션즈화의 조선전쟁 23 인천상륙작전 이후 중국의 작전 제안, 인천-서울 방어작전의 작전적 의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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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저우언라이의 작전개념 제시

중국은 김일성에게 이후 작전의 방향으로 장기전을 제시했다. 9월 20일 저우언라이는 니에즈량을 통해 다음과 같은 내용의 전문을 김일성에게 전달하게 했다.

“1) 장기전을 해야한다는 당신의 생각은 정확한 것입니다 .

2) 현재 중요한 문제는 자력으로 장기전을 수행한다는 전체적인 방침아래, 어떻게 주력부대를 보호하여 적군을 각개격파할 것인가 하는 문제입니다. 만약 적군이 서울을 점령한다면 인민군의 후방이 끊길 위험이 있습니다.


5) … 기층에서 단번에 승부를 결정하고자 하는 분위기가 형성되는 것을 막아야 합니다. (259, 주34 주은래연보(1949-76) 상권, p.80

저우언라이는 10월 1일 추가적인 전문을 보냈다.

“인민구 제1방면 군 8개 사단이 이미 고립되었는데, 8개 사단을 둘로 나누어, 4개사단은 지나치게 무거운 무기들을 파괴한 후, 수많은 소규모 부대로 나누어 적군간의 간격을 이용해 38선 이북으로 철수하고, 다른 4개 사단은 남조선에서 수많은 소규모 부대로 나눈 후, 남조선인민들을 의지해 적의 후방에서 유격전을 전개해 적의 대규모 부대를 견제하여 북진을 못하게 할 수 있는지 고려”

“당신들의 군대는 반드시 빠른 속도로 북쪽으로 철수해야 하며, 이는 빠를 수록 좋다.”
(260, 주35 주은래연보(1949-76) 상권, p.83)

조어언라이의 전문은 패퇴하는 인민군을 위한 작전지침이었다. 김일성이 조우언라이의 제안을 어떻게 반영했는지 또는 당시 철수상황에서 소련의 고문관들은 어떤 역할을 했는지는 아직 알기 어렵다.

군사작전에서 가장 중요한 시점은 승리할 때보다 패배할 때이다. 패배할때 부대를 제대로 장악하지 못하고 운용하지 못하면 그 피해는 걷잡을 수 없게 된다.

그런점에서 저우언라이의 작전지침은 인민군에게 가장 시급하게 중요한 내용이라고 할 수 있다. 이후 북한은 대체로 저우언라이의 작전개념에 따라 작전을 수행한 것으로 보인다.

2 인민군의 인천-서울 방어작전의 의미

우리가 통상적으로 생각하고 있는 것과 달리 북한 인민군들을 인천상륙 작전이후 철수하는 과정에서 생각보다 많은 피해를 입지 않았다. 이미 살펴본 <인민군 연혁>에 따르면 인민군은 주로 한반도 중동부 지역으로 주력이 철수했다. 그리고 태백산과 강원도 지역에 제2군단이 유격작전을 수행했다.

9월 15일 인천상륙작전이후 국군과 유엔군이 9월 28일 서울로 진출하기 위해서는 약 13일 정도의 시간이 소요되었다. 인천에서 서울까지 약 13일간의 기간이 소요되었던 것이다. 이는 당시 후방에서 열세장비와 병력을 가진 인민군들의 저항이 매우 강력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북한의 입장에 보면 인천상륙작전이후 서울까지의 전투는 가장 성공한 지연전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한편 동해안에서 한국군 3사단이 9월 30일 양양에 도착했으며 10월 1일에 38선을 돌파했다. 이를 두고 볼때, 북한 인민군들의 인천-서울 방어작전은 중동부 지역의 인민군이 철수할 수 있는 충분한 시간을 벌어주었다고 할 것이다.

