션즈화의 조선선쟁 부록 3-1 중국의 아시아 공산주의 운동의 중심적 역할에 관한 기술

김일성 모택동.jpg

북한의 발언속에서 본 중국의 위치

아시아공산주의 운동에서 중국의 중심적 역할에 대한 논의에 대해서는 김일성도 참가했던 것으로 보인다. 션즈화는 김일성이 동방정보국 설립문제를 마오쩌뚱에게 제안했다고 밝히고 있다.

마오쩌뚱은 중국과 인도차이나 지역에 모두 전쟁중에 있으며 조선의 상황 역시 긴장상태에 있어서, 만일 정보국이 설립되면 군사동맹을 맺는다는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 있기 때문에, 현 시점에서 진행하기는 너무 이르다고 판단했다는 것이다.(션즈화의 조선전쟁해밀문건, pp. 187-88, АПРФ, ф.39, оп.1, дл.331,лл.59-61; АВПРФ, ф.095а, оп.5а, п.11, д.3, лл. 46-53)

김일성이 어떤 연유로 마오쩌뚱에게 동방정보국의 설립을 요구했는지는 자세하게 밝히지 않고 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김일성이 스탈린의 허락없이 독자적으로 동방정보국 설립을 언급할 상황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이는 스탈린이 김일성에게 마오쩌뚱에게 동방정보국 설립을 제안하도록 지시를 받은 것으로 밖에 설명하기 어렵다.

코민포름이 창설된지 2년이 채지나지 않아서 동방정보국 창설을 중국에게 주도하라고 요구한 스탈린의 의도를 무엇으로 설명할 수 있을까? 이것를 한국전쟁에서 중국과 미국이 서로 싸우게 만들려고 했던 스탈린의 계책이라고 설명하는데 어떤 문제가 있는지 모르겠다. 유고슬라비아 공산당을 제명하기까지 했던 스탈린이 아시아에서 중국의 독자적인 지위를 인정해주었다는 것은 납득하기 어렵다.

션즈화는 김일성이 ‘동방정보국’의 설립을 제안했다고 하면서 당시 아시아 공산주의 운동 조직의 이름까지 제시했다. 그 분명한 내용은 원문을 살펴보아야 할 수 있을 것 같다.

코민포름

1947년 9월, 바르샤바에서 소련 공산당 주창 아래 유럽에 있는 9개국 공산당이 참가하여 창설한 공산주의 국가의 정보국이다. 참가국은 소련을 중심으로 체코·불가리아·루마니아·헝가리·폴란드·유고슬라비아·프랑스·이탈리아의 9개국으로서 미국을 중심으로 한 서유럽의 반공 체제와 투쟁할 것을 선언하고 행동의 통일, 경험·정보 교환, 활동의 조정을 위하여 코민포름을 설치할 것을 정하였다. 이들은 마셜 계획을 미국의 확장 정책의 일부라 비판하고, 1948년 6월에는 유고슬라비아 공산당을 제명하여 반소적(反蘇的)이고 민족주의적이라고 비판하였다. 1956년 4월에 해산될 때까지 세계 각국의 공산당에 대해서 지도적인 역할을 수행했다.

1949년 여름 소련과 중국의 국제공산주의 운동에서의 역할 분담과 관련된 논의

1947년 코민포름을 결성한 소련은 아시아에서의 공산주의 운동과 관련하여 중국과 역할분담에 관한 논의를 시작하기에 이른다. 소련이 중국과 역할 분담에 관해 논의를 하는데 영향을 미친 사건을 아마도 미국의 마샬 플랜과 이에 따른 소련의 대응이 유럽사회에서 첨예한 갈등으로 나타난 것과 상당한 관계가 있을 것이다.

