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전쟁사) 한국의 분단 1945 - 1948, post # 24

웨더스비 교수 씀

이번 포스팅은 소련의 주변지역인 이란을 둘러싼 소련의 정책과 이에 대한 미국의 반응을 정리했습니다. 당시의 한국 상황에 대한 이해를 위해서는 한국과 유사한 지역에 대해 미국과 소련이 어떻게 대립했는가를 알아보는 것이 중요하다고 하겠습니다. 이번 포스팅을 그런 의미에서 다루어진 것입니다. 이란은 소련이 제2차 세계대전이후 세계전략을 시험한 모델이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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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포스팅에서는 미국은 소련이 제2차 세계대전의 말미에 동맹국들의 점령으로 만들어진 경계선 넘어 자신이 통제하는 지역을 확대하려는 시도를 1946년 부터 점점 우려하기 시작했다는 것을 알아 보았다.

1941년 6월 독일이 소련을 침공하자마자, 영국은 독일군이 동쪽으로 공격하는 것을 바라며 어제의 적을 오늘의 동맹으로 삼았다. 그리고 소련이 전쟁을 확실하게 수행할 수 있도록, 미국은 어마어마한 양의 무기와 보급품을 소련에 보냈다. 전쟁물자의 일부는 북해와 태평양의 소련 항구로 보내졌으나, 이중 상당량은 페르시아만의 이란 항구로 보내졌고 거기에서 북쪽으로 이란을 통해 소련으로 수송되었다. 이 보급품이 적군(소련군)에게 도달되는 것이 중요했기 때문에, 세 동맹국들은 동맹국의 군대가 보급품 수송작전에 이용되는 도로와 철도를 따라 주둔하는 것을 이란이 허용하는 협정을 맺었다.

독일군이 항복한 며칠 후, 이란 정부는 공식적으로 동맹국의 군대가 철수할 것을 요구했으며 동맹국들은 일본이 항복한 6개월 후인 1946년 3월 2일까지 그렇게 하기로 합의했다. 그러나 영국과 미국의 군대가 약속에 따라 철수한 것과 달리, 소련은 테헤란으로부터 자치를 요구하며 인접한 소련의 아제르바이잔 공화국과 긴밀한 관계를 요구하는 이란의 북부지역에 공산당 조직을 건설하기 위한 노력을 계속했으며, 이는 이지역을 합병하기 위한 준비로 보였다. 이란은 소련의 문제를 유엔에 제기했으며, 미국무장관 번즈로 하여금 소련이 이란에서 철수할 것을 요구토록 했다. 트루만 대통령은 보좌관들에게 개인적으로 러시아인들이 “세계 정복을 시도”하려는 것인지 아닌지 알아볼 시기가 왔다고 이야기했다.

다음달 이란의 아흐마드 콰밤 수상은 모스크바와 소련군의 철수와 교환으로 소련에 두개의 중요한 양보를 하는 협정에 합의했다. 테헤란은 북부 이란의 인구밀집지역인 아제리에 광범위한 자치를 허용하고 북부 이란의 넓은 기름 매장지를 공동으로 탐사하기 위한 소련-이란 오일 컴파니를 창설하기로 했으며 이는 1933년 영국과의 합의와 유사했다.

그러나 위기는 아직 해결되지 않았다. 1946년 12월 미국의 강력한 외교적 지원에 고무된 테헤란은 아제리의 자치에 관한 약속을 거부했다. 더욱이 이란은 군대를 보내 분리주의 운동을 억압하였으며, 이는 분리주의 운동의 지도자가 소련으로 탈주하게 만들었다. 결국 1947년 10월 이란은 공동 소련-이란 오일 캄퍼니를 설립한다는 합의도 거부했다.

1990년대에 공개된 러시아 문서고 자료는 스탈린이 사실상 소련이 이란에 영향력을 확대하는 것을 서방이 저지할 것인지 아닌지를 시험했다는 것을 밝히고 있다. 전쟁으로 인해 영국의 국력이 쇠약해지면서, 크레믈린은 전략적으로 중요한 남부지역에서 경제적 이익과 정치적 영향력을 얻을 수 있는 기회를 엿보았다. 그러나 트루만 행정부는 소련의 이러한 조치들이 전체 서남아시아에서 주도권을 장악하기 위한 조치라고 두려워하면서 위기를 과장했다. 그리하여 미국은 이란이 소련과의 협정을 파기하자 테헤란이 적극적으로 받아 들이고자 했던 군사지원을 이란에 제공하기로 합의했다.

