션즈화 조선전쟁 29. 소련의 중국에 대한 군사지원의 성격, 한국전쟁 후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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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련은 중국이 참전한 초기에는 매우 적극적으로 지원을 했다. 휴전협상이 진행되면서 스탈린은 중국에 대한 원조를 줄인다. 마오쩌뚱이 계속해서 대규모 원조를 요청했지만 스탈린은 마오쩌뚱의 요구를 수용하지 않았다.

1 대규모 지상전력의 무장 요구에 대한 입장

1951년 5월 25일 제5차 전역이 끝날무렵 마오쩌뚱은 까우강과 총참모장 쉬샹치엔을 모스크바에 보내 60개 사단을 무장할 수 있는 소련제 무기구매협상을 시도했다.

그러나 소련은 60개 사단 장비가운데 1951년에는 16개 사단의 장비(북한군 3개 사단의 장비포함)만 제공가능하고 나머지 44개 사단의 장비는 1952-1953년에 제공가능하다는 입장(325)

마오쩌뚱이 직접 스탈린에게 전보를 보내 강력하게 요청했다(325, 마오쩌뚱이 스탈린에게 보낸 전보, 1951년 6월 21일, АПРФ, ф.45, оп.1, д.339, л.64-65.) 그러나 스탈린은 물리적으로 중국의 요구가 곤란하다는 답을 보내면서 거절한다.(스탈린이 마오쩌뚱에 보낸 전보, 1951년 6월 24일, АПРФ, ф.45, оп.1, д.339, л.78.)

중국과 소련의 합의결과 1951년까지 16개 사단의 장비를 제공하고 나머지 44개 사단은 매년 1/3씩 해결해서 54년까지 완료하기로 했다. 그러나 실제로는 1952년까지 4개 사단의 장비가 제공되었고 그마저도 3개사단은 인민군을 위한 것이 었다 (326, 마오쩌뚱이 스탈린에게 보낸 전보, 1952년 3월 28일, АПРФ, ф.45, оп.1, д.342, л.126-130)
한국전쟁기간 중에 중국은 군대를 교대로 한국전쟁에 참가시켜 소련의 장비로 무장하면서 현대화를 했다. 당시 중공군의 상황에 대해서는 326-328) 참조

“마오쩌뚱이 이들 장비에 대해 절박하게 요청했던 진짜 목적은 오히려 중국군의 현대화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하기 위해서였다.”(326)

션즈화는 “객관적으로 말하자면 스탈린이 소련의 군사장비 생산능력에 어려움이 있다고 말한 것은 사실”(326)이라고 하지만 소련의 군사장비 생산 능력을 고려해 볼 때, 이를 그대로 수용하기 어렵다. 소련은 당시에 동유럽의 군대를 위한 장비를 생산했을 것이고 장비보충의 우선순서를 중국이 아닌 동유럽으로 지향했을 가능성이 높다.
(당시 소련의 군사장비 생산능력과 보충 우선순서에 대해서는 사실확인이 필요)

스탈린의 소극적인 태도에서 우리가 유추할 수 있는 것은 중국이 한국전쟁을 이용해 중국군을 현대화하려는 의도를 간파했을 가능성이 높다.

2 신형 전투기 대량 제공

한편 지상군의 장비 제공에 대해서는 소극적이었던 스탈린은 전투기에 대해서는 태도가 달랐다. 오히려 매우 적극적으로 중국에 장비를 제공하겠다고 제안했다.

스탈린은 신형 전투기를 대량으로 중국에 제공하겠다고 언급

(323, 스탈린이 마오쩌뚱에게 보낸 전보, 1951년 5월 22일, АПРФ, ф.45, оп.1, д.338, л.87.)
(324, 스탈린이 마오쩌뚱에 보낸 전보, 1951년 5월 26일, АПРФ, ф.45, оп.1, д.338, л.91.)

