헌트 형제의 시장 매점
1977년, 넬슨은 처음으로 시장 매점을 시도했다. 즉 어떤 한 상품 시장의 공급을 통제함으로써, 가격을 좌지우지하겠다는 뜻이었다. 그렇게 되면, 매도 포지션을 취하고 있던 사람들은 자기 포지션 청산을 위해 시장 매점 세력을 찾을 수밖에 없어지며, 부르는 게 곧 가격이 된다.
넬슨은 대두 가격이 상승할 것이라고 확신하고, 여기서 이익을 보기 위해 상당 규모의 대두 선물 계약을 매수했다. 1977년 대두 선물 계약의 법적 보유 한도는 시장의 약 5%에 상당하는 300만 부셸이었다. 그와 윌리엄 허버트는 각각 300만 부셸에 해당하는 선물 계약을 매수했다. 그런 다음 넬슨은 허버트 자녀 다섯의 명의로 가짜 계정을 만들었다.
상품 선물 거래위원회 (CFTC)는 이 계략을 쉽게 간파했다. 모든 계좌의 주소가 같다는 점을 발견하고, 누군가 대두 시장을 매점하려 하고 있음을 알아챈 것이다. 한 CFTC 회원이 언급했듯이, 넬슨 가문에서 대두 거래용 계정이 없었던 것은 가문의 개뿐이었다.
헌트 형제의 대두 선물 계약 보유량은 2,400만 부셸(시장의 약 40%)로 많아졌고, 법정 보유 한도의 8배나 되었다. 1977년 대두 선물 거래 중 절반 이상이 헌트 형제 손에서 이뤄졌고, 대두 가격은 5.15달러에서 10.30달러로 상승했다.
CFTC는 넬슨, 윌리엄 허버트 그리고 그의 자녀들이 대두의 가격을 조작하려 하고 있다고 주장했으나, 넬슨은 자기 가족들 각각이 서로 독립적으로 활동하고 있으며, 우연히 같은 정보를 입수할 수 있어서 대두 선물 계략을 비슷하게 거래하게 된 것이라고 항변했다.
시카고 상품 거래소(CBT)는 몇 년 전 토니 드 안젤리스(Tony de Angelis)가 대두 시장을 매점하려 했을 때에도 비슷한 상황에 맞닥뜨린 적이 있었다. 다만 드 안젤리스는 거래소 회원이었기 때문에 거래 한도에 제한이 없었다. 반면, 헌트 형제는 완전히 외부인이었고, 법정 보유 한도가 있었다.
CFTC는 1977년 4월 헌트 형제를 법정에 세워, 포지션 청산을 강제했다. 하지만 헌트 형제는 이미 매점 시도로 수천만 달러를 벌어들인 후였다. 위 차트에서 볼 수 있듯이, 대두 가격은 1976년 5달러 아래에서 1977년 10달러가 넘게 상승했지만, 헌트가 포지션을 청산하고 난 곧 다시 하락했다.
1981년 헌트 형제는 법정 보유 한도 초과에 대해 50만 달러의 벌금을 부과 받았고, 이는 수천만 달러의 이익을 본데 대한 과속 딱지나 다름없었다. 정부에 대한 넬슨 벙커 헌트의 불신은 더욱 커졌다.
은 시장 매점 시작
넬슨 벙커 헌트는 1973년 이미 수백만 온스의 은을 사두었지만, 이후 잊고 살았다. 1978년, 대두 시장에서의 성공에 힘입어 은 시장에서도 같은 시도를 벌이기로 마음먹었다.
넬슨의 아이디어는 선물 시장을 통해 수백만 온스의 은 계약을 “매수”한 다음, 시장에서 가능한 한 모든 현물 은을 매입하는 것이었다. 그 과정에서 은 가격을 부양을 통해 이익을 보려는 속셈이었다. 넬슨은 1970년대 유가가 3달러에서 30달러로 오르고, 전 세계적가 엄청난 인플레이션에 휩싸이는 모습을 보면서, 은 가격도 그렇게 상승하지 말라는 법은 없다고 생각했다.
