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전쟁사) 한국의 분단 1945 - 1948, post # 26.

웨더스비 교수 씀

웨더스비 교수께서 출국하기전에 원고를 보내주셨습니다. 이번 포스팅에서는 미국이 소련에 대한 봉쇄전략의 일환으로 한반도 문제를 다루는 과정을 간략하게 소개했습니다. 터어키와 그리스 문제가 한반도에 대한 미국의 행동을 결정하는데 상당한 영향을 미쳤다는 것입니다. 결국 소련에 대한 봉쇄정책의 일환으로 한국에 대한 경제적 기술적 지원이 이루어지고 정부 수립문제까지도 논의된 것입니다. 결국 한국의 단독정부 수립에 관한 문제도 결국은 소련에 대한 봉쇄전략의 일환이라는 것을 시사하는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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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포스팅에서 우리는 1946년과 47년에 미국이 동 지중해에서 소련의 팽창을 저지하는 책임을 이어받은 것을 알아 보았다. 그러나 이런 새로운 일을 수행하려면, 국회가 필요한 자금을 승인해 주어야 했다. 1946년 중간선거 당시, 공화당은 전쟁기간동안 확장된 정부의 규모를 줄이겠다는 공약을 제시하면서, 1930년 이후 처음으로 의회에 대한 통제를 확보했다. 그리하여, 트루먼 대통령은 미국인들이 잘 알지도 못했고 관심도 없었던 이유로 말미암아 미국으로부터 멀리 떨어진 사람들을 보호하기 위해 세금을 사용하기 위해 부정적인 입장의 의회의원들을 설득해야 했다.

이런 어려운 정치적 상황에서, 트루먼은 미국의 원칙을 호소하기로 결정했다. 1947년 3월 12일 의회 특별 합동회기에서 행한 연설에서, 대통령은 미국인들이 터키와 그리스 사람들을 도와야 한다고 주장하지 않고, 미국이 “무장한 소수나 외부의 압력에 의한 압제를 거부하는 자유민들을 지원”하기 위해 포괄적인 개입을 해야한다고 주장했으며, 이는 트루먼 독트린으로 불리게 되었다.

대통령의 전략은 적중했다. 의회는 신속하게 2억5천만불을 그리스에 1억5천만불을 터키에 할당하면서, 소련의 위협이나 내부의 공산주의 봉기에 취약한 것으로 간주되는 다른 나라들을 지원하기 위한 전례를 만들었다. 국무부는 새로이 정책기획실를 만들었으며, 이러한 원칙이 적용될 수 있는 정책내용을 작성했다. 1947년 7월 해당 부서의 책임자로서 나중에 주소련대사가 된 조지케난은 Foreign Affairs지에 “Sources of Soviedt Conduct(소련 행동의 원천)”라는 제목의 논문에 새로운 개념을 발표했다. “Mr. X”라는 필명으로 케난은 소련은 자신의 광범위한 국경을 따라 약한 지역을 찾고 있으며, 이는 자신의 안보를 보장하기 위해, 노골적인 병합을 하거나 그 외연을 따라 순종적인 정부를 수립함으로써 그 이웃 영토로 세력을 확대하려고 하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Mr. X”는 계속하여 독일, 일본 그리고 영국같이 이전에 러시아의 팽창주의를 억제했던 강대국들은 더 이상 그럴 수 없기 때문에 미국이 그러한 역할을 채워야 한다고 설명했다. 그러나 미국은 이러한 목적을 위해 군사력을 사용하지 않을 것이었다. 미국의 군대는 동원해제되었으며, 평시에 대규모 상비군을 유지 하지 않은 전통적인 원칙으로 돌아갈 것이었다. 대신 미국은 경제적 정치적 자원을 소련의 변방에 있는 국가들의 번영과 안정을 위해 사용해야 했다. 케난은 모스크바가 전시 동맹이 합의한 국경까지 팽창을 제한하도록 강요될 수 있다는 것에 낙관적으로 단언했다.