스탈린이 신형 전투기를 제공하겠다고 한 것은 당시 미국의 제공권에 대응하기 위해 중국의 공군 능력을 제고하기 위한 의도가 있었을 것이다. 스탈린이 5차 전역이후에 전투기를 제공하겠다고 한 것은 소련이 손을 빼기 위한 것으로 보다.

  1. 구형장비의 제공

소련은 중국에 구형장비를 제공했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미국이 소련에 대여한 물자중 사용하고 남은 것, 즉 탄약 공급이 어려운 76.2미리 해안포도 있었다.

1952년 중국의 병기공업 위원회는 18종 방식의 표준무기를 생산하기로 했으며, 그중 3종이 미국무기를 모방한 것이었고 나머지 15종은 소련의 설계를 그대로 모방한 것이었다.

그 해 후반기에 소련은 중국에 전문가와 설계도면을 제공했다. 나중에 알게 되었지만 그때 제공한 설계도면은 모두 본국에서 생산이 중단된 무기 도면이었다.

  1. 구형 폭격기 제공

1952년 8월 펑더화이는 소련에 IL-28 신형 폭격기 제공을 요청했다. 스탈린은 승낙했지만 중국에게 T-4 폭격기 120대를 구입하라는 조건을 내세웠다. 중국은 예산의 한계로 10대만 구입했다. 나중에 알게 되었지만 소련은 당시 최신형 폭격기 T-16를 개발했고, T-4는 퇴출될 상황이었다. (328)

5 구형 어뢰정 제공

소련이 제공한 3억달러의 차관중 2000만 달러를 사용해 쾌속 어뢰정을 구입했다. 그러나 주요부품은 모두 낡고 재사용한 것이었고 수명이 새부품의 절반도 되지 않았다. 이후 중국 해군이 구입한 잠수함 2척과 구축함 4척 역시 중고품이었다. (3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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션즈화의 조선전쟁 28 한국전쟁시 소련중국관계 성격 및 중국군 개입 초기 소련의 지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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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쟁 당시 소련과 중국의 관계는 크게 두가지 정도의 유형으로 구분할 수 있다.

첫째는 전쟁수행과정에 대한 조언이다. 중국이 개입한이후 중요한 결정적인 국면에 모택동은 스탈린으로 부터 조언을 구했다.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51년 중반이후의 상황에서도 모택동은 기동전을 계속하려 했다. 그러나 스탈린은 진지전을 제시했고 모택동은 스탈린의 조언을 수용했다. 이와 함께 직접적인 군사작전 이외의 군사활동에 대해서도 소련은 중국에 조언을 계속했다.

둘째는 중국에 대한 후방지원이다. 소련은 중국이 참전한 다음 각종 병기와 장비에 대한 후방지원을 적극적으로 계속했다. 후방지역에 국한되지만 소련의 공군지원도 적극적으로 이루어졌다. 소련의 중국에 대한 각종 후방 군수지원은 특징이 있었는데 전쟁수행에 대해서는 적극적으로 지원했지만, 중국군의 전력이 일정수준 이상으로 강화되지 않도록 그 지원의 수준을 조정하는 것 같은 경향을 띠고 있었다.

결국 모택동은 전쟁을 통해 중국군을 현대화시키려고 했으나, 스탈린은 중공군이 일정한 수준 이상으로 현대화되지 못하도록 하는데 주안을 두었던 것이다.

그러고 보면 모택동이 그 이전과 달리 스탈린의 조언을 충실하게 수용하고 소련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려고 하는 것은 소련의 지원을 위한 목적이라고 볼 수 있다. 물론 스탈린은 모택동의 그런 의도를 충분하게 파악하고 있었다. 션즈화는 한국전쟁이후 중국이 소련의 신뢰를 회복했다고 평가했지만 그것은 중국이 소련의 심지를 건드리지 않으려고 하는 중국의 입장에 관한 것이지 소련이 전적으로 중국을 다시 신뢰하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고 볼 것이다.

