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전쟁) 한국의 분단 1945 - 1948, post 23

웨더스비 교수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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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포스트는 제2차 미소공동위원회 직전에 미국의 국제정치적 상황에 대한 인식이 어떻게 형성되었는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웨더스비교수는 소련이 제2차 세계대전이후 강력한 국가로 부상하면서 미국과 서방세계를 적이라고 보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하고 있는 듯 합니다.

통상 냉전의 기원을 언급하면서 스탈린이 서방세계를 적으로 보았다는 부분을 별로 언급하지 않는데 웨더스비교수는 스탈린이 국내에서 행한 연설에 주목을 하고 있습니다. 이부분은 이제까지의 냉전연구에서는 소홀하게 다루어져 있었습니다.

특히 이란과 터키에서 소련의 공세적인 입장이 미국의 소련에 대한 태도를 형성하는데 큰 영향을 주었던 것 같습니다. 한국 전쟁의 기원을 언급하면서 이란과 터키에서 미국과 소련의 입장에 대해서는 많이 다루지 않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웨더스비 교수는 우리가 한반도 문제를 좀 더 넓은 시각에서 볼 수 있도록 해주는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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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7년 초 한국의 상황이 급박해지자, 특별 부처간 위원회가 신속하게 움직였다. 2월 후반부에 그들이 제출한 보고서는 당시의 정책이 게속된다면 한국에서 미국의 입장은 유지될 수 없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한국의 즉각적인 독립을 제시하지 않았으며, 그것은 그들이 한국의 독립이 더 심각한 경제적 문제를 초래할 것이며 결국 소련이 전체 한반도를 장악하게 될 것이라고 믿었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이미 맥아더 장군이 제안한 바와 같이, 이 문제를 유엔으로 넘기는 것을 고려했다. 그러나 이것은 한국에서 미국이 실패했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며, 이는 미국의 권위를 약화시키고 1945년 12월의 모스크바 3상 회의의 합의를 위반하는 것이었다. 그들은 다른 방법을 찾을 수 없었기 때문에, 위원회는 미국이 향후 3년동안 약 60억 달러의 경제지원을 할 것을 제안했다. 이는 남한을 안정시키는 데 도움을 줄 줄것이며 모스크바로 하여금 미국은 자신의 점령한 지역에 책임을 진다는 것을 소련에게 보여주는 시그날이 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위원회는 다른 유일한 방법은 미군이 철수하는 것이며, 만일 이렇게 한다면 미국의 입장을 세계적으로 심각하게 손상할 것이라고 언급했다.

특별 부처간 위원회의 보고서는 1947년 초 한국에 대한 미국의 생각은 소련과의 점증하는 경쟁에 대한 우려에 의해 형성되었음이 분명하다. 그러므로 우리는 한국의 분단에 대한 미국의 결정을 이해하기 위해 이러한 갈등을 알아보아야 한다.

1945년 이전, 미국은 일반적으로 고립주의적이었으며, 거대한 대양에 의해서 보호받고 있었고, 유럽의 전쟁으로부터 떨어져 있고자 했다. 미국은 제1차 세계대전의 마지막 달에 참가했으며, 일본이 하와이의 해군기지를 공격하고나서야 제2차 세계대전에 참가했다. 그러나 제2차 세계대전 이후에는, 이러한 전략은 더이상 가능하지 않았다. 유럽의 전의 강대국들은 괴멸적인 세계대전으로 심각하게 약화되었다. 유럽의 양 극단에 위치한 두개의 거대한 국가들인 소련과 미국이, 새로운 세계적인 전쟁을 치룰 수 있는 충분한 군사적 경제적 힘을 가진 유일한 국가로서 전쟁으로부터 나타났다.

