션즈화의 조선전쟁 부록 16-2 한국전쟁 마지막 시기 스탈린의 중국에 대한 군사원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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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3년 초에 중국이 미국의 군사적 공세가 있을 것이라고 평가한 것에 대한 스탈린의 평가는 달랐다. 스탈린은 1952년 12월 27일 보낸 회신에서 1953년 봄 미국이 공격을 개시할 것이라는 추측은 트루먼 정부하에서 군부의 계획일 뿐이며, 아이젠하워가 집권하면 계획은 수정될 가능성이 높다고 보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탈린은 마오쩌뚱의 계획을 지지했다. 중국의 군사무기와 장비에 대한 지원을 결정한 것이다.

마오쩌뚱은 1953년 1-4월간 대표 624문과 232.5만발의 탄약을 지원해달라고 했다. 스탈린은 중국의 요구가 소련의 공급능력을 초월한다고 했으며, 5월 부터 20개 사단을 무장시킬 수 있는 장비를 공급하겠다고 약속했다.(466, 주 20, 스탈린이 마오쩌뚱에게 보낸 전보, 1952년 12월 27일; 바실렙스키와 소콜롭스키가 스탈린에게 보낸 보고서, 1953년 1월 12일; 스탈린이 마오쩌뚱에게 보낸 전보, 1953년 1월 15일, АПРФ, ф.45, оп.1, д.343, лл. 13, 115-116, 133-135)

이와함께 중국은 해군함정과 장비의 지원도 요청했다.

마오쩌뚱은 중국이 해군부대를 북한에 파견해 작전에 돌입할 것이라고 보고하면서, 2월에 쾌속 어뢰정 18척과 해안포 60문 전투기 103대의 제공을 요청했다.

스탈린은 쾌속어뢰정 18척, 해안포 34문, 전투기 83대를 제공하고 해군 및 항공 고문 3명을 증파하겠다고 약속했다.(466, 주21, 마오쩌뚱이 스탈린에게 보낸 전보, 1953년 1월 7일; 스탈린이 마오쩌뚱에게 보낸 전보, 1953년 1월 27일, АПРФ, ф.45, оп.1, д.343, лл. 125-128, 139)

소련의 중국에 대한 지원에 대해 션즈화는 ‘전후 소련의 경제력을 고려하면, 스탈린으로서도 중국의 요청을 만족시키기 위해 전력을 다했다”고 평가했다.

션즈화는 소련이 이렇게 최선을 다해 중국을 지원한 것을 스탈린이 가장 유리하게 생각하는 상황을 조성하기 위해서라는 점을 인정하고 있다. ‘전쟁도 평화도 아닌 상황, 즉 전쟁을 확대시키지 않아서 소련의 개입을 피하면서도 정전제 합의하지 않음으로서 미국을 장기간 조선의 전쟁터에 묶어 놓는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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션즈화의 조선전쟁 부록 16-1 1952년 11월 이후 유엔군의 공세에 대한 중국의 입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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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엔군이 전쟁포로교환 문제로 인한 상황을 타개하기 위한 공세를 재개할 것이라는 예측에 대한 중국과 소련의 입장이 갈리기 시작했다.

중국은 유엔군이 공세를 할 것이라는 입장이었던 반면 소련은 그런 주장에 회의적이었다.

먼저 중국의 동향과 입장은 다름과 같았다

1952년 11월 24일 중국군 총참모부 작전부는 국방부장 펑더화이에게 다음과 같이 보고했다.

“현재 미국이 선거와 계절적인 요인으로 인해 조선에 대한 정책에서 커다란 변화가 발생하기는 어렵지만, 새로운 대통령이 취임한 후에는 군사적으로 모종의 행동을 취할 가능성이 있으며, 그 시기는 추위가 끝나는 내년 3월 하순 이후가 될 것이다”고 예측했다.

12월 4일 지원군 대리사령관 떵화는 마오쩌뚱에게 보낸 서면보고에서 다름과 같이 말했다.