거꾸로 생각하면 인천상륙작전으로 전세를 전환시켰으나 이후 서울점령까지 시간이 너무 늦어서 인민군을 차단포위하는데는 실패했다. 처음부터 서울을 견제하고 곧바로 동해안쪽으로 진출했다면 인민군의 북상을 차단하고 전쟁을 조기 종결시킬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당시 한국군과 연합군은 작전의 중점을 서울확보로만 생각했다. 그러나 당시에는 북괴군의 주력을 격멸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인천상륙작전이후 상황에 대한 작전적 분석이 필요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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션즈화의 조선전쟁 22, 미국의 인천상륙작전이후 스탈린의 반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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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탈린의 지시

  1. 9월 18일 바실리예프와 스티코프에게 전보를 보내 김일성에게 낙동강 전선의 인민군 4개사단을 서울 교외지역으로 이동배치하라고 지시했다.

  2. 이와 함께 소련국방장관 비실렙스키 원수에게 소련 공군이 평양 상공을 방어할 수 있는 계획을 마련하라고 지시하면서 소련 극동 변경지역과 항구도시인 블라디보스토크에 있는 공군부대 중 전투기 중대 몇개와 레이다 및 방공부대를 평양주위의 비행장에 배치하하고 지시

3 소련 무장부대 부총참모장 자하로프를 대표로한 특별대표단을 조선에 파견하면서 다음과 같이 지시
“부산 방어권에 대한 진격을 중지하고, 낙동강 전선에서 모든 부대를 철수하여 동해안과 동북부 전선으로 이동배치하고 서울을 방어하라”
(255, 주 27 Alexandre Mansourov, Stalin, Mao, Kim and China’s Decision to Enter the Korean War, Sept. 16-Oct. 15 1950: New Evidence from the Russian Archives, CWIHP Bulletin, No. 6-7, 1995/1996, pp.95-96)

상기한 스탈린의 조치는 그동안 미국과 직접적인 군사적 충돌을 회피하려고 했던 이전의 행동과 어긋나는 것이었음. 얼마후 스탈린은 직접적인 소련 공군을 투입하는 방안을 포기

  1. 9월 27일 전문을 보내 조선군의 일선 사령부, 집단군 사령부와 각 부대의 군사지휘계통의 지도자들을 질책하면서 전술부분에서 심각한 실수를 저질렀다고 지적. 소련 군사고문들이 이런 실수에 대해 더 큰 책임이 있다고 질책하면서 탱크의 전술적 운용에서 멍청한 짓을 했으며, 정보업무에서도 무지했다고 지적

상황악화의 원인이 스티코프와 소련 군사고문단이 ‘적의 인천상륙작전의 전략적 의미를 무시하고 부정한데 있다’고 강조함.

상황에 대한 경시와 전략적 관점의 부족이 남부지방에서 서울로 부대를 이동시킬 필요에 대해 회의적으로 반응하게 했고 부대의 이동 자체도 상당히 지연시켰다. 스탈린은 소련 최고지휘부가 주요 전선에서 4개 사단을 서울지역으로 철수시키라는 명령이 제대로 전달되고 집행됐다면, 서울 인근의 전세를 근본적으로 바꿀수 있었다고 생각함(257 주 30, 스탈린이 마트베에프와 스티코프에게 보낸 지시, 1950년 9월 27일,
АПРФ, ф.3, оп.65, д.827, л. 90-93)

여기서 7월초 중국지도부가 인천상륙작전에 대한 경고를 소련이나 북한이 제대로 감안하지 못했다는 점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우선 김일성은 마오쩌둥의 경고를 완전하게 무시했다. 조선노동당 서기였던 임은과 정전회담의 조선측 대표였던 이상조의 기억에 의하면 마오쩌둥이 직접 김일성에게 인천상륙을 저지해야 한다고 환기시켰다. 그러나 임은은 “김일성이 마오쩌둥의 경고를 무시했으며, 고려할 가치가 없다고 판단하면서, 이사실을 비밀에 부치라고 명령했다”고 말했다.고 한다.
(Chen Jian, China’s road to the Korean War, p.273, 275)