한반도에 대한 봉쇄는 어떻게 수행될 수 있을 것인가 ? 한반도의 상황은 터키의 위기와 상당한 차이가 있었다. 한국에는 모스크바가 위협할 정부가 아직 없었다. 대신, 소련군은 한반도의 북쪽 절반을 점령하고 있었으며, 최소한 공산주의자를 배제하지않는 한국의 새로운 정부 수립에 협조하기를 거부하고 있었다. 미국은 공동위에서 소련과 협력한다는 공약을 유지하고 있었으나, 회담이 지연되는 동안, 미국은 남한에 경제적 기술적 지원을 제공함으로써 우호적인 조건을 조성하고지 했다.

이렇게 미국무장관 딘 에치슨은 그리스 원조에 관한 상원 청문회에서 행정부가 향후 3년동안 한국에 20억 달러를 원조할 것임을 의회에 확인했다. 만일 이 원조가 서울에 우호적인 정부를 수립하게 된다면, 미군은 한반도를 소련의 통제에 취약하지 않도록 한가운데 미군이 철수 할 수 있다는 것이다.
다음 포스트에서는 어떻게 한국의 상황에 대한 미국의 생각이 1947년까지 발전해나갔는지를 살펴볼 것이며, 여기에는 유엔에 새로운 정부의 수립문제에 대한 제안까지 포함하고 있다.

이 포스트는 다음 자료에 의거했다.
James Matray, The Reluctant Crusade: American Foreign Policy in Korea, 1941-1950 (University of Hawaii Press, 19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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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orean War History) The Division of Korea, 1945-1948, post 26.

Prof. Kathryn Weathersb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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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 the last post we saw that in 1946/47 the United States assumed responsibility for resisting Soviet expansion in the eastern Mediterranean. But if it was to carry out this new job, Congress would have to appropriate the necessary funds. In the midterm elections of 1946 the Republican party gained control of Congress for the first time since the 1930’s, campaigning on a promise to reduce the size of government after its expansion during the war. Therefore, President Truman had to persuade reluctant congressmen that they should use taxpayer money to protect people far from the US who were fighting in causes few Americans knew about or cared about.

In this difficult political situation, Truman decided to appeal to American principles. In his speech to a special joint session of Congress on 12 March 1947 the president declared not just that Americans must aid the people of Turkey and Greece, but that the United States must make a broader commitment to “support free peoples who are resisting subjugation by armed minorities or by outside pressures,” which came to be called the Truman Doctrine.

The president’s strategy worked. Congress quickly appropriated $250 million for Greece and $150 million for Turkey, setting a precedent for assistance to other countries that were considered vulnerable to Soviet intimidation or internal communist uprising. The State Department’s newly created Policy Planning Staff then worked out a policy context within which this principle would be applied. In July 1947 its director, former ambassador to Moscow George F. Kennan, made this new concept public in an article in the influential journal Foreign Affairs titled “Sources of Soviet Conduct.” Writing under the pseudonym “Mr. X,” Kennan explained that the Soviet Union was probing weak spots all along its vast border because it sought to guarantee its security by expanding its power into neighboring territories, either by outright annexation or by installing subservient governments along its periphery.

“Mr. X” went on to explain that since the great powers that had previously restrained Russian expansionism – Germany, Japan, and Great Britain – were no longer able to do so, it was up to the United States to fill their role. The US would not use military force for this purpose, however. Its army was being demobilized, as the country returned to its traditional practice of not maintaining a large standing army in peacetime. Instead, the US must use its economic and political resources to promote prosperity and stability in the states along the Soviet periphery. Kennan asserted optimistically that Moscow would then be forced to limit its expansion to the borders agreed to during wartime allied negotiations.

How would containment be carried out on the Korean peninsula? The situation there was clearly quite different from the crisis in Turkey. There was not yet a Korean government for Moscow to threaten. Instead, Soviet military forces were occupying the northern half of the country and were refusing to cooperate to create a new government for Korea, at least one that was not exclusively communist. The US still had a formal commitment to work with the Soviets in the Joint Commission, but while its meetings were suspended, the US would try to create favorable conditions in the South by sending economic and technical assistance.