“공화당이 집권하면 대한반도 정책이 더 강경하고 조급해질 가능성이 있다. 월스트리트는 아이젠하워의 말을 인용해 미국이 더 적극적으로 전쟁을 준비할 것이며, 덜레스가 국무장관에 취임하면미국의 극동정책을 적극적으로 추진할 것이고, 직접 전쟁을 지휘하고 있는 클라크와 밴플리트 등은 증병을 요청할 뿐만 아니라 측면지역에 대한 상륙작전에도 큰 관심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분석했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마오쩌뚱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적군 5-7개 사단이 한강에서 압록강에 이르는 전선에 대거 상륙하여 우리의 후방에 투입할 수 있으며, 시기는 봄 떠는 더 빠를 수도 있다는 점을 인정하고, 토치카나 갱도 건설을 강화하여 이 일대에 5개 사단을 배치하되, 그 중 4개사단은 경험있는 부대를 배치해야 한다. 방어지역을 확정하고 단호하게 적들의 상륙을 저지해야 하며 실수가 있어서는 안된다”고 강조했다.

마오쩌뚱의 지시에 대해 참모부는 다음과 같이 보고했다.

“미군은 1953년 2월 경 조선에서 대규모의 공세를 취해 북조선 전체를 점령하고 압록강까지 진격할 것이다”는 소련군의 통보를 받았다. 소련군의 통보에는 주일미군 총사령부가 요구한 북한 서해안의 지도, 조선에서 유엔군의 이동과 배치 및 밴 플리트가 조선에 4-5개 사단을 증파해주도록 요청한 내용이 열거되어 있었다.

마오쩌뚱은 유엔군이 서해안으로 상륙작전을 감행할 것이라고 생각하고 12월 9일 떵화에게 다음과 같이 지시했다.

“적들이 이미 결정한 한천강(한강?)에서 청천강에 이르는 지역에서의 상륙작전에 대비하고 적극적으로 준비해서, 적들에 대응할 수 있는 준비를 신속하게 진행하여 상륙계획을 분쇄해야 한다”

12월 11일 마오쩌뚱은 펑더화이기 보고한 배치계획을 비준했다. 이와함께 중국은 전쟁의 장기화에 대비하기 시작했다.

펑더화이는 “조선의 전쟁이 내년에는 확대될 가능성이 있으며, 우리의 방침은 전쟁을 계속하면서 건설을 병행하는 것이다”(465, 주16)라고 선포했다.

유엔군의 일선부대 증가가 진행되었다. 1953년 1월 미국은 병력을 재배치해서 전방에 한국군 12개사단 연합군 8개사단을 증강해 총 병력이 76만 8천에 달했다.

중국은 더 이상 평화회담에 집착하지 않았다. 회담대표단의 인원을 줄이고 인도와 전쟁포오 문제에 대한 협상도 시도하지 않았다.

1953년 1월 하순 지원군의 전쟁배치에 대한 조정이 기본적으로 완성되었다. 한반도에 25만명을 증파하고 북한의 동해와 서해안까지 최전방에서 후방을 아우르는 새로운 공사와 새로운 철도건설 사업 및 기존 철로의 보수, 새로운 도로 건설 및 기존 도로의 보수사업등을 실시했다.

중국은 소련에 1953년 한국전쟁에 필요한 모든 군수물자와 군수공업에 필요한 물자의 공급을 요청했다.(465, 주19, 항미원조전쟁사 제3권, p. 359, 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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션즈화의 조선전쟁 부록 15-3 1952년 10월 이후 전쟁포로 문제의 유엔이관 및 소련의 역할 강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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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2년 10월 8일 미국은 정전협상을 무기한 연기하겠다고 통보했다. 그 이후 전쟁포로 문제는 유엔으로 넘어갔다.
유엔으로 넘어가면서 소련이 유엔에서의 협상을 주도하는 상황이 되었다. 이렇게 보면 결국 협상을 지연시켜서 한국전쟁을 지속하기를 바라는 소련의 입장대로 진행되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11월 3일 멕시코가 새로운 제안을 제시했다.

“송환을 거부한 포로들은 허가를 받아, 한국문제가 정치적으로 해결될 때까지 잠시 다른 국가에 체류한 후 각자의 고향으로 돌아가되, 이 기간 동안 그들의 생명과 자유를 보장하자”는 것이었다.

소련은 즉각 거부했다. 비신스키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 먼저 전투행위를 중단한 후 전쟁포로 문제를 해결해야 하며, 반드시 모든 포로의 송환이라는 원칙이 견지되어야 한다”

11월 17일 인도대표단은 중국의 두번째 방안과 유사한 안을 제시했다.

