션즈화의 조선전쟁 부록 5-1 중국군 파병 초기 지휘권 문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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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군을 파견하기로 하면서 군대의 지휘권에 관한 문제가 대두되었다.

북한과 중국간 지휘권에 관한 문제가 처음 대두된 것은 10월 8일 마오쩌뚱이 김일성에게 전보를 보내 중국이 파병을 결정했음을 통보하고 지원군의 조선진입에 대한 협상을 요구했다.

김일성의 지시를 받은 박일우는 지원군이 조선에 진입한 이후 일률적으로 조선화폐를 사용하고 이후 다시 환율에 따라 상환하며, 불쏘시게 용 건초는 현지정부에서 일률적으로 구매해 시장 가격으로 제공하겠다고 제안하는 한편, 김일성이 평양이북의 덕천으로 이전해있으며 지원군의 지휘부도 그곳에 설치하기를 희망한다고 했다.

션즈화는 박일우의 이말을 북한이 중국군에 대한 지휘권을 행사했다는 것으로 해석(383)하고 있으나 그에 대해서는 확인이 필요하다. 당시 급박한 상황에서 김일성이 중국군에 대한 지휘권을 행사하겠다고 할 가능성은 거의 없기 때문이다.

오히려 김일성은 중국군에게 좌지우지 되지 않기 위해서 북한군에 대한 지휘권을 확고하게 유지하려고 했다고 해석하는 것이 타당하기 때문이다. 김일성이 쌍방의 지휘부를 함께 설치하자고 제안한 이유를 확인할 필요가 있다.(383, 주 79 마오쩌둥이 김일성에게 보낸 전보, 1950년 10월 8일, 펑더화이가 마오쩌뚱에게 보낸 전보, 1950년 10월 10일)

스탈린은 10월 1일 중국에게 파병을 제안하면서 지원군은 “당연히 중국지휘관의 통솔을 받는다”고 분명하게 이야기 했다.(383, 주80, 스탈린이 로쉰에게 보낸 전보, 1950년 10월 1일. АПРФ, ф. 45, оп. 1, д. 334, лл. 97-98) 스탈린이 중국지휘관에게 통솔을 받는다고 언급한 것은 두가지 측면에서 해석할 수 있다. 중국군은 북한지휘부나 소련의 군사고문단에 의해 지휘를 받지 않는다는 것이다. 스탈린의 의미는 중국군의 작전에 소련군사고문이 개입하지 않는다는 것으로 해석하는 것이 더 타당할 것이다.

북한군은 당시 정상적인 작전을 수행하기 곤란한 상황이었다. 시급하게 부대를 재편하는 상황이어서 지휘권 운운할 수 있지 못했다.

10월 21일 펑더화이와 김일성이 대유동에서 첫 대면했을 때도 쌍방은 지휘권 통일에 관한 문제가 논의되지 않았다. 양쪽 군대가 어떻게 협력할 것인가를 논의하면서 김일성은 박일우와 펑더화이와 연락을 담당하도록 하자는데 동의했다.(384)

10월 25일 중공중앙은 박일우를 지원군 부사령관 겸 정치위원 당위원회 부서기로 임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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션즈화의 조선전쟁 부록 4-4 인천상륙작전이후 중국의 파병관련 입장들

김일성과 모택동.jpg

9월 21일 리우샤오치는 로쉰에게 마오쩌뚱은 만약 미군이 조선에서 우위를 차지하면, ‘중국은 조선을 지원할 의무가 있다’고 생각하고 있다고 말했다.(379, 주72, АПРФ. Ф.45, оп.1,.331, лл.133-135; Торкунов Загадочная война, с. 109-111)

중국은 소련에게 파병할 준비가 되어 있다는 점을 지속적으로 통보했다. 그러나 소련은 반응이 없었다.