Thus, Secretary of State Dean Acheson confirmed to Congress during Senate hearings on aid to Greece that the administration was considering sending $200 million in aid to Korea over the next three years. If this aid results in the creation of a viable government in Seoul, American forces could withdraw without leaving the peninsula vulnerable to Soviet domination.

In the next post we will look at how American ideas about the Korea situation continued to evolve in 1947, including the proposal to turn the issue of a new government over to the United Nations.

[This post relies on James Matray, The Reluctant Crusade: American Foreign Policy in Korea, 1941-1950 (University of Hawaii Press, 19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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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쟁사 연구) 6.25 기습남침론의 타당성에 대한 검토 3(기습의 작전적, 전술적 측면), post 7.

6.25 전쟁은 전략적인 측면에서 볼 때 기습이라고 보기 어렵다는 점을 앞에서 언급한 바 있다. 그럼 작전적인 측면과 전술적인 측면에서는 어떻게 보아야 할까 ?

기습은 예상치 못하는 장소와 시간과 방법으로 달성하는 것이다. 우선 장소라는 측면에서 한번 생각해보자.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군은 프랑스의 아르덴느 산림지역으로 전차부대를 운용했다. 산림이 우거진 지역으로 기갑부대를 투입한다는 것은 군사적으로 무모한 일이라고 여겨질 때 였다.

그러나 독일군은 연합군이 예상하지 못하던 장소인 아르덴느 산림지역으로 기갑부대를 집중투입하여 프랑스군과 영국군의 허를 찔렀다. 이렇게 허를 찔린 영국 프랑스 군은 덩케르크 까지 속수무책으로 밀려가게 된 것이다. 한국전쟁에서 맥아더 장군이 인천상륙작전을 감행한 것도 대표적으로 예상치 못한 장소에 대한 기습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예상치 못하는 방법으로 기습을 달성하는 경우는 다음의 경우를 들 수 있다. 독일군은 제2차 세계대전 당시 기갑부대를 집중운용하는 방법을 고안했다. 이와함께 급강하폭격기를 같이 운용했다. 당시로는 기갑부대를 집중운용하는 것은 생각하지 못했고 급강하폭격기까지 같이 운용하는 경우는 예측하지 못했다. 예상치 못한 방법으로 기습을 달성한 사례의 대표적인 경우를 제2차 독일군의 전격전으로 들 수 있다.

예상치 못한 시간의 경우는 통상적으로 6.25전쟁을 들 수 있다. 북한군이 6.25일 일요일 새벽에 기습을 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6.25일 일요일 새벽이라는 것이 예상치 못한 시간이라고 할 수 있을까에 대해서는 생각해 볼 여지가 있다. 그 당시 한반도는 3월위기니 6월위기니 하는 이야기가 많이 있었다. 6.25일 새벽은 북한군이 기습을 달성했다는 것은 기습이라기 보다는 한국군 지휘부가 스스로 방심하거나 오판한 결과로 보는 것이 오히려 타당할 것이다.

통상 기습이라는 것은 예상치 못하는 시간과 장소 방법 중 여러가지가 같이 혼합되어서 이루어지는 경우가 많다. 그중에서 예상치 못하는 시간이라는 요소는 주로 전략적 작전적 수준보다는 전술적 수준에서 이루어지는 경우가 많다고 할 것이다.

6.25 전쟁은 예상치 못했던 장소와 시간이라는 측면에서 기습이라고 보기 어렵다. 우선 한국군은 북한군이 공격할 방향을 정확하게 예측하여 대비하고 있었다. 일부에서 북한군의 공격에 대비해서 후방의 예비사단을 전방으로 추진하자는 이야기가 있었으나 오히려 북한군의 남침 빌미를 줄 수 있다는 미군의 반대로 인해 대비하지 못했다. 그러나 만일 북한의 공격에 대한 대비가 충실했다면 6.25 초반의 괴멸적인 피해는 당하지 않았을 것이다. 이는 춘천과 홍천지역의 6사단의 예를 보면 충분히 예측가능하다.