미국과 소련은 제2차 세계대전동안 동맹국이었으나, 그것은 그들이 오로지 공동의 적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소비에트 이데올로기는 미국과 다른 자본주의 국가들을 항상 적으로 규정했으며, 모스크바와 서방 민주주의 국가와의 동맹은 독일이 패배하자 신속하게 적대적인 관계로 대체되었다. 1946년 2월, 세계대전이 끝난지 6개월 이후, 스탈린은 소련전역에 방송된 연설에서 세계는 이제 두개의 진영으로 나뉘어졌으며 그 사이의 충돌은 불가피하다고 선언하면서 새로운 입장을 분명하게 밝혔다. 비록 소련인들이 독일과의 전쟁에서 지쳤음에도 불구하고, 스탈린은 다가오는 새로운 전쟁에 대비해야 한다고 경고했다.

미국의 전략가들이 소련의 새로운 입장을 분석하면서, 그들은 다음 충돌에서는 독일과의 전쟁이전보다 훨씬 더 강력해질 것이며, 그것은 소련이 전쟁과정에 장악한 지역을 장악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언급했다. 소련 제국은 이제 북한지역 뿐만 아니라 유럽의 에스토니아, 라트비아, 리투아니아, 폴란드, 체코슬로바키아, 헝가리, 루마니아, 불가리아 그리고 동독까지를 포함하고 있었다. 소련 영토와 자원의 이러한 광범위한 팽창은 다가오는 충돌은 민주주의 국가들이 승리하기 어렵다는 것을 의미했다. 결과적으로, 미국의 전략기획가들은 소련제국의 추가적인 팽창을 미국의 생존에 대한 위협으로 간주했으며, 이는 소련 측에 더 많은 자원과 전쟁준비 능력을 추가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이런한 이유로 인해, 소련이 1946년 석유가 풍부한 이란에서 자신들의 군대를 철수시키기를 거부하고 북이란에 공산당 조직을 강화했을 때 워싱턴은 불안에 빠졌다. 동시에 소련은 흑해와 지중해의 좁은 통로인 터키 해협에 소련군의 기지를 허용할 것을 이스탄불에 강요하기 위해 터키 국경에 군사력을 집중하였다. 대영제국은 과거 이지역에 주도권을 가지고 있었으나, 독일과의 전쟁으로 쇠약해졌으며, 터키와 이란은 모스크바에 대한 보호를 위해 미국으로 방향을 돌렸다.

다음 포스트에서는 이란과 터키의 위기를 살펴보고 이러한 사건의 발전이 한국에 대한 미국의 입장에 영향을 주었는지 알아 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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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orean War) The Division of Korea, 1945-1948, Post #23

Prof. Kathryn Weathersb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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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iven the urgency of the situation in Korea in early 1947, the Special Inter-Departmental Committee worked quickly. The report they submitted in late February concluded that the US position in Korea would soon become untenable if the present policy were continued. However, they did not recommend immediate independence for Korea, since they believed that would lead to even greater economic problems, and eventual Soviet control over the whole peninsula. They considered turning the issue over to the United Nations, as General MacArthur had already recommended. However, this would admit that the US had failed in Korea, which would damage American prestige and violate the Moscow Conference Agreement of December 1945. Since they were unable to find any other solution, the committee recommended that the US appropriate $600 million in economic aid for Korea for the next three years. This would help stabilize southern Korea and send a signal to Moscow that the US was committed to its zone on the peninsula. The committee noted that the only other course was to withdraw American forces, but doing so would seriously damage the US position worldwide.

It is clear from Special Inter-Departmental Committee’s report that American thinking about Korea in early 1947 was shaped by concerns over the escalating contest with the Soviet Union. We therefore must examine this conflict in order to understand the decisions the US made about the division of Korea.

Before 1945, the United States was generally isolationist; protected by vast oceans, it tried to stay out of Europe’s wars. It joined the first world war only in the last months, and entered World War II only after Japan attacked the American naval base in Hawaii. In the wake of World War II, however, this strategy was no longer possible. The formerly great powers of the continent had been severely weakened by the devastating world war. In their place, the two large countries on either edge of Europe – the Soviet Union and the United States – emerged from the war as the only powers with enough military and economic strength to fight a new global war.

The US and USSR had been allies during World War II, but only because they had a common enemy. Soviet ideology had always defined the United States and other capitalist countries as enemies, so Moscow’s alliance with the Western democracies was quickly replaced by hostility once Germany was defeated. In February 1946, six months after the end of the war, Stalin made this new attitude explicit when he declared in a speech broadcast throughout the Soviet Union that the world was now divided into two camps and conflict between them was inevitable. Even though the Soviet people were exhausted from the great war against Germany, Stalin warned that they must prepare for the new war to come.

