션즈화의 조선전쟁 11 한국전쟁의 기원에 관한 입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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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쟁을 어떤 관점에서 보는가에 따라 다양한 평가가 가능하다.

션즈화 처럼 소련이 중국에서 상실한 구러시아제국의 권리를 한반도에서 확보하고자 하는 의도에서 발생했다고 보는 관점이 있다.

두번째는 소련이 유럽의 사회주의세력을 결집시키고 보호하고 지키기 위해 미국을 한반도에 끌어들이려고 했다는 관점이 가능하다. 이것은 스탈린이 고트발트에게 보낸 전문에서 확인할 수 있는 내용이다.

두번째 관점에 추가적으로 고려할 수 있는 것은 소련이 미국을 한반도에 참전하게 하고 중공을 미국과 전쟁을 수행하게 함으로써 미국과 중국 모두가 서로 피해를 입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세기의 관점이다.

세번째는 미국이 한국전쟁을 일으키도록 유도했다는 관점이다. 웨드마이어 장군의 관점이다. 웨드마이어는 미국이 유럽에 집중하기위해 한국에 전쟁을 일으켰다는 식으로 한국전쟁의 성격을 규정했다.

어떻게 보든 한국전쟁은 미국과 소련이 전세를 놓고 서로 자웅을 겨누는 상황에서 발생한 전쟁으로 보아야 한다. 따라서 지금처럼 한국전쟁을 내전이니 국제전이니 하는 접근방식, 혹은 남침이니 북침이니 하는 방식으로 보는 관점으로는 한국전쟁의 성격을 제대로 설명하기 어렵다.

냉전의 기원에 대한 연구가 많지만 션즈화는 소련과 미국의 충돌이 유럽에서 발생했다고 보고 있다.
1948년 6월부터 1949년 5월 사이에 냉전이 형성되었다는 것이다. 션즈화는 베를린 봉쇄를 냉전의 기원으로 보고 있는 것 같다. 당연히 베를린 봉쇄로 미국과 소련이 충돌하는 상황이었다면 스탈린은 지구의 또다른 반대편에서 미국에 대응하기 위한 시도를 했을 것이다.

소련이 미국에 맞설 수 있는 지역이라고 한다면 이란과 한반도 정도가 될 수 있을 것이다. 당연히 베를린 봉쇄와 함께 소련은 미국이 다음 행동을 할 수도 있는 한반도에 대한 군사적 준비를 했을 것이다.

베를린 봉쇄는 결과적으로 소련의 굴복으로 막을 내렸다. 그렇다면 스탈린이 이런 굴복을 갚으려고 생각했던 것은 당연한 것 아닐까

만일 소련이 유럽에서의 굴복을 만회하여 한반도를 소련의 영향권하에 두고 만일 미국이 참전하면 그 기회에 중국 공군이 참전하도록 유도하여 미중간 적대관계를 만들면 소련으로서는 금상첨화일 수 있었던 것이다.

스탈린이 중공을 신뢰하지 못했다는 것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12월 2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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션즈화의 조선전쟁 10, 스탈린의 대한반도 정책 수정에 대한 정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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션즈화는 제3장 동북아 국제정세에 대한 스탈린의 사고 에서 스탈린이 대한반도정책을 수정했음을 밝히고 있다.

“1950년 초 스탈린이 마오쩌둥과 중소조약의 기간에 대해 토론하면서 소련의 대조선반도정책을 수정했음을 충분히 보여주고 있는 점에 주목하고 있다”(197)고 하면서 그 근거들로 러시아 문서를 들고 있다.

한편 1949년 내내 한반도는 전쟁이 발발할지도 모르는 상황에 처해 있었다. 문제는 1949년 당시의 상황이 북한만의 의도일 뿐인가 하는 것이다. 그점에서 션즈화는 1949년 당시의 상황이 북한 단독으로 행동한 결과라는 입장이다.

