션즈화의 조선전쟁 35, 중공군의 한국전 참전 목적(중공군의 정치와 군사작전의 상관관계)문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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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까지 중공군의 한국전 참전에 관한 연구는 주로 참전배경과 원인 그리고 과정을 밝히는데 집중되어 있었다. 그리고 휴전하게 되는 과정에 대한 연구도 일부 있었다. 그러나 중공군이 한국전쟁에 참전하면서 어떤 전략적 작전적 목표를 수립했는가에 대한 연구는 눈에 띄지 않는다.

어떤 전쟁이건 참전할 때 어떤 목적 어떤 최종상태를 달성할 것인가를 고민하는 것은 최고사령관의 기본적인 책무이다. 그러나 중공군의 한국전쟁 참가에 관한 연구에서 작전적 목표, 즉 그들이 구상했던 최종상태가 무엇인가에 대한 연구는 별로 눈에 띄지 않는다.

스탈린과 마오쩌뚱의 대화중에서는 한반도에서 미군을 몰아낸다는 이야기가 있지만 그것은 정치적 수사일 뿐이다. 군사적인 최종상태는 피아간의 힘의 상관관계에 대한 냉정한 평가를 통해서 정해질 수 있다.

펑더화이가 제2차 전역이후 부대의 정비와 재편성을 중요하게 생각한 것은 그가 생각한 전쟁의 최종상태가 어떤 상태였는지를 미루어 짐작하게 한다.

당시 생각할 수 있는 최종상태는 크게 두가지정도로 고려할 수 있다. 첫번째는 38선을 회복하는 것, 두번째는 한반도에 미군을 완전하게 몰아내는 것이다.

펑더화이는 처음부터 한반도에서 미군을 완전하게 몰아내는 것이 가능하다고 생각하지 않았던 것 같다. 펑더화이가 마오쩌뚱에게 지원군이 처한 어려움을 설명하면서 미군을 한반도에서 몰아내기 위해서는 장기전이 불가피하다고 주장하는 것은 당시 모택동과 펑더화이가 전쟁의 최종상태에 대한 생각이 달랐던 것을 시사하고 있다.

펑더화이는 마오쩌둥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적군의 대부분이 소멸되지 않으면, 그들은 조선에서 퇴각하지 않을 것이고, 적군의 대부분을 소멸하기 위해서는 많은 시간이 소요되기 때문에, 전쟁이 장기화될 가능성이 있다”고 주장하면서, 동시에 “이런 상황에서, 적들이 38선 부근에 진격하도록 허용하고, 아군의 제2차 지원 부대 9개 군단이 모두 집결한 후, 다시 강력하게 새로운 전투를 진행한다는 결정을 내리게 되면, 미군이 지속적으로 물자를 보급받으면서 아군과 장기전을 준비하고 있는 상황에서, 아군은 반드시 장기전을 준비해서 몇년에 걸쳐 미군 수십만 명을 소멸시켜 미군이 스스로 능력을 깨닫고 물러가게 해야만 조선 문제가 해결될 수 있다”(340)

펑더화이는 한반도에서 미군을 몰아내기 위해서는 세가지 정도의 조건을 제시한 것이다.

첫째, 현재 중공군의 병력이외에도 추가적으로 9개 군단이 필요하다.
둘째, 몇년에 걸쳐 미군 수십만명을 소멸시켜야 한다
셋째, 미국은 한계에 봉착해서 스스로 물러나가야 한다(군사적으로 몰아내기 어렵다)

평더화이는 사실상 군사작전으로 완전한 승리를 거두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을 마오쩌뚱에게 이야기 한 것이다. 마오쩌뚱은 펑더화이의 설명을 듣고 3월초에 스탈린과 이문제에 관한 의견을 교환 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341, 주 61, 건국이래모택동문고 제1책, pp.151-153, 마오쩌뚱이 스탈린에게 보낸 전보, 1951년 3월 1일; 스탈린이 마오쩌뚱에게 보낸 전보, 1951년 3월 3일, АПРФ, ф.45, оп.1, д.337, л.78-82,89)

