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 중국 관계(박영실) 27, 중국인민지원군의 북한 철군에 대한 학자들의 견해

김일성 모택동 스탈린.jpg

당시 정세는 중국이 군대를 철수시키기에 적절한 상황은 아니었다.

1956년 8월 종파사건으로 인해 북한은 소련 및 중국과 불편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혼란스러운 북한의 내부 정치상황을 무시하고 중국이 일방적으로 군대를 철수시키기 어려웠다.

이와함께 한반도의 안보상황도 안정되지 않았다. 남한에 주둔하고 있는 유엔군은 군사력을 강화시키고 있었다. ‘1957년 6월 21일 중국은 유엔군이 정전협정 제13조를 위반하여 새로운 무기를 남한에 반입하고 있다’고 비난하는 상황이었다. (인민일보 1957년 6월 28일)

북한도 중국군의 철군을 고려하지 않고 있었던 것 같다. 1956년 6월 1일 북한은 군병력을 감축시키고자 했다. 1956년 8월 31일까지 약 8만명을 감축시키고자 했으며 그 이유는 전후 복구사업을 위한 인력전환이 목적이었다.

북한이 군대 병력을 줄인 것은 그만큼 중국군에게 의존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 것이다. 문제는 8월 종파사건이 북한의 중국군에 대한 입장을 완전하게 바꾸어 놓았다는 것이다.

서동만과 와다하루끼는 북한의 사회주의 체제건설의 완성이 되었기 때문에 중국 인민지원군이 철수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서동만, 북조선 사회주의 체제 성립사, 1945-1961, 선인 2005, 598쪽)

(와다하루끼 서동만 남기정 역, 북조선, 돌베게, 2002, 120쪽)

김용현은 중국 내부의 문제로 중국인민지원군의 철수가 이루어졌다고 주장하고 있다

(김용현, 북한의 군사국가화에 관한 연구, 1950-1960년대를 중심으로, 동국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01, 81-82쪽)

한편 1966년 소련 외교부가 작성한 6.25 전쟁평가보고서는 김일성이 소련과 중국의 압력을 배제하기 위한 것이라는 것으로 해석하고 있다.

중국은 군대가 장기간 주둔하고 있는 상황을 이용하여 북한에 대한 영향력을 강화하려 했으나, “결국 북한의 압력으로 1958년 10월 말에 중국 인민지원군이 철수”했다는 것이다. 또한 1958년 3월 당조직위원회 확대회의에서 김일성이 ‘소련식 군사단일제’와 ‘중국식 정치위원제’가 북한의 실정에 맞지 않는다며 ‘이원제를 실시하자는 제안을 제시한 것은 그런 이유때문이라는 것이다.

(심지화, 조선전쟁 아국당안관적해밀문건 하책, 대북, 1992년 1348쪽)

(서동만, 북조선 사회주의 체제 성립사, 1945-1961, 선인 2005, 807쪽)

결국 8월 종파사건을 계기로 김일성은 국내적 정치기반을 확보하였으며 이어서 중국인민지원군의 철군을 계기로 중국의 간섭을 배제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소련은 이미 인천상륙작전을 계기로 한반도에 대한 영향력을 중국에게 넘겨준 것이나 마찬가지다. 특히 스탈린이 휴전협상의 권한을 마오쩌둥에게 넘겨준 것은 중국에 대한 북한의 우선권을 인정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소련은 스탈린 사후에는 북한에 대한 직접적인 영향력을 상실한 것이다. 이렇게 볼때 1958년 중국군의 철수는 북한이 진정한 의미에서 외세로부터 해방된 시점이라고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

인천상륙작전을 계기로 소련의 영향력이 급속하게 퇴조하고 그 이후 1956년 8월 종파사건으로 김일성이 국내정치적 기반을 장악하고나서 1958년 중국군이 철수하게 된 과정을 하나로 연결해서 이해해야 한다.