“1949년 내내 조선반도는 곧 전쟁이 발발할 것 같은 긴장상태에 처해 있었으나, 모스크바는 조선이 군사적인 수단을 이용해 조선을 통일시키려는 방안에 계속해서 반대했었는데, 1950년 스탈린은 무력을 사용해 조선반도를 통일시키겠다는 김일성의 제안에 갑자기 동의했다.”

션즈화의 논지는 1950년 이전까지 전쟁을 하겠다는 북한 김일성의 요구를 스탈린이 막아오다가 어쩔 수 없이 전쟁을 하게 되었다는 이야기다. 당시 소련과 북한의 관계에 비추어 그런 주장이 가능할까? 군사적으로 한반도 문제를 해결하겠다는 구상이 이미 굳어져 있는 상황에서 결정적인 시기를 언제 정하는가 하는 것이 문제되었을 뿐이다. 따라서 그 결정적인 시기가 1950년인지 아닌지는 부수적인 문제일 뿐이다.

션즈화는 소련의 대한반도 정책에 근본적인 변화를 보여주는 문헌자료로 1950년 5월 14일 스탈린이 마오쩌둥에게 보낸 <국제정세의 변화를 고려해>라는 부분이라고 한다.(문서번호는 쪽 197, АПРФ, Ф.45, оп 1, д,331, л.55)
국제정세의 변화를 고려해라는 말이 무슨 의미인지를 두고 전개된 논쟁을 소개하고 있다.

즉 국제정세의 변화가 전쟁을 결정하게된 가장 직접적인 원인이라는 것이다.
션즈화가 정리한 당시의 국제정세 변화의 내용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션즈화는 웨더스비 교수가 1995년 발표한 논문을 인용했다.
(Kathryn Weathersby, Conference Report: “The Korean War, An Assessment of the Historical Record, Korea-America Society”, Georgetown University, July 1955)

에프겐니 바자노프는 1950년대 냉전이 전면적으로 전개되었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스탈린은 한반도전체에 대한 통제로 미국의 일본통제가 주는 위협을 상쇄할 수 있을 것이라고 보았다고 한다.

발레리 데니소프는 중국에서 중공의 승리와 소련의 핵무기 개발이라고 주장했다.

이종식과 천지엔은 미국이 한반도에 간섭하지 않을 것이라는 평가라고 주장했다.
제임스 메트레이는 에치슨 연설이 스탈린의 결정을 재촉했다고 본다.

세르게이 곤차로프는 독일과 유럽의 상황 그리고 일본에 대한 우려를 <국제정세의 변화>라고 생각했다.

한편 션즈화는 Uncertain Partner(흔들리는 동맹 으로 번역됨) 를 인용해 ‘스탈린이 대조선정책의 목표를 바꾼 것은 소련의 안전보장을 위한 완충지대를 확대하기 위한 것이며. 장래에 세계적 대전이 발생했을 때 일본을 공격하기위한 발판을 확보하면서, 동시에 미국인들의 계획을 탐색하고 미국과 중국의 적대관계를 심화시켜, 최종적으로 그리고 가장 중요하게는 미국의 역량을 유럽으로부터 분산시키려고 했다’(199)는 것이다.

위에서 말한 어떤 내용이든 간에 만일 그렇다면 스탈린이 말한 <국제정세의 변화>라는 것이 1950년에 들어 형성된 것이라고 보기 어렵다. 오히려 그 전부터 오랫동안 형성되어 왔다고 보는 것이 더 타당한 접근이다.

토르쿠노프와 우핌체프는 중국혁명의 승리를 ‘국제정세의 변화’라고 보았다고 한다. 그러나 1949년 중반을 넘기면서 이미 중공은 내전에서 승리하고 있었다. 이렇게 볼 때, 한국전쟁의 출발점을 시간을 정해 결정하는 것은 타당하다고 보기 어렵다.