션즈화는 마오쩌뚱과 스탈린이 전쟁의 종결문제에 대해 어떻게 의견을 조정했는지에 대해서는 설명을 하지 않고 있다. 모택동문고의 내용을 좀 더 확인해 보아야 할 것같다. 그 이후 지원군은 미군의 진공을 38선 부근에서 저지했지만 막대한 희생을 감수해야 했다. 즉 제4차 전역에서 미군의 반격을 받고 더 이상 군사작전을 계속하는 것이 어렵겠다는 것을 확인하고서야 전쟁의 최종상태에 대한 정리를 하게 된 것이다.

중공군이 전쟁을 어떻게 이끌고 갈 것인가에 대한 전면적인 재검토를 실시한 것은 1951년 5월 하순이었다. 총참모장 대리였던 니에룽쩐은 회고록에서 당시 상황을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제5차 전역후, 중앙은 회의를 열고 다음에는 어떻게 할 것인가를 토의했는데, 다수의 동지들은 아군이 38선 부근에서 당연히 진격을 멈추고, 전투와 회담을 병행하면서 담판을 통해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나도 당시에 이런 의견에 동의했다. 조선의 북부에서 적군을 몰아내려는 목적을 이미 달성했기 때문에, 38선에서 멈추는 것 역시 전쟁 발발전의 상태를 회복하는 것이며, 이렇게 되면 양측이 모두 받아 들이기에도 좋다”(341, 주63)

한편, 중국과 북한과도 전쟁의 종결에 관한 협의가 이루어졌다. 6월3일 김일성이 베이징에 도착해 협상을 통해 의견을 정리했다. 장기전을 준비하면서 동시에 평화회담을 통해 전쟁을 끝낸다는 새로운 전략방침을 채택하기로 정식으로 결정했다.(341, 주 64)

이제까지의 상황을 보면 중국은 전쟁의 목표 그리고 최종상태를 어떻게 설정할 것인지에 대해 분명한 그림을 그리지 못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마오쩌뚱은 정치적인 관점에서 미군을 한반도에서 완전하게 몰아내려고 했다. 그러나 펑더화이는 처음부터 당시의 중공군 전력으로는 미군을 한반도에서 몰아내기 어렵다고 판단한 것으로 보인다, 즉 마오쩌둥과 펑더화이간 정치와 군사의 상호 불일치는 이후 중공군의 작전수행에 심각한 장애를 초래했다. 제2차 전역이후 제대로 준비되지 않은 상태에서 제3차 전역을 수행하게 되었고 그 이후 제4차 전역도 군사적 관점에서는 무리한 결정이었다.

마오쩌둥의 군사작전에 대한 간섭으로 평더화이는 최대한 유리한 상황을 만들어 가고자 했던 구상을 실현시키지 못하게 되었다.
(한국전쟁당시 중공군의 정치의 군사작전에 대한 개입문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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션즈화의 조선전쟁 34, 제4차 전역과 군사와 정치의 문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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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1년 1월 25일 리지웨이사령관은 즉각 반격을 실시했다. 펑더화이는 유엔군이 퇴각에서 반격까지의 행동이 이렇게 신속하게 전개되리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다.

중공군은 계획했던 휴식과 정비를 취하지 못하고 곧바로 전투행동에 들어갔다. 중조연합군은 회의를 통해, 시급히 부대정비와 보충을 한다음에야 전투를 재개할 수 있다고 판단했다.

펑더화이는 부대정비를 위한 시간과 여건을 마련하기 위해 유엔3인위원회의 휴전제안을 제한적으로 수용하면서, 인민군과 지원군이 오산, 태평리, 단구리 전선에서 북쪽으로 15-30km 철수할 것이라고 밝히는 방송을 베이징에서 했으면 좋겠다는 전보를 1월 27일 마오쩌뚱에게 보냈다.