(한국전쟁기간중 소련의 중국에 대한 통제와 관리의 양상에 대한 연구)

이책에서 언급하고 있는 내용에 대해서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1 탄약공급

중국은 탄약이 부족했다. “1951년 1/4분기에 필요한 탄약은 14,100여 톤이었는데, 중국 국내 군수공업에서 생산할 수 있는 양은 겨우 1,500 여 톤에 불과했으며, 당시 중국에 탄약을 제공할 수 있는 국가는 소련이 유일했다.(322, 주 24) 스탈린은 전쟁에 필요한 중국군의 요구를 기본적으로 만족시켰는데 특히 휴전회담이 시작되기 전에는 거의 요청하는 수량대로 공급되었다.

  1. 무기에 대한 지원

전쟁시작 후 마오쩌뚱은 각종 해군무기(어뢰정, 장갑함, 잠수함 격추정, 해안포 등)를 요청하면서 해군사령관 샤오징관을 모스크바에 보내 협상하려고 했다. 스탈린은 마오쩌둥의 전보를 받고 바로 요구를 수용했다.
(로쉰이 스탈린에게 보낸 전보, 1950년 10월 28일; 스탈린이 마오쩌뚱에게 보낸 전보, 1950년 10월 29일, АПРФ, ф.45, оп.1, д.334, лл.62-63)

3 차량지원

저우언라이가 11월 17일 스탈린에게 압록강 철교의 폭격으로 수송이 곤란하다고 하자 중고차량이 아니라 소련군이 보유하고 있는 새챠량을 제공하라고 지시하기에 이른다.
(조우언라이가 스탈린에게, 스탈린이 조우언라이에게 보낸 전보, 1950년 11월 17일, АПРФ, ф.45, оп.1, д.335, лл.122-124)(322)

  1. 공군집단군 건설을 위한 15명의 소련 군사고문관 파견
    조우언라이의 요청에 대해 스탈린은 즉각 수용

(조우언라이가 스탈린에게 보낸 전보 1951년 2월 12일, 스탈린이 조우언라이에게 보낸 전보 1951년 2월 16일,
АПРФ, ф.45, оп.1, д.337, лл.58-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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션즈화의 조선전쟁 27 한국전쟁 당시 중국의 소련에 대한 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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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중국의 소련에 대한 입장을 보여주는 예는 예이엔잉이 광조우 주재 소련 영사에게 한 말을 보면 잘 알 수 있다. “중공중앙은 소공중앙에 대해 항상 비밀을 갖고 있지 않았다. 나는 샹하이, 옌안, 화베이 등 각지에서 일했는데, 중공중앙의 이런 관점을 계속해서 알고 있었다. 나는 중공중앙정치국회의에 자주 참석했는데, 정치국이 소공중앙이 결정한 어떠한 결의도 배반한 적이 없음을 잘 알고 있다. 오직 소공과 소련만이 중국에 우호적인 원조를 줄 수 있고, 현재도 주고 있다. 따라서 중공과 중국지도자들이 중국의 진실된 상황을 소련의 당과 정부에 통보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것이다. 소련과의 우호적인 관계를 위해, 중국인민에게 가장 중요한 사업은 우선 정확한 정책을 택하는 것과 중국인들의 우호적인 행위이다. 이것이 마오쩌둥의 관점이다. …1950년 중국의 고위지도자 한 사람이 마오쩌뚱에게 베이징에 머무르고 있는 소련 동지와의 마찰을 호소하자, 마오쩌둥은 그 중국 지도자에게 다음과 같이 주의를 주었다. 만약 소련과의 관계가 악화되면, 어떤 상황에서든지 중공중앙은 먼저 중국동지가 잘못되었다고 판단할 것이다.”(320, 주21, Кулик, Китайская Народная Республика, Проблемы Дальнего Востока, No. 6, 1994, с. 81)

소련에 대한 조심스런 태도는 어디서 연유할까? 소련군이 만주에 진출했을때 중공은 소련의 주둔에 강력하게 반발했다. 결국 소련은 국민당과 맺은 조약에 따른 기득권도 확보하지 못하고 그냥 물러나야 했다. 당시에 스탈린과 소련은 마오쩌둥과 중국에 대해 매우 부정적인 평가를 했을 것이다. 세계공산주의 운동을 위해 중국은 소련의 지도에 따르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을 했음에 틀림이 없다.