이란에 대한 미국의 새로운 공약은 터키에 대한 유사한 지원과 같이 이루어졌다. 다음의 포스팅은 전쟁이후 소련이 어떻게 터키에 압력을 가해 전략적으로 중요한 터키해협에 군대를 주둔할 것을 허용토록 했는가를 알아보도록 하겠다. 영국이 지중해에서 수행하던 전통적인 역할을 더 이상 행사할 수 없게되자, 미국은 터키뿐만 아니라 전세계의 ‘자유민”들에 대한 광범위한 공약을 내놓기에 이른다. 이는 물론 한국에서의 상황에 대한 반응에 영향을 미쳤다.

[참고자료]
이 포스팅은 William R. Keylor의 초기 냉전에 관한 뛰어난 연구에 근거했다.
William R. Keylor, A World of Nations: The International Order Since 1945 (Oxford University Press,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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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orean war history) The Division of Korea, 1945-1948, post #24

Prof. Kathryn Weathersb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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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 the last post we examined how the United States became increasingly concerned in 1946 about indications that the Soviet Union was attempting to expand the area under its control beyond the boundaries set by allied occupations at the end of the war. The first serious case of this new threat was in Iran, where Soviet forces refused to honor their agreement to withdraw six months after the end of the war.

As soon as Germany invaded the Soviet Union in June 1941, Great Britain embraced its former enemy as an ally, eager for the German army to shift its attack to the East. Then, to be sure the Soviets could carry on this fight, the United States sent it massive quantities of desperately needed weapons and supplies. Some of this war materiel was sent to Soviet ports in the Arctic and the Pacific, but the bulk of it went to Iranian ports on the Persian Gulf, from where it was transported north through Iran to the Soviet Union. Because it was so vital that these supplies reach the Red Army, the three allies made an agreement with Iran that allowed them to station their armed forces along the roads and railroads used for this operation.

A few days after Germany surrendered, the Iranian government formally requested that the allies withdraw these foreign forces and they agreed to do so by March 2, 1946, six months after the surrender of Japan. However, while British and American troops withdrew as promised, Soviet forces did not. Moreover, Moscow continued its efforts to create a communist party organization in northern Iran that would demand autonomy from Teheran and close links to the neighboring Soviet republic of Azerbaijan, which looked like a step toward annexing the area. Iran took the issue of Soviet actions before the United Nations, prompting Secretary of State Byrnes to demand Soviet withdrawal from Iran. President Truman told aides privately that the time had come to find out whether the Russians were “bent on world conquest.”

The next month Iranian Prime Minister Ahmad Qavam reached an agreement with Moscow that gave the Soviets two important concessions in exchange for withdrawing their armed forces. Teheran would grant autonomy to the Azeri populated areas of northern Iran and would create a Soviet-Iranian oil company to jointly exploit the vast oil reserves of northern Iran, similar to the arrangement it had made with Great Britain in 1933.

The crisis was not yet resolved, however. In December 1946, emboldened by the strong diplomatic support it had received from the US, Teheran reneged on its promise of Azeri autonomy. Moreover, it sent troops to suppress the separatist movement, prompting its leaders to flee to the Soviet Union. Finally, in October 1947 Iran repudiated the agreement to create a joint Soviet/Iranian oil company.

Documents obtained from Russian archives in the 1990s revealed that Stalin was, in fact, testing whether the West would resist the extension of Soviet influence into Iran. With British power diminished by the war, the Kremlin saw an opportunity to get economic advantage and political influence in its strategically important southern neighbor. The Truman administration exaggerated the threat, however, fearing that this was a step toward Soviet hegemony in all of southwest Asia. The US therefore responded to Iran’s repudiation by agreeing to provide it with military assistance, which Teheran eagerly accepted.

The new American commitment to Iran was accompanied by similar support for Turkey. The next post will examine how in the wake of the war, Moscow pressured Turkey to allow it to station military forces on the strategically vital Turkish Straits. With Britain no longer able to play its traditional role in the Mediterranean, the United States stepped in with a broad commitment not only to Turkey but to “free peoples” everywhere. This, of course, then shaped its response to the situation in Korea, as well.