9월 30일 모스크바는 서울이 함락되었을 가능성이 있고, 인민군 주력부대가 북쪽으로 철수하는 도로 역시 파괴되었고 연락도 두절되었다는 쉬티코프의 보고를 받음

북한은 새로운 부대를 조직해 효과적인 저항을 할 수 없는 처지였음,

정치국은 스탈린에게 보내는 편지를 통과시키고 소련 공군의 엄호를 요청함. 동시에 중국의 지원을 암시하는 편지의 초안도 작성함

이날밤 김일성은 스탈린에게 직접적인 군사지원을 요청하는 편지를 보내면서 만약 불가능하다면, 중국과 기타 인민민주국가들의국제적인 지원군 구성을 도와달라고 요청함(381, 주76, 김일성이 스탈린에게 보낸 편지, 1950년 9월 30일, АПРФ, ф. 45, оп. 1, д. 347, лл. 41-45, 46-49.)

스탈린은 이런 상황이 되어서야 중국군의 파병을 허락함

10월 1일, 스탈린은 마오쩌뚱에게 전보를 보내 중국군이 지원군의 형식으로 조선에 참전해 38선 이북지역에 방어선을 구축할 것을 요청함

스탈린은 마오에게 “조선 동지들에게 이일을 언급한 적이 없으며 앞으로도 이야기할 계획이 없는데, 조선 동지들이 이 소식을 들으면 매우 기뻐할 것이다”라고 함
(381, 주77, 스탈린이 로쉰에게 보낸 전보, 1950년 10월 1일, АПРФ, ф. 45, оп. 1, д. 334, лл. 97-98.)

스탈린이 이런 태도를 취한 것은 무슨 이유일까?
10월 1일 스탈린의 전보를 받은 이후 10월 19일 지원군이 압록강을 건널때까지 마오쩌뚱은 내부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중국단독으로 파병하여 전쟁을 하기로 결정했음.

북한은 중국의 파병과 관련하여 모스크바의 결정에 따라 행동함.

중국군의 파병이후 중국과 북한의 일련의 갈등이 발생할 때 모스크바는 기본적으로 중국의 주장을 지지하는 입장을 견지함

결국 한국전쟁에 있어서 결정적인 역할을 행사한 것은 소련과 중국이었다는 이야기임. 소련은 북한에 대해 우월적 지위를 가지고 있었음. 당연히 중국이 참전하자 중국의 북한에 대한 우월적 지위를 인정해준 것

김일성은 소련과 중국으로부터 겪었던 경험을 바탕으로 주체사상을 주장하게 된 것으로 파악해야 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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션즈화의 조선전쟁 부록 4-3 인천 상륙작전 즈음 김일성의 중국 참전관련 입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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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탈린의 입장확인 이후 김일성의 태도

김일성은 중공군 개입에 부정적인 스탈린의 태도를 확인한 이후 중공군의 개입을 포기하고 낙동강 전선을 최대한 빨리 종결시키고자 했다.

9월 4일 차이청원이 김일성에게 전쟁이 교착상태라고 문제를 제기하자, 김일성은 “부산전투가 이미 시작되었으며. 정예돌격대가 투입되면 교착상태를 깨뜨릴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미군의 후방상륙가능성도 부정적으로 평가했다.
“현재 미군이 반격을 개시하기는 불가능하다고 예측한다. 비교적 대규모의 병력증강이 없다면 그들이 우리 후방항구에 상륙하는것은 매우 어렵다.”고 하면서 “1개월 내에 전쟁이 종결될 것”이라고 말했다.

스탈린에게 미군의 후방상륙을 걱정하던 김일성은 완전하게 입장을 바꾸었다.

차이청원은 중국에 돌아가 조선의 상황을 보고하고 조우언라이의 긴급지시를 김일성에게 보고했다.
조우원라이는 차이청원을 통해 김일성에게 “전략적 후퇴에 대해 고민하기를 바란다”고 했다. 그러나 김일성은 후퇴에 대해 전혀 고려한 적이 없다는 입장이었다.
(378, 주 68)

당시 상황을 정확하게 평가하고 있었던 것은 중국이었다. 특히 조우언라이의 전략적 후퇴는 그때 당시 가장 적절한 조언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김일성은 이를 수용하지 않았다.

