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미원조전사 5-3 제1차 전역 28일 이후 상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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팽덕회의 작전구상

제40군 주력부대,

구두동 지역의 국군 제6사단, 8사단 부대(각 2개 대대)를 신속하게 섬멸, 이후 천수동, 석창동을 거쳐 마전동으로 계속 전진, 운산지역이 적퇴로 차단, 도시에 박천 방향으로부터의 적 증원을 차단

제40군 118 사단

148 사단과 협조, 고장동 지역의 국군 제7연대를 신속하게 섬멸,

제39군,

29일 운산에 있는 국군 제1사단 포위 후 기회를 보아 섬멸

제38군

희천을 신속하게 점령 후 신흥동, 구장, 군우리 방향으로 진격, 적 측후방으로 우회 실시

제39군 제115사단

태천에서 구성으로 통하는 도로를 내어 주어 미 제24사단 북진을 유인, 적 병력을 분산케 함으로써 아군 주력부대의 작전을 용이하게 조성

제66군 주력부대

구성쪽으로 신속하게 전진하여 미 제24사단을 차단 공격, 또다른 1개사단은 선천, 정주 방향으로 향하는 적을 견제

작전 시행

10월 28일 저녁 제40군 주력 부대

온정 동쪽 구두동 지역을 향하는 적에게 공격을 개시, 29일 새벽까지 격렬한 전투 끝에 국군 제6, 제8사단 각 2개 대대의 대부분을 섬멸, 곡사포 20여문, 자동차 60여대를 노획, 포로 400여명, 이후 계속 남쪽으로 진격

제40군 118사단

용곡동, 고장 지역까지 진격, 제148사단 도착을 기다리지 않고 적이 동요하는 기회를 틈타 제29일 저녁 국군 제7연대를 공격하여 하룻밤 점투에 대부분 섬멸

제38군

희천에 있는 적을 미군으로 오인함에 따라 적시에 공격을 전개하지 못하고 지체되어 29일 해질 무렵 공격을 개시하려 했으나 적은 이미 남쪽으로 후퇴, 이후 희천을 점령한 이후 곧바로 주력부대로 구장을 향해 공격

제39군

29일에 각각 운산의 동북(마장동 지역), 서북(응봉동 지역), 서남(용흥동 지역)에서 국군 제1사단을 3면으로 포위, 섬멸할 준비

제66군

구성 서쪽의 탑동, 신시동 지역까지 진격
1개연대는 고군영동까지 진격하여 계속 구성을 향해 전진, 미 제24 사단을 저지 준비

상기 작전상황을 정리하면

서부전선의 중공군은 고군영동, 탑동, 태천(북), 운산(북), 온정, 희천 일선까지 진격하여 계획된 전역전개를 완료

전개중에 국군 제6사단 대부분과 8사단 2개대대를 섬멸
운산에서 국군 제1사단을 포위, 희천을 점령하여 차후 작전을 위한 조건을 마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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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미원조전사 5-2 제1차 전역 10월 27일까지의 상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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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일, 상기 계획에 따라 각각 예정지역으로 전진

27일

제39군 2개사단, 운산 서북지역까지 진격, 1개사단은 구성지역까지 진격

제38군 주력부대는 희천에서 60km 거리에 있어 희천에 있는 적 섬멸 계획을 시행할 수 없었음

희천, 운산의 국군은 고장, 초산지역에서 고립된 국군 제6사단 7연대를 구원하기 위해 온정을 향해 공껴
국군제 6사단 제19연대 2개대대와 중공군 제40군 제120 사단은 온정 동쪽의 구두동 지역에서 대치

국군 제1사단 일부와 중공군 제40군 제39군 일부는 온정이남 부흥동, 마장동, 마성동 지역에서 대치

희천까지 진격한 국군 제8사단 주력부대는 구장으로 돌아가고, 4개대대가 구장 이북에 집결

중공군은 국군이 동, 남, 서남 3개 방향으로부터 온정에 있는 중공군을 향해 공격할 것으로 판단하고 희천에 있는 국군을 먼저 공격하겠다는 계획을 변경

