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경선에 밤이오다) 1 평안북도 순천에서 적십자 병원 간호사들을 포로로 잡다.

이번부터 이대용 장군의 전장수기 ‘국경선에 밤이 오다’를 정리합니다

1950년 10월 20일 새벽, 평안남도 순천 북방지역의 어느 야산지역에서 제2소대장 김덕출 소위가 일단의 여성들을 잡고 있는 것을 확인했다. 방공속에 있는 여성들을 잡았는데 확인해 보니 서울 적십자 병원의 간호원 및 간호학생이라는 것이었다. 이대용은 이들을 자신이 있는 중대 지휘소로 데리고 오라고 지시하고 직접 심문했다. 이들은 모두 감색 브라우스에 감색 스커트를 입고 있었으며 적십자 마크가 박힌 가방을 메고 있었다.

이대용은 이들을 포로로 간주하고 우선 간략한 심문을 했다. 가까이 가서 보니 보리알 같은 이들이 블라우스위를 기어다니고 있었다. 다들가려운지 긁어 대고 있었다. 간략하게 확인해 본 결과 이들은 1950년 6월 28일 서대문구에 있는 적십자 병원의 간호사로 국군 부상병 치료를 하고 있다가 북한군에게 체포되었다고 한다. 적십자 병원의 의사와 간호사들은 그날부로 북한군의 통제를 받게 되었고 서울시내로 나가지도 못하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

1950년 9월 15일 유엔군이 인천에 상륙했다는 뉴스가 들려왔으나 사흘이 지나도록 유엔군은 서울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 사이에 서울에서는 북한군의 비인도적인 학살행위가 자행되었다. 서울 시내 큰 건물의 지하실이나 교회에서는 몽둥이, 칼 총 등에 맞아 지식인들이 줄지어 살해 되었다. 북한군들은 시내의 주요 건물에 불을 지른다음 적십자 병원 간호원들을 청량리역에서 기차를 태워 의정부 방면으로 실어가려고 했다

간호사들은 이 행렬에서 탈출하기로 결심했다. 그 중 이병철이라는 이름의 19살 먹은 간호사가 탈출을 시도했으나 곧바로 북한군의 총에 맞아 숨지고 말았다. 심문결과 상당수 간호사들의 오빠들이 국방군에 복무하고 있었다.
포로가 아니라 납치된 것임이 분명했기 때문에 그 시간부로 포로취급을 해제했다. 바로 서울로 보내려고 했으나 평양과 순천이 도로는 아직 북한군 수중에 있었고 통행이 불가능했다. 며칠있으면 평양과 순천의 도로가 열릴 것이라고 생각하고 그동안 이대용이 이들을 데리고 있기로 했다. 흰밥과 고추장 한숟가락씩을 주어서 식사를 시켜주였다.

10월 22일이 되었다. 이대용은 대대장에게 명령을 받기 위해 갔다. 가는 길에 그녀들을 본 대위 한 명이 “많이 잡았구나. 몇 마리 양보하지”하고 이야기 했다. 과거 일본군에 복무한 적이 있는 자들이었다. 그들은 여성을 보면 위안부처럼 생각했던 것이다. 분노가 치밀었으나 그냥 침묵하고 대대장에게 갔다. 적십자 병원 간호사들을 발견한 이야기를 하고 서울로 보내겠다고 보고했다. 대대장도 동의했다.

갑자기 3소대 장기봉 하사가 비쩍 마르고 키가 큰 남자 한명을 포로라고 데리고 왔다. 이름을 확인해 보니 왕년의 인기가수 고복수 였다. 북한군에게 잡혀 따라 다니다가 돼지우리에서 체포된 것이었다. 신발도 제대로 신지 못하고 있었고 몰골이 말이 아니었다. 북한군에게 부역한 것을 걱정하면서 살려달라고 애원했다. 이대용은 자신의 배낭에서 깨끗한 양말을 꺼내서 신도록 하고 마음을 안정시켰다. 가지고 있는 캬라멜을 주어서 먹게했다. 부인인 황금심을 빨리 찾아서 건강을 되찾으라고 이야기하고 대대로 후송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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