가장 결정적인 순간에 스탈린의 잘못된 상황평가와 김일성의 스탈린에 대한 지나친 의존은 결정적인 판단미스를 초래한 것이다.

인천상륙작전 이후의 상황(중국과 소련간)

9월 15일 미군의 인천상륙이후 마오쩌뚱은 참전할 수 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9월 18일 조우언라이는 로쉰과 소련 군사고문을 불러 중국의 참전가능성에 대한 소련의 입장을 타진했다.

“현재 서방국가들은 소련과 중국의 참전 가능성과 이로 인한 군사적 충돌가능성을 우려하고 있으므로 ‘이러한 공포심을 이용하여 우리의 의도를 보여줄 수 있는 조치를 취해야 하며, 이런 의미에서 중국군을 남방에서 동베이지역으로 이동시키면, 미국과 영국정부가 불안해 할 것이다’라고 말했다.
(379, 주69, АПРФ. Ф.45, оп.1, д.331, лл.123-126; Торкунов Загадочная война, с. 106-108)

저우언라이가 이런 말은 한 것은 중국의 참전에 대해 스탈린이 여전히 부정적인 입장인지를 확인해 보고자 하는 것으로 보인다.

상황이 심각해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스탈린은 조우언라이가 제안한 중국의 파병문제에 대해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

9월 19일 조우언라이는 주중대사 이주연을 불러 로쉰에게 했던 것과 같은 말을 했다. 이어서 미군 인천상륙후 “조선정부는 중국정부에 대해 무엇을 요구하는가 ?”라고 물었다.
(380, 주730, АПРФ. Ф.45, оп.1, д.331, лл.133-135; Торкунов Загадочная война, с. 109)

조우언라이가 소련과 북한에게 각각 이런 이야기를 한 이유는 무엇일까? 북한과 소련의 사이를 갈라놓기 위한 것으로 추정가능할 것임

9월 20일, 김일성은 소련대사에게 조우언라이의 말을 소개하면서 “만약 적군이 후방에 상륙하면 중국이 자신의 군대를 이용해 조선을 도와주기로 했다”는 협정이 하나 존재한다고 설명했다.
(여기에서 말하는 협정이 어떤 의미인지는 분명하지 않다. 이것이 괴뢰군 연혁에서 말한 조중방위조약을 의미하는 것인지 별개의 협정인지는 추가로 확인해 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김일성은 쉬티코프에게 중국에 어떻게 대답해야 하는가를 물었으나 할말이 없다고 말을 하지 않았다.
이어서 김일성은 중국군이 매우 뛰어나고 전투경험이 많지만 미국전투기가 공습을 계속하고 있어서 그들이 어떤 성과를 거둘 수 있는지 말하기 어렵다고 말했다.

조선의 간부들도 “중국군이 참전하더라도 공군의 엄호가 없으면 전투가 어려울 것”이라고 말했다.
박헌영은 중국의 참전을 희망한다고 명확하게 이야기 했다.

9월 21일 조선노동당 정치국은 조우언라이의 제안에 어떻게 답할 것인가를 토의

박헌영, 김두봉, 박일우는 조선의 힘으로 미국을 패배시킬 수 없기 때문에 반드시 중국정부의 파병을 요청해야 한다고 주장

이에 대해 김일성은 유보적인 입장을 견지

“우리가 요청한 무기를 모두 소련이 지원했는데, 우리가 무엇을 근거로 중국에 원조를 요청할 것인가?… 소련과 중국은 미국이 조선을 완전히 점령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을 것”이라고 하면서 “중국정부에 대한 파병요청 결의를 잠시 보류하고, 스탈린에게 편지를 보내 중국군에 대한 지원요청에 관한 의견을 들어보자”고 제안