또한 예상치 못하는 방법이라는 측면에서도 북한군의 어떤 활동을 기습이라고 할지 명확하지 않다. 북한군의 소련제 탱크를 기습의 요소라고 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미 당시 한국군들도 북한군이 소련제 탱크를 보유하고 있는 것을 다 알고 있었다. 미군들은 한국군의 말로만 호전적인 분위기를 우려해서 전차를 배치하지 않았을 뿐이다. 당시 미군은 한국군이 북침하는 것을 우려할 정도였다. 물론 소련제 전차의 전황에 매우 중요한 역할을 했다는 것을 부정하기 어렵다. 그러나 만일 북한군의 전차에 대비한 방어 준비를 충분히 갖추었다면 그렇게 무력하게 무너지지는 않았을 것이다.

북한군은 6.25 전쟁 초기 전차를 보병무기로 사용했다. 작전적 전술적으로 제대로 사용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크게 양보하더라도 북한군은 전차를 보유하고 있었으나 적어도 작전적 수준에서 예상치 못하는 방법으로서의 기습을 달성하지는 못한 것이다.

한편, 기습에서 예상치 못한 시간이라는 요소는 전략적이거나 작전적인 수준보다는 전술적인 경우가 많다. 6.25일 새벽 4시에 기습을 당한 것은 적이 잘해서가 아니라 우리가 준비를 안한 결과인 것이다.

전략적 작전적 전술적 차원에서 예상치 못하는 장소와 방법 그리고 시간을 종합적으로 고려해보면 6.25 전쟁에서 우리가 기습으로 볼 수 있는 것은 전술적 수준에서 매우 적은 부분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실제 6.25 전쟁 초기 작전에서 우리가 괴멸적인 패배를 당한 것은 북한군의 기습이라기 보다는 당시 한국군이 전쟁에 대비한 준비의 수준이 너무 낮았기 때문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따라서 한국전쟁에서 북한군의 기습남침때문에 한국군이 고전을 했다는 것은 합당하지 않은 평가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당시 한국군 지도부와 주요 지휘관들 그리고 한국의 정치지도자들은 전쟁에 전혀 대비하지 않았고 말로만 떠들었던 것에 불과한 것이다.

(한국전쟁사 연구) 6.25 기습남침론의 타당성에 대한 검토 2(기습의 전략측 측면), post 6

(한국전쟁사 연구) 6.25 기습남침론의 타당성에 대한 검토 1, post 5

(한국전쟁사 연구) 초기 전사기술의 문제점 post 4

(한국전쟁사 연구) 잘못한 작전과 전투에 대한 연구가 소중한 이유, post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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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전쟁사) 한국의 분단 1945 -1948, post 25

웨더스비 교수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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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차 세계대전이후 한국을 위한 국가들의 운명은 당시의 국제적 안보환경에 따라 좌우 되었습니다. 한반도의 운명 또한 당시의 국제정세에 크게 영향을 받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제까지 해방공간에 관한 연구는 당시의 국제 상황에 대한 이해가 부족한 면이 없지 않았다 하겠습니다. 우리와 비슷한 상황에 처해있었던 이란과 터키 그리고 그리스의 상황을 잘 이해해야 당시의 한반도 상황을 잘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지금 다루어지고 있는 주제들은 매우 의미가 있다 하겠습니다.