제40군 주력부대로 백용동, 용두동, 봉지동 일선에서 온정으로 진출하는 국군을 저지
희천, 구장, 운산의 6-7개 연대규모를 유인, 제38, 39, 40군을 집중하여 운산동북, 운산이동의 구두동, 입석동, 천수동, 용포동 지역에서 포위섬멸을 구상

모택동의 지침(p27-28)

지원군이 양수동, 온정지역의 첫 승리를 축하하고 전역의 관건인 두 가지 점을 지적

첫째는, 고장, 초산의 국군 제7연대를 묶어 둠으로써, 국군 제1, 6, 8 사단이 증원할 때 이들을 섬멸하는 것

둘째는 지원군 3개군이 모두 도착하고 전역전개를 조속하게 하는 것.

이를 위해 초산의 국군 제7연대는 2,3일동안 포위한 채 섬멸하지 말고 국군이 증원하도록 유인할 것을 지시

국군의 상황

국군은 28일 제8사단 제10연대 2개대대만 희천으로 부터 증원하고 주력은 여전히 구장지역에 위치

국군 제1사단 역시 운산지역에 주둔

초산까지 진격했던 제6사단 제7연대 선두부대와 연대주역은 깊은 산속에 고립되어 위험을 느끼고 고장동, 유양동, 용곡동 짜지 철수
(이대용 장군의 회고에 따르면 제1대대장 김용배 중령이 신속하게 철수를 명했다고 한다. 당시 제7연대장 임부택과 제1대대장 김용배가 신속한 철수를 결심하지 않았다면 제7연대는 전멸당할 위기에 처했을 것이다.)

미제24사단 영 제27여단은 각각 태천 동남, 정주 지역까지 진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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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미원조전사 5-1 제1차 전역의 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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팽덕회 사령원의 작전방침

#
10월 25일 21시 팽덕회는 전차 자동차를 이용한 적군 부대가 여러지역에서 활동하고 있어 한판의 전투로 적군 2,3개 사단을 일시에 섬멸하는 것이 곤란하므로, 분산전진하는 적을 각개별로 섬멸하는 것이 현명하다고 판단

“군과 사단이 서로 다른 길에서 적의 1개 또는 2개 연대를 섬멸함으로써, 제1차 전역중에 도합해서 적군 1,2개 사단을 섬멸한다. 그럼으로써 적의 활발한 활동을 정지시키며 아군의 심리적 안정을 기한다”는 작전방침을 결정(25)

26일 모택동의 회답전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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팽덕회의 작전방침에 동의하면서 ‘제1차 전역에서는 국군 제1, 제6 제8 3개 사단을 섬멸하는 것을 목표로 하여, 몇개의 대소 전투에서 국군을 섬멸한 후, 다시 미-영군을 쳐야 한다’고 지시(26)

모택동은 작전 수행 국면마다 구체적인 수준까지 작전에 대한 지침을 하달했다.

팽덕회의 작전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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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8군과 제40군의 2개 사단 및 42군의 125 사단을 집중하여 면저 희천의 적(국군 제6사단 일부 및 제8사단 2개연대)를 공격, 섬멸하기로 함

제39군, 운산서북지역에서 국군 제1사단 및 미-영군이 동쪽의 희천 방향으로 전환하지 못하도록 견제, 기회를 보아 제1사단을 포위 섬멸

제40군 제118사단, 북진에서 고장쪽으로 전진, 제50군 제148사단은 집안으로 도하 초산쪽으로 전진, 양사단이 초산 고장까지 진출한 국군 제6사단 7연대를 포위 섬멸

제66군, 차연관 비연까지 진격, 신의주로 진격하는 미-영군을 저지, 공격 준비

제50군 주력 부대, 안동, 신의주 지역까지 진격하여 중공군의 후방안전을 보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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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미원조전사 4-3 모택동의 10월 23일 한국전쟁 상황에 대한 군사적인 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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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미원조전사는 10월 23일 팽덕회에게 보낸 전문의 내용중 한국전쟁 상황에 대한 모택동의 평가를 다름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24)

작전상황이 다음과 같은 점에 의해 결정될 것이라는 것이다.