그러나 마오쩌뚱은 그 다음날인 1월 28일 펑더화이의 건의를 묵살하고 휴식을 중지하고 계속해서 남진하라고 명령했다.

마오쩌뚱은 펑더화이가 요청한 부분적 철수를 허락하지 않았다.

“지원군과 인민군이 북쪽으로 15-30km 후퇴한다는 잠정 휴전에 관한 발표는, 적들이 우리가 북쪽으로일정한 거리를 철수하면, 그들이 한강을 봉쇄한 후 군사행동을 중단하기를 바라고 있기 때문에 우리에게 불리”하다는 것이다.

“우리 군은 즉시 제4차 전역을 개시하기 위한 준비를 해야 하는데, 그 목적은 미군과 적군-2-3만명을 괴멸하고 대전, 안동 이북의 전선을 점령하는 것이다”

“이번 전투에서 반드시 인천, 한강 남쪽의 교두보 및 서울을 사수해야 하며, 동시에 적의 주력군을 수원, 이천으로 유인해야 한다. 전투가 시작되면, 인민군과 지원군은 반드시 적군이 원주에 구축한 방어선을 격파하고 영성, 안동방향으로 진격해야 한다.”

한편, 마오쩌둥은 자신의 제4차 전역에 대한 생각을 스탈린에게 보고하고 의견을 물어보았다.
스탈린은 마오쩌뚱의 결정을 지지했다.

“국제적 관점에서 보면, 적들이 인천과 서울을 점령하지 못하게 하고, 중조연합군이 적의 진공부대에 심각한 타격을 주는 것은 매우 적절합니다”(340, 주60, 마오쩌둥이 스탈린에게 보낸 전보, 1951년 1월 28일; 스탈린이 마오쩌둥에게 보낸 전보, 1951년 1월 30일, АПРФ, ф.45, оп.1, д.337, л.41-44)

모택동이 제4차 전역에서 달성하고자 하는 목표는 실현할 수 없었다.

결국, 제3, 4차 전역에 대한 마오쩌뚱의 작전에 대한 개입은 전체적으로 실책으로 드러났다. 펑더화이가 유엔3인위원회가 제시한 휴전에 대해 어떤 생각을 가졌는지는 아직 확인하지 못했다.

만일 스탈린이 중국과 미국이 서로 싸워서 힘을 소모하게 하는 것이 목표였다면 이 상황에서 유일하게 성공한 것은 스탈린뿐이었다.

제3차 전역이후 계속공격하라고 요구한 바실리예프 소련대사와 고문관들은 군사적인 이유에서 그런 입장을 견지한 것인지 아니면 스탈린의 전략적 구상 때문인지에 대해서도 제대로 확인하지 못했다. 지속적인 추격이라는 점에서는 소련 고문관들의 입장을 이해할 수 있으나 그 이면에는 스탈린의 전략적 구상도 작용할 수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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션즈화의 조선전쟁 33, 제3차 전역이후 휴전협상관련 마오쩌뚱의 전략적 실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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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이 50년 12월 초에 휴전을 위한 5개조항을 연합국측에 제시했다는 내용을 정리한 적이 있다. 제3차 전역이 시작되지 전의 조건이었다. 제3차 전역이후 1951년 1월 11일 유엔 3인위원회에서 휴전을 위한 제안이 만들어지고, 13일 유엔총회에서 통과되었다. 그러나 중국정부는 이를 즉각 거부했다.