[Sources: This post relies on the excellent survey of the early Cold War in William R. Keylor, A World of Nations: The International Order Since 1945 (Oxford University Press,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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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쟁사 연구) 6.25 기습남침론의 타당성에 대한 검토 2(기습의 전략측 측면), post 6

군사적으로 기습이라고 할때는 이를 정의하는 몇가기 기준이 있습니다. 먼저 예상하지 못했던 시간, 장소, 방법으로 공격해서 상대방이 대응할 수 있는 시간과 방법을 주지 않는 것을 기습이라고 합니다. 이러한 기습은 전략적, 작전적, 전술적 수준에서 다양하게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

우리가 전쟁사에서 기습이라고 하는 것을 상기한 조건에 부합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아무리 상대방이 기기묘묘한 방법을 써서 우리를 기습하려고 하더라도 우리가 예상되는 상황을 충분하게 준비하여 대비한다면 기습을 당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상대방이 어떻게 할 것인가를 예측하지 못하고 있는 상태라면 우리는 기습에 매우 취약한 상황이 됩니다. 따라서 기습이라고 하는 것은 내가 어떻게 준비되어 있는가하는 것도 중요합니다. 따라서 우리는 기습을 당하지 않도록 적의 동향을 잘 관찰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자 그럼 6.25 전쟁당시 우리는 어떠한 기습을 당했을까요 ?

먼저 전략적인 수준에서 우리는 기습을 당했나요 ? 적어도 전략적 수준에서 우리는 기습을 당했다고 보기는 어렵다고 생각합니다. 이미 6.25 전쟁이전 한해 동안에 약 1만명 정도의 전사자가 발생할 정도로 이미 전선에서는 군사적 긴장이 고조되고 있었습니다.

이전 포스팅에서도 언급했듯이 이미 김구 선생도 북한이 전쟁을 일으킬 것이라는 것을 충분하게 예견하고 있었습니다. 남한 단독 정부수립을 반대했던 김구 선생은 북한을 방문했습니다. 김구 선생의 북한방문은 그 의도와는 달리 북한 김일성에게 이용만 당하고 말았습니다. 당시 북한을 방문했던 김구선생은 김일성이 전쟁을 일으킬 것이라는 것을 예측했고 그것을 주한 중국(대만)대사에게 이야기를 합니다.
6.25 전쟁이전에는 전쟁이 일어날 것이라는 이야기가 파다하게 퍼져 있었습니다. 남한의 이승만 정부는 전쟁이 일어나면 점심은 평양에서 먹고 저녁은 신의주에서 먹겠다는 이야기를 하기도 할 정도였습니다. 당시 모두 전쟁은 시기문제이고 언젠가 곧 일어날 것이라는 것을 기정사실화 되어 있을 정도였습니다. 이렇게 볼때 전략적인 차원에서 우리는 전혀 기습을 당하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전쟁이 일어날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준비를 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전략적인 차원에서 우리는 이제까지의 전사연구에서 별로 다루지 않았다는 것을 짚고 넘어가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승만 정부의 공세적인 태도가 남한 군의 군사대비태세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가 하는 것입니다.

이승만 정부는 매우 공세적인 태도를 취했습니다. 그러나 공세적인 레토릭에 부합하는 능력은 제대로 갖추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여기에서 관심을 가져야 할 것은 군통수권자가 공세적인 태도를 취했을 때, 군은 방어와 관련한 준비를 제대로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승만 정부가 공세적인 태도를 취했던 것은 정말로 능력과 의지가 있어서 그랬던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북한의 공격가능성에 대한 국민들의 불안을 해소하기 위해 허풍을 쳤던 것에 불과하다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일부 진보적 연구자들은 이승만 정부의 공세적인 태도를 6.25 전쟁을 남한군의 북침 근거로 제시하는 경우도 있었습니다만 이미 그런 주장은 최근 확인된 사료를 통해서 근거가 없다는 것이 밝혀진 바 있습니다.

문제는 국가 통수권자가 허풍이라도 공세적인 입장을 분명하게 하면 방어준비태세가 소홀해 질 수 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당시 우리군은 38선 인근에서 파상적인 공세작전을 수행하면서 국지적인 우세를 달성하고는 있었습니다만 다가오는 전면전에 대비한 준비는 제대로 하지 못했다고 할 것입니다.