첫째는 이 전역에서 완전한 기습을 활용하여 2-3 개 내지 4개 국군사단을 전멸시킬 수 있을것인가의 문제다. 만약 이 전투에서 대 승리를 거둘 수 있다면 적군에게 다시 새로운 배치를 강요하게 될 것이며, 현재 보유한 병력의 조건하에서 적군은 곧 피동적인 위치에 빠지게 될 것이다. 그러나 위처럼 성공하지 못할 때 형세는 적에게 유리하게 변할 것이다.

둘째는, 적군 비행기가 아군을 살상하고 아군의 활동을 방해하는 상황하에서, 아군이 야간행군 작전의 숙달 정도 여하에 따라 대량의 적군 비행기의 위협하에서도 유리한 작전을 수행할 수 있을런지 여부다.

셋째는, 미국이 조선에 다시 5 내지 10개 사단의 증원부대를 파견하기 전에 아국이 운동전 또는 고립된 거점 공격작전으로 미군 몇개 사단 및 국군 몇개 사단을 앞서 섬멸할 수 있는가의 여부다.

이러한 작전적인 문제와 함께 ‘적군이 미국이나 혹은 타지역으로부터 조선에 병력을 증원하기 이전에 적군 병력을 많이 섬멸하여, 손실에 그들의 보충을 맞출 수 없도록 만든데 주력하여야 한다’고 지침을 하달했다.

모택동의 이런 전략과 작전치침은 매우 구체적이다. 오랜 기간동안 내전을 통해 체득한 군사적 식견이 매우 탁월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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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미원조전사 4-2 초기 작전계획, 모택동의 작전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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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에 지원군이 투입할 때는 “적극적인 방어로 진지전과 운동전을 서로 결합시키고 반격, 습격, 매복으로 적 유생역량을 섬멸하고 소모시킨다”는 작전방침을 채택하기로 했다. 이를 위해 먼저 구성, 태천, 구장, 영원, 오노리 선에서 방어는 쉽고 공격이 어려운 유리한 방어진지를 구축, 적군의 진격을 저지하고 전장 국면을 안정시킴으로써 시간을 획득해서 조선 인민군이 북쪽으로의 철수와 정비를 엄호하며 차후작전을 유리하게 창조할 조건을 만들려 했다. (등화, 홍학지, 해방이 1950년 10월 19일 12시에 각 부대장에게 하달하며, 팽덕회 사령원에게 보고한 전보)

중국군은 압록강을 도하한 다음 신속하게 진출했으나 유엔군보다 먼저 처음 생각했던 예정방어지역까지 도착하기 어려운 상황이 되었다.

마침 유엔군은 여전히 중국군의 참전을 알지 못하고 분산한 채로 공격하고 있었다. 게다가 중간지역의 한국군 3개 사단의 진격상태가 돌출되어 있었고 그 양전선 사이에 80여 km의 간격이 열려 있었다.

이런 형세는 중국군이 과감한 기습공격을 통해 각개격파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다.

이런 상황을 파악한 모택통은 즉각적인 공격작전으로 전환할 것을 지시했다. 10월 21일 지원군이 원래 정한 계획을 버리고 운동중에 유엔군을 타격하기로 한 것이다.

