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대용 장군 녹취록 41. 북한의 망명요구를 거절하다.

그 이후로 북한의 요원들은 모두 6-7번 정도 이대용을 심문하러 왔다. 나중에 알게 된 것이지만 이대용을 심문하러 온 사람들은 북한에서 파견된 사람들이었다. 그들의 이름은 박영수 궁상현이었다. 박영수는 나중에 남북회담에서 서울 불바다 이야기를 했던 사람이었다. 이대용이 나중에 귀국했을때 북한에서 귀순한 황일호라는 사람을 만났는데 황일호가 당시 이야기를 해 준것이다.

북한은 이대용을 망명을 시켜서 북한으로 데리고 가려했다. 그러나 외교관을 그냥 막무가내로 데리고 갈 수는 없는 법이었다. 베트남은 자의에 의한 망명서를 받아 오면 이대용을 북한으로 데리고 가도록 허락해주겠다고 한 것이다. 그리하여 북한은 이대용에게 자의에 의한 망명서에 사인을 받으려고 한 것이다.

북한은 이대용을 상대로 계속 설득 작업을 했다. 어느날인가는 갑갑한데 시나 한 수 읽어 볼까 하더니 뭔가를 읽기 시작했다. “그동안 많은 세월이 흘렀어. 그동안 잘 있었니 ?” 그러더니 갑자기 “탁용이도 잘 있고?”라고 했다. 탁용이는 이대용의 동생이었는데 이남에 나와 있었다. 누님의 편지였다. 그러더니 “당신이 원하면 누님의 편지를 주겠소”라고 했다. 이대용은 단호하게 “필요없다”고 거절했다. 보나 안보나 뻔 한 이야기였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누님은 불러주는대로 편지를 썼을 것이기 때문이다.

약 1주일정도 심문이 진행되었으나 이대용은 끝까지 거절했다. 마지막에는 그들이 이대용에게 당신이 아무리 그렇게 해도 소용이 없다고 하면서 우리가 망명서를 써서 도장을 찍어가지고 신문에 발표하면 그걸로 끝난다고 했다. 그러면서 평양가서 냉면같이 먹자고 회유했다. 평양가면 당신 환영할 좋은 색시들 모두 준비되어 있다는 것이었다.

실제 북한에서는 이대용을 망명시키는 것으로 생각하고 만반의 준비를 다 갖추어 놓고 있었다. 이대용의 누님도 좋은 곳으로 보내 놓고 인터뷰 준비하느라고 부산을 떨었다는 것이다.
당시 북한 내부의 상황은 귀국후 만났던 황일호로부터 들었다. 중앙정보부에서 황일호를 만났는데 그때 그런 이야기를 해주었다. 황일호는 북한의 3호청사 차장급 고위인사였는데 망명을 했다.

북한의 이대용 망명유도 계획은 당시 베트남과 캄보디아의 정세로 인해 무산되었다. 당시 베트남은 캄보디아를 침공했는데 북한이 캄보디아를 지지했던 것이다.

그와 함께 한국정부에서도 이대용을 구하기 위한 총력전을 벌렸다. 박대통령은 모든 외교채널을 총동원했던 것이다.

이대용과 같이 붙들려온 한국 외교관 2명은 자술서를 써서 사형수동에서 일반동으로 옮겨져 있었다.

잡혀있던 교민 170명은 3개월 후부터 모두 귀국하기시작했다. 그들은 모두 월맹에 자술서를 쓰고 북한에 충성맹세를 하고 풀려났다. 그들은 각자 모두 북한으로 부터 지령을 받아 행동하겠다는 서약까지 했다. 극한상황에서 죽기를 면하기 위해 그렇게 했다고하면 처벌할 수 없다는 법에 따라 그들은 처벌을 받지 않았다. 그렇게 북한에 맹세를 한 사람들 중에는 나중에 진짜로 간첩행위를 한 사람들도 극소수지만 있었다. 동포를 배신했던 김영택도 그렇게 풀려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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