중국군이 철수하게 된 것도 결국 김일성과 마오쩌둥이 1957년 모스크바 공산당대회에서의 회담이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으로 보아야 한다. 즉 정치적 흥정의 댓가라는 것이다. 중국은 더 이상 북한에게 과거와 같은 영향력을 행사하기 어렵다는 것을 인식한 것이다.

올린이:admin2019년 12월 1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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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 중국 관계(박영실) 26,중국인민지원군 철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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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전협정 체결이후 북한에 주둔한 중국인민지원군의 규모는 모두 120만명이었다.

17개군단과 제33사단, 포병, 고사포병, 장갑병, 공병, 철도병, 후방병참부대, 후방경위부다, 지원군 총사령부 및 각 병단기관과 지속부대등

이들 부대는 정전협정 이후 1958년 10월까지 총 6차례에 걸쳐 공개철수를 진행

제1차 공개철수는 1954년 9월에서 10월사이 7개사단 총 87,894명

1955년에는 두차례에 걸쳐 철수를 진행

3월과 4월사이에 총 6개사단, 52, 192명,

10월에는 6개사단, 63,257명이 철수

세번에 걸쳐 모두 19개 사단이 철수했으나 기본병력 15개사단, 기타 특종병과부대, 인민지원군 총부, 후근보장부 등 25만명이 한국에 주둔하고 있는 상황이었음

1956년 8월 종파사건이후 중국인민지원군은 공개적인 철수를 중단하게 됨

1957년 북한과 중국사이에 중국인민지원군의 최종철수에 대한 논의가 시작됨

1957년 11월 소련에서 열린 공산당 및 노동당 대표자회의에서 마오쩌둥은 김일성에게 1956년 8월 종파사건에 중국이 간섭한 것을 사과, 중국은 북한이 법률적으로 독립국가임을 강조하면서 8월 종파사건은 북한정부를 전복시키려는 음모였음을 인정함(션즈화, 최만원 역, 440쪽)

김일성은 중국으로 넘어간 연안파들의 송환과 중국인민지원군의 철수문제를 제기하고 마오쩌둥은 이를 즉각 수용함

1957년 12월 16일과 25일 마모쩌둥에게 중국인민지원군 철수와 관련한 두가지 방안을 제시

첫째 북한정부가 성명을 발표하여 한반도에서 모든 외국군대를 철수시킬 것을 주장하고 이에 중국정부가 적극 호응한다.

둘째 북한최고인민회의가 유엔에 서한을 보내고 소련도 유엔에 제안함으로써 유엔으로 하여금 직접행동에 나서도록 하자는 것

12월 30일 중국공산당 중앙위원회 정치국 상임위원회와 서기처는 중국인민군 철수방안을 수립함

1958년 1월 24일 마오쩌둥은 김일성에게 1958년 3월에서 4월가지 북한과 중국정부가 성명을 발표한 후, 중국인민지원군의 1/3을 철수시키고, 1958년 7월에서 9월까지 1/3을 철수시키며, 마지막으로 1958년 이전에 남은 1/3을 철수시키자는 의견을 제시

1958년 2월 7일 중국은 북한정부의 건의를 지지하며, 북한정부와 협의후 중국인민지원군이 자발적으로 철수하는데 동의한다고 발표

중국인민지원군의 철수는 북중이 8월 종파사건으로 소원해지 관계를 복원한다는 의미

1958년 3월 12일 중국인민지원군 총사령부는 철수의 구체적인 절차에 관한 공보를 발표,

1958년에 총3차례에 걸쳐 철군을 진행

제1조는 3월 15일부터 4월25일까지 6개사단 8만명이 철수

제2조는 7월 11일부터 8월 14일까지 6개사단과 특별병종부대를 포함한 10만명

제3조는 9월 26일부터 10월 26일까지 지원군사령부와 3개사단 및 후방공급부대 7만명이 귀국

북한정부는 주체 47년(1958년) 3월 15일-10월 26일까지 세차례에 걸쳐 중국인민지원군이 신의주를 경유하여 완전히 철수했다고 공식적으로 발표

공식적으로 철수했다고 밝힌 인원은 45만명이다. 그러나 중국이 정전협정 체결 당시 120만명이 주둔하고 있었다는 것을 밝힌것에 의하면 전체 병력중 2/3정도는 비공식적으로 철수한 것으로 보인다.