특히 티토가 미국과 소련사이에서 기회주의적 태도를 보인 것은 소련이 중국을 다룸에 있어서 매우 조심해야 한다는 생각을 하게 만든 것으로 보인다. 이미 마오쩌뚱을 티토와 같은 성향의 인물로 판단하고 있었기에 중국이 미국과 가까운 관계가 되지 않도록 하는데 중점을 두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당연히 중국을 강압적으로 몰아가기보다는 일정정도 중국의 역할을 인정해주면서 임박한 한국전쟁에서 중국과 미국의 충돌을 만들어가는 상황이 최상이라고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비밀리에 소련을 방문한 리우샤오치에게 이후 소련은 서구유럽의 혁명을 책임질 테니, 중국은 동방의 식민지 반식민지 국가의 민족민주혁명에 책임을 지라고 말했다’(366, 주35, Ковалев И В, Диалог Сталина с Мао Цзэдуном , Проблемы дальнего востока, No, 1-3, 1992, cc 78-79)

한편 션즈화는 북한을 아시아공산당정보국에 포함시키는 문제에 대해서는 스탈린과 마오쩌뚱간 서로 입장차이가 있었던 것으로 해석한다. 처음에는 북한을 아시아공산당정보국에 포함시키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했다. 그러나 중소상호원조조약 체결이후 스탈린은 한반도를 중공의 통제범위에서 제외시키려고 했는데 그 이유를 뤼순 해군기지를 상실할 경우 소련의 태평양 진출과 부동항에 대한 유일한 희망이 한반도였기 때문이라고 설명한하고 있다. 션즈화에 해석과 평가에 대해서는 추가적인 고민이 필요할 것이다.

스탈린이 한반도를 직접 통제하고 싶어한 것은 첫번째는 일본으로부터 완충지역을 확보하고 싶어했을 것이고 두번째는 중국을 견제하기 위한 것으로 해석하는 것이 더 타당할 것이다. (한반도를 완충지역으로 확보하고 싶어했다는 점은 웨더스비 교수의 글로 설명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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션즈화의 조선전쟁 부록 3 소련이 중국을 한국전쟁으로 유인한 방책, 아시아공산당운동의 중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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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쟁 직전 소련과 중국의 입장과 태도에 이해하기 어려운 점이 많다. 션즈화는 마오쩌뚱이 스탈린의 권위에 압도당했다고 하지만 그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이미 마오쩌뚱과 스탈린은 서로를 잘 알고 있었다.

스탈린은 마오쩌뚱을 티토주의자로 평가하고 있었고 마오쩌뚱도 스탈린에 대해 혐오감을 지니고 있었다. 서로 서로가 어떤 관계인지를 잘 알고 있었다. 소련군이 만주에 진출했을때 만주지역에 대한 스탈린의 제국주의적 요구를 단연코 배격했던 것도 마오쩌뚱이었다.

서로 견원지간과 같은 관계였음에도 불구하고 한국전쟁에 관해서는 마오쩌뚱이 이상하게 스탈린의 지도를 전폭적으로 수용한다. 그런 이상한 관계를 설명하는 연구는 별로 없다.

다만 스탈린이 고트발트의 전문에서 보여준 구상과 같이 미국의 관심을 한반도로 끌어들이고 유럽에서 사회주의 운동을 강화시키겠다는 전략적 구상에 모택동이 말려들었다는 것 밖에 이런 현상을 설명하기 어렵다.

마오쩌뚱도 스탈린의 세계전략을 어느 정도 수용한 것으로 보인다. 정전협상 초기에 최대한 빨리 휴전을 하려고 하는 마오쩌뚱이 세계전략적 관점 운운하며 김일성을 설득했기 때문이다.

한편 스탈린이 마오쩌뚱을 한국전쟁에 끌어 들인 유인책 중의 하나가 중국에게 아시아 공산운동의 중추적 역할을 맡기겠다는 구상이라는 설명도 가능하다.

‘1949년 2월 미코얀이 시바이포를 비밀리에 방문했을 때, 소련이 중공을 중심으로 아시아 공산당국의 설립을 지지한다는 의사를 표명했다. 스탈린의 견해에 의하면, 먼저 중공, 일본공산당, 조선공산당 3개 공산당으로 먼저 설립하고, 점차 다른 정당들을 가입시키자는 것이었다. АПРФ, ф.39, оп.1, д.39, л.47-53)

스탈린이 마오쩌뚱에게 미끼를 던진 것이다. 이에 관한 연구는 러시아에서 이루어진 것 같다.
자료는 다음과 같다.