그 이후 중국과 소련의 관계는 많은 변화를 보인다. 국공내전당시까지도 소련은 국민당 정부를 공식적으로 인정하고 있었다. 중공이 동북지역으로 물러나는 상황이되고 미국 해병대가 중국에 상륙하는 상황이 되면서 소련은 중공을 지원하기 시작했고 그 지원을 직접 실행한 것은 북한이었다.

무슨 이유로 중국이 소련에 대해 복종하는 태도를 보였는지는 분명하지 않으나 스탈린과 마오쩌뚱간에 무슨 합의가 있었을 가능성도 있다. 즉 세계혁명에 있어서 소련과 중국의 역할을 분담하는 것과 같은 논의가 있었을 가능성과 같은 것이다.

이점에 대해서 션즈화도 마오쩌둥이 한국전쟁에 참가한 이유를 정리한 가운데에서 파악할 수 있다.

“이문제에 대해, 역사학자들은 수많은 추측과 주장을 제기했는데, 그중 두가지 관점이 비교적 설득력이 있다. 하나는 마오쩌둥이 주요하게 국가안전의 고려(주109, Whiting, China Cross the Yalu), 즉 동베이의 공업지역 보호 및 중국의 안전에 대한 반동세력의 위협을 제거하기 위해, 중국밖에서 적과 한바탕 전쟁을 치르기로 결정했다는 것이다. 현재 발표된 마오쩌뚱과 중국 지도자들의 수많은 발언이 모두 이런 관점의 증거가 될 수 있다. 다른 관점은 마오쩌뚱이 혁명에 대한 신념과 의지 및 미제국주의를 격파하려는 열정과 책임감 그리고 이것을 일종의 혁명을 위한 동력과 중국의 국제적 지위를 제고하기 위한 수단으로 삼으려 했다는 관점이다.(주 110) 그러나 필자가 보기에 마오쩌뚱이 조선파병을 결정하게 된 동기를 분석하기 위해서는 동시에 세부분에 대한 고려를 해야 한다. 즉 대만문제로 인해 조성된 미국에 대항하자는 혁명적 정서, 사회주의 진영을 위한 국제적 분업에 근거해 중국이 떠맡아야 할 책임과 의무, 국가의 안전 및 주권이 위협을 받을 수 있다는 근심등이 바로 그것이다.(주111)”(305)
위에서 말한 “중국의 국제적 지위를 제고하기 위한 수단”이라는 점과 “사회주의 진영을 위한 국제적 분업에 근거해 중국이 떠맡아야 할 책임과 의무”라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특히 사회주의 진영을 위한 국제적 분업이란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따져볼 필요가 있는 것이다. 특히 소련은 유럽을 책임지고 중국은 아시아를 책임진다는 것이 가장 이해하기 쉬운 사회주의 진영을 위한 국제적 분업일 것이다.

중국은 소련으로 부터 아시아 혁명을 책임지라는 권유를 받았고 중국은 이를 수용했을 것이다. 그래서 스탈린이 한국전쟁 발발직전에 김일성에게 마오쩌뚱을 만나서 허락을 득하라고 한 것이다. 물론 스탈린의 입장에서는 중국과 미국이 일전을 벌이도록 만들기 위해 소련이 한발자욱 물러난다는 의미도 있었을 것이다. 그렇지 않고는 당시의 중국과 북한 소련간의 관계를 설명하기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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션즈화의 조선전쟁 26 스탈린의 작전지도 기동전에서 진지전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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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쟁중에 구체적으로 스탈린이 어떻게 개입했는가에 대한 기록은 매우 산만하게 정리되어 있다.
1951년 5월 26일경 모택동은 스탈린에 대해 향후 작전방향에 대한 조언을 구한다. 모택동은 한국전쟁 초기의 기동전에서 성과를 거두었다는 점에 고무되어 이후에도 기동전을 수행하고자 했다. 다만 포위의 섬멸의 규모를 사단급이 아닌 대대급 정도로 줄여나가고자 했다.(318)