스탈린이 한반도 정책을 수정했다고 말할때의 수정이라는 뉘앙스는 적절하지 않다. 스탈린은 처음부터 한반도를 완전하게 장악하고자 했을 것이며, 그 방법을 남한내부에서의 내부봉기와 군사적인 방법을 동시에 고려하면서 처음에는 내부봉기와 같은 방법을 생각했으나 시간이 가면서 군사적인 방법을 적용하기로 했다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

즉 스탈린은 얄타회담에서 결정된 영향력을 그대로 확보하고자 했다는 것이다. 따라서 조선반도 정책의 수정이라고 하는 말은 전쟁의 책임을 결정하는 기원논쟁에서는 적절한 용어라고 하기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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션즈화의 조선전쟁 9, 중소동맹조약과 한국전쟁의 관계에 관해, 션즈화와 다른 입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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션즈화의 조선전쟁에는 북한이 국공내전에 도와준 부분들을 거의 다루지 않고 있다. 국공내전 당시 북한은 전폭적으로 중공을 지원했다. 해방직후 모든 물품이 부족한 가운데서도 적극적인 지원을 했다. 특히 북한이 보유하고 있던 일본 관동군의 무기는 중공군에게 결정적인 도움이되었다고 한다.

북한이 중공을 도와준것은 자발적인이라고 보기 어렵다. 소련의 직접적인 지시가 아니면 북한이 중공을 그렇게 전폭적으로 지원해주기 어렵다.

션즈화는 당시 중국과 소련의 관계를 지나치게 대립적으로 그려내고 있다. 그는 자신의 저서 조선전쟁에서 팔로군이 북한으로 부터 지원을 받은 내용은 거의 다루지 않고 있다. 션즈화의 조선전쟁에서 국공내전 당시 중국과 소련 그리고 북한의 관계가 제대로 그려지지 않는 것은 중공의 역할을 지나치게 부각하려다 보니 발생한 부조화의 결과가 아닌가 한다.

1949년 4월 1일 중공군이 장강을 넘느냐 마느냐가 중국과 소련간 중요한 안건이되었다. 만일 <괴뢰군 연혁>에서 언급한 1949년 3월 북한과 중공간의 방위협정이 사실이라면 이미 이 당시부터 한반도 문제에 대해 중국 소련 북한이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에 대한 원칙적 합의가 있었다는 말이 된다.

1949년 3월경 중공의 대표들이 소련을 방문한 적이 있는지에 대해서는 아직 확인을 하지 못했다.

또한 마오쩌둥은 북한에게 만일 일본이 한반도에 진출하면 중공도 전쟁을 지원하겠다는 언급을 했다.(박영실의 자료에서 다시 확인할 필요) 또한 <괴뢰군 연혁>에 따르면 1949년 1월 이미 소련과 북한의 대표단이 하얼빈을 방문해서 중공의 조선인 의용군들을 북한으로 복귀시키는 문제를 논의했다고 한다는 점은 매우 중요하다.

션즈화는 소련과 중공의 관계에서 복잡한 설명을 하고 있다. 그러나 션즈화가 복잡하게 제시하는 설명은 당시 소련의 태도를 이해하는데 설득력이 있지 않다. 소련의 당시 동북지역과 중공에 대한 입장이 구제국러시아의 권리유지가 중요했다면, 소련이 중공에 많은 군사적 지원을 하지 않았을 것이다. 특히 1949년 중반이 넘어가면 중공이 국공내전에서 확실한 우위를 점하게 된다. 그런 상황에서 소련이 중공에 지원을 할 필요가 있었을까?

당시 동북지역에서의 상황은 소련이 주도권을 잡고 그린 전략적 그림에 따라 전개되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할 것 같다. 즉 중공의 생각과 그림보다는 소련의 생각과 그림이 더 중요한 역할을 했다는 것이다.

대련과 여순을 중공에 돌려주는 문제도 만일 스탈린이 거부했으면 쉽지 않았다는 점을 생각할 필요가 있다. 스탈린은 중공의 성격에 대한 불확실성도 지니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모택동의 중공이 과연 진정한 공산당인가 아니면 민족주의 세력에 불과한가? 모택동의 중국이 권력을 장악한 이후 미국과 협조적 관계가 되지 않을까 하는 의심은 가능한 상황이 었을 것이다. \

션즈화는 중소동맹과정에서 대련과 여순을 잃어 버린 소련이 부동항을 찾기 위해 한반도에서 전쟁을 일으켰다는 입장이다. 그런 측면에서 중국과 소련이 동맹을 맺는 관계를 길게 설명을 했다.