은은 수천 년 동안 화폐로 사용되었다. 헌트는 종이돈은 정부의 잘못된 피조물이며, 결국 붕괴될 것이라고 믿었다. OPEC가 카르텔이 되어 유가상승을 이끌어내는 상황에서, 자기라고 카르텔을 만들어 은 가격을 주무르지 못할 이유가 없었다.
대두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넬슨은 이번에도 가족을 참여시켰고, 여기에 추가로 넬슨의 은 시장 평가에 동의하는 사우디 왕족 몇과 투기꾼 몇을 더 끌어들였다. 1979년 7월 1일, 헌트 형제는 사우디 중앙은행을 움직이던 파드 왕자와 함께 인터내셔널 메탈 인베스트먼트(International Metals Investment Co.; IMIC)를 설립해, 은을 매수하고 가격을 끌어올렸다. IMIC의 매수 규모는 4,300만 온스였고, 여기에 기존 보유 물량 5,500만 온스가 있었다. 은 시장 매점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시장 매점을 성공적으로 이뤄내는 데 있어 문제점은 엄청난 가격 앙등을 일으키기 위해 돈을 빌려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장부상의 이익을 실현하고, 시장에서 빠져나오기 위해서는 필연적으로 기초가 되는 주식이나 상품을 다른 사람에게 팔아야 한다. 그렇게 되면, 가격 붕괴가 일어나고, 과도한 레버리지를 사용한 투기꾼들은 파산에 빠지게 된다. 이것이 바로 시장 매점 후 기초가 되는 상품 매도하는 행위를 “시체 매장”이라고 부르는 이유다. 시장 매점에 당한 사람들이 시체처럼 매장 당한다는 말이다.
헌트 형제는 이 과정에서 은 시장 매점을 시도한 것이 아니라, 1970년대 전 세계적으로 불어닥친 엄청난 인플레이션에 대한 단순한 헤지 수단이었을 뿐이라고 주장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전 세계 민간 시장에서 유통되는 은을 4분의 3이나 소유할 필요는 없었을 것이다. 물론 투기와 조작 사이에 명확한 경계선은 없다. 미국에서 상품 가격 조작 시도는 불법이며, 만일 매점을 시도하는 세력에 의해 시장의 중심이 흔들린다면, 정부와 상품 거래소가 나설 차례다.
거래소의 규칙 개정
규칙은 만든 측에서 개정할 수 있다. 첫 번째 개정은 1980년 1월 7일 CBOT가 은 구매 한도를 3백만 온스로, COMEX가 1천만 온스로 제한한 조치였다. 이에 넬슨 벙커는 은 시장 투자 규모를 줄이겠다고 약속했지만, 비밀리에 추가로 3,200만 온스의 은을 더 사들였다.
여기서 존경할만한 점이라면, 일을 어정쩡하게 처리하는 법이 절대 없었다는 것이다. 1979년 헌트 형제의 은 시장 진입은 정말로 사정이 없었다. 1979년 1월 헌트 형제가 보유한 현물 은과 선물 계약은 7,500만 온스 상당이었다. 1980년 1월이 되자, 규모는 3억 7,500만 온스까지 증가했고, 양다리 전략(롱 포지션과 숏 포지션을 동시에 매수하는 전략)으로 추가로 은 1억 온스에 매도 포지션을 취했다.
이로써 헌트 형제의 세력은 거의 3억 온스의 롱 포지션으로 선물 거래소에 상장된 전체 은 선물 계약의 70% 이상을 통제하게 되었다. 은 가격이 1달러 상승할 때마다, 3억 달러의 이익을 안겨주었고, 은 가격이 최고치에 있었을 당시 헌트 형제의 은 자산 가치는 66억 달러로 치솟았다. 그들은 현물 은 보유량만큼이나 선물 계약도 보유하고 있었다.
은 가격이 상승하면서, 은 매도 포지션을 취하고 있던 은 생산자들은 추가로 증거금을 넣어야 했다. 이 돈은 다시 헌트 형제의 수중에 들어갔는데, 은 가격 상승으로 얻은 이익을 은 보유고를 더 끌어올리는데 사용했기 때문이다.
(3부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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