국가통수권자의 태도가 군사작전에 영향미친 경우는 전사상 많이 있습니다. 그중 가장 대표적인 것이 독일과 소련의 제2차 세계대전입니다. 소련의 스탈린은 자본주의 세계에 대한 공격사상을 견지했습니다. 당연히 방어준비는 소홀했습니다. 게다가 독일군이 소련을 공격하기 바로 직전까지 소련군이 방어준비를 하지 못하도록 했습니다. 독일군에게 괜한 오해를 불러일으켜서 문제를 초래할 수 있다는 이야기이지요. 결국 독소전역에서 소련군이 초반부에 어마어마한 패배를 당한 것은 스탈린의 전략적 판단 미스 때문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마치 그런 소련치하의 스탈린과 비슷한 상황을 이승만 정부가 저질렀다고 해도 틀린 말은 아닐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련군 장교들은 전쟁을 승리고 이끌어 낼 수 있는 능력과 자질을 지니고 있었지만 우리군은 그럴 정도의 능력을 가진 장교집단이 거의 전무했다고 하겠습니다.

만일 당시 우리군 수뇌부가 어느정도의 능력을 지니고 있었다면 아무리 정치지도자가 공세적인 태도를 취한다 하더라도 상당한 수준의 방어준비를 갖추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까지의 상황을 보면 남한군이 북한군의 공격에 대비한 태세를 갖추고 있었다는 증거는 많지 않은 듯 하다. 물론 이를 증명하기 위해서는 추가적인 연구가 필요할 것이다. 따라서 이런 문제의식을 바탕으로 다음과 같은 주제에 대한 연구과제를 염두에 두고 살펴보고자 한다

  1. 이승만 정부의 북한에 대한 공세적인 군사적 발언과 당시 군사대비태세의 상관관계에 대한 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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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쟁사 연구) 6.25 기습남침론의 타당성에 대한 검토 1, post 5

우리가 상식적으로 받아 들이고 있는 6.25 전쟁 남침기습은 조금만 생각해보면 매우 의심스럽습니다. 이미 김구선생이 북한을 갔다가 와서 북한이 전쟁을 일으킬 것 같다고 이야기를 한 적이 있었습니다. 웨더스비 교수가 연재하고 있는 글에서도 엿볼 수 있는 것 처럼 미국이 한반도에 전쟁이 일어날 수 있다는 것을 무시하지는 않았던 것 같습니다.

무엇보다도 1년에 만명정도의 사망자가 발생하는 상황에서 북한으로부터 기습남침을 당했다는 것으로 초기 패배에 대한 책임을 모두 면제 받으려 하는 것은 정상적이라고 보기 어렵습니다. 한국전쟁 이전에 거의 전쟁과 같은 상황이 벌어지고 있었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당시 1사단장이던 일본군 대좌출신의 김석원 장군은 북한군의 상황을 보고 공격이 멀지 않았다고 판단했다고 하는 이야기도 했다고 합니다.

한국전쟁에 대한 기록에 있어서 6.25 전쟁이전의 남북간 전투상황은 잘 기록이 되어 있지 않은 듯 합니다. 매달 천명 가까운 전사자가 발생했는데 그와 관련된 기록들이 제대로 남아 있지 않았다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왜 그럴까요 ? 아마도 그것은 한국전쟁을 남침기습으로 규정하기 위해서는 그 이전의 전투상황을 제대로 기록해서는 안될 필요성 때문이아닐까 합니다.

6.25 전쟁 당시 남한의 군대가 남침기습에 의해서 패배한 것이 아니라 제대로 전쟁준비를 하지 않았기 때문에 패배했다 하는 것이 타당하다고 생각합니다.

이제까지의 한국전쟁사기록은 일단 한국전쟁을 기습이라고 정의했습니다. 그리고 그 이후의 과정을 기록했습니다. 그러나 기습에도 여러가지 종류가 있습니다. 전략적 수준에서의 기습, 작전적 수준에서의 기습, 전술적 수준에서의 기습 등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기존의 전사에서 말하는 기습은 전술적 수준에서의 기습을 말하는 듯 합니다. 그러나 전술적 수준에서의 기습은 충분히 작전적으로 대응할 수 있고 작전적 수준의 기습은 전략적 수준과 전술적 수준에서의 대비로 대응할 수 있습니다. 밑도 끝도 없이 기습당했다는 한마디로 모든 것을 덮어 버릴 수는 없는 것이지요.