그리고 중국은 국공내전 당시 붕괴한 경제를 재건하기 위해 소련의 지원을 받기 위해 한국전쟁에 참가했다는 주장을 한다. 전쟁으로 망한 경험이 있는 중공이 다시 경제적 지원을 얻기 위해 한반도에서의 전쟁을 지지한다는 것은 이해하기 어렵다.

특히 마오쩌둥이 김일성에게 일본군의 참전을 언급하면서 자신들도 한반도의 전쟁에 참가하겠다는 의사를 밝힌 것을 보면 한반도 전쟁에 참가한 것을 단순히 소련의 경제적 지원으로만 보는 것은 설득력이 부족하다.

오히려 소련은 중국을 한반도의 전쟁에 이용하기 위해 국공내전 당시 북한을 이용하여 중국을 적극적으로 지원하도록 했고 그 이후 얄타회담에서 인정을 받은 중국내 각종 기존의 권리를 포기하는 것도 중국이 미국과 대항하는 안보구도를 만들기 위한 것이라고 보는 것이 더 설득력 있다.

즉 스탈린은 중공의 성격이 자신들이 생각하는 공산당과 근본적인 차이가 있으므로 중국과 미국이 갈등을 초래하도록 만들어 왔다는 것이다. 스탈린은 극동지역에서 미국이나 영국과 군사적인 충돌을 극도로 경계했다. 결국 1950년 2월 14일 중소조약이 체결되었는데 여기서 구러시아 제국의 권리를 모두 포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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션즈화의 조선전쟁 8, 스핑전투와 마오쩌둥의 군사 전략변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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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련의 중국 동북지역 철수 이후 소련과 중국의 관계에 대한 정리는 104-121까지 수록되어 있다. 내용이 제대로 정리되지 않은 느낌이다. 소련이 중공을 일방적으로 도와주지 않았으며, 당시 국제정세가 소련에게 불리하게 돌아갔기 때문에 소련이 중공을 지원했을 뿐이라는 맥락이다. 그리고 중공은 스스로의 위치를 확보해가면서 소련에게 종속적으로 관계를 맺지 않으려고 했다는 것이다.

결국 121쪽까지는 소련과 중국이 서로의 중요성을 인정하는 관계로 나아갔다는 것으로 정리할 수 있을 것이다.

여기에서 군사적으로 재미있는 것들을 정리하고 갈필요가 있다.

이전의 내용에서 마오쩌둥은 제일 처음에는 대도시를 점령하려는 계획을 수립했으나 소련이 제대로 지원해주지 않아 농촌과 중소도시를 중시하는 전략을 채택했다고 했다. 그 이후 다시 마오쩌둥은 소련의 지원을 받고 다시 대도시 중심의 전략으로 선회를 했다. 그러나 1946년 중반 스핑 전투에서 국민당군에게 패배하면서 다시 중소소시와 농촌을 중시하는 전략으로 선회했다고 한다.

관련 내용은 다음과 같다

“마오쩌둥으로 하여금 중공의 군사력에 대해 과대평가하게 했으며, 이로 인해 전략적 지역에서 국민당군과 결전을 결심하는 부적절한 결정을 내리도록 만들었다. 1946년 중반, 쓰핑에서 국민당군과 벌인 주력부대 간의 전투에서 린뱌오 부대는 엄청난 손실을 입고 패퇴했으며(104 각주 125), 이는 중공의 지휘부로 하여금 “우리가 창춘과 하얼빈 두 대도시를 점령하기는 했지만, 우리가 주력해야 할 지역은 역시 농촌과 중소도시”이며 “가능한 한 전국적 내전이 시작되는 시점을 늦춰야 한다.” “우리 주력부대는 점령지역을 상실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고, 적들에게서 멀리 후퇴한 후 시간을 벌어 휴식을 취하면서, 기력을 회복해 장기적인 전투에 대비해야 한다”는 점을 깨닫게 했다(모택동 선집 하권 84-86)