체코슬로바키아, 폴란드, 스웨덴과 스위스의 대표 또는 다른 4개 중립국의 대표로 구성된 포로송환을 위한 특별위원회를 설치하되, 안전보장상임이사국 대표는 참가시키지 말자는 것이었다.

이안에 따르면 쌍방은 비군사지역인 교환지점에서 정해진 숫자만큼 포로를 송환위원회에 인도해야 한다. 송환을 원하는 포로들은 그 위원회의 보호아래 즉시 고향으로 돌아가고, 정전협정이 규정한 정치회의의 결과에 따라 해결하도록 회부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중국의 조우언라는 11월 28일 이런 제안을 거부했다.

먼저 전투행위를 중단한 후 모든 전쟁포로 문제를 해결하자는 소련의 제안을 지지한 것이다. 중국은 이방법이 전쟁포로를 강제적으로 억류하기 위한 핑계라고 주장했으며, 유엔총회가 이 결의안을 폐기하고 판문점회담을 재개해야 하며 회담은 반드시 소련의 제안을 기본의 진행해야 한다고 주장했다(462, 주11)

중국의 이러한 입장에 대해 미국과 인도의 일부 인사들은 중국과 소련사이에 전쟁포로 문제에 대한 의견대립이 있었다고 평가했다. 중국이 인도의 안을 거절한 것은 소련의 압력 때문이라는 것이다.
(463, 주 12, 미국국무부전보 요록, 1952년 12월 1, 16일)

미국과 인도의 이런 평가는 션즈화가 줄기차게 주장하고 있는 소련과 중국이 한국전쟁 지속과 관련하여 동일한 입장을 가지고 있었다는 추론을 부정하는 근거일 수가 있다. 그러나 션즈화는 그런 측면은 전혀 다루고 있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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션즈화의 조선전쟁 부록 15-2, 1952년 8월 모스크바 회의의 의미, 정전에 대한 북한 소련 중국의 입장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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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2년 8월 모스크바 회의는 김일성이 현실을 자각한 계기가 되었다고 할 수 있다. 더 이상 전쟁을 수행할 수 없었기 때문에 신속한 정전을 기대했다. 처음에는 중국이 포로문제로 정전협상을 지연시켰다. 김일성이 믿을 수 있는 것은 소련이었다. 그러나 정작 중국이 협상을 지연시킨 이유가 스탈린의 전략때문이라는 것을 때늦게 파악한 것이다.

김일성은 중국의 개입과 간섭에 대해서는 강력하게 대응했다. 그러나 소련에 대해서는 그럴 수 없었다.

1952년 8월 조우언라이가 소련을 방문해 스탈린과 수차례에 걸쳐 회담을 진행했으며 그 사이에 김일성, 박헌영 및 펑더화이도 도착하여 회담에 참석했다.

조우언라이는 한국전쟁을 더 지속할 수 있다고 보고했다.

첫째, 적의 공격을 물리칠 수 있고, 둘째, 현재의 거점을 방어할 수 있으며, 셋째는 공격을 개시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결론적으로 조우언라이는 중국은 상황을 충분히 장악하고 있으며 더 오랫동안 작전을 진행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견고한 갱도를 건설했기 때문에 폭격에도 견딜 수 있다는 것이었다.

스탈린은 조우언라이에게 마오쩌뚱이 포로문제를 어떻게 할 것인가를 물었다. 국제법에 의하면 교전 쌍방은 반드시 범죄자 이외의 모든 전쟁포로를 송환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저우언라이는 포로문제에 대한 중국과 북한의 입장차이를 설명하면서 마오쩌뚱은 모든 포로를 송환해야 한다는 입장임을 밝혔다.

“매일 발생하는 손실이 포로송환에서 문제가 되고 있는 숫자보다 많기 때문에 조선인들은 전투를 계속하는 것이 불리하다고 판단하고 있지만,… 마오쩌뚱은 전쟁을 계속하는 것이 미국의 제3차 세계대전 준비를 혼란에 빠뜨리기 때문에 우리에게 유리하다고 판단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460)

스탈린은 저우언라이의 입장을 즉각 지지했다.