당시 한반도와 유사한 입장에 있었던 국가들의 운명이 어떻게 처리되었는지를 제대로 이해해야 한반도를 둘러싼 미국과 소련의 갈등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며 보다 객관적으로 당시의 상황을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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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포스팅에서 논의한 바와 같이, 전쟁이 끝난 이후 소련이 이웃국가 이란을 위협하는 동안, 소련은 동시에 자국의 전략적으로 남쪽국경에 위치난 터키와 다른 국가들에 심각한 압력을 가했다. 주요 이슈는 흑해에서 지중해로 진출할 수 있는 유일한, 매우 협소한 터키 항로를 통한 소련선박의 자유항행이었다. 터키가 흑해에서 더 큰바다로 항해하고자 하는 러시아 선박을 쉽게 봉쇄할 수 있었기 때문에, 해협을 통과하는 항해 문제는 양국간 수세기에 걸친 조약의 주제였다. 그러나 1945년 3월 독일이 항복하기 두달전에, 모스크바는 터키에게 최근의 조약인 1936년 몽트뢰 협약의 개정을 요구했다.

이후 1년 반동안 소련정부는 터키정부에게 해협의 새로운 안보체계를 만들 것을 요구했으며 이것은 소련 군이 터키 영토에 항구적으로 주둔하는 것을 포함하고 있었다. 터키는 이런 요구를 거부했으며, 스탈린은 신문과 라디오와 함께 소련군 25개 사단을 터키 국경에 보내는 강력한 압력을 가하기 시작했다. 이란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이 지역에서 영국의 영향력 감소는 미국을 터키에 대한 소련의 위협에 대항할 수 있는 유일한 국가로 만들었다.

1946년 봄 미국은 소련의 팽장주의를 “봉쇄”하는 정책을 수립했다. 그리하여, 소련이 그해 8월 해협의 공동통제를 요구하는 불쾌한 메세지를 앙카라에 보냈을때, 트루먼 대통령은 똑같이 강력한 메세지로 응답했다. 그는 미국의 가장 강력한 항모를 동 지중해에 파견했으며 이지역에 이미 주둔하고 있던 미국 해군을 강화했다. 미국의 군사적 지원은 소련의 요구를 거부하는 터키에게 용기를 주었으며, 그결과 해협은 터키의 통제하에 남아 있게 되었다.

인접한 그리스에서는 다른 상황이 미국 관리들을 고민하게 만들었으며,이는 한국에 대한 반향이었다. 독일군이 1944년 10월 그리스로부터 철수할 때, 그리스 공산주의 인민 해방군(ELAS)이 이끄는 대독일저항 운동이 전국을 통제했다. 영국점령군이 그리스 군주정을 회복하고자 하는 시도는 ELSA의 저항을 초래했다. 1945년 2월 얄타회담이 이루어진 그 달에 양측은 국가의 정치적 미래를 결정하기 위한 국제적인 감시하에 선거를 실시할 것에 합의했다.

선거는 1946년 3월에 실시되었으며, 같은 달 미소 공동위원회가 서울에서 개최되었다. 그리스의 좌파 정당은 선거를 거부했으며 새로이 회복한 군주정에 대항하기 위해 무기를 들었다. ELSA는 유고슬라비아, 불가리아 그리고 알바니아의 새로운 공산주의 정부로부터 군사지원을 받기 시작했다. 트루만 행정부는 소련이 그리스 공산주의자들을 지원하고 있다고 생각했으나, 사실 스탈린은 모호했다. 그는 북부에서 반군정부의 인정을 거부했으며 ELSA에 의미있는 지원을 제공하지 않았다. 그의 거부는 부분적으로 소련이 그리스와 국경이 인접하지 않아서 쉽게 군대와 보급품을 보내기 어려웠기 때문이었다. 다른 이유는 스탈린이 유고슬라비아의 지역적 세력 강화를 원하지 않았으며, 이는 왜냐하면 비록 그들이 공산주의자라 할지라도 모스크바에 의해 통제받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워싱턴은 스탈린의 그리스 공산주의자에 대한 지원의 한계를 알지 못했다. 영국 외교부가 영국의 경제위기가 심각하여 그리스와 터키에 대한 지원을 끝내야 하며 그리스에서 군대를 철수해야 한다는 것을 미국무부에 통보한 1947년 2월에 미국은 결국 급박하게 반응했다. 영국정부는 미국이 전투에 돌입한 두 지중해 국가를 구하기 위해 발을 들여 놓아야 된다고 강조했다.

