션즈화의 조선전쟁부록 11-2 56년 8월 종파사건의 발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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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6년 8월 30-31일 조선노동당은 중앙전회를 개최했다. 김일성은 상무위원회에서 만장일치로 통과된 보고서였다.

연안파 간부이자 무역상인 윤공흠이 발언대에 나섰다. 그는 비판적인 어조로 당내에 존재하는 잘못된 경향을 비판했다. 그의 발언은 여러차례 정지당했고, 일단의 고함속에 파묻히기도 했다. 최용건은 일어나 욕설을 퍼부었고 회의장은 혼란에 빠졌다.

최창익은 윤공흠을 변호하기 위해 발언하려 했으나 기회를 얻지 못했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오후 휴회시간에 윤공흠과 노동조합주석 서휘, 문화부부상 김강, 건재국상 이필규는 조용이 회의장을 떠나 중국으로 잠입했다.

최창익은 반당집단의 수괴이자 이론가로 몰렸다. 그 다음날 회의에서 반당호라동에 종사한 윤공흠, 서휘, 이필규와 김강등 4인의 당적을 박탈하고, 최창익은 중앙상위원직에서 경질되었다. 이들에 관한 문제는 당중앙특별위원회에서 심사하기로 결의했다.

박창옥은 동해안 소형 공장의 공장장으로 좌천되었고, 최창익은 돼지사육장으로 보내졌다.

회의 종료후 국가전체가 대규모의 체포와 강력한 탄압의 소용돌이에 빠졌으며, 당과 국가 지도자들에 불만을 품은 극소수 반동분자들이 획책한 궁중반란식의 심각한 음모사건으로 공개되었다.

9월 1일 김일성는 소련대사관에, 최용건은 중국대사관에 전체회의의 상황과 통과된 결의안을 통보했다.
(433, 주 197, ЦХСД, ф. 5, оп. 28, д. 410, лл. 319-321, 322-325, 327-332 ; ЦХСД, ф. 5, оп. 28, д. 412, лл. 392-303)

션즈화는 8월 종파사건에 대해 소련이 책임이 있는 것처럼 이야기 하고 있지만 사실은 중국과 긴밀한 관계가 있는 것으보 보는 것이 타당하다. 한국전쟁 종전이후 북한은 중국의 영향력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노력을 하고 있었다. 중국은 스탈린 사후 북한에 대한 영향력을 강화시키고자 했다.

한국전쟁 이전에 스탈린과 마오쩌뚱간 아시아 공산주의 운동에서 중국이 지도적 역할을 한다는 것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정리가 되어 있었다. 스탈린이 살아 있는 동안에는 중국이 마음대로 하기 어려웠지만, 스탈린 사후에는 북한에 대한 영향력을 강화하려는 시도가 본격화되었다고 보아야 한다. 이는 당시 북중관계의 동향을 살펴보면 알 수 있을 것이다.(노동신문 살펴볼 필요)

가설로 세울 수 있는 것은 8월종파사건은 중국이 뒤에서 연안파를 조정한 것으로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특히 소련대사가 반당종파사건의 조짐을 미리 알려주었다는 것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당시 북한주재 소련대사는 당연히 그런 움직임을 알려줄때 본국의 지침을 받았을 것이다.

결국 소련도 점점 강력해지는 연안파를 제거하기 위해 정보를 김일성에게 알려주었다고 해석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관련 자료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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션즈화의 조선전쟁 부록 11-1 56년 8월 종파사건의 발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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션즈화는 모스크바의 김일성에 대한 압력행사가 소련파들이 8월 중앙전회에서 김일성을 공격하는 계기로 작용했다고 언급하고 있다. 그러나 당시 8월 종파사건은 소련 뿐만 아니라 중국의 영향도 작용했다. 그러나 션즈화는 소련의 영향을 강조하고 있는 것 같다.

소련의 문서에 의하면 조선노동당 제3차 당대회기간과 그 후, 김두봉, 최창익, 박창옥, 박의환, 서휘, 윤공흠, 김승화 등 일부 지도자들이 김일성에 대항하는 경향을 지니고 있었다. 이들은 8월 중 중앙전회에서 김일성의 잘못을 폭로하고 비판하고자 했다.

