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대용은 월남 경제공사로 있으면서 월남 패망당시 교민철수 작전을 지휘했다. 이대용은 한국전쟁과 월남전에 대한 기록을 남기면서 일정한 경향성을 보이고 있다. 처음에는 우리가 잘못한 것을 가급적 이야기 하지 않으려고 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점차 사실을 사실대로 이야기하려고 했다. 처음에는 덮어주고 가려했으나 시간이 지나면서 잘못한 사람 나쁜 일을 한 사람에 대해서는 똑바로 이야기하려고 했다.
2010년에 출판된 ‘6.25와 베트남전 두 사선을 넘다’에서는 철수 당시 우리 해군의 LST 운영과 관련한 이야기를 언급하고 있다.
당시 우리 해군 LST는 교민 철수를 위해 할당되었다. 기본 방침상 우리 교민들만 이용하기로 되어 있었다. 그런데 한국군과 긴밀하게 협력해오던 월남군들이 문제가 되었다. 그 중에서 월남군 태권도 교관인 빈 소위는 만일 그대로 남아 있으면 월맹군에게 처형당하는 것이 불을 보듯 뻔한 상황이었다.
우리나라를 방문했던 고딘디엠 대통령은 태권도 교관 파견을 요구했다. 한국군은 1962년 12월 남태희 육군 소령을 단장으로 하는 태권도 교관 4명을 사이공에 파견하여 남월군 체육학교에서 1년간 태권도 교육을 시켰다. 그 중에서 빈은 남태히 소령과 김승규 대위가 가장 신임한 수제자였다. 하사관이었던 빈은 태권도 유단자가 되어서 소위로 현지 임관되었다.
4월 24일 빈 소위가 이대용을 찾아와서 4월 26일 사이공 항구를 떠나는 해군 LST에 자신과 처자를 태워달라고 부탁했다. 붙들리면 처형되는 것이 뻔하니 살려달라고 했다. 당시 주월 한국대사관은 본국정부로부터 재월 한국인 철수계획에 대한 승인만 받았고, 외국인 해외탈출은 고려한 바도 없었고 본국정부의 지시나 승인을 받지 못하고 있었다.
이대용은 빈소위를 방에 대기시켜놓고 어느 고위층(이대용은 어느 고위층이라고 기술하고 있는데 이대용이 당시 주월대사관의 서열 2위였던 것을 고려해 보면 그 고위층이란 당시의 주월대사임을 알 수 있다)을 찾아가 논의했으나 결과는 부정적이었다. 본국정부에 승인 여부를 문의할 단계까지도 가지 못하고 빈소위를 돌려보내야 했다.
4월 25일에는 사이공에서 사귄 친구들과 돈많은 중국인들이 찾아와서 우리 해군 LST를 타게 해달라고 졸랐으나 그들의 애절한 부탁을 들어줄 수 없었다.
남월에 잔류중인 550명의 한국민간인들은 4월 26일 사이공 부두에서 우리 해군 LST에 승선하여 본국으로 돌아가게 되어 있었다.
4월 26일 오전 9시경 이대용은 우리 해군 LST 두척이 정박중인 부두에 가보고 깜짝 놀랐다. 한국말을 하는 사람보다도 월남어나 중국어 필리핀어를 하는 사람이 세배나 많았다. 이날 우리 해군 LST에 승선하여 부산항으로 철수한 사람은 한국인 314명 한국인의 월남부인가 자녀 및 월남부인의 부모친척 형제등 659명, 한국인과 친인척 관계가 없는 순수 월남인 342명, 중국인과 필리핀인 20명 등 모두 1천 334명이었다.
정작 타야할 550명의 한국민간인 중에서 314명만 승선했다. 이대용은 당시 철수본부장이었는데 이런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었다. 해군 LST 는 한국 대사관이 발급한 승선표를 일일이 받고 외국인들을 태웠다고 대답했다. 재월 한국교민회를 관장하고 있는 이규수 총영사 겸 참사관에게 경위를 물으니 그는 한숨을 지으며 어제 초저녁부터 오늘 아침에 이르는 동안 한 고위층 인사와 교회 지도자 몇몇 사람에 의해 갑자기 이루어졌다고 한다. 여기서 고위층 인사란 당시 주월 한국대사는 해군참모총장을 역임했던 김영관이었다
이대용은 울분이 치솟았으나 어쩔 수 없었다.
이 당시 철수문제와 관련하여 국사편찬연구소는 2009년 관련자들을 인터뷰하고 구술자료를 남겼다. 내용은 아직 열람할 수 없으나 당시 외교관 잔류와 관련하여 이대용의 책임이 있다는 평가를 다음과 같이 하고 있다.
셋째, 한국 외교관이 사이공에 잔류하게 된 경위에 관한 의문점이 일부 해소되었다. 주월남 한국대사관은 월남이 생존할 가능성을 상대적으로 높게 평가하고 있었다. 이 평가는 재월남 한국교민과 주월남 한국대사관 공관원의 잔류에 큰 영향을 미쳤다. 이 평가는 이대용 공사의 판단으로 밝혀졌다. 이대용 공사는 재월남 한국교민철수본부장으로 임명되었지만, 철수작전의 수행에 직접 관여하지는 않았다. 또한, 1975년 4월 29일 밤 미국대사관에서 최종 철수를 앞둔 시점에서도 공관원의 개별행동을 금지함으로써 공관원이 잔류하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그러나 이런 평가는 매우 단편적이다, 당시 철수가 임박해서 외교관들이 철수할 상황에서는 누구도 월남이 생존할 가능성을 높게 평가하지 않았다. 이대용이 월남이 생존할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것은 월맹군이 처음 공세를 했을 때였다. 그리고 교민과 대사관 직원들 철수계획은 이대용이 세웠다. 이대용은 육군대학에서 철수 교관을 했던 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철수작전의 수행에 직접관여하지 않았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공관의 책임자로서 위기상황에서 공관원들이 각자 알아서 마음대로 행동하도록 하는 것은 죽으라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위험한 위기상황일수록 조직을 장악하는 것이 중요하다. 이렇게 볼 때, 국사편찬위원회의 평가는 옳지 않다.
더구나 2009년 당시 구술자료를 정리하는 과정에서 이대용은 구술대상이 아니었다. 철수작전의 가장 핵심인물이었던 이대용의 구술도 없이 위와 같이 평가한 것은 타당하지 않다고 할 것이다.
Sponsored ( Powered by dclick )
DCLICK: An Incentivized Ad platform by Proof of Click - 스팀 기반 애드센스를 소개합니다.
안녕하세요 스티미언 여러분. 오늘 여러분께 스팀 블록체인 기반 광고 플랫폼 DCLICK을 소개…
This page is synchronized from the post: ‘(이대용 장군의 두 사선을 넘다) 13-1 월남 철수작전 당시 우리 해군 LST의 운용에 관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