다음 포스트에서는 터키와 그리스의 위기에서 생긴 트루만 독트린이 어떻게 한국을 포함한 전세계 비공산주의 세력을 지원하는 미국의 약속으로 확대되었는가를 살펴보겠습니다.
이 포스트는 터키와 그리스의 위기에 대한 탁월한 다음의 저서를 참고한 것입니다.
William R. Keylor, A World of Nations: The International Order Since 1945 (Oxford University Press, 2009)

이번 포스팅을 마지막으로 웨더스비 교수께서 미국으로 돌아가십니다. 다음번 포스팅 부터는 미국에서 보내오실 예정입니다. 시간이 지날수록 훨씬 흥미진진한 내용이 펼쳐지고 있습니다. 많은 성원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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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orean War History) The Division of Korea, 1945-1948. Post #25.

Prof. Kathryn Weathersb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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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hile the Soviet Union threatened its neighbor Iran after the end of the war, as we discussed in the previous post, it simultaneously put serious pressure on Turkey, another state strategically located on its southern border. The main issue was free passage for Soviet ships through the very narrow Turkish Straits, the only way out from the Black Sea to the Mediterranean Sea. Since Turkey can easily block Russian ships trying to sail from their Black Sea ports to the larger oceans, the issue of passage through the Straits has been the subject of treaties between the two states for centuries. But in March 1945, with German surrender still two months away, Moscow informed Turkey that it would insist on a revision of the latest treaty, the Montreux Convention of 1936.

Over the next year and a half, the Soviet government demanded that the Turkish government create a new security system for the Straits that would include the permanent presence of Soviet armed forces on Turkish territory. When Turkey rejected this demand, Stalin began an intense pressure campaign via the press and radio as well as more concrete pressure in the form of twenty-five divisions of the Soviet army sent to the Turkish border. As was the case with Iran, the decline of British influence in the region left the United States as the only power capable of resisting Soviet threats against Turkey.

In the spring of 1946 the US committed itself to a policy of “containing” Soviet expansionism. Therefore, when Moscow sent a harsh message to Ankara in August of that year demanding joint control of the Straits, President Truman responded with an equally strong message. He sent America’s most powerful aircraft carrier to the eastern Mediterranean and reinforced the US naval presence already in the region. This indication of US military support emboldened Turkey to resist Soviet demands, with the result that the Straits remained firmly under Turkish control.

In nearby Greece, a different situation concerned US officials, one with resonance to Korea. When the German army withdrew from Greece in October 1944, the anti-German resistance movement led by the Communist Greek People’s Liberation Army (ELAS) controlled the countryside. The efforts by British occupying forces to restore the Greek monarchy to power prompted an insurrection by ELAS. In February 1945, the month of the Yalta conference, the two sides agreed to hold internationally supervised elections to determine the political future of the country.

The elections were to be held in March 1946, the same month the Joint Soviet-American Commission began its meetings in Seoul. Greece’s leftist parties boycotted the elections, however, then took up arms against the newly restored monarchy. ELAS began to receive military aid from new communist governments in Yugoslavia, Bulgaria, and Albania. The Truman administration assumed that the Soviets were also supporting the Greek communists, but in fact, Stalin was ambivalent. He refused to recognize the rebel government in the north and did not provide significant aid to ELAS. His restraint was partly due to the fact that the USSR had no border with Greece across which it could easily send military forces and supplies. Another reason was that Stalin did not want to strengthen the regional power of Yugoslavia, because although it was communist it was not controlled by Moscow.

Washington was not aware of the limitations of Stalin’s support for Greek communists, however. It consequently reacted with alarm in February 1947 when the British Foreign Office notified the State Department in February that Britain’s economic crisis was so severe that it must end its support for Greece and Turkey and withdraw its forces from Greece. The British government appealed to the US to step in to save these two embattled Mediterranean states.