As American strategists analyzed Moscow’s new posture, they noted that the Soviet Union would be much stronger in the next conflict than it had been before the war with Germany, because it was currently establishing control over the areas it had occupied in the course of the war. The Soviet empire now included not only the northern half of Korea, but also the European states of Estonia, Latvia, Lithuania, Poland, Czechoslovakia, Hungary, Romania, Bulgaria, and the eastern part of Germany. This enormous expansion of Soviet territory and resources meant that a coming conflict would be difficult for the democracies to win. Consequently, American strategic planners regarded any further expansion of the Soviet empire as a threat to the survival of the United States, since this would add even more resources and war-making potential to the Soviet side.

For this reason, Washington was alarmed when the Soviet Union refused to withdraw its armed forces from oil-rich Iran in 1946 and also strengthened the communist party organization in northern Iran. At the same time, Moscow massed military units on its border with Turkey in order to force Istanbul to allow it to station Soviet forces on the Turkish Straits, the narrow passageway between the Black Sea and the Mediterranean Sea. Great Britain had previously been the dominant power in that region, but since it was now so weakened by the war against Germany, both Turkey and Iran turned to the United States for protection against Moscow.

In the next post we will examine how the crises in Iran and Turkey unfolded and how those developments shaped American views of what it should do in Kore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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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쟁사 연구) 잘못한 작전과 전투에 대한 연구가 소중한 이유, post 3

6.25 전쟁 당시 이루어진 작전과 전투에 대한 기록은 전적으로 군대에서 이루어졌다. 따라서 군대는 전사를 제대로 잘 기록해야 한다. 군대는 전사를 매우 중요하게 생각한다. 승리한 작전이나 패배한 작전이나 모두 중요하다. 승리한 작전은 승리한 이유가 있고 패배한 작전은 패배한 이유가 있기 때문이다. 승리한 전투와 패배한 전투를 모두 모아서 전쟁의 원칙이라는 것을 만들기도 한다.

많은 사람들에게 익숙해진 집중의 원칙이라는 것도 승리하거나 패배한 작전을 총결산해서 나온 원칙이다. 아무리 군대가 많아도 결정적으로 이루어지는 전투현장에 누가 많은 병력과 장비를 집중할 수 있느냐가 승리를 좌우한다는 것이다. 당연히 기동이 중요하다. 기동성이 뛰어나면 적은 병력과 장비로도 결정적인 장소에 병력과 장비를 집중할 수 있는 것이다.

앞으로 우리는 병력자원이 줄어든다. 군에서는 병력자원이 줄어드니 복무기간을 늘여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기동의 원칙을 잘 생각해보면 적은 병력으로도 전투에서 이길 수 있는 방법이 있다. 기동능력을 높여서 어떤 상황에서도 적에 비해 많은 병력과 장비를 집중할 수 있으면 전투와 작전에서 이길 수 있는 것이다.

기동과 집중을 잘하기 위해서는 지휘를 잘해야 한다. 지휘활동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명령계통이 통일 되어 있는 것이다. 지휘권이 분할되어 있으면 전쟁에서 승리할 수 없다. 통일된 지휘권을 확보하지 못해 패배한 전투중에서 가장 대표적인 것이 칸네의 전투이다. 카르타고의 한니발이 로마로 쳐들어가서 칸네 전투가 벌어졌다. 한니발 군은 역사상 가장 대표적인 승리를 이루었다. 칸네의 전투는 가장 대표적인 섬멸전으로 알려져 있다. 수만의 로마군이 칸네에서 전멸했다는 것이다. 전쟁에서의 승리는 내가 잘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적이 잘못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

당시 로마군은 지휘관을 두명을 두었다. 정치적인 이유로 지휘관을 두명을 둔 것이다. 하루는 이놈이 하루는 저놈이 전투를 했다. 로마는 파비우스라는 유능한 지휘관이 있었지만 정치적으로 소수파였다. 파비우스는 한니발은 카르타고에서 원정온 부대이기 때문에 단기결전을 하기보다는 장기적으로 한니발군을 말려서 죽이면 된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로마에서는 전쟁을 모르는 원로원이 빨리 전투를 수행하라고 했다. 그런데 파비우스는 끝까지 싸우지 않다가 보직해임당했다. 그리고 새로운 집정관을 임명했는데 여기서도 정파별로 싸우다가 두명의 집정관을 임명했다.