<3인위원회>

12월 12일에 인도가 아시아·아프리카 13개국의 지지를 받아 유엔총회에 한국 휴전의 기초 조건을 조사하기 위한 3인위원회를 구성하자는 결의안을 제출하자 미국이 이를 지지

3 인위원회는 당시 총회의장이었던 이란 대표 엔테삼(Entezam,N.)·캐나다 대표인 피어슨(Pearson,L.B.), 그리고 인도 대표인 라우(Rau, B.N)로 구성되었으며, 이들은 중공과 접촉하기 시작

정전을 위한 유엔3인위원회의 중공 정부 접촉이 실패, 이 사실이 총회의 정치위원회에 보고. 중공이 한국전의 정전에 거부하는 태도를 취한 것은 당시 전황이 유리하였기 때문


한편, 3인위원회의 제안에 대해 미국은 난처한 입장에 직면하게 됨, 이 제안에 동의하면 ‘한국의 신뢰를 상실’하고 ‘의회와 여론의 질타’를 당하고, 반대하면 ‘유엔에서 다수의 반대에 직면’하게 될 것이었기 때문

결국 미국은 이 제안을 지지하기로 했는데 그 이유는 중국이 이 결의안을 수용하지 않을 것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이었다.(338, 주58)

중국의 입장에서 이 제안은 전략적으로 매우 유리했다. 천지엔의 지적처럼 즉각 휴전에 돌입하면 지원군은 합법적으로 38선 이남에 근거지를 확보할 수 있었고, 휴전에 실패하더라도 재진격을 위해 부대를 정비할 수 있는 소중한 시간을 벌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338, 주 59, Chen Jian, “China’s Strategy to End the Korean War” Paper for the International Conference, Hong Kong, January 1996)

그러나 마오쩌뚱과 스탈린은 유엔의 제안을 거절하기로 했다. 이는 애치슨이 여유를 가질 수 있도록 했고, 중국이 절대적으로 유리한 조건에서 정전을 실현할 수 있는 기회를 상실하게 했다.

마오쩌뚱과 스탈린이 왜 이렇게 유리한 조건을 거부했는지는 추가적인 확인과 연구가 필요하다. 이부분에 대한 연구성과는 별로 없어 보인다. 이제까지 살펴보면 마오쩌뚱이 적극적으로 휴전을 거부하겠다고 밝히면서 스탈린과 김일성의 동의를 구했다고 한다(이병주 교수 논문). 그러나 중요한 것은 스탈린이 어떤 입장을 취했는가 하는 것이다. 스탈린은 정전협정의 체결에 부정적이었다. 한국전쟁에서 정전협상이 질질 끌게 된 것은 스탈린의 영향 때문이라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마오쩌둥이 유엔3인위원회의 제안을 거부한 것은 전략적으로 가장 결정적인 실수를 했다고 할 수 있다. 만일 마오쩌뚱이 그안을 그대로 수용했다면 중공군은 펑더화이가 생각했던 것 처럼 충분한 휴식을 취할 수 있었을 것이다.

상황은 급변해서 유엔군 사령관 리지웨이는 1951년 1월 25일부터 반격작전을 실시했다. 중공군은 제대로 정비하지도 못한 상태에서 전투를 강요당했다.

결국 제2차 전역이후 제대로 정비를 하지 못한 중공군은 지속적으로 전투에 내몰리게 된 것이다. 중공군의 제3차 전역부터 5차 전역까지는 군사와 정치의 관계가 어떻게 부정적인 영향을 미치는가를 아주 잘 보여주고 있다.

맥아더는 국가정책에 군사가 간섭하려는 경향을 보이면서 실패했고, 마오쩌뚱은 정치가 군사에 간섭하면서 실패한 예를 보여주었다.
(마오쩌뚱의 군사에 대한 개입문제는 논문으로 정리할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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션즈화의 조선전쟁 32. 제3차 전역 중지와 관련한 펑더화이와 소련 북한간 의견대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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펑더화이는 1951년 1월 8일 지원군에 진격을 중지하고 휴식을 취하고 부대를 정비하라고 명령했다. 마오쩌뚱과 스탈린은 펑더화이의 조치를 지지했다.

