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대용 장군의 국경선에 밤이 오다) 17 살아 돌아온 사람들

북창은 국군 8사단 후방이었기 때문에 안전한 지역이었다. 날이 밝은 후 아침 식사를 끝내고 군용트럭을 이것 저것 얻어 타면서 순천에 있는 제2군단 사령부에 도착하니 저녁이었다. 군산 인사참모 유근창 중령의 안내로 그곳에서 하루밤을 자고, 그 다음날 아침 순천 북쪽에 있는 제6사단 사령부에 가서 사단장 장도영 장군에게 신고를 했다.

사단에서는 복귀 환영행사를 했다. 이대용이 사단장에게 신고를 했다. 사단장의 위로와 격려사가 있었다. 사단 군예대 여가수가 이대용의 목에 하늘색 머플러를 걸어주었다.

압록강에서 중공군 제4야전군 예하 제39군과 40군이 첩첩이 둘러싼 포위망을 돌파하여 무려 천 기백리길을 헻 나온 것이었다. 그러나 기쁨보다는 잃어버린 부하들 생각에 더 가슴이 미어질 뿐이었다.
이대용은 우선 간호학생 박태숙과 정정훈을 부모님이 계신 서울로 보내야 겠다는 생각을 했다. 중대 선임하사관 김상사에게 박태숙과 정정훈을 인솔해서 서울로 보냈다.

그리고 한두명씩 살아돌아오는 부하들을 합쳐 중대원이 모두 36명이 되었다. 중공군의 포위속에서 피로와 기아에 시달린 이들은 포로가 되기도 하고, 적탄에 쓰러지기도 했으며, 자결한 사람들도 적지 않았다.

제7연대 고위급 간부급 중에서는 부연대장 최영수 중령과 제2대대장 김종수 중령이 포로가 되었고, 제3대대장 조한섭 중령은 전사했다. 연대 작전주임 조윤재 소령은 포로가된 후 참살을 당했다. 그런 불행중 다행스럽게 연대장 임부택 대령과 제1대대장 김용배 중령이 살아서 돌아왔다.

살아서 돌아온 이들은 중심으로 제7연대 제편성 작업에 들어갔다. 이대용의 제1중대는 1950년 11월 25일 후방에서 보내주는 신병 100명을 보충받았다. 그리고 육군종합학교 제1기생인 신임소위 2명이 소대장 요원으로 보충되었다. 인원은 채워졌으나 신임소대장과 신병들은 훈련이 되지 않아서 전투력이 보잘 것 없었다.

이대용은 이들을 교육훈련 시킬 시간도 없이 곧바로 긴급 출동을 해야 했다.

국경선에 밤이 오다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DCLICK HTML 삽입형 광고] - 운영중인 블로그나 웹사이트를 이용해 수익을 얻으세요!

안녕하세요. DCLICK 입니다. 오늘은 새로 출시된 기능인 HTML 삽입형 광고에 대해서 소…


This page is synchronized from the post: ‘(이대용 장군의 국경선에 밤이 오다) 17 살아 돌아온 사람들 ‘

Your browser is out-of-date!

Update your browser to view this website correctly. Update my browser now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