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전쟁사) 한국의 분단 1945 - 1948, post 15

웨더스비 교수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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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번 소련 외무장관 몰로토프의 치밀한 계산과 미국내 자신의 정치적 입지를 위해 무엇인가 성과를 남겨야 한다고 생각했던 미국무장관 번즈의 합의 결과 신탁통치가 결정이 되었다는 것을 알아 보았습니다. 이번 포스팅에서는 처음에는 신탁통치를 반대했던 한국의 공산당이 찬탁으로 돌아서면서 박헌영이 북한에서 받아온 찬탁의 논리를 살펴보고 있습니다. 신탁통치는 일본의 침략적 제국주의와 다른 민주주의적 국가의 우호적 원조와 지원이라는 논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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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년 12월 31일 아침, 모스크바에서 연합국들이 한국에 신탁통치를 수립하기로 했다는 뉴스가 남한에 퍼져나가자, 수천명의 인파가 서울 한복판에 모여서 이 결정에 항의했다. 비슷한 집회가 다른 도시와 마을에서도 시작되었다. 중국에서의 오랜 망명에서 최근 돌아온 김구는 분노했으며 그는 미군정 정부로 부터 권력을 장악하려고 했다. 그는 합의(신탁통치)에 대해 한국의 좌파를 비난했으며 “모든 댓가를 치르고 러시아를 달래려고” 신탁통치를 수용했다고 미국을 책망했다.

사실, 좌파정당들은 한국의 다른 집단과 마찬가지로 신탁통치에 반대했다. 박헌영이 북한지역에서 소련 장교들을 만나서 상황을 논의하는 동안, 서울의 공산당 지도부는 1월 3일 반탁 시위를 계획했다. 그들은 모스크바 합의는 미국의 작품이라고 믿고 있었기에 소련이 이런한 행동에 반대하리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박헌영이 돌아와서 당이 신탁통치 합의를 지원해야한다고 했을때 그것은 충격적이었고 혼돈스러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훌륭한 공산주의자로서 지시에 복종해야 했다. 그날 이후 그들은 공산당은 모스크바 회담의 합의를 지지한다는 성명을 발표했다. 로버트 스칼라피노와 이종식이 “이시대 처럼 러시아의 권위가 한국 공산주의 운동을 더 큰 시험에 들게 한 적이 없었으며, 그 권위의 힘이 더 빛나게 보여진 적이 없었다.”라고 한 것은 적절한 표현이었다

박헌영은 소련의 정치장교들이 급하게 초안한 정당성에 대한 정밀하고도 서로 연관되어 있는 당의 입장을 가지고 왔다. “한국문제에 대한 모스크바 3상회담의 결정에 대한 한국 공산당의 성명”은 미국과 영국이 소련이 협조한 얄타회담에서의 “민주주의를 강화시키기 위한 투쟁에 그들이 준비가 되어 있다는 것을 확인하는 것”이라면서, 소련과 미국은 국제적 협력을 강화하고 평화와 안전보장을 지원할 것이다라는 선언으로 시작했다. “현재, 3개 강대국들은, 파시즘에 대한 전쟁동안 책임을 다한 것 처럼, 세계의 지도적 책임감을 계속 수행하고 있다. 그러므로 모스크바 3상회담의 결정은 민주주의의 가장 큰 발전이며 강화이다”

한국내에 신탁통치에 대한 광범위한 반대로 인해, 당은 오랜기간의 일본지배와 국가적 통합의 부재의 파멸적 결과로 인한 이러한 단계의 필요성을 설명하고자 했다. “우리는 이러한 단계의 존재를 수용하는 것을 거부하지 않는다”라고 성명서는 밝혔다. 이 결정에 반대하는 사람들은 일본통치의 결과보다는 3개 연합국에 책임을 돌리려고 한다는 것이다. “그들은 3개국의 우호적 지원과 협조를 이전의 일본의 침략적 제국주의와 유사한 제국주의적 보호의 수립으로 그리고 있다”

당은 특별히 김구의 단체가 한국 인민들을 잘못 이끌고 있으며, 그들을 민주주의 국가에 대해 적대적인 태도를 취하도록 기만하고 있다고 주장하고자 했다. 한국 인민들에게 가장 큰 위험인 김구의 행동에 대항하기위해, 당은 “전체 한국 인민들에게 논의의 여지없이 진보적 성격을 지닌… 모스크바 회담 결정의 진정한 의미를 올바르게 알려주어야 한다.”

