션즈화의 조선전쟁 부록 7-1 정전시기 관련 입장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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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1년 7월부터 전쟁종료시까지 전투와 휴전을 반복했으며, 그 2년동안 중조 쌍방은 정전에 관한 입장차이를 노정

5차 전역이후 중국은 전쟁지속이 어렵다고 봄. 1951년 5월 하순 마오쩌뚱은 중공중앙회의를 개최하여 ‘협상과 전투를 병행하면서 회담 해결을 위해 노력한다는 방침을 채택(408, 주142)

김일성은 전쟁의 장기화 방침에 반대하면서 중조연합군이 6월말부터 7월 중순사이에 총공격을 다시 한번 전개해야 한다는 입장

마오쩌뚱은 6월 3일 김일성은 베이징으로 초청 협상, 결과 김일성는 6-7월 공격을 하지 않는 대신 좀더 준비를 한 후 8월 경에 한차례 반격을 요구(408, 주 143, 김일성이 펑더화이에게 보낸 전보, 1951년 5월 30일, 마오쩌뚱이 펑더화이에게 보낸 전보, 1951년 6월 11일)

마오쩌뚱은 스탈린에게 김일성의 설득을 요청, 6월 10일 김일성과 가오강은 소련의 항공기를 타고 모스크바로 가 스탈린과 의견을 교환한 후 정전협상의견을 수용하고 그 내용을 6월 13일 마오쩌뚱에게 보고하라는 지시를 수용함

귀국한 김일성은 6월 23일 유엔주재 소련대표 말리크가 정전회담을 촉구하는 발언을 한 것은 ‘중국이 정전을 달성하기 위한 가장 명확한 표시라고 판단하고, 동시에 말리크가 성명을 발표한 후 수일동안 조선의 언론계와 기타 선전기관들이 그의 발언에 상세한 해석이나 평론을 전혀 내놓지 않은 것 때문에 기분이 매우 울적’
(션즈화가 써 놓은 당시 김일성의 기분의 의미를 무슨 뜻으로 이해해야 할지 파악하기 곤란)(409)

조선지도자들은 중국대표단(책임자 리커농)이 미국인들에게 지나치게 관대하게 양보했다고 판단했으며, 동시에 중국인들이 담판과정에서 조선대표단의 의견을 제때 충분하게 수용하지 않은 점에 대해서도 불만

특히 7월 27일 마오쩌뚱이 김ㅇ릴성에게 “만약 미국이 현재의 전선을 분계점으로 할 것을 고수하면, 중국은 미국이 양보한 것으로 판단한다”고 통지

김일성은 이에 대해 극도의 불만을 나타냄 “이런 양보는 조선에게 심각한 정치적 타격을 주기 때문에 불가능하다”고 답을 보냈으며, 박헌영에게 “나는 중국의 지원없이 계속 전쟁을 하더라도, 이런 양보는 하고 싶지 않다”고 말함(409)

라주바예프는 “최근 몇개월 동안 조선인들의 중국인들에 대한 태도가 명백하게 냉담해졌으며, 조선인들은 좀더 단호하게 소련의 방침에 의지하게 되었다”는 점에 주목했다(409, 주146, 심지화편, 조선전쟁해밀문건, pp.1022-10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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션즈화의 조선전쟁 부록 6-2 중공군의 제2차 전역이후 남진, 김일성과 팽더화이 2차 논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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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월 11일 펑더화이는 마오쩌뚱의 급전을 받았다. 김일성의 휴식을 줄이자는 주장에 대해 스탈린의 주장을 근거로

“인민군 1,2,3,5 군단은 모두 한강 이남에 제1선을 구축하고, 지원군은 인천 및 한강이북으로 철수해 2-3개월 동안 휴식을 취하며, 인천과 서울은 지원군이 경비를 맡는다. 인민군은 현재 동베이지역에서 훈련을 받고 있는 신병으로 보충하고, 만약 김일성이 휴식과 보충이 필요하지 않다고 판단하면 계속해서 진군할 수 있으며, 인민군이 진격해서 적을 공격할 때에는 조선정부가 직접 지위하고, 지원군은 인천,서울,및 38선 이북의 방어를 담당한다”는 내용을 제안

이어서 펑더화이와 김일성 박헌영간 휴식기간을 줄이는 문제로 치열한 논쟁이 진행되었으며 펑더화이의 완강한 입장으로 결국 김일성도 2달의 휴식과 정돈에 동의했다(그 과정은 396-397)

