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미원조전사 15-2 제3차 전역 좌종대의 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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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2군

포병 제44연대의 지원하 31일 18시 20분에 적의 진지를 돌파

우회임무부대인 제124 사단은 적 항공기의 위험에도 불구, 주간 공격을 계속, 10여차례의 저항을 격퇴 1일 12시전에 제영리 남쪽 석장리까지 진출, 국군 제2사단의 퇴로를 차단

이후 상하남종 지역으로 돌격 2일에는 제66군 주력과 협조하에 동지역의 퇴로를 차단 포위섬멸 임무를 완수

제42군 주력은 1일 화현리, 중판리, 적목리지역까지 진격 국군 제2사단 1개 대대를 섬멸
가평으로 계속 공격, 2일 10시에 가평을 점령

제66군

주력은 31일 20시 30분 적진지를 돌파 이후 수덕산, 상하홍적리, 상하남종 지역을 점령, 제42군과 함께 국군 제2사단 31, 32연대, 국군 제5사단 제36연대의 대부분 및 국군 포병제24대대를 섬멸후 각종 포 30여문을 노획, 적 700여명을 생포

춘천방향으로 양공을 실시하던 제66군 제198사단은 2일 15시 춘천을 점령

인민군 제2, 제5군단 5개사단은 전역 개시전에 38선을 넘어 홍천, 횡성, 원주 방향으로 우회침투
제12사단은 31일 새벽에 총천의 서남지역인 신대리지역까지 진출, 국군 제3사단을 남쪽으로 퇴각시킴

미군과 국군의 상황

중국군과 북한군의 공격으로 제1방어선 대부분이 붕괴, 우측방이 완전히 노출
노출된 우측방으로부터 중국군이 광범위한 포위를 감행할 것을 우려, 10만의 병사를 한강북쪽에 투입 배수작전을 펼치다가 1월 2일 전 전선에서 후퇴

일부부대는 서울 북방의 고양, 도봉산 및 수락산을 연하는 선에서 주력의 철수를 엄호하면서 중국군의 공격을 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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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미원조전사 15-1 제3차 전역의 수행(우종대의 작전상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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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 12월 31일 17시 전전선에서 공격을 시작
적이 구축한 임진강 한탄천 및 38선상의 방어진지를 신속하게 돌파

우종대

제39군

포병 제45, 제26연대의 지원하에 31일 17시 40분에 임진강을 돌파
1월 1일 여명전까지 방어종심 10키로미터까지 진출, 대촌무건리 지역을 점령, 제50군의 도하를 효과적으로 지원
제117사단 동두천 서남에 위치한 상수리 선암리 지역을 점령하여 국군 제1사단과 제6사단의 연계를 끊어 놓았으나, 도로는 완전하게 차단하지 못함

주력은 2일새벽 문산 동쪽 오현리, 오림현 지역까지 진출

제40군,

제119사단은 동두천 서쪽의 안흥리 및 싱패리 지역을 점령하고, 1개중대로 동두천 동쪽을 점령하여 국군 6사단 퇴로를 차단했으나, 이 중대를 철수시키면서 간격이 형성
(작전에 대한 이해의 부족)

제118사단, 진출속도가 빠르지 못함

제38군

우회임무부대인 제114사단이 제39군의 제117사단과 연결하여 포위망을 형성하기 전에 국군 제6사단의 대부분이 간격을 이용하여 남쪽으로 퇴각

주력은 포천의 미군 1개연대를 공격

제50군

제39군과 협동하여 1일 2시에 임진강을 돌파, 적 진지 2키로미터를 돌입하여 자장리 지역을 점령
2일 11시에 문산 부근의 율곡리, 문평리, 황발리지역을 계속하여 점명

인민군 제1군단

2일에 문산 부근의 선유리 및 파주리 지역까지 진격

제40군과 제38군은 2일 17시까지 의정부 동부지역, 포천 남쪽지역까지 계속 진격

이로인해 중국군 우종대는 이미 파주리, 선암리, 칠봉산 및 의정부 동북까지 진격하여 적 방어종심 15내지 20킬로미터 지역에 진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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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미원조전사 14-9 제3차전역을 위한 중국군의 준비

제3차 전역을 위해 중국군이 준비한 내용은 다음과 같다.