한편 스탈린은 스티코프가 “적극적으로 조선의 지도자들에게 의견과 건의를 하지 않아 조선지도자들이 우왕좌왕 하도록 했다.”고 하면서 “조선의 전황에 대한 평가를 모스크바에 전혀 보고하지 않았고, 이런 상황에 필요한 어떤 방법이나 건의도 하지 않아 모스크바의 결정을 방해 했으며, 조선 지도자들이 여전히 38선과 그 북부지역의 공화국의 방어에 대한 어떤 계획도 세우지 않아서, 남조선에 있는 병력의 철수 계획도 세울수 없도록 만들었다”면서 마트베에프에 대해 불만을 토로했다.
(Petrov, “Soviet Role in the Korean War Confirmed”, pp.60-61)

이렇게 보면 스탈린은 9월 중순 미군의 인천상륙작전이후 작전상황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스탈린이 4개사단을 서울로 보내 방어하라고 한 지시가 제대로 이행되지 못한 이유는 알 수 없다. 아마도 당시의 통신상황이 좋지 않은 이유도 있었을 것이고, 북한군 전선사령부가 혼란한 상황을 수습하면서 4개사단을 차출하여 서울로 보낼 수 있을 정도의 능력을 발휘하지 못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을 것이다.

한편 북한군이 이런 작전적 운영을 제대로 하지 못한 것은 스탈린의 방침도 일정한 역할을 했다. 스탈린 자신이 조선에서 소련 군사고문단이 어던 상황에서도 38도선을 넘어가지 말라고 했기 때문이다. 당연히 군사고문단은 북한군의 전선상황을 제대로 파악하기 어려웠고 그래서 모스크바에 적시적절 정보롤 제공하지 못했을 가능성이 높다.

  1. 인천상륙작전직후 스탈린은 마오쩌뚱에게 전문을 보내 조선에 군대를 파병가능여부를 확인함(Chen Jian, China’s Road to the Korean War, p.1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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션즈화의 조선전쟁 21 중국의 한국전쟁 개입을 위한 준비(1950년 6월 말부터 8월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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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우언라이의 1950년 6월 30일 한국전의 장기화 예상

1950년 6월 조우언라이는 차이청원을 대사관 정치참사 명의로 조선에 파견하는 자리에서 다음과 같이 언급했다.

“현재 미국 육군이 이미 조선에 참전하고 있으며 미국은 더 많은 국가들을 규합해서 참전시키려 하고 있기 때문에 조선전쟁의 장기화는 불가피하며, 이는 전체 판국에 영향을 주는 복잡한 문제를 동반할 것이다.”(252, 주20, 주은래연보(1949-1976) 상권 p.51)

  1. 중국정부의 한국전 개입을 위한 사전 준비

“7월 초 중국정부는 동베이군구에 소속된 200명의 조선족 간부를 집결시킨 후, 조선으로 보내 이들이 인민군 간부의 전투능력을 향상시키도록 하는 방안에 동의했다. 동시에, 소련 정부가 요청한 장춘철로와 중국 영공을 통한 조선으로의 군용물자 수송 요청에 대해서도 동의했다. “(252)

미국이 개입한 후 ‘중국지도자들은 조선의 전투상황에 대해 더욱 중시하면서 상응하는 군사적 배치를 진행했다. 7월 7일과 10일 마오쩌뚱의 건의에 의해 중앙 군사위원회는 중난하이 쥐런탕에서 국가보위를 위한 1차 토론회를 개최해 ‘동베이변경을 보호하기 위한 결정’을 내려 4개군과 3개포병사단 그리고 3개 공군여단으로 구성된 총 25.5만명으로 구성된 동베이변방군을 구성하고, 8월 5일까지 동베이에 집결시킬 것을 결정했다’(253, 각주 20) 7월 중순 떵화 휘하의 13병단에 소속된 38, 39, 40, 42 군이 동베이지방에 집결했다.