한국 공산주의자들은 모스크바 결정이 카이로 회담에서 약속한 것과 같이, 한국의 독립문제에 대한 보다 견고하며 결정적인 해결책이라는 것을 선언해야 했다. 쓴약을 순화시키기 위해서, 그들은 “국가를 건설하는 문제에 있어서 전국적인 단합의 수립”이라는 만장일치의 조건을 만족시키면 신탁통치의 기간이 단축될 수 있다는 약속을 제시하고자 했다. 다른 말로 하자면, 만일 한국인들이 합의에 대한 반대를 중지하고 그대신 모스크바가 만족할 만한 정부를 수립하게 되면, 독립은 보다 일찍 온다는 것이다.

다음의 포스트에서는 어떻게 모스크바 회담의 합의가 북한지역에서 찬성을 받았으며 어떻게 조만식의 신탁통치 찬성에 대한 거부가 그의 정치적 생명이 끝나도록 했는지를 알아 보겠다.

[참고자료]

George McCune, “Occupation Politics in Korea” Far Eastern Survey 15, No. 3 (February 13, 1946); Richard Lauterbach, Danger from the East;

Robert Scalapino and Chong-sik Lee, The Korean Communist Movement, Part I;

The statement Soviet officials wrote for the communist party in Seoul comes from Russian State Archive of Social and Political History, Fond 17, Opis 128k, Delo 205, Listy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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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orean War) The Division of Korea, 1945-1948. Post # 15

Prof. Kathryn Weathersb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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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n the morning of December 31, 1945, as news spread through the southern zone that the allied powers agreed in Moscow to create a trusteeship for Korea, thousands of people gathered in the center of Seoul to protest the decision. Similar demonstrations began in other cities and towns. Kim Koo, recently returned from his long exile in China, was so outraged that he vowed to seize power from the American military government. He blamed the Korean left for the agreement and accused the US of accepting trusteeship to “appease Russia at all costs.”

In actuality, leftist parties were as opposed to trusteeship as all other groups in Korea. While Pak Hon-yong met with Soviet officers in the northern zone to discuss the situation, the communist party leadership in Seoul planned an anti-trusteeship demonstration for January 3. They never imagined the Soviets would oppose such action, since they believed the Moscow agreement was the work of the Americans. It therefore must have been shocking and confusing when Pak Hon-yong returned with the message that the party must support the trusteeship agreement. As good communists, they nonetheless obeyed the instructions. Later that day they announced that the Communist Party stood in support of the Moscow Conference Agreement. As Robert Scalapino and Chong-sik Lee aptly noted, “never during this era was Russian authority over the Korean Communist movement to be put to a more crucial test – and never was the power of that authority more strikingly revealed.”

Pak Hon-yong also brought back an elaborate, convoluted justification for the party’s position, hastily drafted by Soviet political officers. The “Statement of the Korean Communist Party about the Decision of the Moscow Conference of Three Foreign Ministers on Korea,” began by declaring that inasmuch as the United States and Great Britain “confirmed their readiness to struggle for the strengthening of democratism [sic]” at the Yalta conference, the cooperation of the USSR, the US and the USA strengthens international cooperation and supports peace and security. “At the present time, the three great powers are continuing to carry the responsibility for the leadership of the world, just as they bore the responsibility during the war against fascism. Therefore, the decision of the Moscow conference of three foreign ministers is the furthest development and strengthening of democratism [sic].”

As for the widespread opposition to trusteeship within Korea, the party would explain that the arrangement was necessitated by the pernicious consequences of the long period of Japanese rule and the lack of national unity. “We cannot refuse to admit that such a position exists,” the statement declared. Those who oppose the decision are attempting to lay responsibility for it on the three allied powers rather than on the consequences of Japanese rule. “They portray the friendly aid and cooperation of the three states as the establishment of an imperialistic protectorate, similar to the earlier rule of Japanese aggressive imperialism.”