“만약 소련에게 이문제에 대한 지시를 요청하지 않은 채 임의로 중국군의 지원을 요청하면, 소련은 우리가 군사고문과무기를 지원했는데 그것으로 부족한가?”라고 불만을 가질 수 있다고 강조하는 한편,

‘만약 조선이 신속하게 새로운 부대를 구성하면 중국에 지원을 요청할 필요가 없을 것이라고 말했고, 그날 조선노동당 정치국은 아무런 결론을 내지 못했다. (381, 주75, 1950년 9월 22일, ЦАМОРФ, ф.5, оп.918795, д.125, лл.89-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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션즈화의 조선전쟁 부록 4-2 한국전쟁 참전관련 마오쩌뚱, 김일성, 스탈린의 입장차이(8월부터 인천상륙작전이전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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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오쩌뚱입장

8월 들어 낙동강에서 교착상황이 전개되자 마오쩌뚱은 파병준비를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8월 11일 동북지역에 집결해 있던 제13병단은 마오쩌뚱의 지시로 각군단과 사단 간부들이 참가하는 회의를 개최
동베이군구 사령관겸 정치위원인 가오강은 “조선에 갈때에는 지원군의 명의로 참전하고 조선군 복장, 번호 및 깃발을 사용하고 중요간부는 조선식 이름으로 바꿔서 사용하게 될 것”이라고 하면서 기간내에 준비를 완료하라고 지시
(군사과학원군상역사연구부, 항미원조전쟁사 제1권, 군사과학출판사, 2000, pp.91-92)

8월 19일과 28일 마오쩌뚱은 유딘과 두차례의 대화를 통해 “만약 미군이 계속해서 병력을 증가시킨다면 조선에만 의존해서는 대결할 수 없고 중국의 직접적인 지원이 필요할 것이다. 그런데 최근 상황을 보면 미국은 조선에 대규모 병력을 증파하기로 결심했음(АВПРФ, Хронология основных событий кануна, с.45, 47)

8월과 9월 초 마오쩌뚱은 두차례에 걸처 이상조를 접견하여, ‘인민군의 실수는 충분한 예비병력을 준비하지 않고 모든 전선에 고르게 병사를 배치한 채, 적들을 섬멸하지 않고 단지 적을 격퇴해서 영토를 점령하려 한데 있다고 지적, 그는 특히 인천-서울, 남포-평양 등의 주요 핵심지역은 적들의 습격을 받을 수 있기 때문에 퇴각과 병력의 재배치 문제에 대해 반드시 고려했어야 한다고 지적’(376,, 주 63 )

9월초 마오쩌둥이 한차례 더 재촉하여, 변방군의 동원 계획이 70만으로 증가했으며 보충병도 20만으로 이르렀고 무장도 강화(376, 주 64, 건국이래주은래문고 제3책, pp.247-251)

김일성의 입장

김일성은 중국의 의도를 파악하고 모스크바의 의견을 확인하고자 했다.

8월 26일 김일성은 미군이 인천과 수원에 상륙을 계획하고 있다는 정보를 소련 대사에게 전화로 통보

8월 26일 저녁 김일성은 자신의 비서 문일을 통해 스티코르에게 다음과 같이 언급

“현재 인민군의 상황이 너무 어렵기 때문에, 군대를 파병해서 조선을 지원해 달라고 중국에 요청하고 싶은 생각이 간절한데 이에 대해 모스크바의 견해를 알고 싶다”

김일성이 이 문제를 조선 노동당 정치국에서 토론하겠다고 언급

쉬티코프는 이런 상황을 다음과 같이 보고

“최근 김일성이 갈수록 자신의 힘으로 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을 것이라는 자신감을 상실하고 있으며 수차례에 걸쳐 소련대사관의 동의를 얻어 중국군이 조선을 지원해주도록 요청하고 있다”
(377, 주 66, 쉬티코프가 비신스키에게 보낸 전문 1950년 8월 29일, ЦАМОРФ, ф.5, оп.918795, д.1227, лл.666-669)

스탈린의 입장

스탈린은 국제적인 원조를 제공해 달라는 김일성의 요구를 명확하게 거절했다. 이는 중국이 조선전쟁에 개입하게 되어 조선에 대한 소련의 통제력을 상실하거나 동북아 정세가 복잡해지는 것을 원치 않았기 때문이다.

