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대용 장군은 군의 논공행상이 문제가 있다고 생각했다. 잘한사람 못한사람을 제대로 가리지도 못했고 정작 공이 있는 사람도 제대로 상을 받지 못했다는 것이다.
이대용 장군은 자신이 중대장으로 부대를 지휘하면서 낙동강에서 압록강까지 진격하여 초산을 점령하고 중공군이 개입하여 철수하는 와중에도 유일하게 건제를 유지했던 공을 인정해주지 않은 것에 대해 무척 서운하게 생각했다.
10월 31일에 새로 부임한 일선 전투경험에 없는 27세의 청년 사단장은 제7연대의 낙동강에서부터 북진하여 압록강 초산 진격작전, 그리고 초산에서 개천-맹산 선까지의 철수작전 일등공신 장병들에 대한 논공행상을 전혀하지 않았다. 다만 완전무장을 하고 중대장 지휘하에 포위망을 뚫고 나온 유일한 중대인 제7연대 제1중대에대해서는 사단 사령부에 불러들여 군악이 울려 퍼지는 가운데 신고식을 갖고 환영식을 해주었다. 그러나 훈장수여같은 것은 이때에도 없었다.
또 제7연대 장병들은 자기 목숨이 언제 날라갈 지 모르는 전투에 연일 시달리며 몰두하고 있었기 때문에, 훈장 따위는 꿈속에서조차 생각해 볼 마음의 여유가 없었다. 오직 나라를 위해 충성을 다하겠다는 일념 뿐이었다. 그래서 연대장 임부택 대령, 제1대대장 김용배 중령, 제1중대장을 위시한 유공장병들은 훈장 하나 없는 무관이 용사로 남게 되었다.
두뇌가 우수한 청년장군인 제6사단장 장도영 준장은 전투경험을 쌓으면서 크게 성장했다. 그분은 1951년 10월 하순 어느날, 장도영 사단장 취임 1주년 기념 및 압록강 진격 1주년 기념 행사를 대대적으로 개최했으며, 초산에 진격했던 제7연대 제1대대 장병들에 대한 훈장을 뒤늦게나마 수여했다.
초산진격 당시 제3중대장 김명익 대위 등 유공장병에게 미국 은성무공훈장, 또는 우리나라 을지, 충무 훈장들을 수여했다. 그러나 여기서도 큰 실수가 있었다. 압록강변에 진격하여 신도장에 배치되어 있다가 중공군 포위망 속에서도 제7연대에서 유일하게 끝끝내 중대를 지휘하여 완전무장하고 포위망을 뚫고 나온 제1중대장이 수훈자 명단에서 누락된 것이다. 오늘날까지 제1중대장은 그때 그 작전의 유공을 국가로부터 인정받지 못하고 버림당하고 있는 데 그 이유는 간단했다.
제1중대장은 1951년 7월 15일, 제2사단으로부터 대대장 요원으로 스카우트 되어 제6사단을 떠났으며, 장도영 장군이 초산지구 전투유공자에게 훈장을 뒤늦게 수여하는 1951년 10월 말 경에는 제6사단장 부하가 아닌 제2사단 제32연대 제3대대장으로 금성 남방고지에 있었다. 그 바람에 장도영 제6사단장는 자기부하가 아닌지라 깜박하고 빼버닐 것이다. 당시 우리 국군의 행정력 수준은 그런 것이다.
그러나 다행이 김용배 대령이 전사하자 즉시 준장으로 진급되었고, 제7연대 제1대대장으로서의 혁혁한 전공을 인정받아 태극무공훈장이 추서되었다. 임부택 대령도 태극무공훈장을 2개나 추후에 받게 됨으로써 제7연대 전쟁영웅 두명은 모두 그 전공이 국가로부터 정식으로 인정되었다.
사실 이대용 장군은 6.25 전쟁당시의 공적을 보건데 태극무공훈장을 받아도 부족했다. 그러나 이런 저런 이유로 무공훈장을 제대로 받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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