8월초 귀국한 김일성은 이런 상황을 파악한 후 즉시 대응책을 마련한다. 김일성, 남일, 박정애 등이 소련 대사관과 빈번하게 접촉하는 한편, 모스크바의 비판을 적극적으로 수용할 것을 표명하고, 이들 반대파들의 행동이 반당행위라고 주장했다.

한편 개별적으로 불만을 가지고 있는 간부들은 대화, 위협, 협박, 이익을 미끼로 와해시켰다. 그 결과 김두봉의 간부경질 주장을 포기하게 하고, 박의완에게는 중립적 입장에 서도록 했으며, 김승화는 모스크바로 유학보냈다.

경찰을 동원해 반대파를 감시하고, 그들의 운전기사나 보모를 심문하는 한편, 해외순방중인 내무상 방학세를 긴급 귀국시켜 예방조치를 취하게 했다.

이런 방법으로 김일성은 주도권을 장악했다. 소련대사관도 김일성을 지지했다. 김일성이 조선노동당의 문제를 제기하는 간부들에게 보복하지 않기를 바라는 모스크바의 요구를 수용할 것을 요청할 것을 제외하면, 이바노프는 김일성을 지지하는 입장이었다.
이바노프는 ‘중앙전회 개최목적이 조선노동당의 지도적 위치를 공고하게 하고, 당내의 단결을 옹호하는 것이며, 이를 위해 김일성이 중앙상무위원회 회의를 개최해 사상을 통일시키는 작업에 동의한다’는 것을 분명하게 했다.(431)

이바노프의 이런 태도는 모스크바가 반대파의 핵심주장에 동의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8월 21-23일 개최된 중앙위원회 상무위원회회의의 최종 결론은 ‘당 중앙의 노선은 정확하며, 잘못을 저지른 주요 인물은 허가이, 박창옥 등이고 이에 대해 중앙상무위원회는 이들의 당적을 박탈한다. 현재까지 조사한 자료에 의하면 당의 고위간부들을 경질할 이유가 없다’였다.(431)

김두봉의 신중하고 위축된 발언은 김일성이 회의의 방향을 장악하게 된 관건이었다.

8월 28일 상무위원회는 김일성이 중앙전회에서 보고하게 될 초안을 통과시켰다. 보고서는 ‘당내 파벌과 종파활동의 잔여가 존재한다는 것을 제기하면서 전당이 이에 대해 경각심을 갖고 투쟁할 것을 호소’하는 내용이 담겼다.(432, 주196, ЦХСД, ф. 5, оп. 28, д. 410, лл. 335-359, 317-3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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션즈화의 조선전쟁 부록 10-3 소련파 숙청이후 소련의 반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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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련은 북한의 소련파 탄압에 주목했다. 소련공산당 20차 당대회전 소련 외교부는 조선노동당내의 김일성 개인숭배에 대해 소련공산당이 주의를 주고 수정을 요청하도록 했다(ЦХСД, ф. 5, оп. 28, д. 314, лл. 33-63)

소련외교부 소속 정보위원회는 소련파 간부들이 엄중한 처벌을 받았으며 이들의 처벌이 김일성에 대한 개인숭배 문제제기와 관련있다는 점에 주목했다.

외교부 극동국은 ‘사실상 모든 소련출신 조선족들에 대한 반대운동을 전개했다’고 판단했다.(427, 주187, 소련외교부저보위원회의 조선내부 개인숭배에 관한 보고서, 1956년 4월 5일. ЦХСД, ф. 5, оп. 28, д. 410, лл. 163-170)

김일성은 소련파에 대한 숙청에 제일먼저 주안을 두었다. 그것은 이미 소련의 북한에 대한 영향력이 현격하게 줄기 시작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

1955년 말 조선에는 소련에서 온 조선족 간부 136명이 있었다. 소련최고소비에트가 1955년 12월 31일 공포한 법령에 따르면 그들은 하나의 국적만을 취득해야 했다. 당시 많은 사람들이 조선국적을 원했으며, 24명만이 조선국적 취득이후에도ㅓ 소련 국적 보유를 희망했다.

