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2 정전협정 강요를 위한 미국의 핵무기 사용 문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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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3년 6월 4일 회담재개와 8월합의에 도달한 원인과 관련하여 미국이 전쟁을 확대하고 핵무기를 사용할 것이라는 위협때문이라는 평가가 있었다.

미국이 핵무기를 사용할 지도 모른다는 관측의 근거는 다음과 같다.

1953년 초 뉴멕시코 핵실험장에서 과학자들이 전술핵을 제조했으며, 미군 당국자들은 극동지역에서 핵무기 사용을 제안한 정책를 재고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5월 20일 미국 국가안보위원회는 합참의 제안을 승인하고 클라크에게 정전협상이 결렬되면 공격을 개시하고 핵무기 사용 계획을 준비하라고 지시했다,

5월 21-22 덜레스는 인도 방문중에 정전협상에서 합의에 도달하지 못하면 미국이 더 강력한 군사정책을 취할 것이라는 점을 중국에 전달해 줄 것을 네루에게 요청(486, 주 67, C. Crane, To Avert Impending Disaster, pp. 82-83.)

5월 25일 주소미국대사는 몰로토프와의 회견에서 소련에 압력을 가함

션즈화는 미국의 이런 압력이 중국의 행동을 결정하는데 별 영향을 주지 않았다고 평가하고 있다.

미국이 핵무기를 사용할 수 있다는 의도가 중국에 제대로 전해지지 않았다는 것이다
네루와 몰로토프가 이런 정보를 중국에 전했다는 근거가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션즈화가 자료를 찾지 못했다고 해서 이런 사실이 없다고 평가하는 것은 타당하지 않다. 자료를 찾지 못한 것과 그런 사실이 없었다는 것은 다른 차원의 이야기다. 인도와 소련의 입장에서 미국이 핵무기를 사용할 수 있다는 의사를 중국에 바로 전달하지 않을 수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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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1 소련의 정전협정 결정이후 중국의 행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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션즈화는 스탈린 사후 모택동이 소련에게 과거와 같이 고분고분하지 않았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션즈화는 자신이 수집한 500여건의 한국전쟁에 대한 러시아의 문서에 따르면, 마오쩌뚱은 스탈린이 생존해 있을 때 아주 자세한 분야까지 보고를 하고 지시를 요청했다고 한다. 그러나 스탈린 사후에는 소련지도자들의 의견을 그렇게 많이 묻지 않았다는 것이다.

마오쩌뚱은 소련의 의견을 존중해 양보를 제안하기는 했으나 구체적인 담판과 종전의 실현과정에서 전투와 대화를 병행하는 전술을 구사했고, 소련 지도자들은 마오쩌뚱의 결정을 따랐다는 것이다.

4월 1일 몰로토프는 “부상당한 포로를 교환하고 쌍방이 회담을 재개해서 포로송환 문제를 전반적으로 해결하고, 정전협정도 체결해서 조선전쟁을 종결시켜야 된다”고 성명을 발표했다.

중국은 정전협상과 함께 유엔군과 전투를 계속하는 것을 최우선에 두고 있었다.
1953년 말까지 지원군은 반상륙작전을 위한 준비를 마쳤다. 19개 군단에 135만명을 배치해서 진지가 강화되었고 작전에 필요한 물자도 충분했다. 공격과 방어 모든 선택이 가능했다.

1-4월 사이에 지원군과 인민군은 총 770여회의 전투 통해 5만명에게 피해를 주었다.
지원군 공군은 1/4분기에 399차례에 걸쳐 4,093대의 전투기를 출두시켜 미군전투기 50대를 격추하고 16대를 손상시켰다.

3월 31일 지원군 제9병단 사령관 왕지엔안은 지원군사령부와 중앙군사위원회에 전보를 보내 5월 상순에 한차례 전략적 반격을 실행할 것을 제안했다.