The party would claim that Kim Koo’s group, in particular, is misleading the Korean people, fraudulently setting them against the democratic powers. To counter Kim Koo’s actions, which represent the greatest present danger for the Korean people, the party must “correctly elucidate to the whole Korean people the true meaning of the decision of the Moscow conference…which has an indisputably progressive character.”

Korean communists should declare that the Moscow decision was a more concrete and definite resolution of the question of independence for Korea, as promised at the Cairo conference. To sweeten the bitter pill, they would hold out the promise that the period of trusteeship could be even shorter if the country met the ominous requirement of “establishing full national unity in the matter of constructing the state.” In other words, if Koreans stopped protesting the agreement and instead cooperated with the communist party to set up a government satisfactory to Moscow, independence would come sooner.

In the next post, we will examine how the Moscow Conference Agreement was popularized in the northern zone and how Cho Man-sik’s refusal to support it led to his removal from political life.

[Sources: George McCune, “Occupation Politics in Korea” Far Eastern Survey 15, No. 3 (February 13, 1946); Richard Lauterbach, Danger from the East; Robert Scalapino and Chong-sik Lee, The Korean Communist Movement, Part I; The statement Soviet officials wrote for the communist party in Seoul comes from Russian State Archive of Social and Political History, Fond 17, Opis 128k, Delo 205, Listy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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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전쟁사) 한국의 분단 1945 - 48, post# 14

웨더스비 교수 씀

현재 다루어지고 있는 내용은 1945년 12월 모스크바 3상회담에서 이루어진 한반도 문제에 대한 논의 과정입니다. 그 당시 이미 소련은 북한에서 정권을 수립하기 위한 준비를 다 하고 있었으며 실행에 들어가 있었습니다.

최근 다루는 글에서는 한반도에 단독정부를 수립해야 한다고 주장했던 것은 미국무장관인 번즈였으며. 모스크바 3상회의에서는 번주의 주장을 몰로토프가 역으로 이용하여 미소 공동위원회를 만들어 한반도에 단일 정부가 수립될 수 없도록 여건을 만들어 갔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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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1945년 12월 모스크바에서 연합국 외무장관회의에서 한국문제에 대한 토의가 시작되었을때, 소련 외무장관 몰로토프가 영리하게 미국무장관 번즈로 하여금 먼저 자신의 안을 보이도록 한 것을 보았다. 미국의 비현실적인 제안을 확인한 소련 대표단들은 역제안을 제시했다. 소련의 계획은 미국의 방안을 이용하여 소련에게 “우호적”이지 않은 한국의 정부가 수립되는 것을 막을 수 있는 방안을 만드는 것이었다.

몰로토프가 제출한 제안은 “산업, 수송 그리고 농업의 발전을 위해 필요한 조치”를 취할 수 있는 임시정부의 수립을 요구했다. 이러한 방안은 논의의 초기에 미국이 제시한 경제적 문제에 대한 관심에 대한 응답이었다. 동시에 이 방안은 정부의 수립이 이런 실제적인 문제의 해결을 지향해야한다는 것을 규정함으로써 소련의 이익을 보호했다. 번즈의 단일 행정기구의 제안과 신탁통치를 위한 모호한 미국의 구상을 합쳐서, 몰로토프는 이러한 임시정부를 수립 함에 있어서, 한국이 소련과 미국 사령부의 대표들로 구성된 공동위원회의 지원을 받아야 한다고 제안했다. 공동위원회 위원들이 임시정부에 대한 권고를 각각의 정부에 제출하기 전에, 그들은 한국의 “민주적 정당과 사회조직들”과 협의를 할 수 있었으며, 이 구절은 모스크바의 전략의 핵심이었다.

미국무장관은 몰로토프의 제안에 공동위원회의 권고안들은 4개국들은, 소련이 제안한 것 처럼, 5년간 지속되는 신탁통치를 구성할 4개국에 제출되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는 것만으로 응답했다. 번즈는 사생각없이 공동위원회의 구성을 수용했다. 소련이 미국과 동일한 숫자의 투표권을 가졌기 때문에, 그들은 소련에 적대적일 수 있는 인사들이 포함될 수 있는 “민주적 정당과 사회조직들”의 어떠한 정의에도 비토권을 행사할 수 있었다. 조지 케난이 예측한 것처럼, 번즈는“합의의 증진을 위해” 소련의 초안을 거의 수정없이 수용했다.

