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대용 장군이 존경해 마지 않던 김용배 대대장은 제7사단 5연대장으로 부임한 후 불과 열흘만에 강원도 양구 군량리 전투에서 전사해다. 그때가 7월 2일이었다.
1951년 1월 22일 제7연대 부연대장으로 승진한 김용배와 제1대대 부대대장으로 승진한 이대용이 사적인 대화를 했던 것을 기록해 놓았다.
김용배 부연대장은 지난 1950년 10월 10일, 부인이 딸을 출산했다는 소식을 최근에 들었으며, 이름을 송조(松朝)로 지으라고 연락해 보냈다고 한다. 소나무같이 지조있고 아침같이 신선하게 살아가라는 뜻에다가, 조자가 10월 10일을 모아 쓴 글자라서 그렇게 이름 지었다고 한다.
김용배는 그때까지 살면서 두번을 후회한 적이 있는데 첫번째는 일제 때 지원병으로 나가 일본군에서 근무한 것이라고 한다. 어린마음에 주위의 권고도 있었고 군인이 되고 싶어서 지원병이 되었는데 큰 실수였다고 한다. 또하나는 어릴때 부모가 강제로 정해준 밭에서 일잘하고 집에서 무병이나 명주 잘 짜며 궁둥이가 커서 아이를 잘 낳은 그리고 순정을 가진 시골 처녀와 혼인을 한 것이었다. 어른이 되자 마음에 들지 않는 그 조강지처를 버리고, 마음이 끌리는 처녀에게 새장가를 들었다고 한다. 송조는 두번째 부인의 소생이었다.
김용배 장군이 전사하고 기나긴 세월이 지난 후 현충일 이대용 장군이 김용배 장군의 묘역을 찾았다고 한다.
내가 그 묘소에 도착해 보니, 거친 풍파를 겪으며 패인 주름살에서 과거의 고된 삶을 읽을 수 있는 시골 할머니 한분이 북어와 무침, 과일 등 조촐한 제사 음식을 묘소앞에 차려 놓은 중이었다.
나는 어디서 오신 할머니냐고 물었다. 경상북도 문경에서 왔다는 할머니의 대답이었다. 고 김용배 장군과의 관계를 물었더니 바로 부인이라고 했다. 그러면 송조 어머님이시냐고 물었더니, 송조 어머니는 이미 이 세상을 뜨나셨다고 했다. 그러고 보니 고 김용배 장군이 생전에 나에게 버렸다고 이야기한 조강지처가 확실했다. 나는 그 할머니에게 “송조를 좀 만나게 해주실 수 있겠습니까?” 했더니 “송조도 죽었습니다”하였다.
세월따라 가다가 가버리는 것이 인생이라고 고 김용배 장군이 생전에 말씀하시더니, 송조도 송조 어머니도 모두 아주 가버렸구나. 인생이란 이렇게 무상한 것이며, 반세기의 세월이 긴것인가, 그 사람의 생애가 짧은 것인가 나는 곰곰 생각에 잠겼다.
나는 고 김용배 장군과의 관계를 길게 설명하였다. 할머니는 조용히 듣고만 있을 분, 별로 말이 없었다. 나는 묵념을 올리고 할머니와 헤어졌다. 조강지처를 버리고 신식 새여자에게로 마음 돌린 남자, 버림받았지만 그 옛날 순정을 다 바쳐 따르던 남자의 고혼을 달래느라 천리길 마다 않고 묘소를 찾아온 여자, 모두 인간이기에 그러하다.
이글을 읽으면서 조만간 김용배 장군의 묘소를 찾아 보아야 하겠다고 생각했다. 삶이란 잔인하다. 죽은자는 산자에게 모든 멍에를 남겨놓고 간다. 산자는 죽은자의 무게를 짊어지고 살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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