 주도권은 북한에서 중국으로 넘어간 상태(128)라고 평가하고 있으나 사실상 주도권이 소련에서 중국으로 넘어간 것이라고 보아야 하는 것 아닌가 한다.

소련은 계속 군사고문단을 유지하고 있었지만 큰 틀에서만 조언을 했을 뿐 실제로 개별 전투는 조중연합사령부가 처리했다는 것이다.

중군인민지원군 총참보부에 소련 군사고문이 있었으며 스탈린은 당시 군사고문은 5명으로 충분하다고 판단했다(국편, 1951.9.12, 590쪽)

연합사령부를 구성하는 과정에서 중국과 북한 그리고 소련의 입장은 조금씩 달랐다. 이런 차이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 것인지 추가 연구가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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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 중국 관계(박영실) 17, 3차 4차 전역에 있어서 중공군에 대한 작전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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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게 주목을 하지 않았지만 중공군의 작전수행에 있어서 마오쩌둥의 작전지도가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에 대한 정리가 필요한 듯 하다.

제2차 전역이 끝나고 이어서 곧바로 제3차 전역을 수행토록한 것은 마오쩌둥의 지시였다.

팽더화이는 마오쩌둥의 제3차 전역수행을 탐탁치 않게 여겼다. 팽더화이는 38선을 넘어서 진격하라는 지시를 마지못해 따랐으며 38선 확보여부는 작전의 실제 상황에 따라 결정될 것이며, 서울점령은 중국인민 지원군이 아니라 북한군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는 것이다.(Tsui David, 중공군의 한국전쟁 참가(7), 개입결정의 실현, 1950년 10월-1951년 7월(1), 전략연구, 통권 제46호, 243쪽)

팽더화이가 마오쩌둥의 지침에 반대한 것은 전투에서 패배할 가능성은 없지만 공격을 받아 저지를 받아거나 전투의 승리가 그다지 크지 않을 것이라는 예측 때문이었다(션즈화 최만원 역, 332-333)

팽더화이의 생각을 반영하듯 1951년 1월 3일 마오쩌둥에게 다음과 같은 전문을 보냈다

“적은 남쪽으로 물러서고 있고, 1951년 1월 3일 포로로 겨우 3,000명을 잡았을 뿐이다. 이제 서울, 인천, 수원, 이천, 양평가 홍천을 점령한 후, 우리 군은 진격을 멈출 것이며, 정비와 휴식, 보충 그리고 개편을 할 것이라”(심지화편, 조선전쟁, 아국당안관적해밀문건, 대북, 1992, 653-654)

펑더화의 작전중지 결정에 대해 북한과 소련은 반대했다. 김일성은 38선을 넘은 이상 신속한 승리를 쟁취하기 위해서라도 계속적인 전투를 주장했으며, 소련의 자하로프는 중조 연합군대의 진격 중단에 반대의사를 표명했다. 이기고 있는 군대가 적군추격을 중단하는 경우가 어디있느냐고 불만을 터뜨렸다(박영실 122)

의문 1

마오쩌둥이 제3차 전역을 즉각 실시하라고 하는 지시는 작전적으로 타당한 지시였다. 유엔군이 채 정비하기 전에 가급적 빨리 타격을 가하는 것은 전술적으로 옳은 결정이다. 팽더화이는 왜 마오쩌둥의 지시를 탐탁치 않게 여겼을까? 준비가 미흡하더라도 승기를 잡았을때는 과감하게 진출해야한다는 것은 장수의 기본이다.

의문 2

팽더화이가 제3차 전역을 중지시킨 이유는 무엇일까? 아마도 부대가 지쳤거나 작전을 더 이상 수행하기 어려운 상황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당시의 상황을 보면 꼭 그렇지도 않은 것 같다. 중공군의 피해상황도 그리 크지 않았다(피해상황 확인)

의문 3

북한과 소련의 항의를 받고 마오쩌둥은 어떤 조치를 취했는가 하는 것이다. 마오쩌둥이 김일성의 항의를 받고 취한 조치는 팽더화이의 조치를 지지하는 내용이었다

“인민군 1,2,3,5군단은 모두 한강이남에 제1선을 구축하고, 지원군은 인천 및 한강이북으로 철수해 2-3개월간 휴식을 취하며, 인천과 서울은 지원군이 경비를 맡는다. 인민군은 현재 동북지역에서 훈련을 받고 있는 신병으로 보충하고, 만약 김일성이 휴식과 보충이 필요하지 않다고 판단하면 계속해서 진군할 수 있으며, 인민군이 진격해서 적을 공격할 때는 북한 정부가 직접 지휘하고, 지원군은 인천, 서울 및 제38선 이북의 방어를 담당한다”는 의견을 제시했다(션즈화, 최만원 역, 395-397)

마오쩌둥의 말은 싸우고 싶으면 북한군 단독으로 싸워라는 것이었다. 준비가 되지 않았던 김일성은 마오쩌둥의 지시를 받아 들일 수 밖에 없었다.

결국 제3차 전역에서 중공군 결정적인 행동을 하지 못한 것이 중공군이 한반도 전체를 장악하지 못했던 중요한 요인이라고 보인다.

만일 팽더화이가 중공군이 개입하더라도 한반도 전체를 석권하는 것은 어렵기 때문이라고 판단했다면 그의 평가는 옳았다고 할 것이다. 그러나 애초에 마오쩌둥은 한반도 전체 석권을 목적으로 참전했다.