아주 살짝 수정된 소련의 제안은 12월 27일 발표된 회담의 코뮤니케에 삽입되었다. 이 합의는 모스크바가 미국과 협조를 하고 있다는 모습을 보여주는 동시에 전체 한국에 “비우호적”인 정부의 수립을 막을 수 있는 방법을 제공했으며, 모스크회담의 합의는 소련정부의 전기간동안 경건하게 읖조려진 성스러운 문서의 지위를 획득했다.

그러나 모스크바 회담의 합의가 소련의 이익을 보호하기 전에, 슈티코프 장군은 서울의 공산당 지도자를 설득하여 신탁통치를 지지토록 했다. 그들이 이러한 임무를 어떻게 수행했는지에 대한 문서기록은 가용하지 않으나, 여러자료에 따르면 공산당 지도자 박헌영은 12월 28일 소련구역을 여행하고 1월 2일 서울에 돌아왔으며 당이 모스크바 합의를 지원하도록 설득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슈티코프의 부하들은 또한 자신들의 지역에서 합의에 대한 반대를 표현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한 조치를 취했다. 그들이 공동선언문을 언론에 발표했을때 모욕적인 용어인 “신탁통치” 대신 “보호통치(guardinaship)”로 대체했다. 그들은 또한 “최대 5년간의 기간동안 4개국은 한국신탁통치에 관한 합의를 발전시킨다”라는 주의 규정을 공동위원회의 제안은 “4개보호국에게 제출될 수 있다”는 간단한 문장으로 바꾸었다. 이런 세심한 조치들은 이미 현지에서 작동하고 있던 통치기구와 비공산주의 정치활동가들의 남한으로의 탈출과 합쳐져서 소비에트 구역에서 대중의 반발을 잠재우는데 성공했다.

그러나 미국지역에서는 공동선언문에 관한 뉴스가 즉각 열정적인 반대를 초래했다. 분노한 대중들은 거리를 매웠으며 가게는 문을 닫았고 미국인들은 집안에 머물라는 명령이 내려졌다. 다음 포스트에서는 어떻게 소련이 남한에서 합의의 반대를 이용하여 믿을 수 있는 친모스크바의 인물들로 구성되지 않는 어떠한 임시정부도 수립될 수 없게 했는가를 살펴보겠다.

[참고자료]
Robert Byrnes, Memoir; Hak S. Paik, “North Korean State Formation, 1945-1950”;
Foreign Relations of the United States, 1945, Volume VIII; Richard Lauterbach, Danger from the Ea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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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orean War) The Division of Korea, 1945-1948, Post #14

Prof. Kathryn Weathersb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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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e’ve seen that when the allies began their discussion of Korea at the Moscow Conference of Foreign Ministers in December 1945, Soviet Foreign Minister Molotov cleverly let US Secretary of State Byrnes be the first to show his hand. Then, having received the unrealistic American proposal, the Soviet delegation drafted a counter-proposal. The Soviet plan used the US formulation to create a process that would ensure that Moscow could block the creation of any government for Korea that would not be “friendly” to the Soviet Union.

The proposal Molotov presented called for the establishment of a provisional government that would “undertake all necessary measures for the development of industry, transportation, and agriculture.” This formulation answered American concerns about the economic issues they raised at the beginning of the discussion. At the same time, it protected Soviet interests by stipulating that the creation of a government would precede rather than follow the resolution of these practical issues. Conflating Byrnes’ recommendation for a unified administration with the vague American idea for trusteeship, Molotov proposed that in forming this provisional government, Koreans would be assisted by a Joint Commission composed of representatives of the Soviet and American commands. Before the members of Joint Commission would submit recommendations on the provisional government to their respective governments, they would consult with Korea’s “democratic parties and social organizations,” a phrase that was the key to Moscow’s strategy.

The Secretary of State responded to Molotov’s proposal only by insisting that the Joint Commissions’ recommendations would be presented to each of the four powers, who would then, as the Soviets had proposed, form a trusteeship lasting up to five years. Byrnes thoughtlessly accepted the composition of the Joint Commission. Since the Soviets would have an equal number of votes as the Americans, they could veto any definition of “democratic parties and social organizations” that might include persons hostile to the USSR. As George Kennan had predicted, Byrnes accepted the Soviet draft nearly unchanged “in the interests of promoting an agreement.”