션즈화는 당시까지 중국이 파병문제를 결정하지않았다는 입장이다. 그 이유는 “7월 초 조우언라이가 이미 로쉰에게 중국이 병력을 파견하여 조선을 도와주는 문제에 대해 건의했지만, 그것은 미국군대가 38선을 넘을 때라는 전제조건이 있었으며,”(253) 당시 북한군은 남쪽을 향해 신속하게 진군하고 있던 시기였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션즈화의 이런 해석은 논리적으로 옳지 않다. 이미 조우언라이는 6월말이 전쟁이 장기전이 될 것이라고 예측하고 있었고 그런 예측에 따라 동베이군을 강화했기 때문이다. 션즈화가 자신의 주장의 근거로 삼고 있는 미국군대가 38도선을 넘을 때라는 조우언라이의 생각은 전쟁이 장기전으로 가면 그렇게 될 것이라는 예측의 근거이지 군대 파병의 결정과 연관시키기는 어렵다.

전장상황의 변화와 함께 파병에 대한 의견이 제기되었다.

8월 4일 인민군의 공격이 저항에 부딪히고 있을 때, 중공중앙위원회는 정치국회의를 개최했다.

마오쩌뚱은 여기에서 “만약 미제국주의자가 승리하면, 의기양양해서 우리를 위협할 것이다. 조선을 돕지 않을 수 없지만 반드시 지원군 형식으로 도와야 한다. 시기는 당연히 상황에 따라 선택해야 하지만, 미리 준비해야 한다”고 말했다.

조우언라이도 “만약 미제국주의자들이 조선을 압박한다면, 이것은 평화적 분위기를 조성하는데 불리하며, 그들의 기세도 드세질 것이다. 전쟁에서 승리를 거두기 위해서는 반드시 중국의 역할을 강화해야 하며, 중국의 역할이 강화된 이후에는 국제적인 변화가 시작될 수 있을 것이다. 이 문제에 대해 우리는 원대한 사고를 해야 한다.”(253, 각주 24)

여기서 주언라이가 언급한 “중국의 역할이 강화된 이후에는 국제적인 변화가 시작될 수 있을 것이다”라는 말의 의미를 되새겨볼 필요가 있다. 국제적인 변화라는 것이 무엇을 의미할까? 국제적인 변화라는 것은 다양하게 해석될 수 있다. 동북아시아에서의 역학관계의 변화를 의미할 수 있다. 이는 결국 중국의 역할강화를 의미하는 것으로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전황이 점차 복잡해지자 중국은 ‘8월 말부터 9월 초 사이에 다시한번 대규모 병력을 전략적으로 배치했다. 그리고 마오쩌뚱은 4개군이 배치되어 있는 동베이지방에 추가적으로 다시 8개군을 추가로 배치하는 것을 고려했다.(254, 주 25, 건국이래모택동문고 제1책, p. 454, 469, 485)

8월 중순 이미 중국은 한국전쟁이 장기전으로 갈 것이라고 예측하고 이를 위해 3년간의 계획을 수립하기에 이른다. (254) 8월 27일 마오쩌뚱은 각 지역의 책임자들에게 현 시국과 앞으로의 3년계획과 관련된 문제에 대해 연구하여 11월 또는 12월에 개최될 당의 4중전회와 정치협상회의 전국위원회에서 토론할 수 있도록 준비하라고 지시했다.(255, 주 26)

상기 내용을 정리해 보면 중국은 6월 말에 이미 한국전쟁이 장기전으로 갈 것이라고 예측하고 이에 대비하기 위해 동베이지역에 12개 군 규모의 병력을 집결시켰으며, 3년간의 전쟁을 위한 계획을 수립하기로 했다는 것이다. 이는 중국이 매우 적극적으로 한국전쟁에 개입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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션즈화의 조선전쟁 20 한국전쟁 초기 마오쩌둥과 스탈린의 인천상륙작전에 대한 구상(장차계획의 입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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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인천상륙작전이후 중공군의 개입에 관한 소련, 중국, 북한 간의 서로 다른 입장을 지니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박영실의 책에서는 인천 상륙작전 이후 중국의 개입시도에 북한이 긍정적이지 않은 입장을 보였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것은 여러가지로 해석될 수 있지만 첫째는 소련의 입장이 어떤가하는 문제, 둘째는 김일성이 중공군의 개입시 조
선공산당내에서 연안파가 중국의 지지로 자신의 지위를 위협할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과 같은 이유를 들 수 있을 것이다.