그러나 스탈린은 이에 대해 기동전보다는 진지전을 수행할 것을 요구했다. 이에 관한 스탈린의 전보는 다음과 같다.
“내가 보기에 전보에서 언급한 계획은 매우 위험합니다. 이런 계획은 잘해야 한두차례 성공할 수 있을 뿐입니다. 영국군과 미국군은 이런 계획을 매우 쉽게 간파할 것이며, 그들은 전술을 변경해서 주력부대가 큰 손실을 입지않고 북지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외에도 영국군과 미국군이 북진할 때, 길목마다 새로운 방어선을 구축하여, 당신들이 진격할 때 커다란 손실없이 영국군과 미국군의 방어선을 돌파할 수 있도록 준비하는 것도 고려해야 할 것입니다. 물론 우리는 이런 사태가 발생하기를 원하지 않지만, 쟝지에스의 군대와 비교해 볼 때, 이것 역시 사람들에게 신뢰감을 주지 못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당신들이 상대하고 있는 군대는 쟝지에스의 군대와 다르고, 영국군과 미국군이 쟝지에스의 군대처럼 그렇게 어리석어서, 당신들 생각처럼 적의 진지와 군대를 섬멸할 수 있을 것이라는 어떤 근거도 없습니다. … 만일 평양이 다시 적들의 손에 함락되면, 한편으로는 조선인민과 조선군대의 사기를 떨어 뜨릴 것이고, 다른 한편으로는 영국군과 미국군의 사기를 드높일것입니다.” (마오쩌뚱이 스탈린에게 보낸 전보, 1951년 5월 27일 ; 스탈린이 마오쩌둥에 보낸 전보 1951년 5월 29일 АПРФ, ф.45, оп.1, д.338, л. 95-97)

스탈린의 이 의견은 이후 마오쩌둥이 이후의 전쟁을 진지전으로 전환하게 하는데 직접적인 영향을 미친다. 그런 의미에서 전쟁의 양상을 변화시킨 중요한 계기라고 하겠다. 션즈화는 이를 스탈린과 마오쩌둥의 신뢰를 보여주는 것으로 해석하고 있으나 그것은 지나치게 자의적이다. 오히려 스탈린이 한국전쟁에 대한 중국군의 작전을 지도하는 우월적 위치에 있었다고 하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스탈린이 마오쩌둥에 대해 우월적 위치를 가지는 것은 당연하다. 마오쩌둥은 전체 한국전쟁과정, 전쟁의 시작과 휴전협정까지, 전략적 방침부터 전쟁의 지휘까지, 심지어 전술의 운용과 병참지원에 대한 구체적인 문제까지 스탈린에게 의견을 구했다.(319)

션즈화는 스탈린의 작전지도와 관련한 부분을 여기저기 흩어 놓았다. 스탈린의 작전지도가 가장 중요한 의미를 지니는 부분은 중공군의 제3차 공세와 관련한 부분이다. 그 부분은 추후 다시 정리해야 하도록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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션즈화의 조선전쟁 25 스탈린의 중국에 대한 신뢰 문제, 중국군에 대한 소련 공군 지원의 성격, 제한적 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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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탈린이 마오쩌둥과 중국군을 신뢰했다는 션즈화의 평가에 대해

기본적으로 “스탈린은 마오쩌뚱과 중국혁명에 대해 일관되게 의구심을 품고 있었다. 스탈린은 마오쩌둥이 진정한 마르크스주의자가 아니라고 판단하면서, 그가 중국의 ‘티토’가 될 것을 염려하였고, 소련과의 동맹체결도 다른 의도가 있는 것으로 의심했다”(311)는 것이다.