박창옥, 박영민 등이 직위해제된후 소련국적을 포기한 것을 후회한 사람들이 많았다. 건설상 인민군위생부부장 과 같은 사람들은 소련대사관을 찾아가 소련국적 회북을 요구하기도 했다. (428, 주189 참조)

5월 30일 모스크바로 돌아간 이상조는 소련 부외상 페도렌코를 만나, 조선노동당 내부의 비정상적인 상황을 보고했다. (428-429)

6월 8일 부수상 최창익은 비밀리에 소련대사를 만나 조선노동당의 잘못된 간부 임용문제를 보고 했다. 조선노동당의 김일성 개인숭배를 해결하기 위해 소련공산당중앙과 소련정부의 개입을 요구했다.

한편, 당시 김일성이 소련을 방문했을 때, 소련지도자들은 김일성의 개인 숭배에 대해 특별한 주의조치를 한 것으로 보이지 않는다. 후르시쵸프가 김일성에게 몇가지 의견을 제시했다고 하지만 그 내용은 알려지지 않는다. 김일성은 비판을 받아 들이겠다는 의사를 표명하면서 잘못을 수정하겠다는 정도로 대응했다.

왜 소련공산당이 김일성에게 분명한 태도를 보이지 않았는지는 알 수 없다.

김일성의 개인숭배와 소련파 숙청과 관련하여 모스크바는 김일성과 회담 결과를 중공중앙에 통보했다. 마오쩌둥은 소련 공산당의 조치가 잘한 것이라고 했다고 한다(429, 주193, 마오쩌뚱과 미코얀의 회담기록, 1956년 9월 18일)

북한에 대한 소련과 중국의 입장이 각각 달랐던 것 같다. 김일성 숭배에 대한 처리에 있어 중국과 소련이 입장을 추적확인할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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션즈화의 조선전쟁 부록 10-2 조선노동당 제3차 대표자 대회와 소련파 숙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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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련공산당 제20차 당대회에서 후르시쵸프가 스탈린 개인숭배를 비난한 이후 조선공산당 내에서 불만이 터지기 시작했다.

3월 19일 소련대사관이 보낸 후르시쵸프의 ‘개인숭배 및 그 결과’에 대해 보고 받은 김일성은 소련의 방침에 따르는 듯한 모습을 보였다. 조선노동당 내 실제업무에 진지하게 반영하겠다는 것이었다.(424, 주 178, 이바노프의 일기 1956년 3월 19일, ЦХСД, ф. 5, оп. 28, д.411, лл.164-165) 그러나 실제적으로 어떤 움직임도 보이지 않았다.
김일성 개인 숭배와 관련한 어떠한 조치도 취하지 않았다.

1956년 4월 23-28일 조선노동당은 제3차 대표자대회를 개최했다. 주요 안건은 인사문제였다. 김일성 반대파 세력을 확실하게 제거하고자 했다.

김일성은 박헌영 등 국내파 지도부에 대한 비판과 기타 ‘당을 분열시키는 종파주의 활동’에 대한 비판에 집중했다. 소련공산단 20차 당대회 노선과 집단지도 문제에 대해서는 찬성과 반대도 없었다. 많은 사람들이 발언을 요구했으나 무시되었다.

대회는 중앙위원회의 대규모 조정을 통해 김일성에 대한 절대적 충성과 지지를 확보했다.