제1차 제2차 세계대전에서 독일군은 기습을 통해서 전과를 올립니다. 예상치 못하는 방향과 방법 그리고 시간이 기습을 성공할 수 있는 조건이라고 할 것입니다.

제1차 세계대전에서 독일은 슐리펜 장군이 수립한 계획에 따라 북쪽에 강력한 주공을 두고 공격을 가해서 기습을 달성합니다. 예상치 못한 방향과 방법이었지요. 작전적 수준에서의 기습일 것입니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군은 전격전을 수행합니다. 공군과 전차부대를 묶어서 강력하게 집중적인 전력을 운영해서 폴란드를 불과 며칠만에 꼼짝 못하게 만들었습니다. 그 이후 프랑스로 공격할 때도 강력한 전력집중을 통해 전과를 올립니다.

스탈린은 독일 공격시간까지 정보원을 통해 확보하고 있었지만 제대로 대응하지 못했습니다. 아마도 스탈린은 히틀러에게 전략적인 수준의 기습을 당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위에 정리한 내용이 적절한 지 모르겠으나 상기한 내용에 비추어볼 때 한국전쟁당시 과연 우리 군은 어떤 기습을 당했을까요 ? 그내용은 다음에 올리겠습니다

통상의 연구는 상당한 준비를 통해 정제된 내용을 논문으로 작성합니다. 그러나 현재 스팀잇에서 하고 있는 연구는 통상의 연구와 많은 차이가 있는 듯 합니다. 연구 주제에 대한 의식의 흐름까지 독자들과 공유할 수 있다는 점에서 과거와 다른 경험을 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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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 칼럼) 미국이 북핵문제해결 시간표를 없애버렸다. 트럼프가 진것일까 ?

당연히 그렇듯이 북한에 대해 강경한 방법을 구사해야 북핵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주장하던 사람들은 신이 났다. 중앙일보에서는 과거 북한에 대해 강력하게 대응해서 성공한 방법들을 열거하면서 지금의 트럼프가 김정은에게 놀아나고 있다고 이야기 하고 있다.

이미 필자는 미북정상회담이 이루어진다고 했을때 앞으로 매우 장기간에 걸친 협의과정이 이루어질 것이라고 예견한바 바 있다. 참 이상한 이야기지만 강경한 방법은 강경한 방법대로 유화적인 방법은 유화적인 방법대로 위험하다.

제2차 세계대전은 영국의 챔벌린이 독일의 히틀러에게 처음부터 양보를 했기 때문에 발생했다는 견해가 많다. 유화정책이 세계대전을 초래했다는 것이다. 물론 그럴수도 있다. 그러나 필자는 챔벌린이 유화정책을 하지 않았다고 해도 전쟁이 발발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다시 말해서 제2차 세계대전은 챔벌린의 유화정책 때문이 아니라는 것이다. 아무리 강경한 정책이라고 하더라도 히틀러의 야망을 꺽을 수 없었다는 말이다.

강경한 정책이 전쟁을 막는 것은 아니다. 강경한 정책은 상대방을 강경하게 몰고 나갈 수 밖에 없도록 만든다. 상대방을 강경한 방법으로 굴복시키기 위해서는 자신도 그에 해당하는 피해를 감수해야 한다.

과거 북한에 대해서 강경하게 대응해서 조금의 성과를 이루었다고 해서 그 방법이 지금도 유용하다고 생각해서는 안된다. 또한 과거 북한에 대해 화해협력정책을 해서 성공을 거두었다고 해서 지금도 화해협력정책이 유일하다고 생각해서는 안된다. 과거는 과거일 뿐이다.

과거는 참고는 할 수 있지만 절대적인 기준이 되어서는 안된다. 현재의 정책은 현재의 상황을 가장 정확하게 판단하고 고려해야 하기 때문이다.

북한 핵문제를 단 1,2년 만에 해결하겠다고 생각하는 것이 정상적일까 ? 아마 북핵문제가 아주 초기단계였다면 그것도 불가능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클린턴 행정부 이후 지금까지 미국은 북한 핵문제를 다루는데 실패했다. 유화적인 정책과 강경한 정책을 오가다가 나중에는 니 마음대로 하세요하는 무관심 정책까지 왔다갔다 했다.

아마도 지금까지 미국의 대외정책중 가장 실패한 정책의 하나가 북한 핵문제가 아닌가 한다.
가장 결정적으로 문제를 일으킨 정부는 오바마 행정부였던 것 같다. 무대응도 대응이라는 정책으로 일관하면서 지금과 같이 북한이 핵과 대륙간탄도탄 미사일을 개발하도록 만들었다.