8월 28일자 전보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소공중앙은 침략자들이 곧 조선에서 쫓겨날 것이라는 사실을 전혀 의심하지 않는다, 침략자들과의 싸움에서 연속적인 승리를 거두지 못하고 있다고 불안해 할 필요는 없다. 승리는 약간의 좌절 심지어는 부분적인 실패를 수반할 수도 있다…. 만약 필요하다면 조선의 공군에 다시 공격기와 전투기를 제공할 수 있다”
(377. 주 66, 스탈린이 쉬티코프에게 보낸 전보, 1950년 8월 28일, АПРФ. Ф.45, оп.1, д.347, лл.5-6, 10-11)

스탈린의 입장에 대한 김일성의 반응

김일성은 스탈린의 입장을 확인하고 나서 이를 정치국위원에게 스탈린의 전보를 열람시켜야 한다고 했다. “일부 정치국 위원들의 견해가 일치 하지 않은데, 이편지의 내용을 그들이 이해하면 좋을 것이다”라는 것이었다.
(378, 주 67, 쉬티코프가 스탈린에게 보낸 전보, 1950년 8월 30일, АПРФ. Ф.45, оп.1, д.347, лл.12-13.)

김일성은 중국의 원조를 요청하지 않은데에 대해 정치국 위원들에게 핑계를 제시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전황이 점점 불리해지는 상황에서 김일성이 스탈린의 방침에서 벗어나지 못하면서 위기는 가중되었다.

스탈린의 의사를 파악한 김일성은 다시는 중국의 원조를 고려하지 않았고 모든 희망을 모스크바에 걸었다.

한국전쟁에서 결정적 국면은 바로 이지점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만일 이때 중국이 병력을 지원했으면 전쟁은 끝날 수 있었다. 그러나 스탈린은 중국의 개입으로 인한 상황변화를 바라지 않았고 김일성은 스탈린의 지시를 거부할 수 없었다.

스탈린도 이런 상황에서 북한이 전쟁에서 승리할 것이라고 생각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그런데 왜 결정적인 순간에 중국군의 진입을 허락하지 않았을까? 이것을 무엇으로 설명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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션즈화의 조선전쟁 부록 4-1 중국의 한국전쟁 참전결정 과정 1950년 (8월이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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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쟁 발발이후 중국은 북한에 대한 지원을 적극적으로 실시한다. 전쟁결정과정에서 김일성은 대만을 우선시한 마오쩌뚱에게 부정적이었지만 전쟁이 시작되면서 중국의 지원을 환영한다.

중국은 다양한 상황을 고려한 대비책을 강구했다.

먼저 미국이 38선을 넘어 진격한다면 인민군 복장을 한 지원군을 구성해 미국에 대항할 것임을 강조했다. 당시 동북지역에 3개군단 12만명의 병력이 집결되어 있었다. 중국이 동북변방군의 설립을 정식으로 결정한 것은 7월 13일이었다. 그러나 이런 결정을 내리기 며칠전에 저우언라이는 소련측에 그런 생각을 이미 이야기 했다.(372, 주52)

7월 4일에는 이미 중국 정보총국 국장 조우따펑은 어떻게 하면 산동반도 항구를 통해 조선군을 남한으로 이동시킬 수 있고, 중국의 군사전문가를 남한의 전쟁터로 보내 인민군을 도울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한 구체적인 방안도 고민할 정도였다. (372, 주 53)

7월 12일 조우언라이는 김일성에게 중국이 적극적으로 지원할 것임을 통보했다.