“단정적으로 마오쩌뚱이 옳다. 이 전쟁은 미국의 힘을 약화시키며, 조선인들은 전투중에 발생하는 희생 외에는 잃을 것이 없다. 미국은 이 전쟁이 자신들에게 불리하다고 느끼고 있으며 전쟁을 반드시 종결시켜야 한다고 판단하고 있는데, 특히 우리 소련군이 중국에 주둔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난 후 더욱 그렇다. 굳센 기백과 인내심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이와함께 저우언라이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미국에게는 반드시 강경하게 대응해야 하며, 만약 미국이 이 전쟁에서 패하지 않으면 중국은 영원히 대만을 해방시킬 수 없다는 것을 중국동지들이 깨달아야 한다”고 환기시켰다.

이는 중국이 한국전쟁에 개입하면 대만문제 해결을 지원하겠다는 것을 암시하는 것으로 보인다.

한편 당시 회의에서 조우언라이의 입장에 대한 해석에 차이가 있다. Vojtech Mastny는 자신의 저서 The cold war and soviet insecurity: The Stalin Years, New York, 1996, pp. 147-148에서
조우언라이가 소련을 방문한 이유를 중국과 조선이 정전을 희망한다는 의사를 전달하기 위해서라는 것이다. 그러나 스탈린이 단호하게 반대했다는 것이다. 매스트니는 2개월 이후 리우샤오치가 제19차 소련공산당대표대회를 참가하기 위해 모스크바를 방문한 이유는 스탈린을 설득해 정전을 달성하기 위한 것이라고 했다.

여기서 중국의 입장이 평가자에 따라 달라진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매스트니의 주장을 고려해보면 중국은 1952년 8월 조우언라이가 스탈린과 처음 회담에서 정전협정 체결을 주장하다가 스탈린의 강력한 반발에 부딪쳐 입장을 바꾼 것으로도 이해할 수 있다.

중국과 소련간 오고간 전보만으로 당시의 전모를 제대로 파악할 수는 없다. 당시 중국내부에서 어떤 논의가 진행되었는지를 파악해야 할 것이다.

그러고 보면 다음과 같이 상황을 정리할 수 있다.

첫째, 소련은 한국전쟁 지속을 위해 중국과 북한으로 하여금 전쟁포로 문제를 제기토록 했다.

둘째, 북한은 조속한 정전협정을 기대했으나 소련과 중국으로부터 거부당했다.
셋째, 중국의 입장은 모호하다. 조속한 정전협정을 주장했는지 아니면 소련과 같이 지속적인 전쟁수행을 원했는지 불문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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션즈화의 조선전쟁 부록 15-1 정전협정에 관한 김일성과 마오쩌뚱의 입장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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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2년 2월 정전협정 체결이후 90일 이내에 한반도 문제해결을 위한 관련국의 정치회담을 개최하기로 하자, 김일성은 가능한한 빨리 협상을 종결하고자 했다.

주북소련대사 라주바예프는 김일성이 남일과 토론하면서 한 이야기를 다름과 같이 보고했다.

“반드시 정전협정에 서명하도록 건의해야 하고, 아직 해결되지 않은 모든 문제는 정치회의에서 논의해야 합니다. 미국 공군이 계속해서 조선에 엄청난 피해를 조성하고 있기 때문에, 전쟁포로 문제에 대해 계속 논쟁을 진행하는 것이 합리적이지 않다고 판단하면서, 김일성은 이런 논쟁들이 더 많은 손실을 가져올 수 있기 때문에 협상을 지연시키는 것이 불리하다고 인식하고 있습니다. 게다가 김일성은 지원군 주의 대다수 전쟁포로가 이전의 장지에스 군대에 소속되었던 자들로 정치적으로 믿을 수 없기 때문에 그들을 위해 투쟁하는 것은 특별할 의미가 없다고 판단했습니다. 김일성은 이 문제에 대한 북한의 입장을 확실하게 파악하라고 남일에게 지시하면서, 리커농의 명의로 전쟁포로 문제에서 양보를 하도록 건의했습니다.”
(457, 주 4, 라주바예프의 1952년 제1분기 업무보고, АВПРФ, ф. 0102, оп. 8, п. 35, д. 10, лл. 157-158, А. Волохова, Переговорьюперумирии В Корее, 1951-1953 гг. Проблемы Далнего Востока, No.2, 2000, л. 104 에서 전제)

김일성은 전쟁을 조속하게 종결시켜야 한다는 주장을 직접 마오쩌뚱하기도 했으며 마오쩌뚱은 이런 김일성의 주장을 스탈린에게 보고하기도 했다.(458, 주5, 마오쩌둥이 스탈린에게 보낸 전보, 1952년 2월 8일,)

중국은 앞으로는 소련의 세계전략에 동조하는 것 처럼 생각했으나 실제로는 소련으로 부터 군사장비를 받기 위해서 였다.