두명의 집정관이 하루 하루씩 건너서 지휘를 하기로 했다. 파비우스는 그 중 한명에서 절대 성급하게 싸우지 말라고 했다. 다른 한명은 무조건 싸우고자 했다. 한니발은 무조건 싸우려는 집정관이 지휘를 하는날 전투를 벌였다. 그래서 로마군은 전멸을 했다.
결국 전투에서 승리하기 위해서는 지휘권이 명확하게 보장되고 지휘권이 통일되어야 하는 것이다. 전쟁날때 마다 동원했던 미군이 초기 전투에서 항상 어마어마한 피해를 입었던 이유가 지휘능력의 부족 때문이었다.

지휘권이 통일되어 있으면 작전의 목표가 분명해야 한다. 공격을 하는 것인지 방어를 하는 것인지가 분명해야 한다. 공격을 하려면 공격목표가 분명해야 한다. 그래야 제기능이 통합되어 전투력을 발휘한다. 방어를 하려면 방어의 목적이 분명해야 한다. 지역방어인지 기동방어인지, 어디를 지키고 어디를 포기할 것인지가 분명해야 하는 것이다. 전투를 열심히 하는데 무슨 목적을 위해 하는지도 모르고 전투를 하면 절대로 이길 수 없다. 축구를 하는데 골대가 어딘지 모르고 무조건 공만찬다고 이길 수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여러가지 전쟁의 원칙이 있으나, 지휘통일의 원칙, 목표의 원칙, 기동의 원칙, 집중의 원칙은 인류가 전쟁을 수행하면서 경험적으로 체득하여 정리한 것이다. 즉 경험칙이라고 하는 것이다. 경험칙은 강력한 힘을 가지고 있다. 수없이 많은 사례가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한국전쟁의 여러 작전과 전투를 연구하는 것은 이런 전쟁의 원칙이라는 틀을 바탕으로 무엇이 잘못되었고 무엇이 잘되었나를 잘 확인해서 다음에는 이전에 했던 실수를 반복하지 않기 위한 것이다. 당연히 잘한 것 보다 잘못한 것이 훨씬 중요한 가치를 가지고 있다.

그런데 유감스럽게도 한국전쟁 당시 이루어진 작전과 전투에 대한 연구는 잘못된 것보다 잘한 것 위주로 기술되어 있다. 특히 그런 경향이 심한 부분이 주로 전쟁초기이다. 6월 25일부터 9월 말 낙동강 방어전이 벌어질 때가지의 기간에 대한 기록이 매우 왜곡되어 있다.

그 이후의 작전과 전투는 미군의 지휘하에 이루어졌다. 미군들은 대대급까지 전사기록을 하는 장교가 보직되어서 하루하루 전투를 모두기록한다. 따라서 일방적이고 고의적으로 작전의 승패를 왜곡하기 어렵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런 경우는 적지 않다. 인간사라는 것이 그러므로…

한국전쟁 초기의 경우 작전과 전투의 기록이 상당부분 왜곡되어 기록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당시 사단장 하던 사람들이 그 이후 오랫동안 군의 최고 지휘부에 남아 있었다. 당연히 그들이 잘못한 전투를 잘못했다고 기술할 수 없었다. 잘못한 것을 잘못했다고 기록하지 못하면 전쟁사는 의미가 없다.

현재 한국전쟁사는 무엇이 왜 잘못되었는지를 알 수 없는 기록으로 점철되어 있다. 실패한 장군들이 군수뇌부에 있으면서 자기들 입맛에 맞게 작전과 전투사를 왜곡한 것이다.