첫째, 북 중 연합사령부를 창설

인민군은 재정비를 거쳐 제1선에 3개군단(1,2,5) 14개 사단의 75,000명이 참가할 수 있었다.
양국간 협의를 거쳐 12월 상순에 북중 연합사령부를 설치,
작전의 범위와 전선에 관한 활동을 연합사령부가 결정하고 지휘를 총괄케 함

연합사령부 창설은 대외에 공포하지 않기로 했음

둘째, 병력보충 실시 및 제19병단의 참전 준비

중앙군사위는 1951년 3월 제19병단이 한반도 전선에 도착토록 결정
한반도에서 동원되는 신병으로 병력을 보충하며 중국본토의 부대 가운데 84,000여명의 고참병을 동원하여 전선부대에 보충하여 전투력을 신속하게 회복시키도록 결정함
(한반도에서 동원되는 신병으로 중국군 보충했다는 이야기 ?)

셋째, 후방의 보급수송을 개선, 후방기구를 강화

기존의 9개 대형 정거장을 11개로 증설키로 결정하고 지향성 공급체제를 실행
(정확하게 내용을 이해하기 어려움)

철도병 직속독립연대 및 직속교량연대를 참전시켜 철도병 제1사단과 공동으로 경의선의 정주에서 맹중리까지의 철로(41.7km), 만포선의 희천에서 개천(71.1km)까지의 철로를 수리 복구

넷째, 조직적인 현지조달을 실시

제3차 전역직전까지 모두 30,000톤의 식량을 조달

다섯째, 작전준비

27일 전역 공격준비지역을 은밀하게 점령
제50군은 개성 동쪽에 위치, 제39군은 구화리 지역에 위치, 제66군은 금화 남쪽 및 화천 북쪽지역
제40군은 삭녕지역, 제42군은 철원 동쪽 지역, 제38군은 연천 지역

인민군 제1군단은 사리원 및 그 이남 지역에 각각 위치

인민군 제2군단 제5군단 5개사단은 31일전에 홍천부근까지 진출
나머지 주력부대는 인제지역에 위치

여섯째, 전술지휘

적이 견고하게 편성한 진지에 대한 공격을 실시할 때는 반드시 절대적으로 우세한 병력 및 화력을 집중해서 우선 돌파구를 개척해야 한다고 특별히 강조

돌파후에는 분할 포위를 진행함과 동시에 적의 종심을 향해 계속 진격을 감행할 수 있는 충분한 전력을 유지하여 적을 섬멸해야 한다는 것을 하달

전역적 기습을 달성하기 위해 공격개시시간을 12월 31일로 결정

대외적 여건조성

11월 28일과 12월 16일에 오수권 대표를 유엔에 파견하여 미국의 침략범행을 탄핵

12월 22일 외교부장 주은래는 유엔이 비합법적으로 한국정전 3인위원회 설립결의를 통과시킨 것을 비난하며 미국 정부의 정전을 이용한 음모를 폭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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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미원조전쟁사 14-8 제3차 전역 팽덕회의 작전구상과 계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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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택동의 지시에 따라 팽덕회는 다음과 같은 작전구상을 했다.

‘인민군 3개 군단의 협동하에 지원군 6개군을 집중하여 공격을 실시하며 적군이 38선에 구축한 방어선을 돌파하고
“임진강가 동안에서 북한강 서안간의 제1방어선에 포진한 국군 제1사단, 제6사단, 제2사단 및 제5사단의 일부를 섬멸한다.”