그러나 김일성은 중국의 태도에 대해 불만이 많았다. 북한주재소련대사는 김일성의 불만을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미군이 조선에서 철수를 준비하고 있을 때, 중국군은 수원에서 38선 지역으로 철수하면서 대규모의 공격을 포기했으며, 종종 준비가 안된 부대를 파견해 공격에 참가시키면서 노골적으로 38선 지역에서 전투를 중단했는데, 이런 모든 행동은 중국 지도자들에 대해 조선 지도자들이 갖고 있던 존경심에 영향을 주었으며, 조선인들도 중국이 어떤 어려움에 처해있는지 확실히 알게 되었다.”(398, 주 118 라주바예프가 모스크바에 보낸전보, 1951년 9월 10일 심지화편, 조선전쟁해밀문건, pp.1022-1026)

전쟁이 끝난후 조선노동당 내부에서는 중국이 한반도를 완전하게 통일하려 하지 않았다는 소문돌았다.

페도렌코가 제출한 보고서에 따르면 ‘지원군이 1951년초 적들이 실패에 직면했을 때, 조선을 완전히 해방시키는 것을 원하지 않는 것 같았다’는 소문이 떠돌았다.(398, 주119 1954년 4월, ЦХСД, ф.5, оп.28, д.314, л.48)

펑더화이의 이런 태도를 어떻게 인식해야 할 것인가 ? 션즈화는 ‘군사적인 각도에서, 펑더화이의 주장은 당연히 실사구사적이며 충분한 근거가 있는 반면, 김일성은 오로지 자기 입장만 생각하면서 앞뒤를 가리지 않은 채 행동했는데, 이는 정치적 고려와 함께 다른 요인의 영향을 받은 것이 확실하다’고 평가했다.

김일성이 제3차 전역이후 조속하게 전투행위를 계속하려고 한 것은 가급적 많은 영토를 확보하기 위해서 였다. 미군을 완전히 축출하기 어렵다고 느꼈던 것임에 틀림이 없다.

그러나 펑더화이는 애초에 전쟁을 수행하되 미국을 완전하게 축출하기 보다는 한반도에 그대로 묶어 놓아야 한다는 스탈린의 구상에따라 움직인 것인것으로 평가할 수 있다.

즉 북한과 중국 그리고 소련은 각각 전쟁목표가 달랐던 것이다. 그 결과 김일성은 최대한 남쪽으로 내려가 지역을 확보함으로써 종전후 유리한 입장에 서고자 했던 것이다. 이문제에 대해서는 당시 북한의 노동신문이나 이시기의 북한 문건을 보면 알 수 있을 것 같다.

그러나 중국은 전쟁의 목적을 38선정도에서 유지하는 것으로 설정한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미군에게 결정적인 피해를 입히지 않은 상태에서 유지하는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유엔이 제안한 정전회담(1월 11일 유엔3인위원회)을 도외시한 것은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고민이 필요하다. 당시 중국은 정전회담을 거부했다. 이것을 설명할 수 있는 것은 당시 중국의 전쟁목적이 미국을 한반도에 묶어 놓는 것으로 밖에 설명하기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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션즈화의 조선전쟁 부록 6-1 중공군의 제2차 전역이후 문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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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공군 참전이후 정치와 군사의 관계에 있어서 제2차 전역이후 남진문제는 중요한 주제였다.

제2차 전역이후 펑더화이는 부대의 정돈과 휴식을 요청했다.
“전쟁은 여전히 장기적이고 험난하다. 적들이 진격에서 방어로 전환하고 전선을 축소하여 병력을 집중시키면서, 정면이 협소해지고 종심이 강화되었기 때문에, 다양한 병종이 연합하여 작전하는 것이 유리하다. …적군의 사기가 저하되기는 했지만, 여전히 26만여 병력이 있기 때문에 지금 당장 조선에서 전부 철수할 수 없을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점진적으로 진격해야 한다.”(392, 주 102, 펑더화이가 마오쩌뚱에게 보낸 전보, 1950년 12월 19일, 팽덕회연보, p.456)

저어우언라이도 펑더화이와 동일한 입장이었다.