올린이:admin2019년 12월 1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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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 중국 관계(박영실) 25, 8월 종파 사건 군내 숙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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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6년 8월 종파사건은 1953년 스탈린 사망이후 소련에 새로운 정권이 들어서면서 기존의 공산주의 운동을 벗아난 소련을 추종하는 북한내의 연안파와 소련파들의 김일성에 대한 도전이었다.(박영실 218)

김일성은 1957년 12월 5-6일 개최된 확대 전원회의에서 반종파투쟁을 1년 더 연장하자고 주장했다.

1958년 군에 대한 반종파주쟁이 지작되었다.

1958년 2월 8일 조선인민군 창건 10주년에서 김일성은 ‘조선인민군은 항일무장투쟁의 계승자이다’라는 연설에서 “반당종파분자들의 중심인물들은 신민당중신”이라고 규정하면서, 연안파인 김을규, 최왈종등을 공격했다.

이들을 방치하고 허위보고한 최종학등 소련파도 비판했다. 총정치국장인 소련파 최종학의 해임이 진행되었다. 최종학에 대한 비판은 소련식 군대정치 사업방식인 군사단일제, 즉 유일관리제에 대한 비판이었다.

1958년 중국인민지원군의 완전철군을 염두에 둔 군내 사상적인 단결과 사전내부 정비작업의 일환이기도 했다. 이로써 연안파와 소련파의 군내 핵심세력이 완전히 와해되었다.

1958년 10월 당중앙 상무위원회에서 반혁명분자들을 더욱 철저히 진압할 것을 제기했다. 연안파인 평양위수사령관 장평산등이 쿠데타를 시도했다는 사실을 문제삼아 연안파를 숙정했다.

군내 숙청은 1958년 고위간부를 중심으로 1959년 부터는 전군의 하급부대에까지 확대되었다. 군인 개개인에 대한 ‘사상검토’와 각급부대에 대한 ‘집중검열사업’이 지속적으로 이루어졌다. 이를 통해 군대내의 연안파와 소련파 대부분이 숙청되고 그 자리에 만주파 군인들이 진입했다.

이를 통해 김일성은 연합사령부 설치이후 상실했던 군에 대한 독자적인 인적통제기반을 완벽하게 확보할 수 있었다.(박영실216-217)

올린이:admin2019년 12월 1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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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 중국 관계(박영실) 24, 1956년 8월 종파사건의 발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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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탈린 사후 소련에서는 스탈린 격하 운동이 벌어졌다. 이와함께 중국도 소련의 변화를 외면하기 어려웠다. 그리하여 내부적으로는 중국 상황에 적합한 노선을 취사선택했다.

북한은 소련과 중국의 변화와 다른 입장을 취했다.

1955년 12월 28일 김일성은 “사상사업에서 교조주의와 형식주의를 퇴치하고 주체를 확립할 데 대하여”라는 연설을 했다.(고정웅, 리준항 집필, 장경률 편집, 조선로동당의 반수정주의투쟁경험, 평양, 사회과학출판사 1995, 61쪽)

1956년 4월 23일-29일 조선로동당 제3차 대회에서 자주적인 대외정책을 주장했다. 안팎의 정세가 복잡하지만 우리 식대로 살아가며 주체의 혁명위업을 끝까지 완수하겠다는 것을 선포한 것이다.(박영실 212)

소련은 북한에 대표단을 파견하여 개인숭배문제를 거론하려 했으나, 북한은 소련과 맞섰고 그 과정에서 소련문화를 유입하던 기능의 조선대외문화연락회의 기능이 축소되었다. 1956년에는 전쟁기간중에도 이루어졌던 ‘조소우호의 달’ 행사마저 최소되었다.