결국 쓰핑 전투는 중공이 농촌과 중소도시중심 전략으로 선회하게된 결정적인 계기라는 점이다. 이제까지 마오쩌둥의 전략적 사고의 결과로 농촌 중소도시 중심전략을 이해했었다. 그러나 마오쩌둥이 농촌과 중소도시 중심전략을 채택하게 된 배경은 스핑 전투에서의 패배와 같은 상황에 직면했기 때문이다. 전략보다는 상황에 적응한 것이라는 점이다.

션즈화의 평가에 따르면 스핑전투를 중심으로 중공군의 전략변화를 살펴보는 것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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션즈화의 조선전쟁 7, 소련이 중국동북에서 철수한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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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6년 봄이 되자 동북지역의 정세가 급변해서 소련은 동북지역에서 철수해야 하는 상황에 직면했다. 션즈화는 그 이유를 다음 세가지 정도로 정리하고 있다.

첫째, 동북지역에서 중-소 경제협력에 관한 회담이 교착에 빠짐

소련과 국민당 정부가 체결한 중소동맹조약에 따르면 소련은 1945년 12월 3일까지 동북지역에서 철군하기로 했으나 협상을 통해 1946년 2월 1일로 철군시기를 미룸

(만일 소련이 국민당 정부와 중소동맹조약을 체결하지 않고 바로 동북지역으로 진출했으면 어떤 일이 발생했을까? 스탈린이 모택동의 중공을 무시하고 진출했다면 소련군의 동북지역 철수에 관한 시한 설정을 하기 어려웠을 지도 모른다.

즉 스탈린이 마오쩌둥의 공산당과 불편한 관계에 있었기 때문에 소련군이 동북지역에 지속적으로 주둔하기 어려웠는지도 모른다. 션즈화는 스탈린이 제국주의적 욕망으로 중공을 억압하고 국민당정부와 협상을 했다고 한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소련이 국민당 정부를 인정하지 않았다면 동북지역에서 지속적으로 주둔할 수 있는 여지를 확보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이러한 점에 대한 평가는 아직 별로 없었던 것 같다)

중국과 국민당 정부간 경제협력 회담이 교착상태에 빠지고, 소련의 동북지역 철군기한이 넘어가면서 소련은 수동적인 위치에 놓이게 되었다.

두번째, 미국이 동북지역의 상황에 개입하게 될 상황이 있었다. 소련군의 주둔이 길어지면 소련이 중소동맹조약의 파괴자로 비춰질 것이기 때문에 시간은 소련에게 불리했다.

(션즈화가 두번째 이유라고 제시한 것은 첫번째 이유의 연장선상에 있어서 별로의 이유라고 하기 어렵다)

세번째, 중국군내에 일고 있는 반소감정이 강화되면서 소련이 철군을 결정할 수 밖에 없게 되었다.

미국과 영국은 소련이 가능한 한 빨리 동북지역에서 철수하게 하기 위해 1946년 2월 11일, 극동문제에 관한 얄타협정의 비밀협정전문을 공개했다.

이후 소련의 동북지역에서의 경제적 요구와 철군중단상황이 보도되면서 중국의 여론을 극도로 자극했다. 총칭, 창춘, 난징 등 대도시에서는 매일 대규모 반소시위기 전개되면서 소련군의 즉각적인 동부지역 철군을 요구했다.