다음 포스팅에서는 초기단계의 전투과정에 대한 기존 연구의 기술 방향을 살펴보겠습니다.

한국전쟁사연구 2, 연구배경 2

한국전쟁사연구 1, 연구배경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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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쟁사) 한국의 분단 1945 - 1948, post 22

웨더스비 교수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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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포스팅은 제2차 미소공동위가 열리기 전의 미국측이 어떤 상황에 직면했는가를 살펴보았습니다. 미국은 한국의 상황을 매우 우려하고 있었습니다. 한국문제의 해결은 전쟁성, 즉 미육군의 가장 시급한 과제였습니다. 미국은 남한 점령 정책을 위해 하루 100만달정도의 예산을 필요로 하고 있었습니다. 한국의 정치 경제적 상황은 악화일로를 걷고 있었습니다.

이승만은 시급하게 정부수립을 요구하고 있었고 미국은 국제적인 해결을 위해 무엇인가를 해야한다는 생각을 했던 것 같습니다. 한국문제 해결과 관련하여 국제적 해결을 생각했던 미국과 남한 단독정부 수립을 요구했던 이승만 사이에는 괴리가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미국은 상황에 끌려 다니는 처지에 직면했던 것 같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국은 남한의 정치세력을 지원해서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결국 점령정책은 점령지역과의 원활한 협조가 필수적이었는데 미국은 그러지 못했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것이 상황을 악화시킨 이유가 아니었을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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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7년 1월에 들어서서 한국의 미국대표부는 새로운 딜렘마에 봉착했다. 미국은 국가수립이후 평시에는 대규모 상비군을 유지하지 않는 것이 전통이었으며, 미군은 세계대전이 끝나자 신속하게 동원해제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제 미국은 유럽과 아시아에서 확대된 새로운 책임을 짊어졌으므로, 남한 점령을 계속하기 위한 인원과 물자가 충분하지 않았다. 하루에 백만달러가 소요되었으며 전쟁성은 트루만 대통령에게 한국에서의 활동을 계속할 수 없다고 보고했다. 전쟁성 장관 패터슨은 국무부에 의회에 더 많은 자금을 요구하거나 미국이 한국에서 철수하거나할 것을 요구했다.

동시에 토쿄의 맥아더 장군은 한국에 대한 소련과의 교착문제에 대한 새로운 해결책을 워싱턴에 제안했다. 그는 미국이 이문제를 유엔으로 넘길 것을 제안했으며, 유엔은 결국 그런 목적을 위해 만들어 졌다는 것이다. 그는 이문제에 관여하지 않는 국가들로 구성된 국제위원히를 제안했으며, 이 위원회는 일본의 패망이후 한국이 독립한다고 한 1943년의 카이로 선언에서 동맹국이 한 약속을 어떻게 수행할 것 인가에 대한 계획을 고안할 수 있을 것이라는 것이다. 그는 또한 모스크바 3상합의를 구체화하기 위한 4 국 협의회와 한국의 통일과 독립을 방해하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고위급 미-소 협의회를 요구했다. 맥아더는 계속되는 교착은 한국국민과 아시아에서 미국의 위신과 영향력에 나쁠 것이라고 경고했다.

전쟁성 분석관들은 맥아더의 제안은 성급하다고 판단했으며 또한 남한지역의 즉각적인 독립이라는 대안도 거부했다. 국무부는 맥아더의 생각은 소련과의 협력을 요구한다는 이유로 비현실적이라고 언급했다. 대신 국무부는 점령정책을 계속하기 위해 5천만 달러를 요구한 펜타곤의 제안에 동의했다.