그러나 조선과 중국에 파견되어 있던 소련의 고문들은 모두 강력하게 반대했다. 1월 9일 오전, 중국주둔 소련군 총고문 자하로프는 해방군 총참모부 작전실에 찾아와서 불만과 이해할 수 없다는 말을 했다. ‘전쟁에 승리하고서도 적을 추격하지않고, 승리의 성과를 확대시키지 않는 부대가 세상에 어디 있는가? 이것은 적들에게 휴식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고 전쟁을 끝낼 수 있는 기회를 상실하는 실수를 범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니에룽쩐이 설득했지만 자하로프는 자신의 뜻을 굽히지 않았다.

펑더화이도 현장에서 조선 지도자와 소련대사의 반대에 봉착했다. 신임대사 라주바예프는 지원군이 계속해서 남진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김일성과 박헌영은 펑더화이에게 면담을 요구하면서 지원군의 결정에 강한 불만을 토로했으며, 마오쩌뚱과 스탈린에게 직접 펑더화이에 대한 불만을 토로했다.

이런 의견 충돌은 중소 양국의 최고위층에 전달되었고, 다시 마오쩌뚱과 스탈린의 협조를 통해 겨우 해소될 수 있었다.

마오쩌둥과 스탈린은 펑더화이의 결정을 지지했다.

북한의 발발이 거세자 스탈린은 북한이 앞장서서 추격하는 방안을 제시했다. 중국에 대한 국제적 비난을 피하기 위해 지원군은 38선 이북과 동서해안에 대한 통제를 담당하고, 북한군이 계속 남쪽으로 추격을 하는 것이다.

김일성은 이런 상황에서 정비기간의 축소를 요구했다. 마오쩌뚱은 펑더화이에게 전문을 보내, 계속 남진할때, 인민군을 한강이남의 제일선에 배치하고 지원군은 인천과 한강이북으로 철수해 부대를 정돈하라고 지시했다.
이때 남쪽으로 진격하는 인민군은 조선정부가 지휘하고, 지원군은 38선 이북의 방어임무를 담당하라고 지시했다,(337. 주55)

인민군이 독자적으로 깊숙하게 진격하는 것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김일성은 어쩔 수 없이 진격을 멈추고 부대를 정비하자는 펑더화이의 주장을 받아 들일 수 밖에 없었다.

1월 14일 마오쩌둥은 펑더화이와 김일성에게 다음과 같은 전문을 보냈다

“2-3개월의 정비와 휴식을 거친 후에야 남조선 문제를 해결하고 최후 승리를 보장할 수 있으며,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1950년 6월부터 9월 사이에 인민군이 저질렀던 실수를 다시 저지를 수 있다”(337. 주56. 마오쩌뚱이 스탈린에게 보낸 전보, 1951년 1월 15일, АПРФ, ф.45, оп.1, д.337, л.1-3)

제2차 전역과 3차 전역의 과정을 보면 중국과 소련이 당시 한국전쟁의 목표를 한반도 전체 석권이 아닌 38도 선상에서 상황을 정리하는 것으로 생각했을 가능성이 있다.

이제까지 중국의 한국전쟁 개입시 전쟁목표가 무엇인가에 대한 검토는 그리 많지 않았던 것 같다.
그러나 제3차 전역으로 한국전쟁의 기초적인 목표는 달성했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중국이 참전하면서 한반도 전체를 석권하는 것을 전쟁목표로 삼았을까하는 점에 대해선 회의적이다.
물론 마오쩌뚱과 스탈린은 ‘미군을 남조선에서 완전히 물러나게 하는 것을 전략적 목표’로 삼았다는 기록(338, 주5)이 있으나 그 실제 내막을 정확하게 알기는 어렵다.

스탈린의 입장에서 볼 때도 중국이 한반도에서 미군을 완전하게 몰아내는 상황이 그리 달갑지 않을 수도 있다. 북한이 완전하게 중국의 영향력하에 들어가게 되면 소련이 입장에서도 중국이 부담스러울 수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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션즈화의 조선전쟁 31 제3차 전역시작의 작전적 의미와 정치적 의도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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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공군 제3차 전역은 1950년 12월 31일부터 1951년 1월 8일까지 진행되었다. 중공군은 그 기간 동안 서울과 37도선 이북 대부분의 지역을 장악했다.