Лудовский А М, Мировская Р А, Мясников В С(сост) Русско-китайские отношение в хх веке, Документы и Материалы, Том 5, Советско-китайские отношение, 1946-Фебраль 1950 гг, Москва, Пямятники исторической мысли, 2005, сс 62-66)

‘얼마후 미얀마, 말레시아, 인도차이나 공산당들이 중공에 편지를 보내와 동방 각국의 공산당 정보국을 설립할 것을 제안했다.’ 선즈화는 마오쩌뚱은 중국의 내전이 아직 끝내지 않았기 때문에 여건이 성숙하지 않았다고 판단했다고 기술했다. (선즈화 편, 조선전쟁해밀문건, pp188-189)(360-361, 주 21)

만일 마오쩌뚱이 아시아공산당 운동의 맹주가 되라는 스탈린의 제안을 수용하면서 마치 소련이 동유럽을 장악한 것처럼 아시아를 중공이 장악해야 한다고 생각했다면, 마오쩌뚱이 한국전쟁에 참전한 이유를 납득할 수 있다.
그리고 스탈린이 김일성에게 마오쩌뚱에게 허락을 받으라고 한 배경도 이해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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션즈화의 조선전쟁 부록 2, 내전기 북한의 중공지원

김일성과 모택동.jpg

동베이지역에서 내전 초기 중공은 커다란 위험에 봉착했음.
국민당에 의해 남만조우지역과 북만조우 지역은 연락이 두절되었음. 남만조우는 북한의 지원이 절실한 상황

1946년 7월 중공 동베이국은 평양에 사무소를 개소하고 주리즈가 전권대사를 맡음. 이 사무소를 통해 중공동베이국 간부들과 북한지도자들간 연락이 가능해짐.

주리즈는 김일성, 최용건 등 북한 지도자들과 긴밀하게 왕래했으며, 특히 박일우, 무정, 강건 등 연안파 간부들과는 각별한 관계

1947년 6월 27일 주리즈가 동베이국에 보고한 북한이 동베이국 지원 내용은 다음과 같음

1, 부상당한 병사들과 가족을 수용

통화와 안동 방어에 실패한 후 약 1,5000명에 달하는 중공의 부상병과 가족이 북한에 이주해 주민들의 집에 분산배치됨

2, 무기와 장비를 공급

1947년 6월까지 동베이지역에 공급한 물자는 모두 네차례에 걸쳐 약 800-1000대의 차량으로 공급(군수물자 위주)

그 중 일본으로부터 획득한 후 북한에 남겨졌던 물자는 김일성이 주도적으로 소련에 요구에 중공에 지원되었음

3, 국경통과 인원에 대한 접대

9개월 동안 동베이국의 간부와 일반인 및 물자수송부대 인원 등 총 2만여명의 인원을 접대하고 안배함

물자의 저장과 이송을 도움

중공군이 철수하면서 맡겨 놓았던 물자 2만여톤은 모두 조선노동당원의 도움으로 이송됨

북한을 통해 운송한 동베이국 물자는 1%도 안되는 세율을 적용했고 운송비도 매우 저렴했으며 아예 면제하기도 함

다급한 운수물자가 있을 경우, 북한은 자신들의 여객운송을 중단시키고 중공의 운송을 지원함

김일성은 린뱌오에게 보낸 편지에서 밝힌 것 처럼, 최선을 다해 도움

주리즈는 중국의 혁명투쟁에서 “조선은 든든한 후방기지와 교량역을 수행했으며, 조선을 변형된 그리고 은폐된 형태의 후방으로 삼아 남만조우에서의 작전을 지원하려던 동베이국의 의도를 실현했다”고 평가함(359,주15)

1947년 7월 하반기부터 1948년 초까지, 중국이 북한을 통해 운송하고 교환한 물자는 약 52만여톤 규모

국경을 넘나든 인원도 약 2만여명 규모

1948년에는 투먼과 난양 사이 국경을 통해 한 차례에 약 8,685명이 이동

동베이국의 주요간부 들, 천원, 리푸춘, 주뢰이, 리우야로우, 샤오화, 장아이펑 등이 수차례 북한을 거쳐 갔으며

후에 신정치협상회의에 참가한 민주당파와 해외화교 대표, 리지션, 션쥔루, 장란, 마슈룬, 차이팅카이 등도 홍콩에서 북한을 통해 중국 대륙으로 진입함(359, 주 16)