1월 29일 국무부 전쟁성 해군성 조정위원회(SWNCC)의 회의에서 페터슨 전쟁성 장관은 한국문제를 “전쟁성이 지금 봉착한 유일한 가장 심각한 문제”라고 묘사했다. 행정부는 남한의 경제적 정치적 붕괴를 방지하기 위해 국회에 새로운 적절한 방안을 요구하기로 합의했다. 조정위원회(SWNCC)는 한국을 지원하는 프로그램을 만들기 위한 특별 부서간 위원회를 만들기로 합의했다.
이승만이 하지 장군을 한국의 독립 지연에 개인적으로 책임이 있다고 주장했던 1947년 초부터 상황은 더욱 복잡하게 되었다. 이승만은 맥아더에게 보내는 서신에서 미국은 모스크바와 협력하겠다는 희망을 포기해야 하며 대신 남한에서의 임시정부를 위한 별도의 선거를 치룰것을 주장했다. 남한에 수립된 과도 입법회의의 보수주의자들은 신탁통치를 비난하고 언론의 자유에 대한 원칙에 대해 소련과 어떠한 협상도 거부하는 결의안을 전년도에 통과시킨 바 있었다.

이런 모든 어려움에 직면하여 실망한 하지 장군은 맥아더에게 “한국은 동방의 정말로 뜨거운 지점으로 발전하고 있으며, 적극적이고 협조적인 국제적인 행동이 즉각적으로 취해지지 않으면, 야만의 수준을 넘는 전면적인 내전이 발생할 것이다. 미소공동위원회가 성공적으로 재개되거나 앞으로 두달안에 전국적인 수준에서 한국의 상황에 에서 적극적인 조치가 취해지지 않으면, 우리는 한국에서 우리에게 부여된 임무를 완수할 기회를 상실하거나 한국민의 신뢰를 상실할 것이다라는 것이 본인의 의견이다”라고 보고했다.

다음 포스트에서는 2월에 개최된 특별 부처간 위원회의 제안을 살펴보고 한국의 상황에 대한 워싱턴과 서울의 미국 관리들이 느낀 점증하는 위기감에 대해서 알아 보겠습니다.

[참고자료]
This post relies on James Matray, The Reluctant Crusade: American Foreign Policy in Korea, 1941-1950 (University of Hawaii Press, 19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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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orean War) Korean Division 1945 -1948, post #22

Prof. Kathryn Weathersb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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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anuary 1947 American authorities in Korea faced a new dilemma. US tradition since the founding of the country was to avoid keeping a large standing army in peacetime, and American armed forces accordingly demobilized rapidly after the end of the world war. Now, however, given the expansive new responsibilities in Europe and Asia, there were not enough people or supplies to continue the occupation of southern Korea. It was costing $1 million per day, and the War Department informed President Truman that it simply could not continue its operations in Korea. Secretary of War Patterson insisted that the State Department ask Congress for more funds or accept that the US would have to withdraw from Korea.

At the same time, General MacArthur in Tokyo sent Washington new proposals for resolving the deadlock with the Soviets over Korea. He recommended that the US turn the issue over to the United Nations, which had, after all, been created for just such purposes. He suggested that an international commission be formed from countries not involved in the issue, which would devise a plan for how to fulfill the commitment the allies made in the 1943 Cairo Declaration that Korea would become independent after Japan was defeated. He also called for a four-power conference to clarify the Moscow agreement and a high-level Soviet-American conference to resolve the issues that were preventing the unification and independence of Korea. MacArthur warned that continued delay would be disastrous for the Korean people and for American prestige and influence in Asia.

War Department analysts judged MacArthur’s recommendations premature and also rejected the alternative of immediate independence for the southern zone in Korea. The State Department noted, reasonably, that MacArthur’s ideas were unrealistic since they required cooperation with the Soviets. Instead, State agreed with the Pentagon proposal that they request $50 million from Congress in order to continue the occupation.

At a meeting on January 29 of the State-War-Navy Coordinating Committee (SWNCC) Secretary Patterson described Korea as the “single most urgent problem now facing the War Department.” The administration agreed to request new appropriations from Congress in order to prevent economic and political collapse in the American zone. The SWNCC agreed to create a Special Inter-Departmental Committee to formulate a program for aid to Korea.

The situation was further complicated in early 1947 by attacks from Syngman Rhee on General Hodge accusing him of personal responsibility for the delay in Korea’s independence. In a letter to MacArthur Rhee urged the US to give up hope for cooperation with Moscow and instead hold separate elections for a provisional government in the southern zone. Conservatives in the Interim Legislative Assembly that had been established in the South the previous year passed a resolution denouncing trusteeship and rejecting any compromise with the Soviets on the principle of freedom of expression.