제2차 전역이 끝난이후 펑더화이는 충분한 시간을 가지고 전력을 회복한다음 제3차 전역을 실시하고자 했다. 대규모 전투로 인해 부대원들이 극도로 지쳐있었고 부상자도 증가해서 휴식을 취하면서 시급하게 부대를 재편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후방으로부터 물자 공급이 부족했고, 대부분의 부대에 동복이 제대로 보급되지 않았다. 탄약과 식량도 제때 보급되지 못했으며 남쪽으로 내려갈 수록 이런 상황은 더욱 심해졌다.

펑더화이는 제3차 전역을 51년 2-3월 경 시작하고자 했다.

그러나 마오쩌둥은 즉시 제3차 전역을 시작해 신속하게 38선을 돌파하자고 주장했다.
50년 12월 13일 펑더화이에게 보낸 전문에서 “현재, 미,영 각국은 자신의 군대를 정비해서 다음 전투를 치루기 위해 우리에게 38선 이북에서 남진을 멈추도록 요구하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반드시 38선을 넘어 진격해야 한다. 만약 38선 이북에서 멈춘다면 매우 불리하게 될 것이다”(332, 주45)

한편 펑더화이는 마오쩌뚱의 지시를 받아 자신의 생각을 접고 제3차 전역을 수행한다. 그러나 당시 상황에 대한 전망은 매우 부정적이었다. 12월 19일 마오쩌뚱에게 보낸 전보는 다음과 같다

“조선 전쟁은 여전히 상당히 장기적이고 어려운 전쟁이 될 것입니다. 적군은 진격에서 방어전술로 전환했으며, 전선을 축소하고 병력을 집중해서 전선에서 직선상의 전투력을 강화하여 연합작전에 유리한 전술을 채택했습니다. … 주석께서 보낸 13일의 전보를 받은 후, 현재는 38선을 넘어 진격하라는 지시를 따르고 있습니다. 만약 다른 변수가 발생하지 않는다면, 전투에서 패배할 가능성은 없지만 공격을 받아 저지를 당하거나 전투의 승리가 그다지 크지 않을 것입니다.”(333. 주 47)

펑더화이의 군사적 고려와 달리 스탈린과 마오쩌둥은 신속하게 38선을 넘어 공격한다는 묵계가 있었다고 한다. 왕쟈샹과 그로미코는 50년 12월 5일의 대화에서 신속한 중공군의 공격에 의견을 같이 했다. 왕쟈샹은 “정치적 각도에서 볼때, 중국군이 성공적으로 진군하고 있는 상황에서, 당연히 38선을 넘어 진격할 것인가?”를 그로미코에게 물었고 그로미코는 “현재의 상황을 보면 ‘쇠뿔도 단김에 빼라’는 속담이 매우 적절하다”고 답했고 왕쟈상도 동의했다.

한편, 소련과 중국의 생각과 달리 국제적인 상황은 여의치 않았다. 12월 5일 왕쟈샹과 그로미코가 회담을 하던 날 “버마, 이집트, 인도 등 11개 아시아 아프리카 국가들은 중국과 조선의 군대가 38선을 넘지 말 것을 호소했으며, 연합국과 영국, 인도 등 국가들로 계속해서 중국정부에 휴전조건을 탐색했다”(335)

이에 대해 중국은 다음과 같은 다섯개의 조건을 제시하면서 이런 조건이 충족되지 못한다면 군사행동을 중지할 수 없다고 밝혔다. 5개항의 조건은 다음과 같다. 조선에서의 모든 군대 철수, 대만해협과 대만에서 미국군대의 철수, 조선문제는 반드시 조선인 스스로 해결해야 함. 일본과의 평화조약 체결을 준비하기 위한 4개국 외교장관회의의 소집 등이었다. 물론 이런 중국은 이런 조건에 대해 소련과 사전 협의를 거쳤다.