“중국은 미국이 조선에 개입하는 것을 용납하지 않을 것이며, 중국정부는 이 전쟁에서 조선에 필요한 모든 것을 지원하기 위해 최선을 다할 것”이라고 하면서 ‘중국에 10만분의 1, 20만분의 1, 50만 분의 1 비율로 제작된 지도 각 500장씩을 제공하고 전선의 상황을 통보해주고 인민군 군복 견본을 가능한 한 빨리 제공해 줄 것을 요구했다’
(373, 주 56, 주은래연보, 상권 p.51.)

김일성는 중국의 이런 지원에 반색했던 것 같다. 김일성은 즉각 이런 상황을 소련대사에게 보고하면서 “이미 미국 등이 이승만 편에서 전쟁에 참가했으니 체코슬로바키아, 중국 등과 같은 민주국가들도 자신들의 군대를 조선에 파견해주면 어떠냐고 제안했다.”

7월 19일 김일성은 베이징의 북한대표와 마오쩌뚱간 회담내용을 소련대사에게 보고했다.

“마오쩌뚱은 미국이 장기적으로 참전할 것이며 조선에 더 많은 병력을 투입할 것으로 판단하고 있습니다. 그는 적에 대한 공격을 중단하고 주력부대를 정돈할 것을 제게 제안했으며, 조선에 무기와 군수물자를 제공하기로 승락했습니다. 만약 조선이 지원을 원하면 중국은 군대를 파견할 수 있으며, 이를 위해 이미 4개군단 32만면의 병력을 준비해놓고 있으니 8월 10일 이전에 의견을 표명할 것을 바라고 있다”는것이다.

그러나 김일성은 소련으로부터 어떠한 대답도 듣지 못했다. 김일성은 마오쩌뚱과 스탈린이 이문제데 해서 이미 협의를 실시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마오쩌뚱은 이 문제에 대해 스탈린과 충분한 토의를 하지 않았던 것이다.

스탈린은 김일성의 요구에 답변을 하지 않았다. 스탈린은 중국의 개입은 미군이 38선을 넘어서 진격하는 경우라고 말했다(이 근거를 찾아 보아야 함). 소련의 지원으로 김일성이 승리할 수 있다면 굳이 중국의 지원까지 필요하지 않다고 생각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김일성도 스탈린의 이런 구상을 이해했던 것으로 보인다. 초기에는 중국의 지원제안에 적극적이었으나 시간이 지나면서 태도가 달라졌다. 중국대사관에 제공하는 정보도 방송의 수준을 넘지 않았다. 중국 무관부 요원을 인민군 부대에 파견하여 참관하게 해달라고 하는 요구도거절했다. 중공군과 같이 싸웠던 연안파 간부들도 엄격하게 통제받고 있었다. 이와함께 중국군이 조선의 상황을 파악하기 위해 참모단을 파견하겠다는 계획도 거부당했다. 조우언라이는 소련대사에게 북한이 동의하지 않아서 참모단을 제대로 파견하지 못했다고 말했다. ( АВПРФ, Хронология основных событий кануна, сс.52-54)

상기내용은 Goncharov의 Uncertain Partner, p.163)에도 기술되어 있다.(확인 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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션즈화의 조선전쟁 3-2 대만문제와 한반도 문제에 관한 스탈린. 마오쩌뚱. 김일성의 입장차이

김일성 모택동 스탈린.jpg

션즈화는 중국이 스탈린에게 북한에 대한 기득권을 양보한 듯한 언급을 한다.
“마오쩌둥과의 회담에서 소련이 중요한 양보를 했기 때문에, 이에 따른 손실을 보완하기 위해 소련은 태평양 진출을 위한 항구와 부동항을 유지할 필요가 있었고, 따라서 스탈린은 조선을 자신의 세력범위 안에 포함시키기로 결심했다”(368)는 것이다.

그러나 스탈린은 이미 북한을 완전하게 장악하고 있었기 때문에 북한을 자신의 세력범위안에 포함시키고 말고할 상황이 아니었다.

