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진일퇴의 격동하는 전선의 세월을 빨리 흘러갔다. 그간 이대용의 제1대대는 제7연대의 일부로 여주, 문막, 원주, 횡성, 홍천, 춘천, 가평을 지나 중공군을 몰면서 사창리로 들어갔다가 다시 밀려 가평, 청평을 거처 용문산으로 철수하여 방어진지를 구축했다.
1951년 5월 1일. 기울어가는 전세를 만회하기 위해 미 극동공군 전부가 출격중이란 소문이 전선에 퍼졌다. 제공군을 장악한 유엔군 공군의 폭격으로 중공군 병참선은 대타격을 받았고 보급품도 매우 부족했다. 이와 반대로 한국군은 남아돌아갈 만큼 풍부한 실탄 보급을 받았으며, 북한에서 후퇴할 때 보충된 신병들도 지난 6개월의 전투를 통해 싸움에 익숙해지고 있었다.
1951년 5월 11일 중공군의 제4야전군 정예부대의 선두가 북한강에 도달했다는 정보가 들려왔다. 제6사단장 장도영 준장은 상황이 불리하여 방어선이 무너질 경우 일선에서 칼빈소총을 들고 병사들과 같이 싸울 비장한 각오를 하고 해발 1200미터의 용문산 정상에 올라가 있었다.
드디어 1951년 5월 17일 용문산에서 제6사단 제2연대 전원은 ‘결사’라고 쓴 수건을 머리에 두르고 중공군 정예부대와 결전에 들어갔다. 36시간 동안 쉴세없이 전투가 벌어졌다. 숫적으로 월등하게 우세한 중공군운 제2연대를 완전하게 포위했다. 제2연대가 5월 21일을 넘기기 어려울 것이라는 관측이 지배적이었다. 그러나 제2연대는 중공군의 공격을 끝까지 막아내고 있었다.
5월 22일 제6사단은 반격에 들어갔다. 중공군의 지휘계통은 완전하게 마비되어 버렸고 전투력은 급속하게 떨어졌다. 밥을 짓던 인부들도 빈주먹으로 중공군을 수십명씩 붙잡아 오고, 핀셋과 약병을 들고 다니던 위생병들도 중공군 낙오병을 수십명씩 데리고 왔다. 춘천에서는 60이 넘은 노인들까지 몽둥이들 들고 중공군 패잔병과 낙오병들을 몇명씩 잡아왔다.
“할아버지, 참 용감시기군요”라고 하면 “지난 겨울이 이놈의 떼놈들이 우리 돼지를 잡아 먹었다오. 내 이놈들을 죽이려다 데리고 왔소”하고 하는 사람도 있었다.
용문산전투에서 결정적으로 패배하여 전선을 돌파당한 중공 제4야전군은 전선 정리를 위해 한국의 모든 전선에서 후퇴하기 시작했다.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주한 유엔군 및 한국군은 총공격을 가해 적을 격멸시키면서, 동해안 간성으로부터 양국 북방, 김화, 철원, 연천, 문산선으로 진격하였다.
이대용의 제1대대가 속해 있던 제7연대는 춘천, 화천, 구만리 발전소를 거쳐 풍산리 절골을 거쳐 백암산 밑에까지 진출했다.
국경선에 밤이 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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