여기서는 먼저 전쟁이 발발하기전에 이미 중국은 미국의 군사개입과 인천상륙작전 감행에 대한 우려를 표명했다는 것이다.

7월 2일 주중소련대사 로쉰은 전문에서 ‘조우언라이는 조선인들이 미국의 군사개입 가능성에 대한 고려가 부족했으며, 일찌기 1949년과 1950년 5월 마오쩌둥이 경고한 것을 경시했다고 불평했다. 동시에 저우언라이는 “미국군이 인천상륙작전을 감행할 것 가능성을 고려하여, 인천 후방에 강력한 방어선을 구축할 필요가 있다”고 마오쩌뚱이 조선인들에게 제안했던 사실도 전달했다. 조언라이는 중국의 3개군단, 총 12만명의 병력이 이미 션양에 집결해 있으며, 만약 미군이 38선을 넘어 진격한다면 지원군이 인민군으로 위장한 채 저항할 것이라고 확인해 주는 한편 소련 공군이 이들 부대를 위해 엄호해 줄 수 있을 것인지 문의했다.(248, Bajanov, “Assessing the politics of the Korean War”, pp. 88-89)

여기서 마우쩌둥이 인천상륙작전의 가능성을 사전에 언급했다는 대목이다. 여기서 우리가 예측할 수 있는 것은 만일 마오쩌뚱이 그렇게 경고했다면 그 경고는 소련도 알고 있었을 것이란 점이다. 북한은 당연히 그런 상황을 소련대표부에 통보를 했을 것이다. 또한 마오쩌뚱이 직접 스탈린에게 전문을 보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마오쩌뚱은 그런 문제에 대한 대비책을 세우고 싶어했을 것이다. 그리고 그런 점에서 스탈린도 마오쩌뚱과 입장이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로쉰의 전문에 대해 스탈린은 미군이 38선을 넘어 진격할때 중국군이 조선에 진입하여 전투를 수행하기로 한 것은 정확한 방침이라고 하면서 공중지원을 약속한다.(248, 스탈린이 로쉰에게 보낸 전문 1950년 7월 5일, АПРФ, ф.45, оп.1, д. 331, л. 79)

북한군이 승기를 잡고 있던 초기전투단계에서 마오쩌뚱과 스탈린이 이런 전문을 주고 받았다는 것은 매우 흥미로운 일이다. 이것은 요즘 말하는 ‘장차계획’의 영역이라고 할 수 있다. 마오쩌둥은 우발사태에 대한 대비가 필요하다고 본 것이었다.

이와함께 스탈린은 중국을 가급적 빨리 북한에 개입시키려고 했다. 7월 8일 로신에게 다음과 같이 지시했다.”중국의 대표가 조선에 없다는 사실에 대해 조선인들이 불만이 많다는 사실을 마오쩌뚱에게 전달하기 바란다. 당연히 가능한 빨리 대표를 파견해서 연락을 가능하게 하고, 또 신속하게 문제를 해결할 수 있도록 하라. 물론 이런 조치들은 마오쩌뚱이 조선과 연락관계를 수립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할 때를 전제로 한것이다.”(249, 주 АПРФ, ф.45, оп.1, д. 331, л. 82)

스탈린은 중국을 가급적 빨리 개입시키고자 했지만 그것이 중국의 자의적 선택이라는 형식을 빌리고자 했다. 전쟁이후 소련의 책임문제도 고려했을 것이다. 중국군이 스스로의 선택으로 참전했으므로 중국으로부터 반대급부를 요구받지 않으려는 의도가 작용했다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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션즈화의 조선전쟁 19, 소련의 군사고문단 운용과 전략적 실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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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련 군사고문단의 운용은 한국전쟁의 전사부분을 이해하는데 매우 중요하다. 당시 북한군은 사단 이상의 작전을이끌어갈 군사적 능력을 보유하지 못하고 있었다. 작전계획도 소련군사고문단이 다 작성했고 북한군은 이를 번역해서 사용했을 뿐이다.