1956년 8월 전원회의에서 연안파와 소련파는 김일성을 제거하기 위한 계획을 수립했다. 조선노동당 제3차 당대회 기간과 그 이후에 김두봉, 최창익, 박창옥, 박의환, 서휘, 윤공흠, 김승화 등 일부가 조선노동당 내의 개인숭배 상황, 간부정책 및 경제방침에 대해 불만을 가지고 김일성의 잘못을 폭로 비판하려고 했던 것이다.(션즈와, 저 최만원역, 430쪽)

평양주재 소련대사관이 리필규, 박창옥, 최창익, 김승화, 윤공흠 등을 통해 사전에 김일성 제거계획을 전해 들었고 이 사실을 김일성에게 전달했다. 이 사실을 들은 김일성은 전원회의 소집을 지연시키고 소집일자를 하루전에 공포했다.

(의문 여기에서 왜 소련대사관은 김일성에게 김일성 제거계획을 알려주었을까?)

8월 30일 시작된 전원회의에서 당 중앙위원 겸 상업상인 윤공흠이 제3차 당대회에서의 개인숭배에 대한 처리방식에 대한 김일성의 과오를 비난했으나, 최용건, 허성택 등 당주류파가 윤공흠의 발언을 저지하면서 소란이 벌어졌다.

토론분위기에 위협을 느낀 윤공흠, 서휘, 리필규, 김강은 북한을 탈출하여 중국으로 망명했다. 소련파인 김승화역시 김일성에 대한 반대토론을 준비했다가 거절당하자 급히 소련으로 떠났다.

다음날 회의에서 최창익은 당중앙위원회 상무위원과 중앙위원에서 제명되어 내각 부수상에서 파면되었고, 박창옥은 내각부수상과 기계공업상에서 해임되었다. 윤공흠 역시 상업상에서 파면되고, 서휘는 조선직업총동맹중앙위원장에서 물러나게 된다. 리필규도 내각건재공업국장을 잃게된다. 이들과 관련있는 당원들은 당 중앙위원회 검열위원회에서 심의하는 쪽으로 결정이 났다.

리상조는 9월 5일 소련 외교부 차관 페도렌코에게 소련 공산당과 중국 공산당 중앙위원회가 조선로동당 문제에 개입하여 주기를 요청했고, 소련과 중국공산당은 중국 공산당 제8차 전국대회에 참석했던 중국 국방부장 펑더화이와 소련 제1부수상 미코얀을 북한에 급파했다.

그러나 이미 북한은 김일성을 중심으로 한 세력이 당중앙위원회를 장악하고 있었다. 김일성 축출을 단념한 대표단은 8월 전원회의에서 처벌당한 사람들의 복권문제만 다루는 선으로 정리되었다.( 박영실212-215)

1956년 9월 23일 다시 열린 전원회의에서 중국과 소련의 압력을 수용하여 처벌과 조치를 취소하는 결정을 했지만 이는 지켜지지 않았다.

올린이:admin2019년 12월 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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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 중국 관계(박영실) 23, 8월 종파사건이전의 연안파와 소련파 정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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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안파 숙청

김일성은 한국전쟁 당시부터 중국과 관계가 가까운 인사들을 경계했다.

1950년 12월 21일 강계에서 열린 당 중앙위원회 제3차 전원회의에서 김일성은 군지도자들과 전선사령관들을 비판했다.

김일, 최광, 림춘추같이 김일성의 심복과 함께 연안파의 무정, 김한중, 허성택, 박광희 등이 비판의 대상이 되었다.(서대숙, 현대북한의 지도자, 을유문화사, 2000, 81-82)

그러나 표적은 무정이었다. 그는 중국의 신임이 높았고 특히 펑더화이와 절친한 사이였다.

