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전쟁당시 춘천으로 들어온 북한군 제2군단은 첫날부터 대량피해를 입었다. 그리고 그런 피해로 인해 북한군은 춘천을 통해 서울로 진출하려던 계획이 무산되었다. 제16포병대대의 활약 덕분이었다. 그러나 포병들의 활약은 별로 인정을 받지 못했다. 제6사단장이 잘해서라든지 제7연대장이 적시적절한 판단때문이라든지 하는 식으로 기록되었다. 그러나 춘천지역에서 보병전투는 제1대대를 제외하고는 거의 없었다. 38선에 있던 제7연대 2대대와 3대대는 일방적으로 두들겨 맡고 후퇴했다. 그리고 소양강 이남으로 철수했다.
제1대대만 6월 26일 파쇄공격을 해서 적의 진출을 잠시 저지시켰을 뿐이다. 그러면 적의 진출저지하고 대량피해를 당하게 한 것은 포병밖에 없다. 그러나 포병들의 활약은 거의 무시되다시피했다. 이대용 장군은 포병의 활약에 대해서 비교적 정확하게 기술하고 있다. 일개 보병 중대장에 불과한 이대용 장군이 당시의 포병상황을 모두 파악했을리는 없다. 그러나 6월 25일 38선이 무너진 절대절명의 순간에 포병들이 적의 주력을 향해 직접 교전에 들어간 것을 분명하게 기록하고 있는 것이다
춘천싱내에 주둔하고 있던 국군 제7연대 제1대대는 일요일 외출 및 외박을 나간 사병들을 긴급소집하는 비상을 걸어, 이들을 영내에 불러들여 출동준비를 하고 탄약을 분배했다. 그런 다음 군용트럭에 승차하여 우두산 북방에 있는 능선일대에 미리 구축해 놓은 제1대대 방어진지를 향하여 달리고 있었다. 이때 5번 도로 축선의 북한 공산당 제2사단 대부대의 진격을 저지시키고 있는 아군 부대는 놀랍게도 보병부대가 아닌 포병부대였다.
김 성 소령이 지휘하는 제16포병대대는 우두동 일대에 포진하여 아직 국군 제7연대 제1대대가 방어진지에 진입하기 전에 역골, 아리산, 한계울, 삼거리에 진출한 적군 대부대에 집중포화를 퍼붓고 있었다. 앞에서 포병부대를 보호해주는 보병부대가 거의 없는 상태인데도 개의치 않고, 적군 포병 대부대와 1대 1로 대결하면서 용감무쌍하게 결사적으로 항전하고 있는 제16포병대대의 당당한 모습, 그것은 군용트럭을 타고 그 곁을 지나가는 국군 제7연대 제1대대 장병들에게 깊은 감명을 주었으며, 사기 진작에도 큰 도움을 주었다.
제16 포병대대의 맹활약으로 5번도로를 따라 내려오던 적군 제2사단의 전진 속도가 거북이걸음으로 느리게 바뀌었다. 이날의 포병의 용전분투는 너무도 훌륭했다.
당시 포병부대는 서북청년단 출신들이 많았다. 서북청년단은 이북에서 공산당에게 자신들의 가족이 처형당한 경험이 있는 사람들이었다. 그래서 전투에서도 절대로 물러서지 않았다고 한다. 제16대대가 보병도 무너진 상황에서 끝까지 포격을 가할 수 있었던 것이다.
춘천전투 당시 포병대대장 김성 소령의 행적에 관한 의문을 제기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6월 25일 오전일찍 김성 소령이 전방으로 갔다가 그 이후 춘천에서 철수할때까지 김성소령이 사라졌다는 것이다. 사단장 김종오 대령이 춘천봉의산에 왔을 때도 김성 대대장은 자리에 없었다고 한다.
제16포병대대의 전공이 무시된 것도 대대장 김성 소령의 행적과 연관이 있는 듯 하다. 대대장이 탈영하다시피한 상황에서 자신들이 잘했다고 전공을 자랑하기도 어려웠을 것이다.
결국 제16포병대대는 대대의 지휘기능이 붕괴된 상황에서 각각 알아서 싸운 것이다. 제16포병대대는 그 이후에도 전투를 잘했다. 그럴 수 있었던 것은 포탄을 모두 지니고 후퇴를 했기 때문이다. 당시 포탄을 옮겨야하겠다고 결심한 사람은 군수장교 김운한 중위였다. 포병대대장은 거의 아무런 역할을 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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