만약 상황이 순조롭게 전개된다면, 계속해서 기민하게 서울과 춘천, 홍천, 양양, 강릉지대를 점령한다. 그 후 재차 휴식과 재정비를 진행하면서 춘계 공세를 준비한다’는 것이었다.

팽덕회는 제3차 전역에서 한국군을 지향한다는 것을 분명하게 정했던 것이다.

작전계획은 다름과 같다.

5개군(군단)을 주공으로 동두천, 서울방향으로 공격, 별도로 2개군이 제령리와 가평 및 춘천방향으로 각각 공격하고 인민군 2개군단은 자은리, 홍천 방향으로 공격한다.

우종대

지원군 제38, 39, 40, 50군에 포병 6개연대(25, 26, 29, 42, 45, 46)를 배속시켜 우종대를 조직
이부대를 한선초 부사령원이 지휘

고랑포리와 영평간에서 공격하되 우선 국군 6사단을 섬멸하고 다시 국군 제1사단을 섬멸한다. 성공하면 의정부 방향으로 진출

제39군

신대(샛터), 토정(토막포)간에서 임진강선을 돌파, 그 주력부대는 상성동, 오현리, 법원리 방향으로 공격, 증원하는 적에 대한 타격과 문사지역의 국군 제1사단을 견제할 준비

별도의 1개사단은 상수리, 신암리 방향으로 우회, 그 지역의 진지 점령하여 북쪽으로의 적의 지원과 남쪽으로의 도주를 저지

상기 임무 달성후 군 주력부대는 제50군과 합동으로 국군 제1사단을 포위 섬멸

제40군

아마리와 고난 간에서 임진강과 한탄천을 도하하여 동두천 방향으로 공격, 제38군 및 제39군의 1개 사단과 협조하여 국군 제6사단을 포위 섬멸한다.

제38군

누대(다락대)와 판거리(늘거리)간에서 한탄천을 도하, 우선 영평지역의 적을 섬멸, 연후에 동두천, 지행리 방향으로 공격, 제40군과 협조하여 국군 제6사단을 포위섬멸,

별도 1개사단으로 칠봉산 진지를 점령하여 북으로의 증원을 저지하며 또 다른 일부는 포천의 적을 감시한다.

제50군

모석동과 고랑포리간에 개목동 방향으로 공격, 제39군과 협조하여 적의 원군을 섬멸하거나 국군 제1사단을 공격

임민군 제1군단

주력부대는 동장리 이동에서 문산방향으로 양공을 실시, 지원군 우종대와 협조하여 국군 제1사단을 섬멸, 또 다른 일부부대는 해주지역에서 해상의 적을 경계하면서 아군 우측면의 안전을 보장

좌종대

지원군 제42, 66군이 포병 제44연대를 배속받아 좌종대를 조직
제 42 사령원이 좌종대를 지휘, 영평에서 마평리지역 사이에서 적 전선 돌파후 주력을 집중
영평과 용소동(용담리)간 국군 제2사단의 1-2개 연대를 섬멸

이후 가평, 청평리 방향으로 전과를 확장, 서울과 춘천간의 연결을 차단
다른 1개사단(1개 연대 결)은 화천에서 북한강을 도하, 춘천 북쪽으로 적극적인 양공을 실시

국군 제5사단을 견제, 좌익의 인민군 제2 및 제5군단의 남진을 지원

제42군

관음산과 배선동간에서 돌파, 주력부대는 중판리, 귀목동 방향으로 공격
국군 제2사단 제17연대를 섬멸, 청평 가평간 도로를 절단
다른 1개사단을 제영리 방향으로 우회, 제66군의 주력과 협조하여 국군 제2사단 32, 36연대를 섬멸

제66군

주력은 각각 용소동(용담리)와 마평리, 원평리 지역에서 돌파여 제영리 방향으로 공격,
제42군과 협조하여 국군 제2사단을 섬멸
다른 2개 연대는 춘천 이북에서 적극적인 양공을 실시, 국군 제5사단을 견제하여 주력부대 작전에 협조
인민군 제2, 5군단의 남진을 지원한다.