동베이국은 북한에 대해 식량을 주로 제공했다.
1946년 여름과 가을 사이 김일성은 옌안에서 귀국한 정설송을 불러, 그녀에게 식량지원을 요청
동베이국은 1947년 여름까지 리우야로우를 통해 1만톤이 전달, 동베이국이 다시 2000톤을 지원
상호 교환한 물자의 양까지 합산하면 식량 총계는 3만톤에 달함(359, 주 17)

한편 션즈화는 북한의 중공에 대한 지원이 상호적이었다고 주장한다.정설송을 통한 식량원조 이에외도 조선의용군과 동베이민주연합군 소속이었던 조선족 간부와 사병으로 구성된 부대를 북한에 보내주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중공에 있던 조선인들이 북한으로 들어온 것은 당연한 것이었다. 조선인 출신 부대를 북한에 보내준 것으로 중공이 북한의 원조와 지원을 상쇄할 수 있다고 보는 것은 지나치다.

당시 북한이 아니었으면 중공은 국공내전에서 승리하기 어려웠다는 점을 감안해보면 션즈화의 평가는 지나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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션즈화의 조선전쟁 부록 1. 북중관계 (1949-61), 연안파와 유격대파 정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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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정)

션즈화의 조선전쟁에 관한 정리를 마쳤다. 션즈화는 자료는 풍부하게 확보했으나, 자료의 해석과 평가는 철저하지 못했다. 중국이라는 한계는 연구에도 어쩔 수 없는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인다. 특이하게도 션즈화는 자신의 저서를 본문과 부록으로 편성했다. 부록의 양도 140페이지 정도다. 주로 북중관계를 정리해서 다루었다

이번부터는 션즈화의 조선전쟁 부록을 정리해 보고자 한다. 부록은 1949-1961년까지 북중관계와 1953년 정전당시 북중간의 입장 두부분으로 나뉘어져 있다.

먼저 1949-1961년간의 북중관계부터 살펴보겠다.

연안파의 경우

중국에서 항일전쟁이 발발하면서 조선인들 중 중공과 팔로군에 소속된 경우는 다음과 같다.

1941년 1월 타이항 산 팔로군의 총부가 소재한 샨시성 통위현에서 무정을 회장으로 하는 화베이조선청년연합회 설립

1941년 4월 조선의용대 화배이 지부가 설립되어 직접 팔로군의 지휘를 받음

1942년 7월 중공의 지지하에 조선청년연합회는 조선독립동맹으로 이름을 바꾸고 김두봉과 최창익이 지휘
조선의용대 화베이 지부는 조선의용군으로 확대재편하고 무정이 총사령관, 박효삼과 박일우가 부사령관을 맡음

전쟁 종료전 조선독립동맹의 주요 지휘자들이 중공중앙 소재지 옌안에 집결하여 서휘, 윤공흠 등의 간부들을 지휘자들에게 포함시킴

위의 인물들은 연안파의 핵심인물이 됨

유격대파

김일성은 1930년대 초 중국 동베이 지방으로 건너와 중공중앙의 위임을 받아 지린성에서 항일 유격운동을 조직하고 연대와 사단급 정치위원을 역임. 이후 동만지역 주요전선 지휘관이 됨

일본관동군의 소탕작전을 피해 1938년부터 1942년사이 소련 극동지역으로 후퇴

1942년 7월 소련극동방면군은 하바로프스크 동부지역에 제88 독립보병여단을 설립하고 여단장은 중공당원인 주오중이 맡음

김일성은 자신의 잔여부대를 이끌고 1942년 88여단에 편입되어 조선인으로 편성된 제1대대에 소속

일본 항복이후 김일성은 김일, 강건, 최용건과 함께 9월 중순 북한에 들어왔으며, 김일성은 소련점령군평양대표의 업무를 도움

1945년 12월 모스크바 3상 회의이후, 소련점령당국은 조만식을 대표로 한 민족주의자들을 정치무대에서 배제하고 김일성과 소련에서 온 고려인 대표이자 모스크바 파의 대표적 인물인 허가이와 남한에서 온 조선공산당대표 박헌영과 박정애 등 남한파의 대표적 인물과 연합시켜 친소정권을 수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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션즈화의 조선전쟁 36-2 스탈린의 정전에 대한 입장(본문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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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탈린은 중국의 입장을 전폭적으로 지지했다. 1952년 8월 20일 스탈린과 조우언라이는 회담을 진행하면서 중국과 북한간 전쟁포로 송환문제로 의견차이가 있다고 언급하자 다음과 같이 중국을 지지했다.