The slightly amended Soviet proposal was then incorporated into the communique the conference released on December 27. Since this agreement provided a means for Moscow to preserve the appearance of cooperating with the US while simultaneously preventing the establishment of an “unfriendly” government for all of Korea, the Moscow Conference Agreement soon acquired the status of holy writ, piously intoned for the remaining lifetime of the Soviet government.

However, before the Moscow Conference agreement could protect Soviet interests, General Shtykov would have to persuade the Communist Party leadership in Seoul to support the hated trusteeship. The documentary record of how they accomplished this task is not available, but numerous sources reported that party leader Pak Hon-yong traveled to the Soviet zone around December 28 and returned to Seoul on January 2 ready to persuade the party to support the Moscow agreement.

Shtykov’s men also took steps to prevent expressions of opposition to the agreement in their zone. When they released the communique to the press they substituted “guardianship” for the hated word “trusteeship.” They also replaced the alarming reference to “developing an agreement relating to Korean trusteeship by the Four Powers for a maximum period of five years” with the simple statement that the Joint Commission’s proposals “will be turned over to the four guardians.” These precautions, combined with the governing mechanisms already in place and the exodus of non-communist political activists to the South, succeeded in muting public protest in the Soviet zone.

In the American zone, however, news of the communique immediately raised passionate opposition. Angry crowds filled the streets, shops closed, and Americans were ordered to stay inside. In the next post we will examine how the Soviets used opposition to the agreement in the South to guarantee that no provisional government would be created unless it was made up of persons reliably pro-Moscow.

[Sources: Robert Byrnes, Memoir; Hak S. Paik, “North Korean State Formation, 1945-1950”; Foreign Relations of the United States, 1945, Volume VIII; Richard Lauterbach, Danger from the Ea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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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쟁사) 한국의 분단 1945 - 1948, post # 13

웨더스비 교수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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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저번 포스트에서 미국무장관 번즈가 1945년 12월의 연합국 외무장관회담에서 한국이 두개의 점령지역으로 분할된 것에 의해 초래된 실제적인 문제를 미국과 소련 사령관들이 해결할 필요성에 대한 혼란스러운 발언으로 한국문제에 대한 토의를 시작한 것을 보았다. 소련 외무장관 몰로토프는 “루즈벨트 대통령과 스탈린 원수간에 논의된바와 같이, 한국에 단일 행정기구, 신탁통치 그리고 독립정부에 대한 문제에 대한 검토는 해리만의 편지에서 제기된 실제적인 문제들의 해결을 촉진할 것이다”라고 제시함으로서 이 문제에 대한 토의를 종식시켰다.

영국외무장관 베빈은 신탁통치에 관한 초안의 복사본을 요구하면서 몰로토프의 제안에 끼어 들었다. 문서본이 없이 구두토의만 있었기 때문에, 번즈 국무장관 미국 대표단에게 다음 회담을 위해 이문제에 대한 문서를 준비하라고 요구했다. 미국이 먼저 자신의 문서를 보여주도록 하는 것이 유리했기 때문에, 몰로토프는 미국의 문서가 제시될 때 까지 한국문제에 대한 토의의 연기에 동의했다.

미국이 다음날 제시한 문서는 4개국 신탁통치가 한국이 “독립적, 대표적, 그리고 효과적인 정부”를 구성하기에 필요한 만큼을 초과하지 않는다는 것에 대한 “일반적인 양해가 있었다”라고 기술했다. 문서는 번즈 국무장관이 전날 제기한 얄타협정보다 단지 조금 덜 모호한 신탁통치에 대한 공식으로 결론을 내리기 전에 양개 군 사령관하의 단일 행정기구의 창설에 관한 공식을 반복했다.