In the next post we will look at how the Truman Doctrine that emerged from the crisis in Turkey and Greece led to an expanded US commitment to supporting non-communist forces worldwide, including Korea.

[Sources: This post relies on the excellent account of the crises in Turkey and Greece found in William R. Keylor, A World of Nations: The International Order Since 1945 (Oxford University Press,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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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isdom & Justice 최근 동향

1. 웨더스비 교수의 한국전쟁사 연재 관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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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선 한국전쟁사를 연재하고 계신 웨더스비 교수께서 미국으로 다시 돌아가시게 되었습니다. 미국에 가시더라도 집필은 계속하기로 하셨습니다. 이제까지는 주2회정도의 분량을 고려하셨는데 당분간은 주 1회정도로 원고를 작성하실 계획입니다. 오랫만에 미국으로 돌아가셔서 주변정리로 바쁘실 듯 합니다.

2. 고 심일 소령관련 공적 관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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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심일 소령의 공적 진위와 관련한 자료가 발간되었습니다. 고 심일 소령은 6.25일 전쟁 당일 춘천에서 북괴군의 자주포를 육탄공격으로 격파했다고 하여 미 은성무공훈장과 태극무공훈장을 수여받았습니다. 이 사건에 대해 당시 현장에 같이 있었던 고 이대용 장군(전 주베트남 공사)께서 심일의 공적은 사실이 아니므로 고쳐야 한다는 이야기를 하셨습니다.

이것이 조선일보에서 기사화되어 국방부 군사편찬 연구소와 육군 군사연구소가 사실확인 조사를 했습니다.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는 심일의 공적이 사실이라고 평가를 했고, 반면 육군의 군사연구소는 심일의 공적이 조작되었다는 연구 결과를 발표했습니다. 양기관간에 상이한 입장을 발표하자 국방부는 심일 공적확인위원회를 만들어 검증을 했습니다. 그 결과 심일의 공적이 사실이라고 발표를 했고 육군 군사연구소는 강력하게 반발하는 사태가 벌어졌습니다.

저희 Justice & Wisdom 에서는 심일의 공적문제에 대한 사실 여부를 재확인 하는 작업을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그 와중에 춘천 문화원에서 심일의 공적에 관한 심일 공적확인위원회의 연구결과와 육군 군사연구소의 연구결과를 비교분석한 결과 육군 군사연구소의 연구 결과가 타당하다는 내용의 책자를 발표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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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와 고 이대용 장군의 개인적인 인연이 있어 심일 소령 공적의 진위와 관련한 연구를 준비하는 과정에 춘천 문화원의 연구결과가 나와서 매우 다행스럽습니다. 연구는 춘천 문화원과 한림대학교가 공동으로 진행했습니다.

3. 문재인 정부의 국방개혁과 관련한 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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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문재인 정부의 국방개혁안이 발표되었습니다. 일부 군사 전문가들이 군에서 진행되고 있는 국방개혁이라는 것이 매우 폐쇄적으로 작성되었다는 비판이 있었습니다. 전역한 군 장성 중에서 최근의 국방개혁안에 관한 평가를 하시겠다는 분이 연재를 준비하고 있습니다.

4. 한국 전쟁의 작전과 전투에 관한 역사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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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쟁사 전문가 몇몇을 중심으로 한국전쟁을 새롭게 바라보기 위한 시도를 하고 있습니다. 기존의 한국전쟁사의 기록이 편향적으로 기술되어 있다는 반성에 따른 것입니다. 아직 서로간의 협업이 원활하지 않아 진도는 느리지만 꾸준하게 작업을 해 나가기로 했습니다.

Wisdom & Justice는 온라인 연구소라는 개념의 새로운 시도입니다. 이제까지 소외되어 있었던 부분들을 조명해보기 위해 먼저 안보와 국방에 관한 콘텐츠들을 생산하고자 합니다. 아직 초기라 많이 미숙하지만 쉬지않고 계혹 앞으로 뚜벅 뚜벅 걸어 나갈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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