“마오쩌뚱 동지가 옳다. 이번 전쟁은 미국에 피해를 줬다. 조선 인민들은 전쟁중 피해를 입은 것 이외에 아무것도 잃지 않았다. 물론 조선인민들을 이해해야 한다. 그들은 커다란 희생을 당했다. 그러나 그들에게 확실하게 이야기 해야 한다. 이것은 매우 커다란 사건이며, 의지와 인내심이 필요하다”(348, 주76, 스탈린과 조우언라이의 회담기록, 1952년 8월 20일, АПРФ, ф.45, оп.1, д.329, л.54-72)

한편 와다 하루키는 이와 다른 주장을 하고 있다. 그는 1952년 조우언라이가 소련을 방문했을때, 조선이 정전을 요구했고, 소련도 정전을 원하지만, 중국은 정전을 원하지 않았고, 스탈린은 어쩔 수 없이 조우언라이의 의견에 동의할 수 밖에 없었다고 주장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동안 소련의 입장을 고려해 볼 때 와다 하루키의 견해는 사실과 다를 확률이 높다. (Wada Haruki, Stalin and the Japanese Communist Party, 1945-1953; In the Light of New Russian Achival Documents”, Papers for the International Conference, Hongkong, January 1996)

한반도 전략에 있어서 스탈린은 항상 지도적인 지위에 있었다. 션즈화는 그런 현상을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다. “소련의 정치, 경제적 역량, 국제공산주의 운동과 중공 내부에서의 스탈린의 위엄과 명망 및 스탈린의 노련한 외교적 수단 등은, 신중중 초기 소련과의 교류에서, 마오쩌뚱을 일종의 피동적이고 복종적인 위치에 처할 수 밖에 없게 했음을 반드시 간파해야 한다.”(349)

원래 마오쩌뚱은 스탈린을 좋아하지 않았고 스탈린도 마오쩌뚱을 티토주의자로 생각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전쟁에서 스탈린이 지도적 위치를 차지한 것을 설명하기는 어렵다.

1953년 3월 스탈린의 사망은 소련과 중국의 관계를 변화시켰다. 마오쩌뚱은 더 이상 스탈린없는 소련에 매여있고자 하지 않았다. 스탈린 사망이후 소련의 새로운 지도자들은 양보와 타협적인 대외정책 방침을 제시했고 중국은 이런 방침을 고려하여 1953년 7월 정전협정이 체결되기에 이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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션즈화의 조선전쟁 36-1, 휴전협상을 통해본 소련, 중국, 북한의 한국전쟁에 대한 입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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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전협상 진행과정을 보면 한국전쟁에 대한 소련, 중국, 북한의 입장을 분명하게 파악할 수 있다. 이제까지 휴전협상에 관한 연구는 공산군측과 연합군측이 각각 어떻게 휴전에 합의했는가 하는 과정에 촛점이 맞추어져 있었다. 그러다보니 자연스럽게 휴전조건을 두고 양측이 힘겨루기를 하는 문제에 연구의 관심이 집중된 점이 없지 않다.

그러나 휴전협상에 대해서도 공산권의 입장은 단일하지 않았다. 즉 공산측은 훨씬 복잡한 협상과정을 거쳤다. 휴전협상에 대해 소련, 중국, 북한의 입장은 다 달랐다. 휴전협상이 실제 서명하게 된 것은 스탈린의 사망이 계기라는 사실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휴전시작할때에는 북한 소련 중국이 동일한 입장이었다.
그러나 시간이 가면서 북한이 신속한 휴전을 요구했다. 유엔군의 공습으로 더이상 버티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소련과 중국은 북한보다 휴전에 대해 신중한 입장이었다. 그러나 시간이 가면서 중국도 휴전을 요구하는 상황이었다. 스탈린이 휴전에 가장 부정적이었다.