In the face of all these difficulties, a despairing General Hodge wrote to MacArthur that “Korea has developed into a real hot spot of the Orient, now ripe for a full-fledged civil war of unsurpassed savagery unless positive and cooperative international action is taken immediately. It is my carefully considered opinion that unless the Joint Commission should successfully reconvene or positive action be taken in the Korean situation on a national level within the next two months, we may lose the opportunity of accomplishing our avowed mission in Korea and will have lost the confidence of the Korean people.”

In the next post we will examine the recommendations the Special Interdepartmental Committee presented in February and the increasing sense of urgency among American officials in Washington and Seoul over the situation in Korea.

[Sources: This post relies on James Matray, The Reluctant Crusade: American Foreign Policy in Korea, 1941-1950 (University of Hawaii Press, 19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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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쟁사 연구) 한국전쟁연구 출범 선언 2, post 2

아래의 한국전쟁 출범선언 1에 이어서 이번 포스티에는 2를 올립니다. 한국전쟁사의 순수한 군사적인 측면, 작전사와 전투사에 대한 연구를 출범한 이유에 관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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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쟁연구 출범선언 1

대부분 국가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전쟁사는 군에서 직접 작성을 합니다. 군대는 전쟁이 끝나면 무엇을 잘못했고 무엇을 잘했는지 그래서 어떤 결과나 초래되었는지를 검토합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잘못된 부분을 찾아 내는 것입니다. 무엇이 왜 잘못되었는지를 잘 찾아서 그것을 고치는 노력을 하는 것이 전쟁사를 연구하는 가장 중요한 이유입니다. 클라우제비츠도 그의 전쟁론에서 전쟁사 연구의 중요성을 강조했습니다. 이것이 전세계적으로 패권을 지녔던 국가들이 전쟁사 연구에 상당한 관심을 가졌던 이유였습니다.

우리나라에서 전사에 대한 연구는 한국전쟁 당시부터 이루어졌습니다. 전쟁이 벌어지면서 거의 모든 것을 미국에 의존했던 우리나라 군은 미국의 전사연구 시스템을 많이 받아 들였습니다. 그러나 항상 그렇듯이 껍데기만 받아 들이고 알맹이는 받아 들이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군이 6.25 전쟁에 대한 연구를 독점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면서 전쟁에 대한 연구도 독점을 했습니다.

오랜기간 동안 전쟁에 대한 연구를 군이 독점하다보니 다른 해석이나 분석이 자리할 틈이 없었습니다. 우리나라 대학들은 무에 대한 연구나 관심을 천시한 듯 합니다. 조선시대에 문을 숭상하고 무를 천시하는 기풍이 아직까지도 이어진 이유가 아닌가 합니다. 잘살고 힘있는 나라중에서 무를 천시하는 나라는 단 한곳도 없습니다.

우리나라에서 문을 숭상하고 무를 천시한 이유는 유교적 질서를 지키기 위한 이유라고 생각합니다. 고려가 무너뜨리고 조선을 세울때도 군대가 동원되었고 연산군과 광해군을 몰아낼때도 군대가 동원되었습니다. 결국 우리 역사에서 3번의 유교적 질서가 무너졌을 때 가장 핵심적 역할을 한 것은 군대였습니다. 그러니 무를 천시하는 것은 유교적 질서의 핵심인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 가장 중요한 일이었습니다. 임진왜란과 이후의 호란을 당하고도 군대를 제대로 양성하지 못한 가장 큰 이유가 무엇이었을까요 ?

한국군이 한국전쟁에 대한 연구를 독점하면서 한국전쟁의 해석 또한 독점하게 되었습니다. 각종 작전이나 전투에 대한 연구를 위해서는 자료의 수집과 정리가 필요합니다. 한국전쟁이후에는 그런 작업들이 매우 체계적으로 진행이 되었던 듯 합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가면서 그런 작업이 소홀하게 이루어졌습니다. 전쟁당시에는 학문적 백그라운드를 가지고 있던 학자 연구원들이 군대에서 일자리를 얻었습니다. 당연이 초기에는 체계적으로 자료가 축적되고 관리가 되었습니다.