“서울지역에서 적군을 완전히 섬멸시킬 수 있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적들이 서울을 사수하든 포기하든, 우리 군은 일정기간 동안 휴식을 취해야 한다”고 했다(393, 주103, 건국이래주은래문고, 제3책, pp.625-626)

소련대사는 이에 부정적이었다
“미국이 신속하게 퇴각하면, 우리군도 신속하게 진격해야 한다. 이는 소련대사의 의견일 뿐만 아니라 조선 노동당 중앙의 다수 동지들의 요구다”라고 했다(392)

마오쩌뚱은 즉시 38선을 넘어 진격하라고 지시했지만 이후의 휴식에는 찬성했다.

전쟁상황은 펑더화이의 예상대로 전개되었다. 제3차 전역에서 38선을 돌파하고 서울을 점령했지만, 유엔군은 계획적으로 철수한 것이었기 때문에 중조연합군은 일부 지역을 점령한 것이외에는 적에게 심각한 타격을 주지 못했다.

당시 작전상황은 1951년 1월 3일 펑더화이가 김일성에게 보낸 전문에서 잘 파악할 수 있다.

“적들은 방어선이 무너진 후 신속하게 퇴각하고 있지만, 전과는 그다지 크지 않아 겨우 3000명을 포로로 잡았을 뿐이며, 만약 적군이 계속 남쪽으로 퇴각하면 수원까지 추격한 후 명령을 기다리겠다. 이 전투는 서울, 인천, 수원, 이천 등을 점령한 후 전진을 중단하고 휴식을 취하면서 보충해야 한다. 만약 적군이 서울을 강하게 방어하면 우리는 각종 여건이 성숙되지 않았기 때문에 잠시 강공을 보류하겠다”(393, 주 106)

이와함께 1월 8일 진격을 중단하고 휴식을 취하라는 명령을 전군에 하달했다. 그러나 곧 북한의 강력한 반발에 봉착했다.

김일성은 38도선을 넘어 진격한 후 2달동안 휴식하면서 정비한다는데 동의했지만 신속한 승리를 바라고 있었다.

김일성은 차이청원에게 “부대의 휴식과 정돈은 너무 길 필요가 없고 한달 정도면 충분하다. 만약 너무 길어지면 하천과 논, 밭의 얼음이 녹아내려 부대가 이동하는데 어려움이 가중하고, 적들이 시간을 끌어 장비를 보충하고 숨을 돌리게 될 것이다”라고 말했다(394)

1월 9일 오전 자하로프는 작전중지를 반대했으며 총참모장 대리 니에룽쩐이 설득에도 의견을 굽히지 않았다.

마침 스탈린이 전보를 보내 지원군을 38선 이북과 그 양쪽해안으로 통제하되 인민군은 계속해서 남하하라고 지시했다.(394, 주 111)

1월 10일 밤, 차이청원은 김일성과 함께 펑더화이의 지휘부에 도착했다. 펑더화이는 지금 휴식하면 다음에 더 많은 적을 섬멸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김일성은 휴식에 동의하면서 휴식시간을 가능한 한 줄이자고 제안하면서, 먼저 출동 가능한 3개군을 남진시키고, 다른 부대는 1개월간 휴식시키자고 제안했다.

김일성은 휴식에 동의하면서도 휴식시간을 최대한 줄이자고 제안했다. 먼저 출동 가능한 3개군을 남진시키고, 다른 부대는 1개월간 휴식시키자고 제안했다.

펑더화이는 현재 공격을 진행하면 적들에게 몇개 지역을 포기하게 할 수는 있지만, 적의 주력군을 너무 일찍 부산이라는 협소한 지역에 집중시키기 때문에 분산시켜 섬멸하는데 불리하다고 판단했다.
김일성은 적을 섬멸하지 못하더라도 점령지를 확대하는 것은 매우중요하다고 주장

펑더화이는 영토확장은 먼저 적을 섬멸시키는 것만 못하다고 말함

김일성은 더많은 지역을 점령하여 인구를 증가시키는 것이 문제의 평화적 해결 이후 치뤄질 선거에서도 유리하다고 주장

펑더화이는 너무 많은 것을 고려할 필요가 없으며, 현재 임무는 전투에 승리하고 적을 섬멸하는 하는 것이라고 판단
(김일성은 정치적 측면, 펑더화이는 군사적 측면에서 판단)

평더화이는 9일 마오쩌뚱이 김일성에게 보낸 전보를 전달했다. 김일성은 자신이 주장한 내용은 개인 의견이 아니라 조선노동당정치국의 집단의견이라며, 심야에 박헌영에게 전화를 걸어 즉시 오도록 했다.(395, p.112 팽덕회연보, p. 465)

펑더화이와 김일성의 논쟁은 결론을 맺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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션즈화의 조선전쟁 5-4 조중연합사령부의 성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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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 3일 마오쩌둥과 김일성의 회담에서는 조중연합사령부의 성립에 관한 기본적인 논의가 이루어졌다.