스탈린이 장개석의 국민당정부와 <중소동맹조약>을 체결한 것은 마오쩌둥에 대한 불신 때문인지도 모른다. 특히 중소동맹조약에서 장춘철도와 대련 그리고 여순항에 대한 권리를 주장한 것은 중국에서 국민당이 권력을 장악하든 아니면 마오쩌둥이 권력을 장악하든 기본적으로 큰 차이가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일 것이다. 즉 스탈린이 구러시아 제국의 권리를 요구한 것은 제국주의적 측면에서의 기득권 확보 그리고 중국의 정치적 상황에 대한 인식, 특히 마오쩌둥의 정치적 성격에 대한 평가 때문일 가능성이 높다.

이에 대해 션즈화는 한국전쟁에 중국이 참전하게 됨으로써 스탈린이 중국에 대한 평가가 바뀌었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션즈화가 스탈린의 중국에 대한 평가와 인식이 바뀌었다고 주장하는 근거로 제시하는 내용들은 반대로 스탈린이 여전히 마오쩌둥의 중국을 불신의 눈초리로 바라보고 있다는 증거로 해석될 수 있는 여지가 있다.

중국이 참전을 결정함에 앞서 소련에게 줄기차게 요구했던 공군의 지원은 스탈린이 하던 말보다 매우 빨랐다. 1950년 11월 초에 이미 소련 공군은 중-조 국경지역에 투입되어 전투에 참가했다. 비록 후방지역이었지만 소련의 공군지원은 중국을 지원하겠다는 스탈린의 결심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중국군은 후방보급망이 유엔군의 타격을 받아 피해를 입자, 1951년 2월 23일 조우언라이, 니에룽전 및 펑더화이가 자하로프 대장에게 소련 공군 2개 사단을 압록강 북측에 진주시켜 38선 이북의 병참선을 엄호해주도록 요청했다. 자하로프는 이런 요청을 거부했고 중국은 이를 스탈린에게 직접 다시 요청한다. 스탈린은 즉각 자하로프에게 지원할 것을 지시한다.(314-315)

션즈화는 스탈린의 이런 지시를 스탈린의 마오쩌둥과 중국군에 대한 신뢰라고 평가한다. 신뢰라기 보다는 중국군이 제대로 전투를 수행하여 미군에게 타격을 줄 수 있도록 하기 위한 것으로 파악하는 것이 훨씬 더 합리적인 설명일 것이다.

소련의 공군작전은 매우 제한된 범위안에서 이루어졌다.

스탈린은 미국과 직접적인 충돌이 예상되는 행동을 피하려고 했다. 이를 위해 먼저 중국군이나 북한인민군 지상부대와 어떤 협조도 없었다. 게다가 소련 공군은 폭격임무를 하지 않고 주로 요격임무만 실시했다. “우리는 폭격기가 없었다. 우리는 미국의 군함에 대한 폭격이 한차례도 없었다. 왜냐하면 그것은 우리의 임무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페펠야예프는 “러시아의 작전 중 폭격기가 출격한 적이 한번도 없었으며, 심지어 출격을 준비한 적도 없었다”(317. 주 16. Halliday, Air Operation in Korea”, pp.154, 161 ; Goncharov, Lewis and Xue, Uncertain Partner, pp. 199-200)
작전활동의 범위도 매우 제한적이었다 “공중전의 대부분이 압록강, 청천강, 대동강 사이의 지역이었다.”(317)

한편 흥미로운 것은 미국 또한 소련 공군의 참전에 대해 공개적으로 밝히지 않은 것이다. 한국전쟁에서 소련은 모두 1300여대의 적기를 격추시켰다고 한다. 그정도 항공기를 상실할 정도였다면 미국도 심각한 수준의 손실이었을 것이고 당연히 소련이 개입했다는 것을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미국은 이를 굳이 밝히지 않았던 것이다.(3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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션즈화의 조선전쟁 24, 중국군의 한반도 파병결정과 모택동-스탈린의 외교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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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상륙작전이후 중국군의 한반도 진출의 결정과정은 매우 복잡했다. 복잡하지만 간단하게 정리하자면 중국은 그 이전까지의 태도와 달리 중국군의 북한진입에 유보적인 입장을 나타냈고, 스탈린은 애매모호한 입장이었다. 즉 중국이 한국전쟁에 신속하게 개입해야 하지만 그것은 중국이 결정할 문제이고 소련은 중국에게 강권하지 않겠다는 것이다.