“충분한 조직적 준비와 주도면밀한 계획아래 우리 1개군단이 적군 1개 대대를 섬멸하는 것이 가능하다. 우리의 각 정규군이 일제히 반격을 가한다면 적에게 치명적인 타격을 줄 수 있고 적들을 공포에 빠지게 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483)

4월 20일 떵화는 전문을 보내 ‘반격예정 시간은 6월 초에 시작해 7월 상순에 종결할 예정이며, 모든 준비업무는 반드시 5월말까지 완성하고, 이후의 사태진행을 보면서 다시 결정한다’ 고 지시했다.

4월 25일 마오쩌뚱은 작전의 실시여부는 5월 중 적절한 시기에 다시 결정한다고 지시했다.

4월 30일 펑더화이는 만약 회담이 성과가 없으면 6월에 계획대로 작전을 수행한다고 지시했다,

5월 11일 떵화는 6월 1일부터 공격을 실시한다는 지시를 다음과 같이 내렸다
“판문점 회담이 여전히 일부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고 있어서 6월 이전에 정전협정에 서명할 가능성이 크지 않기 때문에 전투중인 각 부대는 모든 준비를 반드시 5월 30일 전까지 완성해야 한다. 6월1일부터는 계획대로 예정된 목표에 대한 공격을 시작한다”

그러나 지원군의 군사작전은 5월 13일 앞당겨 실시되었는데 이는 미측과 정전협상이 원할하지 않게 진행되었기 때문이었다.

5월 16일 중앙군사위원회는 “현재 정전회담이 계속해서 지연되고 있지 때문에 언제 전투가 중단될지 판단하기 어려우며, 따라서 조선에서 우리의 작전 방침은 여전히 과거에 제안된 안정적으로 장기전을 지속하는 방침이 유지되어야 한다고 지시했다’(485, 주66, 항미원조전쟁사, 제3권, pp.395, 399-401)

5월 25일 유엔군이 수정안을 제시했으나 지원군은 계속해서 공격했다

5월 27일에는 더 대규모로 하계 반격작전의 2단계 공세를 전개했다

6월 1일 지원군은 공격대상을 남한군에 지향한다. “현재 상황과 판문점 회담에 근거해 현 반격작전의 주요 타격대상이 이승만 괴뢰군임을 확전했으며, 따라서 단호화게 공격해서 적들을 대거 섬멸시키고, 영국 등 추종세력의 군대에 대한 공격은 잠시 중단하며, 미군에 대해서도 대대적인 공격은 하지 않는다(중대급 이하의 부대만 공격), 그러나 원래 계획했던 전투준비는 그대로 계속진행하여 전투가 필요할 때를 대비하면 어떤 적이라도 우리를 공격하면 반드시 철저하게 분쇄한다”는 것이었다.(487)

6월 16일 중단된 이 공격은 58만 평방미터의 진지를 확대했으며, 적군 41,000여명이 사살되거나 부상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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션즈화의 조선전쟁부록 16-6 스탈린 사후 소련의 한국전쟁 정전에 관한 입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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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련은 서방세계에 화해의 몸짓을 보여주었다. 3월 21일 모스크바 라디오 방송은 북한이 포로가된 9명의 영국외교관과 선교사가 석방되도록 적극적으로 돕는데 동의한다고 언급

며칠후 몰로토프는 김일성에게 편지를 보내 프랑스 국민 14명의 석방을 요구했는데 그 이유는 다음과 같았다.

“현재의 상황에서 프랑스 정부의 요구에 적극적으로 화답하는 것은 정치적으로 유리하기 때문”(480, 주59, 몰로토프가 라주바예프에게 보낸 전보, 1953년 3월 25일, АПРФ, ф. 3, оп. 65, д. 830, лл. 94-95.)

북한은 소련의 태도변화를 반겼다. 김일성이 환호를 지를 정도였다. 소련 특사는 “3월 29일의 2차회의에서 김일성은 소련정부의 조선문제에 대한 제안에 전적으로 동의한다고 다시 한번 선언했으며, 이 제안이 반드시 신속하게 실현되어야 한다고 판단하고 있다….”

김일성은 현재의 상황을 더 지연시키면 조선과 중국 또는 전체 민주진영에게 불리하며, 소련 정부의 제안은 가장 현명하고 정확하다고 판단했다.