중국과 소련이 휴전에 부정적이었던 것은 중국과 소련의 세계전략의 일환때문이라 할 수 있다. 전반적으로 중국은 스탈린의 세계전략을 받아 들이는 입장이었던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

말리크와 조지캐넌의 대담

소련의 휴전에 대한 입장은 6월 5일 조지 캐넌과 말리크 대사와의 회담에서 엿볼 수 있다. 이 회담에서 말리크는 “소련 정부는 평화를 바라며 한국문제를 평화적으로 해결하기를 희망하고, 그것이 빠를수록 좋다. 그러나 소련군이 한국에서 전투에 참가한 적이 없기 때문에, 소련 정부는 휴전문제와 관한 어떤 토론에도 참가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고 밝힌 다음 미국정부는 북한 및 중국정부와 이문제에 대해 접촉해야 할 것이라는 입장을 밝혔다. (342, 주 66, FRUS, Vol, 1951, Part, pp.462, 507-511)

한편, 중국과 미국 모두 서로 평화회담을 희망한다는 의사를 먼저 표명하고자 하지 않았기 때문에 소련이 6월 23일 유엔에서의 라디오 연설을 통해 교전 당사자간의 즉각적인 휴전을 제안했다.

이어서 6월 27일 소련주재 미국대사 커크(Kirk)와 그로미코의 회담에서 소련의 입장을 최종확인한 후, 6월 30일 유엔군 총사령관 리지웨이가 TV연설을 통해 정식으로 휴전을 제안했다.(345, 주 70, 그로미코와 커크간 회담 비망록, 1951년 6월 27일 АПРФ, ф.3, оп.65, д.828, л.181-185)

7월 1일 중국과 북한은 리지웨이의 제안에 적극적으로 호응

스탈린이 직접 휴전회담을 지휘하지는 않았지만 회담진행중에 모스크바와 베이징간 전보가 빈번하게 왕래했으며, 중국과 조선이 취한 모든 구체적인 조치와 방침의 확정은 모두 스탈린에게 보고되고 그의 비준을 받았음을 러시아의 문건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346)

회담 진행간 중국과 북한의 이견과 스탈린의 마오쩌뚱 지지

회담이 교착상태에 빠지자 북한은 신속한 협상진행을 위해 양보를 할 수 있다는 의사를 표명했지만 마오쩌뚱은 불리한 불리한 상화에서는 양보를 할 수 없다는 입장이었다. 이때 스탈린은 마오쩌뚱의 의견을 지지하면서 김일성을 설득했다.

북한의 전쟁지속 불가능하는 의견 관련

1952년 1월말 북한은 ‘전쟁을 계속 진행하고자 하지 않는다’는 의견을 표시(347, 주73, 마오쩌뚱이 스탈린에게 보낸 전보, 1952년 2월 8일, АПРФ, ф.45, оп.1, д.342, л.81-83)

이후 전쟁포로 문제로 휴전회담이 지연되자, 7월 14일 김일성은 마오쩌뚱에게 미국의 조건을 받아들여 즉시 휴전에 들어가자고 제안했다.

마오쩌뚱은 7월 15일 보낸 전보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적들의 무차별적인 폭격 때문에, 그들의 도발적이고 기만적인 제안을 받아 들인다면, 중국과 조선에게 정치적 군사적으로 모두 불리하다. 전쟁이 계속되면, 물론 조선인민과 지원군이 손실을 입겠지만, 중국과 조선의 인민들도 자신의 실력을 강화할 수 있으며, 또한 평화를 사랑하는 전세계 인민들이 침략전쟁을 반대하도록 고무시킬 수 있고 전세계적인 평화운동을 발전시킬 수 있다. 전쟁은 미국의 주요역량을 아시아로 유인하고 지속적으로 손상시켜서, 소련의 건설과 세계민족혁명운동의 발전을 가져올 수 있는데, 이것은 새로운 세계대전의 발발을 늦출 수 있음을 의미한다.”고 말했다.

여기서 마오쩌뚱이 ‘전쟁은 미국의 주요역량을 아시아로 유인하고 지속적으로 손상’시킨다고 한 말은 스탈린의 한국전쟁 기본 구상과 거의 일치한다. 스탈린이 한국전쟁 직후 체코 대통령 고트발트에게 보낸 전보에서도 동일한 내용을 담고 있는 것은 우연이라고 하기 어렵다.

이미 한국전쟁의 의미에 대해서는 스탈린과 마오쩌뚱이 서로 상당한 수준에서 의견교환이 이루어졌음을 의미한다. 문제는 이런 소련의 입장에 대해서 마오쩌뚱은 어떻게 평가하고 있었는가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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