71명의 후보중앙위원 중 43명이 새로 선출되었고 28명이 유임되었으며, 45명의 후보중앙위원 중 43명이 새로 선출되고 2명만 유임되었다.(425, 주181, 서대숙, 북한의 영도자 김일성, pp.128-130)

회의중 언론의 김일성에 대한 찬양이 고조되었고 소련공산당의 개인숭배 반대와 같은 지침은 무시되었다. 오히려 대외기간중 당내에 개인숭배에 대해 언급하는 것은 온당치 않으며 당을 약화시키는 행동으로 처벌받아야 한다는 소리까지 나왔다.(426)

회의는 소련파의 자격을 문제 삼았다. 김일성은 소련에서 귀국한 일부 간부들이 조선국적을 부여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소련국적을 포기하지 않은 것을 문제 삼았다. 그들을 중앙위원으로 선출하는 문제를 제기했다. 그 결과 그런 사람들은 모두 배제되었다.

대표자 대회이후 개최된 중앙상무위원회에서 김일성은 다시 소련파 간부들이 종종 소련대사관의 상황만을 고려하는 것을 비판하면서 기밀을 보장하고 규율을 강화할 것을 강조했다. 외국인과 모든 연락은 외교부와 대외무역부를 통해서만 진행할 수 있도록 즉시 규정할 것을 요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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션즈화의 조선전쟁 부록 10-1 한국전쟁 당시 김일성의 경쟁자 숙청(소련파)

(허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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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5년 12월 김일성이 처음으로 주체사상을 제기한 것은 소련 및 중국에 대항하기 위한 것이었다. 션즈화는 여기서 ‘소련의 영향을 제거하기 위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주체사상을 주장하게 된 과정은 그 이전부터 중국과 소련의 영향을 받은 세력을 제거하는 과정부터 살펴보아야 한다. 이미 전쟁 수행과정 종전과정에서 김일성은 북한이 중국과 소련의 영향력을 벗어나지 않으면 자주적인 국가 운영을 하기 어렵다는 것을 실감했다.

김일성이 제일 먼저 숙청하기 시작한 것은 연안파 들이었다. 중국군이 진출해있는 과정에서 연안파를 시급하게 제거할 필요성을 느꼈을 것이다.

1950년 12월 무정은 평양사수에 실패하면서 파면되었고, 이어서 박일우, 방호산 등이 잇달아 좌천되거나 체포되었다.

소련파 간부들에 대한 숙청으로 이어졌다. 1951년 11월 소련파의 대표적 인물인 허가이가 김일성과 의견대립으로 당적이 박탈되었다. 소련의 개입으로 부수상직을 유지했으나, 심문을 당하고 1953년 초 자살한다.

이어서 국내파에 대한 숙청이 이루어졌다. 1953년 8월 이승엽을 수장으로 한 다수의 국내파 간부들이 미국간첩, 남한혁명세력파괴, 공화국전복기도 등의 죄목으로 법정에서 재판을 받았다. 이미 반년전 체포된 박헌영은 2년후 사형을 선고받게 된다.

한국전쟁기간 동안 김일성은 확고한 권력기반을 구축했으나 여전히 연안파의 김두봉, 김창만, 소련파의 박창옥 박영빈 국내파의 박정애 등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러나 각 파벌들의 견해차는 여전히 존재하고 있었다.


소련파에 대한 숙청은 김일성이 이미 오래전부터 소련의 간섭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의도가 반영되어 있다는 해석을 하고 있다. 쿠르스크 국립대학의 이, 엔, 셀리와노브 교수의 허가이에 대한 설명(https://koreans.kz/news/937-.html)에서 그런 설명이 있다.

“존재하는 비공식적 자료를 본다면 알렉세이 이와노비치가 당 및 정부에서 높은 직책을 차지한 김일성 그리고 외무상 박헌영과 함께 <미국괴뢰> 이승만으로부터 남조선을 해방시킬 목적으로 습격할 계획을 꾸민 발기자 및 강구자들중 한 사람이였다.
전격전으로 남조선을 점령하려는 계획이 실패하고 유엔군 (여기에서 미군무장편대가 주요 역할을 놀았다)이 이 이승만을 지원하러 오자 평양에서는 장본인을 찾기 시작했다. 김일성은 이미 오래전부터 모스크바의 후견을 벗어나려고 꿈구었었다. 결국 김일성은 간책의 방도로 마치도 수많은 과오를 범했다는 구실하에 1951년 11월에 허가이 알렉세이를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비서의 직책에서 해임시켰다. 예를 들어 허가이 알렉세이가 입당하는 자들에게 지나친 요구를 제기하며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정치체계에서 유일민주조국전선의 역할을 과소평가한다는 등이였다.