마오쩌뚱은 대규모 소련 군사장비의 지원이 한국전쟁 종결로 감소되거나 중단될 것을 걱정하면서 중국과 북한의 군사력이 약화될 것을 우려했다.

리커농은 국제사회의 여론이 아니거나 장기전을 수행할 준비를 하지 않는다면 미국이 결코 양보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김일성은 늦어도 1952년 5월 까지는 미국과 정전협정에 서명할 것을 기대했다. 이를 근거로 1952년 하반기 경제 및 정치업무를 계획했다. 그러나 전쟁포로 문제로 논쟁이 계속되면서 협상이 지연되자, 김일성은 크게 실망하면서 중국에 대해 전쟁포로 문제에서 양보하고 정전협정 서명을 요구했다(458, 주7, 라주바예프의 1952년 제2분기 업무보고 АВПРФ, ф. 0102, оп. 8, п. 35, д. 10, лл. 157-158, А. Волохова, Переговорьюперумирии В Корее, 1951-1953 гг. Проблемы Далнего Востока, No.2, 2000, л. 104 에서 전제)

그러나 마오쩌뚱은 전쟁의 계속을 주장했다. 전쟁을 지속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 전쟁으로 미국의 주요역량을 아시아에 묶어 두면서 계속해서 손실을 입히면, 소련과 전세계적인 민족혁명운동이 발전하게 될 것이며, 이것은 새로운 세계대전의 발발을 지연시킨다는 것이다. 마오쩌둥은 중국이 전력을 다해 조선인민들이 난관을 극복하도록 돕겠다고 보장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459)

“만약 우리가 문제를 해결할 능력이 되지 않는다면, 당신과 함께 스탈린에게 가서 이 문제를 해결해 주도록 요청하겠다”면서 중국의 제안과 방침을 스탈린에게 전달하고 그의 의견을 듣겠다고 했다.

김일성은 마지 못해 마오쩌뚱의 의견을 수용했으나 소련대사에게는 기존의 입장을 되풀이 했다

“우리는 반드시 가능한 빨리 정전협상에 서명하여 전투를 중단하고 제네바협정에 따라 모든 포로를 교환하기 위해 노력할 것이다. 이런 요구는 평화를 사랑하는 모든 인민들의 요구이며, 우리를 수세에서 구해 줄것이다”는 것이었다. (459, 주 8, 마오쩌뚱이 스탈린에게 보낸 전보, 1952년 7월 18일 ; 라주바에프가 바실렙스키에게 보낸전보, 1952년 7월 17일, АПРФ, ф. 45, п. 1, д. 343, лл. 65-68, 72-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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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한국전쟁에서 북한과 소련 중국의 관계개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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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전협정은 북한이 중국과 소련과의 관계를 근본적으로 다시 생각하게 되는 계기라고 할 수 있다. 김일성은 조속하게 정전협정을 체결하고 전후복구를 하고자 했으나 중국과 소련은 쉽게 정전을 하려고 하지 않았다.
애시당초 중국과 소련은 전쟁을 중지하겠다는 생각을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스탈린은 소련과 미국의 대결이라는 전지구적인 전략적 고려에서 출발해 전쟁을 계속하겠다는 마오쩌뚱을 지지하면서, 평화적 협상이라는 문제에 있어서 결코 양보하지 않았다. 즉 스탈린이 사망할 때가지, 중국과 소련은 조선문제에 있어서 기본적으로 일치된 전략을 갖고 있었다”(457)는 것이다.