당시 1950년 초부터 한국전쟁끼지 스탈린과 모택동 그리고 김일성사이에 어떤 이야기가 오갔는가 하는 문제는 스탈린이 어떻게 세계전략을 구상하고 수행했는지 이해하는데 중요하다.

1950년 1월 30일 스탈린은 김일성이 모스크바에 와서 한반도 전쟁에 관한 계획을 구체적으로 협의하자고 평양에 통보했다.

한편 스탈린은 북한과 논의한 문제를 당시 모스크바를 방문중이었던 마오쩌뚱에게 전혀 알리지 않았다고 션즈화는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당시 스탈린이 마오쩌둥의 대화는 철저하게 비밀로 이루어졌다. 특히 스탈린과 마오쩌둥간 마지막 단독회담의 내용은 전혀 알려지지 않았다. 따라서 지금까지 자료가 발견되지 않았다고 해서 스탈린과 마오쩌둥이 한국전쟁에 관해 서로 의견을 나누지 않았다고 보는 것은 성급하다.

스탈린이 마지막 순간에 북한에게 마오쩌뚱의 허가를 받아야 한다고 한 것의 의미를 어떻게 해석해야 할 것인가하는 문제가 남는다. 이는 아시아 혁명에서 중국의 역할을 강조했던 것과 서로 연계시키지 않을 수 없다.

한국전쟁 중에 모택동이 스탈린의 지도를 수용한 것은 아시아 공산주의 운동에서 중국의 주도적 역할이라는 당근을 포기하기 어려웠기 때문이라고 해석해도 무리가 없다.

한편 김일성은 중국의 영향력을 인정받고 싶어하지 않았다. 스탈린의 요구에 따라 5월 12일 베이징을 비밀리에 방문하기로 결정했지만 중국의 개입을 달가워하지 않았다. 스탈린의 지시에 따라 모스크바에서 스탈린과 김일성의 회담결과를 설명했다.

그러나 김일성은 마오쩌뚱을 만나고 싶지 않았으며, 스탈린에게 ‘자신의 모든 요구가 모스크바에서 충족되었기 때문에 조선은 다시는 중국의 원조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는 의사를 전달했다.’(368, 주 43. 쉬티코프가 비신스키에게 보낸 전보. АВПРФ, ф.059а, оп.5а, п.11, д.3. лл.100-103)

한편, 50년 5월 13일 베이징에서 북한과 중국의 회담은 순조롭지 않았다. 중국은 북한으로부터 스탈린과 합의한 내용을 들었으나 이는 자신들이 과거에 스탈린과 합의한 내용과 달랐던 것으로 보인다. 13일 23시 30분 조우언라이가 소련대사관에 와서 김일성이 통보한 내용에 대한 스탈린의 설명이 필요하다는 것이다.(369, 주44, 로쉰이 모스크바에 보낸 전보, 1950년 5월 13일, 심지화편 조선전쟁해밀문건 p.383)

스탈린은 5월 14일 중국에 다음과 같이 회신을 했다.
“조선동지와의 회담에서 스탈린동지와 그의 동료들은 국제정세의 변화를 고려해 통일을 실현하기 위한 조선인들의 제안에 동의했다… 이 문제는 최종적으로 반드시 중국과 조선의 동지들이 공동으로 해결해야 하며, 만약 중국 동지들이 동의하지 않는다면,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해야 할지 다시 토론해야 한다”(369, 주 45, 스탈린이 마오쩌뚱에게 보낸 전보, 1950년 5월 14일, АПРФ, ф.45, оп.1, д.331. л.55)

스탈린의 답변에 대한 마오쩌뚱의 대응은 매우 미온적이다. 마오쩌뚱은 스탈린의 결정에 반대하거나 유감을 표한다거나 하는 행위를 하지 않았다. 그는 모스크바의 견해에 찬성을 표했다. 여기서 중국이 조중조약의 체결을 통일후로 미루겠다는 정도로만 답변했다. 션즈화는 조중조약의 체결을 미루자고 제안 한 것이 마오쩌뚱의 불만을 의미한다고 설명했지만 그 설명이 타당한지는 불확실하다.

