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대 정보과 보좌관 김중위와 제1대대 정보과 선임하사관이 이대용을 찾아 왔다. 그들은 연대 정보주임의 지시라고 하면서 적십자 병원 간호사들을 연대본부로 후송하라고 했다. 아침 순천 우체국앞에서 일본군에 복무한 바 있는 어떤 대위의 이야기가 떠올랐다. 간호사들의 신상이 걱정되었고 기분이 좋지 않았다. 그의 지시에 불응하였다.
김중위에게 순천 우체국 앞에 있었던 일을 이야기 하면서 간호사들에 대한 처리 문제는 이대용 자신의 생각대로 할테니, 연대본부에서 심문할 필요가 있으면 제1중대에 직접와서 하라고 했다. 김중위는 이해한다는 입장을 표명하고 연대로 돌아갔다. 그리고 얼마 있지 않아 다시 이대용을 찾아왔다. 그는 연대 정보주임의 생각도 이대용과 다르지 않다고 하면서 한 두명의 쓸모없는 놈들이 있지만 시간이 가면 다 제거될 것이라고 했다. 연대 정보주임이 간호사들의 육체적 순결성은 보호해 준다는 약속을 적은 메모를 보여주었다. 이대용은 연대 정보주임의 청렴결백과 강직함을 평소부터 알고 있었기에 자신의 고집이 지나치다는 생각이 들었다. 간호사들을 모두 연대로 후송하기로 하고, 심문이 끝나면 다시 제1중대로 복귀해서 서울 적십자 병원으로 보내기로 했다. 간호사들에게도 그렇게 설명했다.
출발전에 인원을 세어보니 2명의 간호학생이 부족했다. 제일 키가 작았던 박태숙과 그녀의 가장 친한 친구 정정훈이었다. 확인해보니 중대 선임하사관의 지시에 따라 밥을 짓고 있었다는 것이다. 김중위는 10명 정도면 충분하다고 하면서 두명은 그냥 두고 간호사들을 차에 태우고 갔다.
다음날 새벽밥을 먹고 트럭을 타고 개천 방면으로 전진했다. 개천에서 3대대를 추월하여 전진하다가 경전차 5대를 가지고 북한군과 대치하고 있는 미군 수색대를 만났다. 이들을 초월하여 계속 전진했다. 적과 전투를 벌였다. 진군해 나갈 수록 북한군 패잔병은 그 수효가 계속 늘었다. 이들을 지나쳐서 계속 진군했다. 북한군에게 재편성의 여유를 주지 않기 위해서 트럭위에 흙가마니를 놓고 그 위해 박격포를 세우고 계속 사격하면서 진출했다. 원리에 이르니 북한군이 방어를 시도했으나 한시간정도의 교전끝에 다시 북쪽으로 쫓기어갔다.
원리를 지나 자작 부근에 도달하니 군수품을 가득 실은 화차가 여기저기 철로위에 서 있었다. 소련제인 듯한 북한군 작업복이 산더미 처럼 쌓여 있었다. 모두 한벌씩 갈아입고 스탈린 동무의 선물이라며 좋아했다.
박태숙과 정정훈도 옷을 깨끗하게 갈아 입었다. 연대본부와 점점 멀어지니 간호사들 12명이 모두 모이기 어려워질 수 있다고 걱정을 했더니, 박태숙과 정정훈은 압록강까지 갔다가 서울로 돌아가겠다며 제1중대를 떠나지 않겠다고 말했다.
자작 북방 2km 정도 되는 곳에 도달했다. 적의 저항이 있어 전투를 하다가 제3소대의 김하사가 철로변 터널속에 가득차 있는 미군 시체를 발견했다. 피가 완전히 마르지 않은 것으로 보아 학살당한지 얼마 지나지 않은 것 같다고 보고해왔다. 이대용은 대대장에게 바로 보고하고 현장의 시체검증을 위해 대대군의관을 보내달라고 요청했다.
대대장 김용배 소령은 대대 구호반을 데리고 직접 현장으로 왔다. 상황을 확인한 즉, 1950년 10월 22일 오전 10시경 북한 군들이 북으로 끌고가던 미군포로 300여명을 이터널 속에 가두고 한쪽은 기차와 보급품으로 완전히 틀어막고, 다른 한쪽에서 기관총을 난사하여 모두 학살했다는 것이다. 멀리서 이 광경을 보고 있던 마을 주민들이 모두 울었다고 한다. 그 중에 숨이 끊어지지 않은 미군 3명이 있어서 응급조치를 하고 후송했다.
이대용은 대대장이 현장에 도착하자 북한군을 추격하여 구장으로 들어갔다. 적은 완전히 흩어져 버렸다. 구장을 지나는 길가에서 주민들이 납치당한 안재홍씨 일행이 이틀전에 도보로 걸어서 이곳을 지나갔으며, 빨리 추격하면 그들을 구출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을 했다.
국경선에 밤이 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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