“현재 이 문제는 전기를 잘 포착하여, 며칠내에 전역계획을 세워 작전을 개시하는 것이지, 먼저 일정시기 방어를 한 후 다시 공격을 준비하는 때가 아니다”라고 지적했다.(20-21)

이어서 매우 구체적인 부대운용방안까지도 제시한다. 42군의 주력부대를 이용하여 맹산 이남으로 진출시켜 원산-평양선의 철도선을 차단하고 북쪽으로의 원조를 견제한 다음, 지원군의 3개 주력군을 집중하여 국군 6,7,8 개 사단을 타격한다는 것이다.

그 이후 국군과 유엔군의 진출이 빨라지면서 중국군은 신속하게 작전계획을 바꾼다. 이 과정에서 모택동은 매우 정확한 상황판단에 입각한 작전지침을 하달한다. 아마도 모택동이 그런 판단을 할 수 있었던 것은 당시 한국군과 유엔군의 진출상황이 매우 자세하게 보도가 되었기 때문이 아닌가 한다.

전쟁이 거의 끝나가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종군기자들이 거의 제한없이 국군과 유엔군의 진출상황을 보도할 수 있었을 것이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당시의 신문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즉 국군과 유엔군의 작전보안 미흡으로 인해 모택동은 적시적인 상황판단에 입각한 작전지침을 실시간으로 하달 할 수 있었던 것이다.

<항미원조전사>에 따르면 1차 전역에서 모택동이 전보로 지침을 하달 한 것은 다음 세 번이다.

10월 21일 공세작전을 하라는 내용(20),

10월 23일 국군과 유엔군을 깊숙하게 유인하기 위해 희천, 온정, 구성 선 이남을 양보하고 절대 조기에 접촉하지 말라는 지시(22),

10월 24일 먼저 국군 제1,6,8 사단을 타격하고 다시 미-영군을 공격할 것을 준비하고, 깊은 산악지역까지 유인한 후 포위섬멸하라는 지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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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미원조전사 4-1. 제1차 전역과 맥아더 라인 (완충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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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장의 제목과 장절은 다름과 같다.

제2장 조선인민군과 전략적 반격을 실시 조선의 북반부 영토를 수복

제1절 첫 작전에서 승리, 적군을 압록강 부근에서 청천강 이남까지 축출(제1차 전역)

1, 미군을 필두로 하는 침략군들이 미친 듯이 조중국경을 침범 추수감사절 전에 전조선을 점령하겠다는 망상 기도

재미있는 것은 처음부터 완충지역으로 맥아더 라인을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미국을 필두로 하고 있는 침략군들이 중공 정부의 거듭된 경고를 무시한 채, 10월 초에 38선을 넘은 후 3개진로로 나누어 계속 북진하였다. 서부전선에서는 평양을 점령하고, 동부전선에서는 원산을 점령한 후 먼저 동서로 진격하고 연락을 소통한 후 다시 일치된 협조 아래 조중 국경으로 밀고 들어간다는 계획을 세웠다.
세계의 여론을 기만하고 중국의 참전을 막기 위해 한국군을 제외한 유엔군은 단지 국경남쪽 40킬로미터까지만 진격하고 이른바 ‘맥아더선’을 그어 완충지대로 삼는다고 일부러 떠별였다.”(15)
“맥아더는 추수감사절(11월 23일) 이전에 전쟁을 완결시켜야 한다고 미친 듯이 떠벌이며, 원래 정해 놓은 동서 양쪽 전선의 동시진격과 완충지대를 건립하겠다는 계획을 변경하여 동서양전선의 부대 모두가 가장 빠른 속도로 곧바로 조중국경선까지 진격하여 재빨리 국경선 요충지를 장악하고 조선 인민군의 퇴각로를 차단하며, 또한 중공군의 개입을 방지하도록 명령하였다.”

결국 맥아더가 스스로 설정한 완충지대라는 것은 이미 한국전쟁 때 이미 고려되었다. 휴전이후 연합사가 수립되고 나서 미측은 작전계획 수립시 중국의 개입을 고려하여 완충지대를 고려했다. 그러나 이미 실패한 완충지대의 개념을 다시 적용한다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었는가 하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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