중국이 정전협정을 서두르지 않은 표면적인 이유는 전쟁포로 문제였다. 중국은 유엔군에게 잡힌 포로를 모두 송환하고자 했으나 유엔은 중국의 요구를 거부했다. 중국이 포로문제로 전쟁을 지속한 것은 스탈린의 구상에 따른 것으로 보아야 한다. 스탈린은 가급적 오랫동안 미국을 한국전쟁에 붙잡아 놓고 유럽에서의 사회주의 체제를 강화시켜가고자 했던 것이다 .

중국이 스탈린의 지침에 순수하게 따른 것은 스탈린이 중국을 아시아 사회주의 운동의 맹주로 인정하겠다는 약속때문이었을 가능성이 매우높다. 중국의 한국전쟁 참가결정 시기에 스탈린은 코민포름을 본딴 동방정보국의 필요 성을 언급하기도 했다.

이제까지 스탈린과 모택동간 아시아 사회주의 운동에서 중국을 맹주로 내세우기로 한 문제는 거의 다루어지지 않은 듯 하다. 그러나 스탈린이 모택동을 이렇게 이용함으로써 중국과 미국을 한국전쟁에 몰아 넣으려고 한 목표는 충분하게 납득가능하다.

중국을 한국전쟁에 몰아 넣음으로써 중국과 미국이 손을 잡지 못하도록 했으며, 미국도 유럽에 대한 관심을 집중하지 못하도록 하는 효과를 거둔 것이다. 스탈린이 체코 대통령 고스발트에게 보낸 전문은 그의 전략적 구상을 분명하게 보여주고 있다.

소련이 한국전쟁에 직접참전하는 것을 극도로 꺼려한 이유도 유럽에서 행동의 자유를 확보하고자 하는 전략적 고려 때문이라고 할 것이다.

어차피 냉전으로 인한 미소간 갈등은 예정된 상황이었다. 많은 학자들은 한국전쟁을 냉전의 기원으로 파악하기도 한다. 그러나 그런 분석은 제2차대전이전부터 존재하던 사회주의와 자본주의의 갈등을 전혀 무시한 처사다. 연합국이 독일과 대응하여 사회주의 국가인 소련과 동맹을 맺은 것은 비정상적인 대외정책의 결과일 뿐이다.

만일 진영논리에 충실했다면 영국과 프랑스가 정상이었다면 소련에 대응하기 위해 독일과 손을 잡았어야 했다. 그러나 영국과 프랑스는 멀리있는 사회주의 국가 소련보다 바로옆에서 자신들의 지위를 위협하는 독일을 더큰 위협으로 생각했을 뿐이다.

이런 상황에서 소련은 한국전쟁을 통해 결정적인 시기에 미국이 유럽에 관심을 집중하는 것을 막을 수 있었던 것이다.

한편 김일성은 처음에는 한반도 통일을 국제주의적인 관점에서의 혁명적인 과업으로 생각했던 것 같다. 그러나 전쟁이 불리하게 되고 더 이상 전쟁을 수행할 수 없는 상황이 진행됨에도 불구하고 중국과 소련이 지속적으로 전쟁을 강요하면서 현실적인 선택을 취하게 된다.

김일성이 제일먼저 착수한 것은 권력의 강화와 소련의 영향력 배제였다. 당시는 중국군이 주둔한 상황으로 소련의 입김이 약할 수 밖에 없는 상황에서 곧바로 허가이를 위시한 소련파를 제거한다. 소련파의 제거는 중국으로서는 싫어할 이유가 없었다. 이후 정전협정이 계속되면서 김일성은 독자적인 행동공간을 모색하게 된다.

한국전쟁 정전협정 체결이 스탈린 사후 곧바로 이루어졌다는 것은 의미하는 바가 크다. 한국전쟁 전반의 구상이 스탈린에 의해서 이루어졌다는 것이다. 김일성은 이후 중국의 영향력 배제를 제1의 과업으로 선정했을 것이다. 1955년 주체사상을 부르짖은 것은 당시 북한의 입장에서 중국이나 소련과 같은 외세의 의존으로는 희생양 밖에 안된다는 것을 현실적으로 인식했기 때문이다.

1956년 8월 반당종파사건과 그 이후 이어진 1958년의 중국군 철수는 중국과 소련의 갈등을 절묘하게 이용한 북한의 전략적 승리라고 할 것이다.

따라서 정전협정의 협상과정은 김일성이 국제정치의 냉혹한 현실을 깨닫는 계기라고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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