션즈화의 책 내용중에 소련의 군사고문단 운용에 관한 내용을 정리해 보았다.

7월 1일과 4일 스티코프는 스탈린에게 보낸 전문에서 군사원조의 대폭 증가를 요청한 것 이외에도, ‘인민군의 각 방면군에 소련 군사고문 2명씩을 파견하는 문제와 총 군사고문 바실리예프가 군관조직을 대동하고 전방사령부와 함께 서울에 가서 사령부에서 상주하는 문제에 대해 스탈린이 비준해 줄 것을 요청했다’(245, АПРФ, ф.45, оп.1, д. 346, лл. 105-107, 136-139)

7월 6일 스탈린은 전문을 통해 ‘조선의 전방부대에 군사고문을 파견해 달라는 요청에 대답을 하지 않았으며, 바실리예프의 주둔지역에 대해 “우리는 그가 평양에 머무르는 것이 훨씬 적절하다고 생각한다”( АПРФ, ф.45, оп.1, д. 346, л. 140)

스탈린이 바실레예프가 전선으로 추진해서 북한군을 지원하지 못하도록 한 것은 한국전쟁에 소련이 개입하고 있다는 것을 알리고 싶어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한편, <소련이 본 6.25 전쟁>에서 소련군이 분석 평가한 한국전쟁의 전략적 작전적 실책은 결국 소련이 초기단계에 보다 확실한 전략 작전적 지시를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측 초기 며칠의 전술적 성공이후 작전적 성과로 확대하지 못한 것은 북한군이 작전적 수준에서의 부대운용에 거의 무지한 수준이었기 때문이라고 할 것이다.

‘조선전쟁이 시작될 때, 인민군에는 3,000여명의 소련 군사고문이 있었는데, 이는 인민군 45명당 1명 비율이었다. 이 군사고문들은 군대의 훈련과 작전지휘를 보좌하는 책임을 맡고 있었으며, 인민군의 작전계획 역시 소련고문의 참여와 결정 아래서 수립되었다(246, 각주 9 확인 필요 심지화의 책 <조선전쟁게비> 제3장)

‘인민군이 38선을 넘어 남한으로 진공을 개시했을 때, 스탈린은 명령을 내려 인민군 전방부대에 있던 모든 소련군사고문들을 소환했다. 당시 후르시쵸프는 사건의 경과에 대해 질문했으며, 스탈린은 “우리는 다른 사람들이 우리가 이 사건에 참여하고 있다고 지적할 만한 증거를 남기고 싶지 않네. 이 사건은 김일성의 일이야”라고 대답했다.(247, Kim Chullbaum ed, The truth about the Korean War, pp. 25-26)

김일성은 소련군사고문의 지원이 절실하게 필요했다. 김일성은 스티코프를 통해 스탈린에게 친필서신을 보낸다. “나는 조선인민의 미제국주의에 반대하는 염원에 대해 당신이 도와줄 것을 믿어 의심하지 않으며, 인민군 간부들이 현대식 군대를 지휘하는데 충분한 지식을 갖추고 있지 않기 때문에, 인민군 전방사령부와 2개방면 사령부에 25-33명 정도의 소련 군사고문을 배치하는 것을 당연히 허락해주시기를 간절히 요청합니다.”(247. 주 11. АПРФ, ф.45, оп.1, д. 346, л. 143-144)

한편, 스탈린은 스티코프가 김일성의 친서를 보낸 것에 대해 질책했다. 스티코프에 보내는 전문에서 ‘상부의 비준도 없이 “인민군에 고문을 파견하는 것을 허락대 달라”는 방법은 정확한 방법이 아니라고 하면서 스티코프가 소련의 대표이지 조선의 대표가 아니라고 질책한다.