12월 3일 김일성은 베이징에서 마오쩌뚱과 회담에서 ‘스탈린이 전보를 보내. 중국과 조선의 군대는 반드시 통일적으로 지휘해야 하며 지원군이 풍부한 전투경험을 갖고 있기 때문에 중국동지가 정직을 조선동지가 부직을 맡으라고 지시했으며, 조선노동당정치국회의에서도 이에 대해 동의했다’’고 밝혔다.

마오쩌뚱은 펑더화이를 사령관겸 정치위원으로 추천했고, 김일성은 김웅을 부사령관에 박일우를 부정치위원으로 추천했다. 이후의 연합명령은 펑더화이, 김웅, 박일우의 3인이 서명으로 확정하고 지원군에 대한 단독명령은 이전과 동일하게 하기로 결정했다.

연합사령부 성립후 작전 및 전선에 관련된 활동은 연합사령부 지휘로 귀속되었고, 후방의 동원, 훈련, 군정, 경비 등의 사무는 조선정부가 직접 관할하게 되었다.

연합사령부는 필요할경우 후방에 요구와 제안을하게 되었다. 연합사령부는 지원군사령부와 인민군 참모부의 두조직으로 구성되었지만 한 곳에 모여 업무를 처리했다.

연합사령부의 설립은 대외비로 내부의 공문에서만 사용했다.

철로수송과 수리역시 연합사령부에 귀속되었다.

회담후 조우언라이는 ‘중조쌍방연합지휘부의 성립에 관한 중조쌍방의 협의’ 초안을 작성했다.(390, 주 93, 주은래군사활동기사, 하권, pp. 168-169)

12월 7일 북한에 돌아온 김일성은 펑더화이와 구체적인 문제에 대해 협의했다. 쌍방은 수일내 연합사령부를 설립하기로 결정했다. 김일성는 이후 다시는 군사적 지휘문제에 직접 간섭하지 않고, 중국측의 제안을 받아 들이며, 이전 인민군 제3군단의 배치를 취소하고, 가까이 있는 지원군 제9병단 송스룬의 지휘를 받도록 하겠다고 약속했다.
(390, 주 94, 차이청원 방담기록; 마오쩌뚱이 펑더화이에게 보낸 전보, 1950년 12월 6일; 펑더화이가 마오쩌둥에게 보낸 전보, 1950년 12월 7일, 팽덕회연보 p.545)

지상군부대와 달리 공군부대의 연합은 중공군의 참전이후에 이루어졌다.

지원군이 출동해 첫승리를 거둔후 스탈린은 소련공군의 참전을 결정했다.(391, 주98) 중공군 참전결정과정에서 끝까지 공군지원을 거부하던 스탈린은 지원군이 승리하자 공군의 참전을 결정한 것이다.

1950년 10월 29일 소련 고문은 모스크바가 “소련 공군이 안동에서 방공업무를 수행하고 중조변경을 넘나들며 작전을 수행하는데 동의했으며, 10일후 공군기지를 션양에서 안동으로 이전하는 데도 동의했다”고 조우언라이에게 통지함(391, 주99, 건국이래주은래문고, 제3책, p.427)

11월 1일 소련공군이 처음으로 압록강 상공의 전투에 투입.