‘일선과 후방에서 북한의 손실(거의 매일 300-400명)이 매우 크기 때문에 미국과 송환포로의 숫자를 가지고 계속 토론하는 것은 현명하지 못하다’는 것이었다.

북한은 정전을 반대하는 중국의 입장을 못마땅해 했다.
중국이 정전을 반대한 입장은 무엇 때문이었을까? 그것은 스탈린의 갑작스런 죽음으로 인해 한국전쟁으로 얻어야 하는 과실을 제대로 확보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과실의 첫번째는 아시아 사회주의 운동에서 중국의 지도적인 역할이다. 스탈린의 사망으로 중국은 아시아 사회주의 운동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수행하는 것이 모호해져버렸다.

두번째는 전쟁상황을 지속함으로써 소련의 군사적 지원을 받아 중국군을 현대화하는 것이었다. 소련은 중국의 의도를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한국전쟁을 수행하는 이상의 충분한 군사장비를 지원하지 않았다.
그러나 스탈린 집권 말기에 중국에게 군사장비를 많이 지원했는데 이는 중국으로 하려금 정전하지 말고 계속 전쟁상태를 유지하기를 바랐기 때문으로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
(소련의 중국에 대한 군사장비 지원의 양을 시기별로 분석해 볼 필요)

한참 전쟁을 실시할 51년과 52년보다 전선이 교착상태에 들어갔을 때 더 많은 장비를 제공해 준 것같음

중국은 소련의 입장변화가 달갑지 않았다. 그러나 모스크바의 요구를 무시할 수 없었다. 중국은 김일성에게 회담 재개를 통보했다.

러커농과 챠오관화는 3월 28일 개성으로 가서 클라크에게 회신을 전달하고, 3월 30일 조우언라이는 ‘조선정전회담에 관한 성명’을 발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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션즈화의 조선전쟁부록 16-5 스탈린 사후 소련과 중국의 한국전쟁 정전에 관한 논의(1953년 3월 2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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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3년 3월 21일 조우언라이가 모스크바로 돌아온 저녁, 말렌코프, 베리아, 불가닌, 후루시쵸프 및 신임중국대사 쿠즈네쵸프 등과 회담을 가지고 한반도 문제에 대한 토의를 가졌다.

조우언라이는 미국이 독자적으로 정전협상의 무기한 중단을 선언한 무례한 행위를 이용해 회담재개 문제를 일정기간 미루고자 주장했다.

“우리에게 전쟁포로의 송환을 위한 투쟁은 정의로운 행동이지만, 적들이 고의로 어렵게 만들고 있는 것이 우리에게 새로운 것은 아니다. 그렇게 하면 우리를 단련시켜 국방력을 강화시킬 수 있고 국제평화운동을 강화할 수 있다….

정전의 현실화를 지연시키면 미국의 병력과 자금을 소모시킬 수 있고, 특히 적을 전략적으로 불리한 위치에 처하게 할 수 있으며 서구진영 내부의 모순을 격화시킬 수 있다”고 지적했다.

한편 소련은 그 이전과 다른 전략적 평가를 내리고 있었다.

한국전쟁이 지속되면, 미국의 군비확장에 유리해져서 경제위기의 도래가 지연되고, 미국이 다른 국가들에게 자신들의 침략야욕에 복종하도록 강요하는데 유리하게 될 것이라고 판단했다,

소련의 이런 입장은 미국을 유럽에 개입하지 못하도록 하겠다는 스탈린의 생각과 전혀 다른 의미를 지니고 있다. 소련이 이런 판단을 하게 된 과정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고 있다.

소련은 마오쩌뚱에게 보낸 편지에서 정전협정을 가능한 한 신속하게 체결할 것을 요구했다. “결코 한 순간도 지체하지 말고 가능한 모든 방법을 사용하라”는 것이었다.

