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2년 7월 9일, 한국전쟁이 발발한 지 2년이 넘었고, 김용배 대령이 전사한지도 벌써 만 1년하고 7일이 지났다. 그간 이대용은 대대장에게 부여하는 임시계급인 중령으로 진급했다. 판문점에서는 언제 끝날지 모르는 지루한 휴전회담이 계속되고 있었다. 전선에서는 조그만 고지를 빼앗고 빼앗기고, 포로를 잡아 오고 잡혀가는 일들이 반복되고 있었다.
제3대대는 금성에서 김화 동북방에 있는 저격능선으로 이동하여 중공군하고 대치하고 있었다. 이대용의 제3대대 좌측으로는 미제 7사단 제32연대가 김화북방 604 고지를 방어하고 있었다.
미 제7사단이 604 고지를 방어하기 전에는 한국군 제9사단이 그곳에 있었다. 한국군 제9사단이 주둔하고 있을 때, 당시 국회의원 이진수 의원의 친아들이 이 604 고지에서 전사했다. 이 진수 의원은 당시 권력을 가진 여당의 국회의원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친아들을 일선 소대장으로 내보냈다. 그리고 아들을 잃어 버리고 만 것이다.
이대용은 만 2년동안 장장 6천리 전선을 질주하며 싸우는 동안, 정부의 장관이나 국회의원 아들 중에서 일선 중대나 소대에 나와서 적과 싸우다가 전사한 청년이라곤 이진수 의원의 아들 이 소위 한사람 뿐이었다.
이시영 부통령도 자신의 손자를 전선에 내보내 중공군과 싸우게 했다. 이시영 부통령은 아무도 모르게 손자 이소위를 제2사단에 보낸 것이다. 김화전선에 배치된 이 소위는 전사하지 않고 살아 남았다.
6.25 전쟁에 앞서 1948년 10월 이청천 국회의원의 외아들 이 정계 소위가 공비토벌 작전 당시 최전방 소대장으로 나가 공비와 전투중 전사했다.
이대용 장군의 한국전쟁 전투기록 ‘국경선에 밤이 오다’는 저격능선에서 대대장 시절로 끝이 난다. 이후 미국 보병학교로 교육을 받으러 떠난다.
이대용 장군은 자신이 경험한 전투중 낙동강 전선의 신령전투를 가장 치열하다고 했다. 국경선에 밤이오다에서 일부가 묘사되어 있고 직접 작성한 기록이 있다. 다음에는 이를 중심으로 신령전투를 정리해 보도록 하겠다.
국경선에 밤이 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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