션즈화는 이런 정치적 이유로 인해 펑더화이의 진격중지요구를 받아 들일 수 없다고 주장한다.(336) 그러나 미국이 실제 이런 조건을 받아 들이지 않을 것이하는 점을 생각해보단면, 마오쩌둥의 상기 5개조건은 군사적 행동을 계속하기 위한 핑게거리에 불과하다.

실제로 마오쩌뚱이 군사적인 요구와 조건을 무시하고 계속 공격을 하라고 요구한 이유는 명확하지 않다. 제3차 전역은 제2차 전역의 작전적 기세를 유지하는 것과는 차이가 있었다.

12월 29일 모택동이 보낸 전문은 다음과 같은 이유를 제시하고 있다.

“겨울 내내 우리 지원군이 휴식을 취하면서 움직이지 않는다면, 자본주의 국가들의 온갖 억측을 야기하고, 민주진영(사회주의 진영)의 일부 국가에서도 각종 이론이 발생할 것이다.”(336. 주 52 건국이래모택동문고, 제1책, pp. 741-742)

한편 이에 대해 펑더화이는 제3차 전역을 다음과 같이 평가했다

“제3차 전역에서 일정한 승리를 거두더라도 지원군은 이미 상당히 지친 상태가 될 것이다. 전투과정에서 유엔군은 계획적으로 철수하겠지만 중국과 조선의 연합군은 일부 지역을 점령한 것 이외에는 적들에게 의미있는 타격을 주지 못할 것이다.”(336. 주 53. 팽덕회군사문선, p.383)

펑더화이는 38선 이남이라는 지역보다는 유엔군의 전력을 타격하는 것에 주안을 주었던 것으로 보인다. 즉 마오쩌둥과 펑더화이는 무엇을 지향할 것인가하는 점에서 서로 의견의 일치를 보지 못했다.

펑더화이는 유엔군을 현위치에 고착시키면서 부대를 재편하고 전열을 정비하여 유엔군에게 결정적인 피해를 강요하려 했던 것이다.

만일 제3차 전역을 펑더화이 생각처럼 치루었다면 유엔군은 궤멸적인 피해를 입었을 수도 있다. 그것은 제4차 전역에서 중공군의 작전을 고려해 보면 알 수 있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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션즈화의 조선전쟁 30, 한국전쟁 당시 소련의 중국에 대한 경제적 지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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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은 한국전쟁에 참가하면서 경제상황이 더욱 어려워졌다. 스탈린과 조우언라이의 회담기록을 살펴보면 중국의 전체 예산 중 군비가 차지하는 비용은 1950년 44%, 51년에는 52%에 달했다.(스탈린과 조우언라이의 회담기록 1952년 9월 3일, АПРФ, ф.45, оп.1, д.329, л.75-87.) 한편 중국의 공식자료는 조우언라이가 말한 수치보다 조금 작다. 50년에 38.19%, 51년에는 45.64% 였다(329, 주 35, 중국인민공화국경제당안관자료선편(종합권) p.872. 892)

전쟁기간중 미국과 서방의 경제봉쇄는 중국의 경제를 더욱 곤란하게 만들었다.
1950년 말부터 1951년 7월까지 수입원자재와 기계재료 가격의 상승폭이 일반적으로 배 이상, 심지어 4배까지 뛰었다.
수출품은 크게 감소해서, 1950년 중국의 토산품 수출은 겨우 4억달러였고, 51년의 계획은 2.3억 달러로 축소했다.
중국과 미국, 영국, 프랑스, 독일 등 유럽 국가와의 무역총액은 역사상 가장 많았던 시기와 비교하면 90%이상이 감소했다

조우언라이는 로쉰과 대화에서 중국의 경제적 어려움을 첫째 엄청난 재정압박, 둘째, 기술관료의 부족이라고 했다(329. 주 37 조우언라이와 로쉰의 대화, 1951년 7월 24일, АВПРФ, ф.0100, оп.44, п.32, д.322, л.48-49.)