한군전쟁이 끝나고 사회가 안정되면서 각종 작전이나 전투에 대한 자료의 수립이나 관리가 소홀해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동안 군대에서 봉급을 받고 생활하던 전문가들이 모두 대학으로 대학으로 연구소로 돌아갔기 때문입니다. 역사적 자료를 수집하고 분류하는 작업은 일반적인 상식만 가지고는 하기 어렵습니다. 당연히 한국군의 한국전쟁에 관한 자료의 수집과 정리는 미흡하기 짝이 없는 수준이 되어 버렸습니다.

한국전쟁의 작전과 전투에 대한 연구경향도 고착되어 버렸습니다. 한국 전쟁 당시수행된 각종 작전과 전투에 대한 연구와 분석은 다양한 관점과 시점에서 이루어지지 못했습니다. 군에서 한번 내용을 정리하면 그 내용은 교조적인 성격을 지니게 되었습니다. 다른 측면에서 검토되거나 평가되지 못했습니다.

한국전쟁에서 실패했다고 생각했는데 나중에 성공한 것으로 재평가된 전투는 춘천전투가 유일합니다. 애초 육군은 물론이고 6사단 자체도 춘천에서 3일간 방어한 것을 성공했다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서울도 3일만에 떨어졌고 춘천도 3일째 철수를 했으니 그것가지고 성공한 전투라고 하기는 어려웠습니다.

나중에 일본 자위대에서 소련의 자료를 이용하여 북한이 춘천방향의 북한 2군단으로 하여금 수원방향으로 우회기동하여 한국군을 포위하려는 시도를 했고 그것이 6사단에 의해서 좌절되었다는 내용을 기록하면서 춘천전투에 대한 평가가 완전하게 달라졌습니다. 패배한 전투에서 춘천대첩으로 화려하게 부활한 것입니다.

춘천전투를 제외한 어떤 내용도 이렇게 극적인 평가를 받은 경우가 없는 것 같습니다.

왜 그럴까요 ? 한국전쟁의 작전과 전투의 승패에 대한 해석을 군이 독점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군이 작전사와 전투사에 대한 해석을 독점하면서 한국군은 한국전쟁을 통해서 습득해야할 당연한 교훈들을 제대로 습득하지 못하고 말았습니다.

통상의 역사와 마찬가지로 작전과 전투에 관한 평가도 지속적으로 새롭게 이루어져야 합니다. 그간 우리군은 북한이 어떻게 작전을 수행했는지 제대로 모르는 상태에서 전쟁사를 기술했습니다. 그리고 소련군이 전쟁을 어떻게 보았는지 모른채 전쟁사를 기술했습니다. 중공군이 어떻게 작전과 전투를 수행했는지 모르는 상태에서 전쟁을 수행했습니다.

1950년 이후 지금까지 군대에서 작성한 전쟁사는 큰 틀의 담론 구조가 바뀐 것이 없습니다. 새로운 자료가 발견되고 발간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그간의 담론구조가 하나도 바뀌지 않은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한국 전쟁사가 그런 식으로 기술된 것은 당시 군의 수뇌부의 잘못을 지적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특히 전쟁초기 한국군 수뇌부는 어머어마한 실책을 저질렀습니다. 그러나 그런 잘못에 대한 기록은 거의 없습니다. 많은 기록들이 없어졌습니다. 일부는 고의로 파기한 정황도 없지 않습니다.

미군이 작전을 지휘하기 시작한 이후의 작전은 비교적 잘 기술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특히 한국군이 수행했던 초기작전에 대한 기술은 매우 일방적입니다. 이런 일방적 기술은 한국군의 작전적 전술적 상상력 제고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이번 연구는 우선 한국전 초기 단계로 부터 낙동강 방어선까지의 과정에 대해 작전사적으로 어떻게 해석할 수 있는지의 가능성을 타진해보려고 합니다.

다음 포스팅에서는 한국전쟁에 대한 기존의 기술경향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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