김일성은 제2군단장에서 철칙당한 무정이 명령을 제대로 집행하지 않아 전투를 제대로 수행하지 못했고 철칙한 이후에도 퇴각과정에서 법적수속없이 사람을 총살하는 등의 만행을 저질렀다고 비판했다(김일성 선집3, 현정세와 당면과업, 조선노동당 출판사, 1953, 167)

박일우도 비판을 피할 수 없었다. 북한과 중국이 연합사령부를 조직하면서 매개체 역할을 했던 박일우도 1953년 2월 연합사령부 부정치위원에서 퇴출되었다.

박일우의 퇴출은 정전협상과정에서 중국과 북한의 입장차이가 많이 작용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중국은 포로의 전원송환을 주장하면서 정전협정 체결을 미루고 있었으나 북한은 국내의 손실이 너무커서 조속하게 전쟁을 종료하고 싶었다. 북한은 중국의 입장을 대변하던 박일우의 입자강화를 두고볼 수 없었던 것이다.

1955년 4월 당중앙위원회는 박일우를 연합사령부에서 자신이 마치 중국의 대표자인 것처럼 행세했다는 이유로 비판을 받앗다.

전쟁영웅으로 알려진 방호산도 숙청되는 등 연안파를 대표하는 인물들이 제거되기 시작했다.

소련파 정리

연안파에 대한 정리가 전쟁중에서부터 시작되었다면 소련파에 대한 정리는 1956년에 들어 본격적으로 이루어졌다.

1956년 1월 상무위원회에서 박창옥, 박영빈, 기석복, 전동혁, 정률은 당의 문예정책 집행에서 범한 오류들이 실수가 아니라 부르주아 사상에서 나온 개인 영웅주의, 출세주의로부터 출발한 것이라고 비판받았다.

1955년부터 1956년동안 북한은 중국과 소련의 원조를 받아 전후 복구사업을 하고 있었지만 한편으로는 연안파와 소련파에 대한 숙청을 시작하고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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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 중국 관계(박영실) 22 정전협상이후 북중갈등 현상

2019년 12월 7일

김일성 모택동.jpg

박영실은 정전협상 기간 중 포로송환문제와 관련하여 중국과 북한간 상호 갈등이 있었다고 했다. 그러나 갈등의 내용을 분명하게 이해하기 어려웠다. 다른 자료에서 정전협상간 중국과 북한의 관계에 대해 확인 해 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박영실 176-179)

박영실이 정리한 북중간의 갈등은 중국의 소련대사관에 잠입한 중국비밀정보원이 작성한 <재중화인민공화국 소련대사관보고 1956>에 일부 정리되어 있다. 중국인민지원군이 북한에서 점령군처럼 무례하고 북한정치에 내정간섭을 한 사례가 있다는 것이다.

시모토마이 노부오의 책 <모스크바와 김일성, 논형, 2012, 247-248>에는 “현재 상황에서 다수의 조선인은 인민지원군부대를 마치 점령군처럼 보고 있다. 북한에서 향후 주둔은 바람직하지 않고, 조선 민주주의 인민공화국의 주권을 위협하고 있다”고 언급하고 있다.

1957년 7월말 박정애는 소련대사에게 “몇명의 주민이 중국인민지원군에 의해 사살된 사건”이 일어났다고 말했다.

박종철의 북중국경지역 인터뷰에 따르면, 중국 인민지원군이 북한에 주둔하면서 교통사고, 무기분실, 강간등의 사건이 증가하면서 북한주민들의 반감이 커졌다고 한다. 1954-56 중국인민지원군의 교통사고로 약 417명이 사망했고, 1954-55년 강간사건 68건, 1956년 상반기 강간, 강간미수, 통간사건이 208건이 있었다고 한다.(박종철, 중국인민지원군의 철군과 북중관계, 한국정치외교사학회 이재성 조성훈 편, 한반도 분쟁과 중국의 개입, 선인, 2012, 189쪽)

올린이:admin2019년 12월 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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