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의 일생을 알아볼때 제일 먼저 해야할 일은 그가 어릴때 어떻게 자랐는가 하는 것이다. 어릴때 어떤 가정환경에서 어떤 교육을 받고 자랐는가하는 것은 사람의 일생 내내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이대용이 태어난 곳은 아름답지만 가난한 동네였다. 마을의 땅 대부분은 개성사람들 것이었고 금천군 고우봉동 사람들은 농사의 절반을 소작으로 내야했다.
이대용의 할아버지는 조선조 말년에 말단 공무원인 풍헌(지금의 면장)을 하고 하고 있었다. 한때는 내노라하는 양반집안이었으나 점점 가세가 기울여 이대용의 아버지 대에 와서는 먹고사는 것 조차도 녹록하지 않았다. 이대용의 어머니 또한 원래 양반집안었으나 경제적으로는 몰락한 농부의 딸이었다. 이대용의 어머니는 한글로 쓴 책을 읽을 수 있을 정도의 공부만 했다. 얼굴이 희고 아름다웠으며 현명해서 동네 아낙네들이 근심거리가 생기면 찾아아서 의논을 하곤 했다.
이대용이 태어나기 전에 어머니는 두명의 자식을 앞세웠다. 큰형이 6살, 작은형이 4살때 홍역을 앓았고 며칠 간격으로 모두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이대용은 어머니가 간혹 혼자서 조용히 눈물을 흘리는 것을 보았다고 한다. 먼저 보낸 자식들 생각때문이었다.
그러던 이대용의 어머니도 오래 살지는 못했다. 이대용이 초등학교 2학년 겨울방학 때 돌아가시고 말았다. 그 동네에서 보통학교를 다니는 것은 보통일이 아니었다. 한문을 가르치는 서당이 몇개 정도 있었으며, 보통학교에 가려면 이웃동네인 백마면으로 가야했다.
이대용이 만 6살에 백마보통학교에 진학한 것이 그마을에서 처음이었다. 어린 나이에 5km가 넘는 길을 혼자서 통학을 했다. 당시는 10살정도가 되어야 보통학교에 입학을 했으니 이대용은 가장 나이가 어렸다. 힘겨운 통학길이었다. 어머니는 하교때마다 1km 정도 마중을 나와 걸음에 지친 이대용을 업고 집으로 갔다. 이대용은 어머니 등에 업혀 스스르 잠이 들곤했다. 집에와서 어머니가 이대용을 내려놓을 때 단잠을 깨곤했다.
그러나 이런 행복은 오래가지 못했다. 어머니가 해산을 하고 산후조리가 잘못되어 병환을 얻었다. 병세는 점차 악화되었고 늦가을이 되자 어머니는 이대용을 더 이상 업을 수 없었다. 그래도 어머니는 예전처럼 이대용을 마중나와 손을 잡고 집으로 같이 갔다. 간혹 몸이 좋지 않으시면 지팡이를 짚고 마중을 나오기도 했다. 이대용은 따뜻한 어머니의 손을 잡고 같이 집에 오는 시간이 너무 좋았다.
어머니 병세는 점점 나빠졌다. 2학년 겨울방학때인 음력 11월 26일 아침 어머니는 어젯밤에는 소화가 잘되었다고 이불을 걷고 일어나 앉아 조반을 드셨다. 그러나 점심나절부터 병세가 갑자기 악화되었다.
어린 이대용은 그날 오후에도 동네 아이들고 뛰놀고 있었다. 이대용이 어머니가 돌아가신 상황을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누님이 나를 데리러 왔다. 어머니가 나를 찾고 계신다고 했다. 200미터 정도되는 집으로 뛰어가보니 어머니는 안방 아랫목에 반듯이 누워 이불을 가슴까지 덮고 계셨다.
어머니가 손짓으로 나를 머리맡으로 부르셨다. 나는 어머니 왼쪽 어깨에 바짝 다가 앉았다. 어머니는 어린, 그러나 맏아들인 내 고사리 손을 잡으셨다.
“ 공부 잘해서, 곧고 훌륭한 사람이 되거라”
가쁜 숨결 속에서도 말은 그런대로 알아 들을 수 있게 이어졌다.
나는 “네”하고 대답했다.이것이 나와 어머니의 마지막 대화였으며, 그 다음부터 약 한시간 반동안 어머니는 한마디 말씀도 못하시고 누워 계시다가 조용히 숨을 거두셨다. 나는 어린 두 손등으로 흐르는 눈물을 번갈아 닦으면서 울고 또 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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