인민군 제2군단(2개 연대를 결한 4개사단) 및 제5군단의 일부(1개사단)

전역개시전에 38선을 넘어 홍천 동남지역에 은밀 침투한후 정면공격에 배합할 준비

제5군단의 주력(4개사단)과 제2군단의 일부(2개연대0

양구와 인제지역간 국군 제1, 제2군단의 접합부를 공격
이후 홍천 방향으로 전진, 춘천의 적 퇴로를 절단하고 지원군 주력과 협조, 춘천지역의 적을 포위 섬멸

인민군 해군 4개여단은 동해안 방어를 책임

제3군단은 원산을 방어, 제4군단은 서해안 방어를 담당

지원군 제9병단은 제2차 전역중 동상에 걸림 병사가 많아 함흥지역에 집결하여 계속하여 휴식 및 재정비
(제3차 전역에 제9병단이 참가하지 않았음. 만일 제9병단이 참가할 수 있었다면 제3차 전역은 매우 어려워졌을 것임. 이렇게 보면 당시 미제1해병사단의 전투가 매우 성공적으로 한반도 작전에 기여했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임, 의미 재평가가 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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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미원조전사 14-7 제3차 전역, 모택동의 입장변경(신속한 작전 지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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팽덕회의 신중한 작전에 동의했던 모택동은 곧바로 신속한 작전을 주문했다.
새로운 정보를 확인했다는 것이다.

“한국군 및 미군의 일부가 이미 37도선에서 부터 38도선 사이에 확고하게 방어선을 구축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으며, 이것이 중국군이 먼길을 진격하지 않고도 바로 교전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82)

이런 정보는 이미 팽덕회도 알고 있었고 중국군 지도부 전체가 다 공유하고 있었다. 새로운 정보도 아닌 것을 가지고 모택동이 신속한 결전을 요구한 것은 무엇 때문일까?

제2차 전역이후 작전을 중지한 것에 대한 북한과 소련의 반발때문일 것이다. 당시에 김일성과 팽덕회가 서로 몸싸움까지 했다는 소리까지 있었다고 한다.

모택동은 애초에 인민군 제2, 제5군단을 적후방에 투입하여 병력을 분산시키려는 계획을 변경하면서 다음과 같은 전문을 보냈다.

“국군이 집중되어 있으면 아군에게 유리하고 분산되어 있으면 아군에게 불리하다. 만약에 인민군 제2 및 5군단이 이 시점에서 조선 남부에 침투하여 적의 후방을 위협하게 되면 적군의 병력이 분산되고 적은 부대배치를 변경하게 될 것이다.

즉 37도선 이북지역에 방어선을 구축하지 않으려 할 것이다. 이렇게 되면 아군의 작전에 매우 커다란 곤란이 초래되고, 아군은 적군을 쉽게 섬멸치 못하게 될 것이다. 따라서 인민군 제2, 제5군단은 현시점에서 조선남부에 투입되지 말아야 한다.

또 아군의 주력(인민군을 포함)은 이번 전역을 마친 연후 수십리를 스스로 철수해서 휴시과 재정비를 갖추게 해야 한다. 그럼으로써 미군과 한국군이 안도감을 느끼고 그 방어선을 가능한한 북쪽에 편성케하여, 아군이 춘계에 다시 적을 섬멸함에 유리하게 될 수 있다.”(82)

모택동의 이런 지시는 최종적인 것으로 팽덕회는 거부할 수 없었을 것이다. 모택동도 당시 중국군의 상황을 볼 때, 계속 공격할 수 있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었으나 소련과 북한의 요구를 무시할 수도 없었을 것이다. 제2차 전역이후 공격중지문제는 스탈린이 중국과 북한의 입장을 직접 조정해야 할만큼 심각한 갈등을 초래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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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미원조전쟁사 14-6 제3차 전역을 위한 팽덕회의 신중한 계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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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택동의 강요에 의해 어쩔 수 없이 제3차 전역을 정비없이 계속하게 되었으나 팽덕회는 매우 신중하게 작전을 수행해야 한다는 입장을 모택동에게 밝혔다.