북한이 핵과 미사일을 개발할 때마다 각종 제재를 남발했지만 전혀 효과적이지 않았다. 그리고는 핵을 먹고 살수는 없다는 말로 일관했다.

결국 지금의 상황을 보면 군사적으로 타격하는 것을 제외하고는 모든 강경한 방법을 다 동원했지만 북한의 핵과 미사일 개발을 방지하지 못했다. 북한이 그럴 수 있었던 이유는 지정학적으로 북한이 매우 중요한 위치에 있기 때문이다. 북한은 중국과 러시아를 매우 잘 활용해왔다. 미국이 중동의 이라크나 아프가니스탄과 같이 북한을 다룰 수 없었던 이유이다.

현실이 그러하다면 어떤 방법으로 북한을 다루어야 할까 ? 당연히 미국의 체제내로 포용해 내어야 한다. 북한이 핵과 미사일 무기를 가지고 위협을 한다면 북한을 적으로 두는 것이 아니라 친구로 두는 것이 훨씬 더 효과적인 방법이 되기 때문이다. 국제사회에서 어제의 적이 오늘의 동지가 되는 것은 별로 특별한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안보상황을 다룰때는 보수적인 시각이나 진보적인 시각을 통해 문제를 바라보아서는 안된다. 가장 현실적인 방법이 무엇인가를 생각해야 한다. 지금의 트럼프는 가장 현실적인 방법을 취한 듯 하다.

정말 지금부터 우리가 예상하지 못했던 상황이 발생할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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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쟁연구) 초기 전사기술의 문제점 post 4

이번 연구는 한국전쟁을 군사적 관점으로 접근하여 왜곡된 부분을 바로잡기 위한 것입니다. 한국전쟁은 민족사의 일대 비극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에 합당한 연구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먼저 한국전쟁의 발발과정에 대해서는 웨더스비 교수가 담당하기로 하고, 전쟁과정의 군사적인 측면 즉 작전과 전투에 대해서는 우선 관심있는 연구자들이 참가하기로 했습니다.

한국전쟁의 작전과 전투를 다시 살펴보는 것은 매우 어려운 작업인 듯 합니다. 이민자를 제대로 연구하기 위해서는 역사학에 대한 훈련이 되어 있어야 하고 군사적인 소양도 갖추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아직 제대로 연구자들이 제대로 갖춰지지 않았지만 우선 문제를 제기하는 방식으로라도 출발을 해보고자 합니다.

우물쭈물하기 보다는 무엇인가 일을 저질러야 진척이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제대로 정리되지 못해 거칠지만 양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이런 과정을 통해 보다 잘 정리되어 나갈 것으로 기대합니다.

한국전쟁사 기술에는 처음부터 일정한 스토리 라인이 만들어져 있었다. 우리가 다 아는바와 같이 북한이 6.25불의의 기습을 감행해서 용감한 우리 육군은 손쓸 틈도 없이 북괴군에게 패배를 당했다는 것이다. 거기에다 당시로는 어찌 담당하기도 어려운 신문기인 소련제 탱크가 밀고 내려와서 패배하는 것 이외에 다른 방도가 없었다는 것이다.

북괴군이 불의의 기습남침을 했고 당시 한국군이 가진 무기로는 대적할 수 없었던 전차로 인해 패배하지 않을 수 없었다는 것을 강조하는 스토리 라인이 만들어 졌다. 북한군의 강력한 전투력을 강조하기 위해 일본에서 투입된 보병 대대급의 스미스 특수부대가 전차를 앞세운 북괴군의 공격에 죽미령에서 반나절도 견디지 못하고 무너졌으며 대전지역에서 미군 24사단도 붕괴되고 말았다는 것을 강조했다.

한국전 초기 단계에서 북괴군의 기습과 신무기로서의 전차를 강조하는 것은 무슨 이유일까 ? 이렇게 한번 규정된 한국전 초기단계에 대한 스토리 라인은 근 70년가까이 되도록 바뀌지 않았다. 과연 그럴까 ? 과연 한국전쟁의 초기작전과 전투에 관한 기술과 평가가 타당한 것인가요 대한 검토가 필요하다.