한편 5월 15일 김일성과 마오쩌뚱의 회담내용은 당시 소련과 중국간 어떤 이야기가 오갔는지를 암시하고 있다.

“마오쩌뚱은 중국이 대만을 점령한 후 조선이 남쪽을 공격하면 중국이 조선에 충분한 지원을 할 수 있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러나 조선이 현재 공격을 개시하기로 결정했으면, 이것 또한 중국과 조선의 공동과제이기 때문에 이 결정에 동의하면서 필요한 지원을 하기 위한 준비를 하기로 했다고 말했다. 마오쩌뚱은 만약 미국이 참전하면 중국도 곧 부대를 파견해 조선을 지원할 것이라고 말하면서, 조선과 중국의 변경지역으로 일부 중국군을 이동시킬 필요가 있는지 또는 무기와 탄약의 지원이 필요한 것인가를 물었다.”(370, 주 47, Goncharov, Lewis and Xue, Uncertain Partner, p.145)”

김일성은 마오쩌뚱의 제안을 받아 들이지 않았다.
마오쩌뚱이 김일성에게 언급한 내용중 ‘중국이 대만을 점령한 후 조선이 남쪽을 공격하면 중국이 조선에 충분한 지원을 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한 점이다. 무엇을 우선순서로 삼는가하는 것은 중요하다. 중국이 당황한 것은 한국전쟁을 개시한다는 것이 아니라, 당시 아시아에서의 과업 우선순서에 관한 것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아마 중국은 소련에게 대만을 먼저 점령하는 문제를 제기했을 것이고, 스탈린은 그에 대해 확답을 하지 않은 상태에서 김일성을 통해 한국전쟁을 먼저 수행하겠다는 결정을 통보한 것으로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
당시 상황에서 스탈린이 한반도 문제를 먼저 해결해야 하겠다고 판단한 것은 당연했을 것이다. 대만을 점령하려면 소련의 대규모 공군과 해군지원이 필수적이었고, 이는 미국과 소련의 충돌이 불가피했다. 따라서 소련이 직접 개입하지 않을 수 있는 한국전쟁을 우선시한 것은 스탈린에게 있어서 너무나 당연한 결정이었다.

5월 15일 마오쩌뚱과 김일성의 대화에서, 마오쩌뚱이 미국이 참전하면 중국도 참전할 것이라고 말했다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즉 당시 마오쩌뚱과 스탈린은 이미 미국개입시 어떻게 할 것인가에 대해 충분하게 협의를 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리고 중국의 전쟁개입 결정이 이미 한국전쟁 이전에 내려져 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렇게 보면 1950년 10월 중반이후 중국이 한국전쟁에 개입하는 문제로 스탈린과 미묘한 갈등을 빗은 것은 무엇으로 설명할 수 있을까?

김일성이 마오쩌뚱에 대해 불만을 표시한 것은 당연한 것이었다. 김일성은 스탈린과 마오쩌뚱간에 대만문제와 한반도 문제에 대한 해결문제로 서로 의견교환을 한 것을 알고 있었을 것이다. 대만문제를 먼저 해결하겠다는 중국의 의도를 잘 알고 있었던 김일성이 중국에게 호의적일 수는 없었을 것이다.

“김일성은 조선이 중국혁명의 승리를 위해 지대한 공헌을 한 상황에서, 혁명성공 후 즉각적인 조선의 통일과 해방에 대한 염원을 만족시켜주지 못하는 마오쩌뚱의 태도에 불만을 품는 것”은 당연하다고 할 것이기 때문이다.(370)

결국 1950년 1월부터 1950년 5월 15일까지 스탈린과 마오쩌뚱 그리고 김일성이 서로 논의한 것은 아시아 혁명의 우선순서에 관한 문제라고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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