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대용 장군의 두 사선을 넘다) 5 김용배 대대장의 인격과 아량, 제2중대장 오윤석의 경우

이대용 장군은 자신의 대대장이던 김용배에 대한 기억을 많이 남겨 놓았다. 김용배 대대장은 나중에 전사해서 준장으로 추서되었고 태극무공훈장을 받았다. 한국전쟁 당시 대대급 전투지휘관으로는 최고의 능력을 보여주었다고 할 것이다. 그의 전투지휘 능력과 함께 이대용은 김용배의 인격을 높이 평가했다.

이대용의 책 중에서 김용배의 인격에 관한 글을 다음과 같이 옮긴다.

그분의 용감성과 침착성, 그리고 뛰어난 지혜와 성실성은 싸움터에서도 늘 돋보였다. 그로 인해 사단장 김종오 준장, 연대장 임부택 대령으로부터 무한한 신임을 받았으며, 빠른 승진을 거듭하여 1950년 7월 9일에는 중령으로 진급했다. 이때 그분의 육군사관학교 동기생들 대부분은 계급이 대위였다. 김용배 대대장은 맑은 물, 흙탕물을 모두 포용하는 큰 바다와 같은 넓은 도량을 가지고 있었다.

이렇게 훌륭한 대대장 밑에 있는 장병들은, 용장 밑에 약졸없다는 말과 같이 모두 용감하게 싸웠다. 그러나 예외적으로 겁많은 제2중대장 오대위만은 그렇지가 못했다. 오 대위는 전술적 지식도 있고 평상시에는 중대원 교육훈련을 잘시키는 등 모든 일에 열심이었다. 그래서 6.25가 일어나기 전까지는 제7연대에서 가장 유능한 중대장으로 손꼽혔고, 연대장과 대대장의 두터운 신임까지 받고 있었다. 그러나 전쟁이 일어나서 적군과 전투를 하게되자 그는 항상 꽁무니를 빼며 후퇴를 일삼았다.

김용배 중령은 오대위의 담력을 길러주고 전투에 쓸 수 있는 지휘관으로 키워보려고 애를 쎃다. 그런 노력이 꽤 성과를 거두기는 했으나, 타고난 천성을 완전히 바꿔놓지는 못했다.

1950년 8월 30일, 전투가 치열해지자 오대위는 바위에서 넘어져서 가슴이 아프다는 말을 연락병에게 남기고 무단이탈, 후방으로 도망쳐 버렸다. 그래도 자신을 따뜻하게 인도해준 김중령을 생각하며 양심의 가책을 느낀 모양이었다. 다른 못된 장교들처럼 마산이나 부산에 있는 육군병원으로 가서 여러가지 병을 가진 환자로 위장해 입원하거나, 멀쩡한 맹장수술을 받는다거나 하는 따위의 요령을 피우지는 않았던 것이다. 그는 최전방 일선에서 약 12 킬로미터 후방에 있는 연대본부에 나타나 대죄하며 근신하였다.

제1대대 장교들 대부분은 오대위를 불러 총살이라고 시키는 것이 군기확립상 좋을 것이라고 여겼다. 하지만 김 중령은 그를 잘 타이르고 용서하여 일선 후방에 있는 연대본부 작전보좌관으로 일하게 해주었다. 오대위는 상황도도 잘 그리고 작전명령도 잘 작성하면서 밤낮을 가리지 않고 열심히 일했다.

제2중대장 오대위의 이름은 오윤석이다. 그는 신령의 화산전투 당시 현지이탈을 했다. 그로 인해 제1대대 전체의 전투가 어려웠다. 당시 이정도의 상황이면 대부분 지휘관들이 즉결처분을 했다. 그러나 김용배는 사람들 크게 포용하는 아량이 있었다.


DCLICK: 광고 기능을 소개 합니다

지난주에 dclick 에서 Advertise 기능이 오픈 되었습니다. Advertise 메뉴 …


This page is synchronized from the post: ‘(이대용 장군의 두 사선을 넘다) 5 김용배 대대장의 인격과 아량, 제2중대장 오윤석의 경우’

Your browser is out-of-date!

Update your browser to view this website correctly. Update my browser now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