이제까지 알려진 한국전쟁 초기의 스토리라인을 좀더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우선 38선에서 서울로 들어오는 관문인 분산과 의정부지역에는 각각 1사단과 7사단이 지키고 있었다. 1사단은 백석역 장군이 사단장으로 7사단은 유재흥 장군이 사단장이었다. 춘천에는 김종오 장군이 지휘하는 6사단이 방어를 하고 있었고 강원도 쪽에는 중국군 출신의 이성과 장군이 8사단을 지휘하고 있었다. 총 4개의 사단이 38선을 지키고 있었다.

북괴군이 공격하자 1사단은 거의 손을 쓰지 못하고 바로 무너지고 말았다. 1사단은 임진강 북방지역에 거의 모든 장비와 무기를 남겨두고 철수했다. 당시 부대별로 체제를 유지하지도 못하고 철수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7사단은 북괴군 공격에 철저하게 패배를 당하고 말았다. 당시 7사단을 증원한 2사단의 역할에 대해서 이런 저런 평가가 있으나 제대로 전투다운 전투한번 제대로 하지 못하고 무너지고 3일만에 서울을 내주고 말았다.

서부전선이 괴멸적인 피해를 당한 것과 달리 동부전선의 6사단과 8사단은 조금 달랐다. 6사단은 춘천과 홍천지역으로 들어온 북괴군을 성공적으로 방어했다. 그러나 6사단의 작전에 대해서는 시간이 지나면서 그 평가가 달라졌다. 초기에는 6사단의 춘천 전투가 패배했다는 평가가 지배적이었다. 그러나 1970년 중반을 지나면서 일본에서 춘천에 북괴군이 강력하게 공격하여 이후 수원으로 진출하여 한국군을 섬멸하려고 했던 계획이 있었으나 한국군 6사단이 초점에서 잘 싸워줌으로써 북괴군의 전략적 구상이 어긋나고 말았다는 소련군 자료가 발견되면서 춘천의 6사단 7연대가 승리했다는 평가로 바뀌었다. 패배했다는 평가에서 승리했다는 평가로 바뀐 것이다.

한편 홍천전투는 처음부터 매우 잘싸운 전투였음에도 불구하고 이상하게 그 의미를 제대로 평가받지 못했다. 홍천을 담당하던 제2연대는 약 5일간 북괴군 7사단의 공격을 막아냈다. 그 내용을 보면 7연대의 춘천전투보다 2연대의 홍천전투가 훨씬 의미가 있고 잘싸웠다. 춘천에서는 7연대보다는 포병대대가 거의 전투를 주도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홍천전투에서 2연대는 초기에 포병의 지원을 거의 받지 못한 상태에서 북한 7사단과 상대를 해서 공격을 막아냈다.

당시의 전선상황으로 보아 7연대는 상당한 전과를 거두었음에도 불구하고 잘알려지지 않았고 지금까지도 그 의미가 제대로 평가되지 못했다.

작전과 전투에 관한 기록도 통상의 역사와 비슷한 성격을 지닌다. 승리자나 권력자의 관점에서 역사가 기술되는 것이다. 한국전쟁 당시 한국군의 수뇌부는 초기전투에서 괴멸적인 패배를 당한 제1사단장 백선업, 제7사단장 유재흥 등이 주도하고 있었다.

결국 백선엽이나 유재흥 잘못했다는 내용의 작전과 전투는 기술하기 어려웠을 것으로 보인다. 당시 전투에서 백선엽과 유재흥이 당한 패배는 어쩔 수 없었다는 것을 강조해야 했다. 그 결과 한국전 초기의 전사기록은 왜곡될 수 밖에 없었다. 그런 왜곡은 시간이 지나면서 마치 사실인 것 처럼 굳어졌다.

우리는 북한의 기습남침과 전차로 인한 대응불가상황을 당연하게 받아 들이고 있다. 당시 상황을 자세히 살펴보면 북한의 공격을 기습남침이라고 규정하는 것을 납득하기 어렵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남북이 각각 정부수립이후 38선에서는 끊임없는 전투가 벌어졌다. 한국전쟁이 발발하기 1년전에는 약 1만명의 전사자가 있었다고 할 정도였다. 전선에서 매달 천명정도가 죽어나가는 상황에서 전쟁이 발발했는데 이것을 6.25 전쟁의 초기전투는 북한의 기습으로 패배했다는 이야기는 지나친 합리화가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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