“신탁통치 협정의 문항에 대한 우리의 구상이 결정적인 형태는 아니다”라고 인정하면서, 미국은 유엔과 한국인민을 대신하여 작동할 4자가 참가한 기구를 제안했다. 유엔헌장 76조에 따라서, 이러한 기구는 자유롭고 독립적인 정부가 수립될 때까지 효과적으로 국가를 운영하는데 필요한 행정, 입법 및 사법권을 행사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기구는 고위급 위원회와 행정 위원회가, 한국인민의 진보적인 정치적, 경제적 그리고 사회적 발전의 증진과는 별도로, “5년의 기간안에 독립적인 한국정부를 구현하기 위한 목적으로, 인민에 의해 선출된 한국의 입법 그리고 적절한 한국의 사법적 체계를 수립”할 수 있었다.

본인은 지금 만일 신탁통치의 파트너들이 미국과 영국, 비슷한 정치적 가치와 제도를 가진 국가들이라면, 이러한 협정이 작동할 수있을 것이라고 제시하는 것이다. 사실, 베빈은 영국 정부는 “이러한 원칙에 관해 심각한 충돌이 없다”고 하면서, 시행을 위해 전문가들이 검토할 것을 제시하면서 호의적으로 제안에 반응했다. 그러나, 미국에게, 정반대의 정치적 그리고 사회적 체계를 가진 두국가에게 한국의 “정치적, 경제적 그리고 사회적 발전”을 증진하기 위해 스탈린의 소련과 같이 일한다는 것은 명백히 불합리하다고 제시했다.

소련을 잘 알고 있던 미국 외교관들은 이러한 방식은 불합리할뿐만 아니라 위험하다는 것을 잘 이해하고 있었다. 장차 봉쇄정책의 설계자, 조지 케난은 모스크바의 미국 대사관에 근무하면서, 모스크바 회의가 무엇보다 열리지 말았어야한다고 믿었으며, 그것은 실질적인 것은 아무것도 생산해내지 못하고 대신 소련이 장악한 지역에 독재체제 이식의 합법성을 가려줄 것이라는 것이다. 본국에서의 정치적 이익을 위해, 이 의제의 이런 저런 이슈에 일종의 합의에 도달한 번즈의 결정과 관련하여, 케난은 “ 그들은 한국, 루마니아 그리고 이란인 들에 대해 관심을 가졌으나, 그는 그들에 대해 아무것도 몰랐으며, 합의의 이면의 실제는 그의 관심이 아니었다. 러시아인들은 이것을 알았다. 그들은 그가 현실에서 이 문제에 대해 값비싼 대가를 치를 것을 알았다”고 예리하게 관찰했다.

케난은 나중에 몰로토프가 “러시아 담배를 길게 물고 앞으로 기대 앉있었으며, 외무장관들을 한명씩 훑어 보면서 만족스러움과 자신감으로 눈을 반짝였다….그는 로얄 플러쉬를 쥔 열정적인 포커플레이어와같은 모습을 하고 있었으며 그의 마지막 상대편에게 콜을 하는 것 같았다.”라고 회상했다.

다음 포스트에서는 한국과 관련하여 어떻게 소련 외무장관 몰로토프가 “실제 문제에 값비싼 댓가”를 부과했는지 자세하게 살펴볼 것이다.

[참고자료]
George F. Kennan, Memoirs: 1925-1950; Foreign Relations of the United States, 1945, Volume I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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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전쟁사) 한국의 분단 1945 - 1948, post # 12

웨더스비 교수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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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에게 있어서 남한의 점령은 경제적인 부담이었으며, 미국은 값어치 있는 자원을 거의 가지지 못한 지역에 식량보급, 에너지 지원 등을 해주어야 했다. 그러나 소련은 북한의 풍부한 광물과 산업지역을 통제하는 것이 전쟁으로 찟겨나간 국가가 간절히 필요로 하는 자원들을 확보하기 위한 중요한 수단이었다. 그러므로 소련 외무부는 모스크바의 1945년 12월 연합국 외무장관회담에서 한국문제 해결에 대한 토의를 준비할 때, 소련 외교관들은 자신들의 지역에서 경제적 자산에 대해 지속적인 통제를 확보하는 계획을 마련했다.

