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7 중국과 소련의 관계 악화와 북한의 소련중시 외교 정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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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6년 중국과 북한의 긴장관계가 형성되는 와중에 북한과 소련의 관계는 더욱 강화되었다. 이런 외교적 노선 변경은 김일성의 전략이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김일성은 북한내에서 강력한 위치를 확보하고 있는 중국을 견제하기 위해 소련을 이용하려 했었고 소련또한 중국을 견제하려고 했기 때문이다.

1956년은 헝가리에서 반소 봉기가 일어났다. 이와함께 공산주의 맹주국이라는 소련의 지위가 흔들리기 시작했다. 게다가 후르시쵸프가 스탈린주의를 비난하면서 중소의 관계는 악화되기 시작했다. 김일성은 수정주의비판보다 권력장악이 더 중요했다. 김일성은 수정주의를 비판하는 중국과 중국의 북한내 위치를 약화시키기 위한 투쟁을 병행해야 했다.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하는 과정에 소련과 손을 잡을 수 있는 것은 절호의 기회였다.

소련이 헝가리에 파병하는 시기 11월 2일 남일은 소련대사에게 북한은 이후 소련과 우의를 강화할 것이라고 하면서 “우리는 현재 모든 진보적 세력들이 당연히 소련 주위로 더 긴밀하게 단결해야 한다고 판단하고 있다”고 밝혔다. (438, 주 209, 이바노프의 일기, 1956년 11월 2일, ЦХСД. ф. 5, оп. 28, д. 412, лл. 364-365)

김일성은 주소북한대사가 모스크바에 부임하기전에 소련과 관계를 강화하는 노선을 확실하게 했다. “소련과의 연합과 우의를 강화하는 것 외에, 우리에게 다른 정치노선이 없다”는 것이었다.(438, 주 210, 이바노프의 일기, 1956년 11월 28일, ЦХСД. ф. 5, оп. 28, д. 411, лл. 297-300)

한편 소련과 중국과의 관계는 점차 벌어지고 있었다.
마오쩌둥은 폴란드와 헝가리에서의 정치적 위기가 발생한 이후 소련이 계급투쟁을 포기하고 미국과 긴장완화를 추구하는 방법은 잘못된 것이라고 주장하면서, 사회주의 진영에 대한 소련의 지도능력과 위상을 위협하는 발언을 계속했다.

특히 1957년 11월 모스크바 회의이후 중소간 견해차는 더욱 벌어졌다.
(438, 주 211, 이바노프의 일기, 1956년 11월 9, 28일, ЦХСД. ф. 5, оп. 28, д. 411, лл. 297-294, 297-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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