소련의 입장을 확인하자 조우언라이는 소련의 입장을 수용하는 듯한 태도를 보였다

마오쩌뚱의 지시를 받아야 하겠다고 했지만 “과거 한동안 우리가 너무 강경하게 대응했었다. 마오쩌뚱 동지 역시 정협회의 중 전쟁포로의 송환문제는 정의와 관련된 투쟁이라고 강조했었다”고 여지를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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션즈화의 조선전쟁 부록 16-4 스탈린의 사망과 소련지도부의 한국전쟁에 대한 입장 변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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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하게 끌던 정전협정이 급물살을 타게 된 것은 소련의 입장이 변했기 때문이었다. 그 계기는 스탈린의 사망이었다.
스탈린 사후 한반도 문제에 주도적인 역할을 한 인물은 몰로토프로 알려지고 있다. 몰로토프는 외무인민위원으로 임명되자 마자 한국전쟁의 종결을 위한 초안을 작성했다. 베리야 역시 한반도 문제에 대한 조속한 해결을 적극적으로 지지했다.(472, 주 40, F. Orlandi, “The Alliance; Beijing, Moscow, the Korean War”)

모스크바가 정책을 전환한 이유는 미국과의 냉전적 대응상황에서 최악의 상황을 고려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션즈화는 그 근거를 ‘주복’과 ‘플레샤코프’의 저서에서 찾고있다( V. Zubok and C. Pleshakov, Inside the kreamlin’s cold war, p. 154)

스탈린 사후 소련이 한국전쟁에 관한 정책방향이 논의된 것은 제4차 최고소비에트 대회로 보인다. 말렌코프는 “현재 논쟁중이거나 아직 해결되지 않은 문제는 관련 국가 간 공동협상을 기초로 평화적으로 해결할 수 있을 것이다. 이 방법은 미국과의 관계를 포함해 우리와 모든 나라와의 관계에 적용될 수 있다. 평화를 유지하는데 관심이 있는 국가들은 현재와 미래에 소련이 단호한 평화적 정책에 마음을 놓아도 될 것이다.”고 말했다.(473, 주46)

3월 18일 몰로토프는 베리야와 말렌코프에게 자신이 초안한 조선전쟁에 대한 새로운 정책방향을 제출했다(473, 주 47, 몰로토프가 말렌코프와 베리야에게 보낸 전보, 1953년 3월 18일, V. Zubok and C. Pleshakov, p.155)

소련이 한국전쟁의 향방에 대한 정책을 결정하는 과정에서 중국은 그리 중요한 역할을 하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3월 19일 마오쩌뚱은 체코슬로바키아 고트발트 대통령 장례식에 참가한 저우언라이에게 소련측과 정전협상에 관한 논의를 하라고 지시했다.

그러나 소련은 3월 19일 같은날 한국전쟁의 정전에 관한 새로운 방침과 이를 구현하기 위한 새로운 방법을 확정했다. 인민위원회 회의에서는 중국과 북한에게 전쟁포로 송환문제에 대한 지시를 보내기로 결정했던 것이다.

마오쩌둥과 김일성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현재의 정치적 특성과 우리 3국인민의 가장 절한 이해관계에 부합하는 개선조치를 취하지 않는다는 것은 옳지 않다. 소련, 중국, 북한 3국인민은 세계평화를 공고하게 하는데 관심이 있으며, 가능한 빠른 시일내에 조선전쟁을 끝낼 수 있는 방법들을 모색해왔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다음과 같이 지시했다. “1. 클라크 장군이 2월 22일 제기한 부상당한 전쟁포로의 교환 문제에 대해 김일성과 펑더화이가 긍정적인 회신을 하도록 요구한다. 2. 김일성과 펑더화이가 회신을 발표한 후, 중국의 권위있는 대표(가장 적합한 인물은 조우언라이 동지)가 베이징에서 성명을 발표하여 전쟁포로 교환 문제를 적극적으로 해결할 의사가 있음을 표시하고 한반도의 정전과 평화조약을 체결할 시기가 이미 도래했음을 보증한다. 3. 위에서 언급한 내용을 베이징에서 성명으로 발표하는 동시에,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수상 김일성이 평양에서 정치적 성명을 발표하는 동시에, 조선 민주주의인민공화국 수상 김일성이 평양에서 정치적 성명을 발표하여, 중국대표의 성명이 정확하고 정당하고 이를 전적으로 지지함을 표명한다. 4. 우리는 이렇게 하는 것 또한 타당하다고 생각한다. 베이징과 평양에서 성명을 발표한 후 곧바로 소련외교부가 베이징과 평양의 입장을 완전히 지지한다고 표명한다. 5. 위에서 언급한 네가지 조치에 보조를 맞춰, 소련대표단이 뉴욕의 유엔총회에서 필요한 모든 행동을 취해 위에서 언급한 새로운 정책의 실시를 지지하고 추진한다,”고 하면서 정전협정회담의 책임있는 쌍방대표가 판문점에서 회담을 재개할 것을 요구했다.