개략적인 보고서가 제시한 바에 따르면, 그중 하나의 방안이 모든 일본의 군수산업과 중공업이 전리품으로 부분적 보수를 위해 소련에 양도되어야 한다는 것을 주장하는 것이었다. 1945년 소련이 대일본전에 참전한기간은 매우 짧았기 때문에, 이러한 자원들은 이런 자원들은 “소련의 전기간동안, 1918-1923년간 극동지역에서 일본의 간섭으로 인한 피해를 포함하여, 일본에 의한 막대한 피해”에 대한 보상으로간주될 수 있다는 것이었다.

서울의 소련 영사관이 일본 통치의 마지막 기간 동안의 각종 자산에 대한 상세한 보고서를 준비했기 때문에, 소련 정부는 한국의 일본 산업자산, 가치있는 광물자원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모스크바가 일본과 1945년 8월 9일 선전포고를 하기 전까지 일본과 중립조약을 준수했으며, 그리하여 태평양 전쟁동안 서울에 영사관을 계속하여 유지했었다. 소련군은 한국의 자원에대한 위치와 성격에 대한 지식으로, 점령을 하자마자 자신의 지역을 경제적으로 봉인해버렸다. 적군(소련군)은 사람들이 38도선을 넘어 남한으로 넘어가는 것을 막지 않았으나 전력과 석탄의 유출을 중지시켰다. 적군(소련군)은 또한 수송, 우편 및 일상생활에 중요한 여러 기능을 금지했다.

9월 중순 미군이 남한에 도착하자마자, 미군 장교들은 평양을 방문하여 소련의 카운터파트들이 서울에서 38도선의 분할로 인해 조성된 현안문제들에 대한 토의를 하자고 초청했다. 그러나 소련군 장교들은 초청에 응하지 않았다. 그들은 북한의 자원을 자신들을 위해 확보하는 것 뿐만 아니라, 미군들이 일본이 건설한 산업 공장을 해체하여 기차로 장비들을 소련으로 보내는 것을 방해하는 것을 원치 않았다.

경제문제에 대한 미국의 간섭은 실제로 가능성이 있었다. 11월 8일 미국 대사 해리먼은 스탈린에게 두 점령군 사령관이 만나서 어떻게 교역, 철도수송 그리고 해안 하역, 동일안 재정정책의 수립 및 기타 중요한 문제에 대한 토의를 하자는 이전 미국의 요구를 담은 편지를 보냈다. 이러한 대화가 소련의 “전리품” 약탈을 방해할 것을 두려워한, 소련 외무부는 대신 두 국가가 “소련과 미국군대가 한국 영토에 주둔하는 사실로부터 발생한 현안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특별 소련-미국 위원회의 창설을 제안했다.

그러므로 우리는 모스크바 회담에서 왜 소련 대표들이 국무장관 번스(Byrnes)가 회담의제 였던 통일 정부의 수립 주장보다 “현안 문제”들을 제기하는 것으로 한국문제에 대한 토의를 시작하자 긴장했는가를 이해할 수 있다. 번즈는 몰로토프에게 모스크바가 한국의 소련 사령관이 미군의 카운터파트와 해리먼이 11월 8일 편지에서 열거했던 문제를 해결하기위한 협상을 시작하는 것을 승인할 준비가 되어 있는가를 물었다. 몰로토프는 해리만의 편지가 회담의 의제와 관련이 없으며, 독립한국 정부의 수립을 향한 첫 행보가 무엇인지에대한 미국정부의 생각을 포함하고 있기때문에 그가 편지를 언급하는 것이 상황을 더 악화시킬 수 도 있다고 반대했다. 그러나 몰로토프가 저항했을 때, 번즈는 해리만의 제안은 신탁통치의수립을 위한 첫 조치일 수 있다고주장했다. 소련 외무장관은 어떻게 이러한 문제가 연관되어 있으며 그렇게 설명하려 하는지 이해할 수 없다고 자연스럽게 주장했다

다음의 포스트에서 우리는 어떻게 한국에 대한 논의가 이런 예측할 수 없이 혼란한 출발에서, 신탁통치에 대한 완전히 무력화된 합의로 결론으로 진행되었는가를 살펴볼 것이다.
[참고자료]
Suzdalev, “A Report on Japanese Military and Heavy Industry in Korea,” December 1945. Archive of the Foreign Policy of the Russian Federation, Fond 0102, Opis 1, Delo 15, Papka 1, Listy 22-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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