1951년 1월 초, 자하로프는 소련공군 2개사단이 가까운 시일내 조선에 진입해 집안-강계, 안동-안주 노선을 엄호할 것이라고 통보

4월 초에는 중국공군 5개사단, 조선공군 3개사단이 참전하게 됨

소련고문의 동의하에 중국측은 통일공군지휘부의 설립을 제안함

중국과 조선의 협상을 거쳐 연합사령부 설립 원칙을 참조해 3월 ‘중도공군연합집단군사령부’가 설립됨

그러나 소련공군은 여기에 참여하지 않음

인민군부대의 지휘계선

1951년 4월 15일 중국에서 훈련받던 부대가 조선으로 귀국하면서 인민군은 모두 7개 작전군단을 보유함. 그중 4개군단은 연합사령부의 지휘를 받게 되고, 3개군단은 인민군총사령관의 직속부대가 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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션즈화의 조선전쟁 부록 5-3 지휘권과 북중간 협상의 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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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 15일 김일성과 쉬티코프가 지원군 총부에서 회담을 가졌다. 가오강도 션양에서 도착했다. 펑더화이는 직설적으로 쌍방의 군대에 대한 통일적 지휘의 필요성을 제기했다.

가오강도 한반도가 협소하기 때문에 통일된 지휘가 없으면 전투가 어렵다고 설명했다.

슈티코프는 중국군이 통합지휘를 해야 한다고 명확하게 의사를 표시하면서, 인민군이 최신 소련 장비를 사용하면서 패배한 것을 비판하고, 반대로 지원군이 열악한 장비로 대량의 적군을 섬멸한 것을 찬양했으며, 중국측의 정확한 지휘에 어떤 의심도 없다고 주장했다.

김일성은 인민군의 상황을 설명하면서 지휘권에 대해서는 한마디도 언급하지 않았다.

평더화이는 김일성, 쉬티코프와 3인 소조를 결성해 군사문제를 협상하고 통일적 지휘를 책임지자고 제안했다. 김일성은 여전히 가부를 언급하지 않았다. 쉬티코프는 모스크바에 이문제에 대한 답을 요청하지 않았기 때문에 가부를 표시하지 않았다. 결국 제2차 전역이후 논의하기로 했다. (388, 주 90)

마오쩌뚱은 모스크바의 의견을 요청하기로 하고 11월 13일 스탈린에게 전보를 보내 “김일성 동지와 쉬티코프 동지가 전방에 상주하기를 희망하면서, 김일성, 쉬티코프, 펑더화이로 구성된 3인 소조를 결성하고 이 소조가 부대편성, 작전, 적의 후방진입 및 이와 관련된 수많은 정책들을 포함한 군사정책의 결정을 책임지고 상호간의 의견을 통일시켜 전쟁수행에 도움이 되도록 하자”는 펑더화이의 제안을 전달했다.(387, 주91 항미원조전쟁사 제2권 pp.167-168)
한편 이미 스탈린과 마오쩌둥간에는 북한군에 대한 중국의 지휘에 대해 사전 협의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위에 언급한 전문에서 마오쩌뚱은 “인민군과 지원군이 효과적으로 협력하여 전투를 수행하고, (스탈린) 동지의 제안처럼 상당수의 조선군과 지원군이 혼성으로 편제(조선군의 편제는 그대로 유지, 여기서 괄호는 션즈화의 해석인지 원문에 있는 것인지는 확인이 필요하다) 된다면 전투에서 승리를 보장할 수 있을 것입니다”라고 했다.

전문의 내용을 엄격하게 따져보면 이미 스탈린이 먼저 지휘권 통일에 관한 언급을 마오쩌뚱에 했을 가능성이 있다. 이는 북한의 소련 군사고문이 인민군의 작전지휘능력이 부족하다는 판단이 스탈린의 결정에 작용했을 수도 있다.

11월 17일 마오쩌뚱은 평더화이와 가오강에게 전보를 보내 다음과 같이 지시했다.

“스탈린이 이미 회신을 보냈으며 중국 동지가 통일적 지휘를 하는데 찬성했으며, 김일성과 쉬티코프에게도 전보를 보낼 것”이라고 하면서 “중국 주재 소련 총군사고문인 자하로프도 통일적 지휘를 찬성했다고 전하는 한편, 펑더화이에게 김일성의 반응을 살피라고 지시했다.(389, 주92)

마오쩌뚱과 스탈린이 서로 협의를 하는 과정에서 김일성은 소외되었다. 김일성은 중국군 파병과정과 조중연합사창설과정에서 마오쩌뚱과 스탈린의 협의과정에서 소외되었던 것이다.

10월 1일 파병을 요청하는 스탈린이 마오에게 보내는 전문에서는 당시 김일성이 어느정도 소외되었는지 잘 보여주고 있다.