당시 예하부대는 신속한 승리를 쟁취해야 한다는 움직임이 있었다. 팽덕회는 이런 움직임을 눌러야 했다.

12월 19일 팽덕회는 신중한 작전의 필요성에 대한 전문을 모택동에게 보낸다

“내 관점에서 볼 때, 조선전쟁은 상당히 장기적이며 어려운 전쟁이 될 수 있다. 적군은 공격에서 방어로 전환하였고, 전선은 축소되고 짧아졌으며, 병력은 집중되어 있고, 방어전선은 협소하여, 자연히 종심이 강화되었고 합동작전에 유리하게 되었다.

미군과 남조선군의 사기는 비록 전보다 저하되었으나, 아직도 260,000명의 병력을 보유하고 있다. 정치적으로 볼 때, 적군이 이 시점에서 조선을 포기하게 되면 제국주의에게는 매우 불리할 것이기에, 영국 프랑스도 미국이 조선을 포기하지 말것을 요구하고 있다.

적은 다시금 한 두번의 패배를 겪더라도 또 다시금 2-3개 사단이 섬멸당하더라도 아마 몇개의 교두보 진지(부산, 인천, 군산)까지 물러나면서 방어할 것이며 결코 조선에서 철수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기에 아군은 현재 신중한 공격을 취해야 한다”(81)

이런 판단을 바탕으로 다음과 같은 작전구상을 모택동에게 건의했다.

“의외의 실수를 피하기 위해서, 장차 4개군(50군, 66군은 양익에서 적군을 견제)을 집중하여 우선 남조선 제1사단을 섬멸하고 후에 계속해서 기회를 보아 남조선 제6사단을 공격한다. 만약 이러한 전역의 발전이 순조로울 경우에는 다시 춘천의 남조선 3군단을 공격하며, 만약 순조롭지 못하면 적당한 시기에 병력을 수습한다. 38선을 통제하는 여부는 반드시 당시의 구체적인 상황을 보아 그때 다시 결정을 한다.”(81)

팽덕회의 건의에 대해 모택동은 12월 21일 다음과 같은 전문을 보냈다.

“적 정세에 대한 당신의 예측은 정확하다. 반드시 장기계획을 세워야 하고 신속하게 승리를 쟁취하려는 관점은 매우 해로운 것이다.”

“현재 미 영국군은 서울지역에 집중되어 있어서 공격하기 불리하며, 따라서 우리는 남조선 군대를 먼저 공격하여야 한다. 결론적으로 강조한다면 우리가 남조선 군대 대부분을 섬멸시킬 수 있다면 미군은 고립될 것이고, 조선에 장기간 주둔할 수 없게 될 것이다. 이럴 때 다시 미군 몇개 사단을 섬멸시키면, 조선문제는 매우 순조롭게 해결 될 것이다”

전쟁이 장기화 될 것이며 신중한 작전이 요구되며 작전의 주요 대상이 국군이라는 점에서 모택동과 팽덕회는 기본적으로 인식을 같이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택동은 전쟁을 신속하게 종결시킬 수 있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모택동의 작전에 대한 관여는 매우 구체적이다. 이런 구체적인 작전 개입이 어떤 결과를 초래했는지는 잘 살펴볼 필요가 있다.

제2단계 작전에서 휴식을 가져야 한다는 팽덕회의 주장을 물리치고 이어서 곧바로 제3차 전역을 수행하게 한 것은 분명 부정적이었다.

모택동이 작전에 세부적인 지침을 내렸지만 그것이 현지에서의 작전수행에 얼마나 도움이 되었는지는 확인이 필요하다. 모택동의 지침과 그 이후 팽덕회의 작전지침 그리고 그 이후의 작전경과를 하나씩 비교해나갈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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