이와함께 인민위원회의는 중국과 북한이 발표하게 될 정전회담 재개에 관한 제안과 성명서에 대해 비신스키에게 책임을 부여했다. (475-6, 주49, 소련인민위원회회의 1953년 3월 19일, АПРФ, ф.3, оп.65, д.830, лл.60-71)

1953년 3월 19일의 소련인민위원회회의의 내용은 스탈린이 사망한이후에도 소련은 한국전쟁에 대해 중국에 대한 확고한 지도적 위치를 유지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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션즈화의 조선전쟁 부록 16-3 1953년 초반 상황에 대한 중국과 소련의 그리고 북한의 전략적 입장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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션즈화는 당시 소련과 중국이 동일한 전략적 관점을 지녔다고 하지만 조금만 자세히 들여다 보면 차이가 있음을 충분하게 알 수 있다.

살펴보아야 할 문제는 다음과 같다. 첫째 중국은 소련이 생각하는 것처럼 전쟁을 장기적으로 끌고 가려고 했을까? 하는 점이다. 그점에 대해서는 다소 이견이 있을 수 있다.

마오쩌뚱은 조건만 좋다면 전쟁을 계속해서 상대방이 양보하도록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소련이 제공한 대규모의 시기적절한 원조는 중국의 자신감을 강화시켰다.

1953년 초 중국에 배치된 중국의 군사력은 병력, 장비, 훈련 공사 및 교통부문 뿐만 아니라 탄약과 식량비축 등에서도 개전이래 가장 상태가 좋았다.(467, 주22, 항미전쟁원조사, 제3권 pp.358-372)

한편, 북한의 지도자들은 전쟁의 피로감으로 휴전을 간절하게 바라고 있었다. 그러나 이와 반대로 중국지원군은 연합군과의 일전을 기대하고 있었다.(467, 주23, 수즈다레프의 1953년 제1분기 업무보고, 항미원조전쟁사, 제3권, p.358)

중국이 스탈린의 기대와 달리 적극적인 일전을 기대하고 있었던 것은 아이젠하워 행정부가 ‘장지에스를 동원해 중국을 봉쇄한다’는 것을 고려한 것이었다.

마오쩌뚱은 2월 7일 “중국은 전쟁을 끝까지 수행할 준비를 하고 있으며, 미 제국주의자들이 손을 떼고 중국과 소련의 인민들이 완전히 승리를 거둘때 까지 싸우겠다”고 한 선언은 스탈린의 구상과 상당한 차이가 있었던 것이다.(모택동군사군집, 제6권, p.341)

(중국은 미국을 한반도에 붙잡아 놓음으로써 미국이 중국본토를 공격하지 못하도록 해야 한다고 생각한 것이란 측면에서 중국이 입장을 추측할 수 있다.)

중국은 한국전에서 미군에게 군사적인 압박을 가함으로써 장지에스를 통해 중국본토를 봉쇄한다는 구상을 분쇄하려고 한 것으로 이해할 수 있는 것이다.

중국은 평화협상에 적극적으로 나서려고 하지 않았다. 미국의 입장을 살펴보면서 전투행위를 적극적으로 준비했다.(468, 주27, 2월 24일 군사훈련부의 조선파병부대에 대한 3개월 전투훈련실시 계획에 대한 펑더화이의 서면지시 ‘조선에 파병될 신병의 훈련은 군사훈련 80%, 정치훈련 20%가 적당, 팽덕회 연보, p.544)

1953년 초반에는 북한과 중국 소련의 전략적 입장이 가장 크게 갈라지는 시기로 보아야 할 것이다. 1953년에는 북한의 조속한 정전에 대한 입장이 거의 반영되지 않았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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