스탈린은 김일성이 이렇게 친필 서한을 보내오면 그냥 무시할 수 없었다는 것이다. 스탈린은 어쩔 수 없이 김일성의 요구를 들어주면서도 매우 조심스러운 방법을 이용했다. 소련의 군사고문을 군인신분이 아니라 타스지의 기자신문으로 파견하되, 전방사령부에만 배치하고 일선부대에는 배치하지 않도록 한 것이다. 스탈린은 스티코프에게 “당신은 개인적으로 소련정부에 책임을 져야하며, 그들(군사고문)이 포로가 되지 않도록 해야 한다”(247, Волкогонов Следует ли этого бояться, с. 29)

그런데 스탈린이 김일성의 편지를 무시할 수 없었던 것은 무슨 이유일까? 김일성이 한국전쟁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소련이 지원해 줄 것이라는 확실한 믿음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것은 스탈린이 김일성에게 그런 확신을 주었기 때문일 것이다. 단순하게 사회주의 국가지도자의 요청이기 때문에 그런 지원을 해준 것은 아니다. 스탈린은 소련이 개입한 다는 것을 극도로 감추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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션즈화의 조선전쟁 18. 스탈린과 마오쩌둥의 한국전쟁에 대한 논의경과와 그 의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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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오쩌둥이 스탈린의 생일을 기념한 초청으로 모스크바를 방문하여 회담을 실시했다. 여기에서 마오쩌둥과 스탈린이 한국전쟁에 대한 논의가 있었는가 없었는가에 대한 논쟁이 있었다.

션즈화는 모스크바 회담기관에 연회참가와 경축활동을 제외하고도 스탈린과 마오쩌둥은 세차례에 걸친 정상회담을 실시(1949년 12월 6일, 24일, 1950년 1월 22일)했고, 에치슨의 연설에 대한 작은 범위의 담화(1950년 1월 하순)도 진행했으나 ‘조선에서의 군사행동 개시’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하지는 않았다고 한다.

“12월 24일 회담에서 마오쩌뚱과 스탈린이 조선의 상황에 대해 토론하기는 했지만 조선에서의 군사행동을 취하는 문제에 대해서는 결코 언급한 적이 없었다”(233)는 것이다.

한편 상기한 세차례의 정상회담 이외에도 스탈린은 두차례에 걸쳐 마오쩌둥을 자신의 개인 별장으로 초청해 밀담을 나누었다. 당시 모두 다른 배석자가 없었고 스탈린이 군사정보분야에 종사하던 자신의 친구를 통역으로 배석시켰다고 한다. 2월 154일 두번째 밀담에서 스탈린과 마오쩌둥은 조선 문제에 대해 토론했는데 구체적인 내용은 알려지지 않았다고 한다.

션즈화는 두번의 밀담에도 불구하고 스탈린과 마오쩌둥간 한반도에서의 군사적 충돌에 관한 논의가 없었다고 추론하고 있다. 그러나 그런 추론의 근거는 분명하지 않다. 당시 스탈린은 중요한 회담에 대한 자료는 남기지 못하도록 했다는 점을 생각해 볼 때, 당시 스탈린과 마오쩌둥간 세계 공산주의 운동에 대한 논의가 이루어지지 않았을리가 없었을 것이다. 당시 유럽에서는 독일문제가 아시아에서는 한반도가 가장 핵심적인 문제였다.

스탈린은 한국전쟁에 소련의 개입이 드러나는 것을 극도로 꺼리고 있었기 때문에 당연히 문서도 남기지 않았을 것이다. 문서가 없다고 해서 스탈린과 마오쩌둥간에 한반도에서의 군사적인 논의가 이루어지지 않았다고 하기는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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