“조선동지들에게 이 일을 언급한 적이 없으며 앞으로도 이야기할 계획이 없는데, 조선 동지들이 이 소식을 들어면 매우 기뻐할 것이다.”(381, 주 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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션즈화의 조선전쟁 부록 5-2 조중지휘권 통일문제의 대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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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미원조 제1차 전역기간(1950년 10월 25일-11월 5일)에 펑더화이는 중국과 북한간 언어의 불통, 지형의 미숙함, 도로 통제등의 문제에서 협조가 부족해 작전을 수행하는데 어려움을 겪었다(385, 주84, 펑더화이가 마오쩌뚱에게 보낸 전보, 1950년 10월 25일, 11월 2일)

11월 4일 지원군 제39군이 박천 동남쪽에서 미군 제24사단을 협공하고 있을 때, 순천으로 공격하고 있던 인민군 탱크의 공격을 받아 포위되었던 상대편이 탈주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물자 공급, 교통운수 등에서도 통일된 협조와 지휘가 없어서 혼란스러운 상황이 발생했다.

펑더화이는 김일성에게 작전수행 중 지휘통일을 제안하면서, 인민군 총부가 지원군 총부에 가능한 가까운 곳에 위치하기를 희망했다.

11월 78일 펑더화이는 박일우에게 김일성을 만나 다음 사항을 협의하라고 요청했다.

1) 적 후방에 전투거점을 확보하는 문제
쉬티코프가 중국의 주장을 단호하게 지지하면서 김일성은 동의했다.

2) 양국군의 협력문제
김일성은 참모를 파견해 통신연락과 정보교환을 담당할 것을 주장하면서, 양국군 사령부가 가까운 곳에 위치하고 연합지휘하는 것을 반대함

3) 북한이 포로를 학대하는 문제
심지어 영국과 미국 대사관 직원까지 탄압을 받고 있는 문제에 대한 문제 제기, 펑더화이는 완곡하게 의견을 제시했다고 함.(션즈화는 완곡하게 문제를 제기했다고 하지만 여기서 ‘완곡하게’라는 말의 의미를 분명하게 할 필요가 있다. 실제 제대로 이야기 하지 않은 것)

4) 병역을 기피한 조선의 일반군중에 대한 문제
김일성은 지원군이 탈영자들 소환업무를 돕는 것은 동의했으나, 사실상 이들에게 반역죄를 씌워 무력토벌을 준비했다(386, 주86)

펑더화이는 인민군 제6사단이 아직 6,200명 정도 남아 있고, 지원군 125사단과 합류해 있기 때문에 현지에 남아 지원군과 협력해 작전을 진행할수 있기를 희망한다고 김일성에게 전해달라고 중앙군사위원회에 요청했다.

그러나 김일성은 제6사단을 다른 곳으로 이동시키겠다고 주장

이후 제7사단의 5,000여명이 125사단에 합류했고 펑더화이는 이 사단의 잔류를 김일성에게 요청했으나 거부

북한과 북한주둔 소련 군사고문은 펑더화이가 제안한 몇 십 km 철수해 매복해서 제2차 전역(1950년 11월 25-12월 24) 을 준비하자는 방침에 반대하면서 지원군이 계속해서 청천강 이남으로 적을 추격해야 한다고 주장(387, 주87, 펑더화이가 김일성에게 전달하라고 군사위원회에 보낸 전보, 1950년 11월 9일; 펑더화이가 마오쩌뚱에 보낸 전보, 1950년 11월 18일)

김일성은 인민군의 지휘권 이양을 원하지않았다. 한편 션즈화는 김일성이 중국군을 지휘하겠다고 했다고 주장하고 있다.

“이제 막 수십만 인민군을 상실한 상황에서 다시 수십만 중국군을 지휘하겠다는 것은 이해하기 어렵다.”(387)라고 하는 말 자체가 이해하기 어렵다.

중국은 자신들의 참전이 너무 드러나는 것을 바라지 않았다. 조우언라이는 ‘중국지원군’이 아니라 ‘중국인민지원군’임을 특별하게 강조했다. 그리고 11월 2일 전보에는 김일성의 연설에 ‘지원군부대가 인민군총사령부의 지휘아래 작전에 참가했다’라고 할 정도였다. 이는 중국이 정식으로 참전한 것을 숨기기위한 위장이었을 뿐이었다.

오히려 중국은 인민군의 지휘권을 장악하고 싶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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