션즈화는 자신의 책에서 중국과 소련이 한국전쟁 개입과 관련하여 막전막후에서 치열한 외교전을 벌인 과정을 제시하고 있다.(261-310)

중국은 소련과의 협상에서 처음의 입장과 달리 군대를 보내지 않을 수 있다는 점을 스탈린에게 이야기 했다. 아마도 스탈린은 이를 일종의 협박과 비슷하게 받아 들였을지 모른다. 중국이 군대를 파병하는 조건으로 요구한 것은 소련의 지원이었다. 소련은 처음부터 분명한 선을 정해놓고 있었다. 그것은 소련이 직접 미국과 부딪칠 수 있는 상황은 절대로 만들지 않겠다는 것이다.

중국과 소련간 중국군의 파병과 관련하여 짧은 기간동안 치열한 외교전이 오갔다. 여기서 쟁점이 되었던 부분은 소련공군의 지원이었다. 중국은 중국군이 한국에서의 작전기간동안 소련 공군의 지원을 받고자 했으나 소련은 한반도에서 소련공군은 직접지원하지 않을 것이라는 입장을 분명하게 밝혔다.

중국과 소련간의 입장충돌을 유엔군이 38선을 돌파하는 순간까지도 계속되었다. 중국은 한편으로는 유엔군이 38선을 넘으면 개입할 것이라는 신호를 보내는 동시에, 소련에게는 파병하지 않을 수 있다고 이중 플레이를 했다.

중국과 소련이 중국군의 한반도 파병을 놓고 이렇게 짧은 기간 치열한 외교전을 벌인 것은 매우 이례적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국과 소련의 이런 외교전은 한국전쟁에 중국이 파병하기로 했다는 의사결정의 측면에서 다루어졌고, 중국과 소련간의 갈등과 외교전이라는 측면에서는 다루어지지 않았다.

결국 소련은 중국이 파병을 안할 것같은 태도를 보이자, 스탈린은 소련대표부의 완전한 철수와 북한지도부의 만주행을 지시하기에 이른다. 그런 상태가 되어서야 겨우 중국은 파병하기로 결정한다.
중국의 의사결정과정에서 당기구의 회의와 같은 것은 요식행위에 불과했다. 모든 결정은 모택동에 의해 내려졌을 뿐이다.
결국 그 과정은 스탈린과 모택동의 머리싸움이었다.

스탈린으로서는 직접 한국전쟁에 참가하게 될 경우 세계전략 차원에서 유럽에서의 공산주의 구축이란 과업에 지장을 받게 된다. 원래 한국전쟁을 시작한 이유도 고트발트 문서에 의하면 미국의 관심을 유럽에서 아시아로 돌리기 위한 것이다. 그런데 자신들이 오히려 아시아에 끌려 들게 되면 전략적 구상이 흐트러지게 된다.

게다가 스탈린과 모택동은 세계 공산주의 운동에 있어서 일정한 역할 분담을 약속한 것으로 보인다. 중국은 아시아 지역을 소련은 유럽지역에 중점을 둔다는 식의 역할 분담이 있었을 것이다.

소련이 마지막에 철수하는 방안까지 생각할 수 있었던 것은 당시 맥아더가 북진할 경우, 그것이 단순히 한국전쟁의 종결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중국대륙 진출까지도 생각하고 있다는 것을 염두에 두었기 때문일 것이다. 이미 맥아더의 그런 의도를 중국과 소련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스탈린은 결정적인 순간에 과감한 철수 결정을 내리게 된 것이다.

결국 최후의 순간에 중국이 파병을 결정했고 그것은 스탈린의 승리를 의미했다.

(다양한 평가가 가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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