제4차 전역은 애초계획했던 2달의 정비기간을 채 보내기도 전에 약 1달만에 재개했다. 1951년 1월 28일 마오쩌둥은 즉시 제4차 전역을 수행하여 2-3만명의 미군과 한국군을 섬멸하여 전투선을 대전, 안동지구 이남으로 설정하라고 지시했다. 마오쩌둥의 이런 지시는 제4차 전역성공이후 남한과 미국이 중국과 북한에 정전협상을 시도할 것이라는 전망에 기반한 것이었다. (박영실 123)

박영실은 이런 평가를 중국측 자료를 인용했으나 그 내용 전체를 살펴볼 필요가 있을 듯 하다.

중공군의 제3차 전역에 이어 제4차 전역으로 연결된 과정을 보면 중국군의 유엔군에 대한 평가가 정확하지 않았던 것 같다. 제3차 전역 중지한 이후 얼마 되지 않은 1951년 1월 15일 부터 리지웨이 사령관은 공세적 탐색작전 ‘울프 하운드’를 시작해서 중공군을 압박하기 시작했다.

이과정에서 제3차 전역에 대한 작전지도의 적절성 제3차 전역의 중지에 대한 결정의 적절성에 대한 검토와 분석 평가가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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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 중국 관계(박영실) 16, 조중연합사령부-2(철도문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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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중연합사령부 구성이후 중공군의 제3차 전역이 시작되었다. 조중연합사 구성이후 북한과 중국군사이에는 불협화음이 발생했다.

제일 먼저 문제가 된 것은 철도관리에 관한 문제였다. 보급선이 길어지면서 중국은 철도병들을 북한에 파견하여 철도보수를 담당하게 했다.

펑더화이는 1950년 11월경 가오강과 회담에서 철로 수송에0 관한 관리업무를 개선하고 중국과 북한의 수송업무를 협조하면서 철로연합지휘부 구상을 했다.

1950년 12월말 중국 측 사령관 류쥐잉 정치위원 위광셩 부사령관 예린으로 구성된 동북군구철도운수사령부가 설립되었다.

북한은 조선철도군사관리국을 임시로 설립하여 중국과 공동으로 철로관리를 담당했다.

북중간에는 철도운영에 대해 서로 이견이 많았다. 군수물자를 먼저 운송할 것인지 민용 및 경제건설을 위한 물자를 수송할 것인지(션즈화, 마오쩌둥 스탈린과 조선전쟁, 402-404)

1951년 중국측 대표 장밍위엔에 의하면 중요한 쟁점은 연합운수사령부의 지휘권이었다.

중국은 대부분의 철도차량을 본국에서 들여왔으며 북한의 철도와 기관차가 대부분 훼손되어 있었다. 철도를 수리하는 기계와 북한의 철도를 담당하는 인력 역시 중국이 공급을 책임지고 있었다.

북한이 철도운송의 정상적인 운영을 위한 지휘에 실질적인 협조를 제공하기 어려웠다.

그러나 문제는 이런 상황에서 북한주재 소련 군사고문이 북한의 지휘권을 주장했다는 것이다. 철도운수의 관리권은 국가의 주권과 연결된 문제라는 이유였다.(박영실 117, 중국의 당대중국사연구 지 2000, 제6기 34쪽에서 인용)

소련이 왜 북한의 주권을 주장했는지에 대해서는 설명이 분명하지 않다.

이후 이문제는 스탈린에 의해 결정되었다. 스탈린은 중국 편을 들었다. “부대의 구성과 전쟁물자의 전선으로의 수송계획은 정확해야 한다. 따라서 북한의 철도는 반드시 중국사령부에서 관리하여야 한다.”는 것이었다. (션즈화, 마오쩌둥 스탈린, 406)

한편 여기에서 스탈린은 북한내부에서 북한철도의 관리에 대한 의견이 다른 것을 시사하는 언급을 한다

“김일성은 이 의견을 지지했지만, 북한의 다른 사람들이 반대했다”는 것이다.

결국 스탈린은 “북한의 이익을 위해서도 북한과 중국의 더욱 밀접한 국가적 관계를 형성하는 것이 좋다고 판단한다”고 하기에 이르는 것이다.

철도문제로 북한과 중국간에 이견이 발생한 것은 북한주재 소련군사고문의 입장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리고 북한내부에서도 의견이 갈렸는데 그것은 소련군사고문의 입장때문이라고도 할 수 있는 것이다.

1951년 5월 4일 북한과 중국은 베이징에서 “조선철로의 전시 철로관리제도에 관한 협의”를 체결하고 관리체제, 조직기구, 수송력부분등에 대한 규정을 만들었다.

중국군이 북한에 들어오면서 곧바로 북중간의 주도권 경쟁이 벌어지고 있는데 이를 북중간의 관계로 이해할 것인지 아니면 북한을 두고 중국과 소련이 경쟁을 벌이는 것으로 이해해야 할지에 대해서는 더 살펴보아야 할 것이다.

이런 상황에 대해 박영실이 김일성은 중국과 소련의 압력을 적정수준에서 차단시키면서 자신의 입자를 강화했다고 평가했다(박영실 119, 김일성 선집, 평양 조선노동당 출판사, 1953, 207-208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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