소련은 두가지 문제에 대한 지원을 했다.

1950년 중국은 소련에 15,044억 루블(2,838억 달러)의 물자제공을 요청했는데 그 중에는 야금, 광산, 기중기, 운수, 에너지 동력 등의 설비 및 압연제, 금속선반 등이 포함되어 있었다.

소련은 부장회의를 통해 1,357억 달러의 물자제공을 비준했고, 동시에 소련은 중국으로부터 1,508억 달러에 해당한 물자를 구입했다.

1949년 2,630억 달러였던 중소무역액은 1950년 9배나 증가한 24,190 억 달러가 되었다

가장 많이 수입한 제품은 기계와 공구였으며, 그 다음이 석유제품과 철강재였다. 이들 물자는 중국의 제조업을 발전시키는데 필수적인 물자였고, 동시에 미국을 위시한 제국주의 국가들이 판매를 하지 않았다.

소련은 중국과의 무역에서 비교적 우호적인 조건을 제시했는데, 중국이 수입한 제품은 모두 자본주의 국가의 시장가격보다 낮은 가격이었다. 규소강판의 경우, 홍콩시장의 절반이었으며 계약가격이 고정되어 있어 국제시장의 가격변동에 영향을 받지 않았다.

소련정부는 중국의 생산능력 회복을 돕기위해서 자신들이 수입할 필요가 없는 물자들도 중국으로부터 수입했다.

중국이 급히 필요로 하는 물자들에 대해서도 중소 간 무역계약에 구애받지 않고 가능한 공급했다. 따라서 중국의 소련에 대한 대대적인 무역은 이 시기에 중국 대외무역의 방향을 확정했다.(330. 주 38, 39 참조)

(한국전쟁시기의 중소간 경제관계에 대한 국내자료는 많지 않은 듯 하다)

중국이 부족하다고 했던 기술자들과 관련하여 소련은 중국에 수많은 경제전문가, 기술자등을 파견했고 중국인들의 소련 유학요청도 받아 들였다.

한국전쟁 초기에 중국은 중국에 근무하고 있던 126명이 소련전문가들이 1년 더 근무기간 연장해줄 것을 요청했고, 동시에 중국의 경제분야 공무원(133명의 간부와 33명의 통역)이 소련에서 3월부터 반년까지 현지시찰과 학습을 진행할 수 있도록 허락해달라고 요청했고 소련은 이를 모두 받아 들였다.

1952년 3월 중국에는 소련 고문 및 교사가 332명, 각종 기술 전문가 471명이 체류하고 있었음. 이들이 귀국하자 조우언라이는 몰로토프에게 편지를 보내 1952년-53년에 239명의 전문가를 중국에 파견해달라고 요청

션즈화는 소련의 중국에 대한 경제지원을 들어 스탈린이 중국을 보는 시각이 변화했다고 평가했다. 웨스타드도 스탈린이 자신이 생존한 마지막 기간동안 경제와 기술분야의 협력을 통해 중소단계를 새로운 단계로 격상시키려고 했다고 평가했다는 것이다.(Westad, “The Sino-Soviet Alliance and the United States”)

그러나 소련이 중국에 적극적으로 경제지원을 한 것은 중국이 수행하고 있는 한국전쟁을 지원하기 위한 것이지 중소관계를 발전시키기 위한 것으로 보기는 어렵다. 하나의 현상에 대한 다양한 해석은 가능하다. 그러나 션즈화는 다른 한쪽의 해석 가능성을 고의적으로 차단하는 경향이 있다. 반론의 가능성에 대해서는 거의 아무런 논리적 대응을 하지 않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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