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대용 장군의 사이공 억류기) 3 이대용 두번 자결을 결심하다.

이대용은 두번 자결할 각오를 했다. 첫번째는 한국전쟁당시 압록강 초산까지 진출했다가 중공군의 공격으로 포위가 되었을때다. 그때 그는 중공군에 붙잡히는 상황이 되면 권총으로 자결을 하려고 생각했다. 쫓겨가는 와중에도 마지막에 자결을 할 수 있도록 권총에 항상 총알을 남겨 놓았다. 그저 생각이나 말만 그렇게 한 것이 아니다. 같이 철수하던 중대원과 서울 적십자 간호학생 박태숙과 정정훈에게도 자신은 자결할 생각이라고 이야기 했다. 마지막에 발바닥 피부가 모두 벗겨져 나가 더 이상 걷기도 어려울 때였다. 철수하는 와중에 국군의 장교들이 포로가되자 죽창으로 죽임을 당하는 상황을 잘 알고 있었기도 했거니와, 해방이후 북한에서 인민학교 교사를 하다가 인민재판을 받아 죽을뻔 했던 경험도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대용이 자결을 할 생각임을 밝히자 박태숙과 정정훈도 중공군에게 포로가 되면 자신들을 먼저 죽여달라고 부탁하면서 서로 울었다고 한다.

두번째 자결을 생각한 것은 월남에서 철수하다가 잘못되어 잔류했을 때였다. 이대용은 마지막 순간에 여러번 탈출할 수 있는 상황이 있었으나, 부하 외교관들과 교민들을 보호하기 위해 남아 있을 수 밖에 없었다. 여러번 마지막 탈출할 수 있는 상황에 마음이 조금씩 흔들렸던 것 같은 생각이 든다. 그나 남긴 기록을 보면 그 마지막 순간에 주저주저하면서 마음을 다시 잡았던 것을 알 수 있다. 인간이란 그런 존재다. 항상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와 같다. 그러나 위대한 사람은 흔들리면서도 중심을 잡아간다. 무엇이 중요하며 무엇을 지켜야 하는지 분명하게 알고 있기 때문이다.

미국 대사관에서 마지막 헬기가 떠나가고 이대용은 남은 교민들과 안전한 장소를 찾아 이곳 저곳을 전전했다. 먼저 북베트남과 외교관계가 있는 프랑스 대사관에 가서 도움을 요청했으나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 이대용은 교민들을 김영관 대사관저에 대기시켜놓고, 다시 이규수 참사관, 김창근 서기관, 신상범 서기관을 대기하고 프랑스 영사관으로 가서 도움을 요청했으나 거부했다.

이대용은 일본 대사관저로 갔다. 대사관저에서 일본의 국방무관 구로다 일등육좌를 만나 향후 어떻게 할 것인지를 이야기 하다가 새벽녁에 일본 대사관에 갔다. 이대용은 이규수 참사관을 대동하고 히도미 대사를 만나서 도움을 요청했다. 그러나 히도미 대사는 일본과 북베트남과는 외교관계가 없어 도움을 주기 어렵다고 난색을 표했다. 이대용은 어쩔 수 없이 지금의 긴급상황을 일본 대사관에서 전문으로 한국정부로 보내달라고 요청했다.

그 이후 이대용은 지푸라기라도 잡아야 겠다는 심정으로 월남 해군본부로 갔다. 이대용은 월남 해군사령관 충 땅 깡 중장과 친한 사이였다. 월남 군함을 이용해서 외교관들과 교민들을 전원 철수 시켜야 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월남 해군본부 정문 초소에서 더 이상 접근하지 말라고 총탄세례를 받는 상황에 이르자, 포기하고 다시 프랑스 인 보네를 만나 프랑스의 그랄 병원으로 외교관들과 교민들을 데리고 들어가는 상황에 이르게 되었다. 프랑스인 보네의 부인은 한국인 유선화로 지미식당을 운용하고 있었다.

1975년 5월 1일 아침 8시 30분경 일본 대사관의 와타나베 참사관이 김동조 외무장관이 이대용에게 보낸 전문을 가지고 그랄 병원으로 찾아왔다. 전문내용인 즉, 정부는 각종 외교계통을 통해 사이공 잔류 외교관과 교민들을 구출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겠다는 것이다.

와타나베 참사관은 북한과 친밀한 관계에 있던 일본 좌익의 거물급 작가 마쓰모토 세이쵸의 사위였다. 와타나베 참사관은 그동안 들었던 이야기를 해주었다. 이미 북한의 고위급 정보요원들이 사이공까지 들어와 있으며, 베트남 공산정권과 협조하에 한국 외교관 8명을 모두 평양으로 끌고갈 것이라는 것이었다.

이대용은 각오는 하고 있었지만 그말을 들으니 머리가 하얗게 되었다. 그는 자신이 가지고 있던 38구경 리볼버 권총을 꺼냈다. 그리고 와타나베 참사관에게 북한으로 끌려가는 상황이 되면 북한 정보요원을 사살하고 자신도 자결하겠다고 이야기 했다. 50평생 후회없이 살았고 죽음이란 언젠가 가야할 피할 수 없는 것이니 깨끗하게 가고 싶었다. 와타나베 참사관은 이대용의 손을 잡으며 자결 만을 하지 말라고 울었다. 옆에 있던 이규수 참사관도 울고 있었다.

이대용은 이후 북베트남에 체포되어 심문을 당하면서도 여러번 자결할 생각을 했다. 사람이 죽을 생각을 하는 것은 쉬운일이 아니다. 아마도 이대용이 이대용 같은 삶을 살수 있었던 것은 죽고 사는 문제를 확실하게 정리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는 만년에 천주교 신자로 살았다. 언제부터 천주교 신자가 되었는지는 모르겠으나 결정적인 순간에 스스로 목숨을 정리하겠다는 생각은 변치않았다.

군인에게는 사생관이 중요하다고 한다. 자신이 살고 죽을 자리와 상황을 잘 알아야 한다는 것이리라. 그런점에서 이대용은 진정한 군인정신의 표상이라고 할 것이다. 마치 일본 전국시대의 사무라이를 연상하게 한다. 무엇이 이대용을 그렇게 만들었는지 알 수 없다. 그냥 스스로 타고난 것인지 아니면 살아오면서 스스로를 그렇게 만들고 다음어 간 것인지는 알 수 없다. 아마 타고난 성정도 무시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평생 어떤 삶을 살아야한다는 생각을 다지지 않으면 안된다. 그런점에서 이대용은 일본식으로 표현하자면 문제적 인간이다.


한국에 상륙한 블루보틀 기존에 자리매김한 스벅을 긴장시킬지 아니면…

갠적으로는 좀 더 지켜보야지 않을까 싶은데 1표인데 여러분들의 생각은 어떤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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