이.엔.셀리와노브 - 역사학 박사, 교수,
꾸르쓰크 국립대 세계사 강좌장,

<21세기 국제관계=""> 과학연구소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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션즈화의 조선전쟁 부록 9 한국전쟁 시기와 그이후 북한의 중국과 소련에 대한 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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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련 공산당 20차 당대외이후를 계기로 의구심은 강해졌다.
1954-56년 사이 중공과 소공은 대외정책(평화공존)에서 내정(경제구조조정)까지 비교적 일치된 입장이었다. 중공이 소공의 지도적 입장을 따랐다고 할 것이다.

그러나 북한은 중공과 소공의 입장을 따르지 않았다. 1955년 1월 31일 조선공산당의 당과 국가의 현단계 기본임무에 관한 지침성 문건에는, 모스크바의 방침인 ‘평화와 통일을 위해 노력한다’는 표현이 없었다. 그 대신 ‘남조선 인민의 해방’, ‘’남조선의 친미 친일 지주집단을 박살내자’는 구호가 채택되었다.

김일성은 모스크바의 새로운 정책에 대한 불만을 노골적으로 표시했다.

“우리는 일방적으로 모스크바를 따라하던 방식을 수정해야 한다. 소련은 미국과 직접 전투를 진행하지 않았고, 미국과 평화공존을 모색했을 수도 있지만, 미국은 우리의 남쪽을 점령했으며 이것은 모든 조선인민의 마음을 아프게 하고 있다”(420, 주170, 서대숙, 북한의 영도자 김일성, pp.125-126)

1956년 초 조선노동당 강령초안은 이런 경향을 계속해서 반영하고 있었다. 소련대사관은 수정안을 제시하기도 했다. (420, 주171, ЦХСД, ф.5, оп.28, д.410, лл.22-25)

중국과 북한의 관계는 전쟁중부터도 별로 좋지 않았다. 소련 외교부의 보고서는 중국과 조선의 관계가 비정상적이라고 평가했다. ‘지원군 사령부가 평양에서 수십 km 떨어진 지역에 위치하고 주거 조건도 매우 열악하며 매우 적은 수의 조선 지도자 동지들이 방문을 하고 있다. 평양의 전쟁 박물관에는 12개의 전람실이 있는데 중국 지원군을 위한 것은 겨우 한개의 전람실 뿐이며, 그 외 모든 전람실에는 인민군의 작전이 지원군과 무관하다고 설명되어 있다’
(421-422, 션즈화가 말한 소련 외교부의 평가가 시기적으로 언제인지는 추가적인 확인이 필요하다.)

중국의 북한에 대한 태도로 매우 강경했다.

1952년 중국정부는 조선주재 중국대사를 불러 들인후 1955년 1월까지 다시 신임대사를 파견하지 않았으며, 중국조재 조선대사관에서 개초된 연회에서 저우언라이는 북한대표와 거의 대화를 하지 않았다.

1952년부터 1955년까지 중국이 북한주재대사를 파견하지 않은 이유는 무엇일까? 당시 가장 많은 협조가 필요한 관계였음에도 불구하고 중국은 북한에 대사를 파견하지 않았다. 그리고 중국주재 북한대사도 무시했다. 당시는 연안파 숙청이 이루어지는 시기도 아니었다.

(1952년부터 1955년까지 중국과 북한의 관계의 성격을 어떻게 규정하는가는 이후 북중관계 연구에 중요할 것이다)
추정할 수 있는 것은 중국은 북한에 대한 영향력을 강화하려했고 북한은 이에 저항했다는 것이다. 중국은 한국전쟁에 참전하는 대가로 스탈린으로부터 북한에 대한 영향력을 인정받았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북한은 이에 저항했고 이것이 북중간 관계악화로 표현되었다는 가설 수립이 가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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