미군의 중국진출과 소련군 동북지역 철수의 상관관계

(션즈화의 설명중에서 이해하기 어려운 것은 소련군의 철수와 미군의 중국 진출에 관한 상관관계가 분명하게 정리되어 있지 않다는 것이다)

“미국군의 동베이지역 진입에 대한 소련의 우려는 점점 커져갔으며, 스탈린은 1945년 12월 30일, 쟝징궈를 접견한 자리에서 다음과 같이 확실하게 언급했다. “동베이 지역은 소련의 세력범위 안에 있기 때문에, 소련정부는 미국군대가 만조우에 진입하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 미국, 영국은 물론이고 다른 나라의 군대로 모두 만조우에 진입할 수 없다.(Ледовский Сталин и Чан Кай ши, c. 119)

한편 당시의 상황에 대해 션즈화는 소련이 중공세력을 통해 미국세력의 제어하는 방법밖에 없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당시 스탈린은 미국과 직접 충돌하는 것을 피하고자 한 것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소련도 미국의 경제적 지원을 받고 있는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소련의 미국의 경제적 지원에 관한 문제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lend lease)\

그러나 션즈화는 매우 단순하게 다음과 같이 정리하고 있다.

“소련은 군사적 점령을 통해서도 또한 국민당 정부와의 협력을 통해서도 미국세력이 동베이지 지역에 침투하는 것을 제어할 수 없으며, 따라서 오로지 다시 정책전환을 통해, 중공의 동베이지 지역에서의 발전을 지원하고 지지하는 방식으로 자신의 목적을 달성할 수 밖에 없었다”(100)

올린이:admin2019년 12월 2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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션즈화의 조선전쟁 6, 소련이 동북지역에서 중공을 지지하게된 이유, 미국의 동북지역 개입과 소련의 반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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런던에서 개최된 5개국 외무장관회의 실패이후 소련과 미국도 극동문제에 대한 합의에 실패하자, 소련은 극동자문회의의 참여를 거절했다

(극동지역에서의 소련과 미국의 협상에 대해서는 추가 확인이 필요함)

미국은 소련이 중소동맹조약을 이용해 동북지역을 완전히 장악하게 될 것을 우려하여 소련에게 문호개방원칙의 준수를 공개적으로 보장할 것을 요청

이와함께 미국 군대는 화베이지역에 상륙해 국민당 군대를 화북 및 동북지역으로 운송

1945년 10월 미국 군함한척이 대련함에 입항 했으며 이는 소련의 부정적 반응을 초래

소련은 국민당 부대가 동북지역에 상륙하는 것을 저지하고 중공이 동북지역을 탈취할 수 있도록 전력을 다해 지지한다는 입장을 표명

1945년 10월초 소련은 중공 동북국과 중공중앙에 20-30만의 군대를 동북지역으로 이동시켜 요충지를 장악하도록 요구하면서 대량의 군사장비 제공을 제안

중공군이 국민당 군대와 대결시 소련군에 협력할 수 있음을 표명

소련의 정책변화에 따라 중공은 동북지역을 탈취하고 화북지역과 화중지역을 지키기 위해 10월 16일과 19일 그리고 11월 1일 각부대의 과거의 분산적 방침을 수정하고 장개석 군대가 동북지역에 진입하면 단호하게 모두 소탕하고록 하고, 진조우, 잉코우, 션양지역에 주력부대를 집중배치해서 우선적으로 랴오닝과 안동을 사수한 후 동북전체를 장악할 것을 명령함

한편 국민당 정부는 동북지역으로 진군하던 국민당 군대를 샨하이관 서쪽으로 철수시키면서 소련에 대한 양보안을 제시, 이에 소련은 다시 중공의 행동 제제함

11월 20일 소련군 대표는 중공군에게 철도를 기점으로 50km 밖으로 철수하고 소련군 주둔지역에 진입하지 말고, 소련군 철군전에 국민당과 전투를 할 수 없으며, 중공군이 장악하고 있던 지역의 정권도 이양할 것을 요구

소련의 정책변화로 중공은 동북지역을 독점하는 것이 사실상 불가능하므로 주력부대를 다시 분산시켜 중 소도시들과 부차적인 철로와 광범위한 농촌을 점령해서 장기전에 대비하는 방향으로 전환하게 된다.

올린이:admin2019년 12월 1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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