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스토퍼 콜럼버스 그리고 역사가 각색되는 이유



1937년 벌어진 “난징 대학살”은 일본군이 수십만에 달하는 중국 일반 주민들을 조직적으로 학살한 사건이다. 하지만 일본 학교에서는 이 사실을 자세히 가르치지 않는다. BBC에 출현한 일본 학생 오이 마리코는 이렇게 말한다.

1937년 중일 전쟁 관련 내용은 교과서에 한 페이지로 설명돼 있다. 그중 일본군이 난징에 침공해 벌였던 대학살은 단 한 줄 각주로만 나와 있다.

이런 역사 감추기는 일본 만의 일이 아니다. 언제 어디서든 일어났었고, 또 일어나고 있다. 예를 들어, 미국에서 누구나 알고 있는 크리스토퍼 콜럼버스 이야기는 역사라기보다 신화에 가깝게 교묘하게 편집되고, 각색된 이야기다.

인간은 이야기를 통해 믿음, 성격 그리고 삶을 형성한다. 두 편의 글에서 크리스토퍼 콜럼버스 이야기를 바탕으로, 우리 삶에서 이야기의 기능과 목적에 대해 살펴보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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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알고 있는 크리스토퍼 콜럼버스 이야기는 거의 대동소이하다. 영문학자 조너선 갓셜은 “스토리텔링 애니멀(The Storytelling Animal: How Stories Make Us Human)”에서 이렇게 말한다.

최근에 1학년짜리 딸 아비가일에게 학교에서 크리스토퍼 콜럼버스에 관해 뭘 배웠는지 물었다. 아비는 기억력이 좋았기 때문에 자세히 설명했다. 배 3척의 이름, 대서양을 건너 1492년 아메리카를 발견했고, 지구가 평평하지 않고 둥글다는 사실을 증명했다고 말했다. 30년 전 내가 초등학교 때 배운 것과 같았다. 또한 그전에 내 부모가 배운 것과도 같았다.



콜럼버스의 도착은 교과서에 실린 내용과는 실제 아주 달랐다. 산 살바도르 섬에 상륙한 콜럼버스는 일기에 이렇게 적고 있다.

그들 중 몇에게 빨간 모자와 유리구슬 몇 개를 건네자, 자기 목에 걸었다. 거의 쓸모없는 다른 물건을 주어도 아주 즐겁게 받았다. 신기하게도 그들은 우리를 친구로 대했고, 며칠 후 우리 배까지 헤엄쳐와 앵무새, 면실 타래, 창 및 가지고 있던 다른 많은 것들로 가져왔다. 모두 선의로 한 일이었다.

여기까지는 그런대로 순조로웠다. 콜럼버스는 이어 이렇게 썼다.

그들은 무기를 다루는데 아주 서툴렀다. 쉰 명으로도 쉽게 다스릴 수 있을 것 같았고, 원하는 일도 전부 시킬 수 있어 보였다.

60년 만에 콜럼버스는 아라와크족 주민을 노예로 팔거나, 전부 죽였다. 역사가 제임스 로웬은 “다른 누구보다 더 많이 노예를 실어 날랐다. 5천은 될 터였다. 다른 나라들도 서둘러 콜럼버스의 뒤를 이었다.”라고 말한다.

미국에서는 ‘교과서를 고쳐 콜럼버스가 미국의 영웅이 아니라고 해야 하는 것 아니냐’를 두고 뜨거운 논쟁이 진행되고 있다.

그렇다면 왜 이야기가 그렇게 각색되었을까? 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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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가 감춰지거나, 가짜로 각색된 데는 많은 이유가 있을 것이며, 그 모두를 이해하기는 힘들다.

하지만 갓셜은 이야기가 각색된 이유는 문화적으로 하나로 통일된 이야기가 필요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하워드 진과 제임스 로웬 같은 수정주의 역사가들은 미국 역사 교과서가 더 이상 역사라고 할 수 없을 만큼 철저하게 각색되었다고 주장한다. 역사를 잊기로 한 것이다. 국가의 기억에서 부끄러운 내용을 지움으로써, 역사를 하나로 통일된 애국적 신화로 만들고 싶은 것이다.

콜럼버스, 스콴토, 첫 번째 추수 감사절, 조지 워싱턴의 거짓말 등에 대한 이야기가 국가가 만들어낸 신화 역할을 하고 있다. 이런 이야기의 주인공은 결함 있는 나약한 인간으로서가 아니라, 영웅 이야기에 걸맞게 각색된 선구자로 그려지고 있다. 이런 신화 창조의 목적은 역사에 대한 대한 객관적 설명을 위해서가 아니라, 공동체를 하나로 결속시키기 위한 것이다.

그러면 왜 하나로 통일된 이야기가 필요한 걸까? 갓셜은 기본적으로 아주 도덕적인 이야기가 필요했기 때문이라고 지적한다. 이야기를 통해 선과 악을 가르치고, 이를 통해 공동체 또는 문화 속 모든 사람들을 하나로 모으고, 공통된 정체성을 갖게 만들기 위한 것이다. 갓셜은 이렇게 말한다.

이야기는… 예로부터 일련의 공통된 가치를 강화하고, 공통된 문화 속 관계를 강력하게 함으로써, 사회를 결속하는 기능을 해왔다. 이야기는 젊은이들을 소속 사회 문화에 적응시키고, 사회를 정의한다.

이야기로 칭찬받을 만한 일과 비난받을 만한 일을 알려준다. 불손함보다는 예의를 갖도록 거듭 권장한다. 이야기는 사회의 윤활유이자, 접착제로서, 이를 통해 훌륭한 행동을 고취하게 하고, 사람들을 공통된 가치를 중심으로 통합하고, 사회적 마찰을 줄인다. 신성한 이야기든 세속적인 이야기든 인간의 삶을 일관되게 해주는 힘이다.

한 사회는 성격, 목표 및 의도가 저마다 다른 사람들로 구성된다. 혈연관계를 넘어 인간을 하나로 묶어주는 것은 무엇일까? 바로 이야기다. 존 가드너가 말했듯이, 이야기는 ‘본질적으로 심각하고 유익하며, 혼돈과 죽음에 맞서고, 엔트로피에 맞서는 게임이다.’ 이야기는 사회적 혼란, 즉 서로 떨어져 나가려는 데 맞서는 힘이다. 이야기는 구성원들이 한데 모으는 구심점이다.

종교 원리주의는 상대적으로 새로운 현상이다. 신화와 종교 이야기는 결코 글자 그대로의 의미가 아니다. 오히려 은유적 지혜의 원천이며,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중요한 진리를 내포하고 있다.

요정과 정령, 그리고 구름이 말하던 시절에는 믿음직한 근원에서 비롯된 신화가 필요했다. 아마 역사도 그런 근원 중 하나였을 것이다.

이렇게 크리스토퍼 콜럼버스의 이야기를 도덕적 지침으로 쓰고자 했다면, 이야기 속 추악한 부분을 숨기고 각색한 것도 놀라운 일이 아니다. 이야기 속에 “누군가 친절하게 대해주는 이들이 있다면, 그들을 노예로 만들고, 그들에게 전염병을 퍼뜨리고, 서서히 그들 모두를 학살해도 된다.”라는 구절이 있으면 좋아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어린 조지 워싱턴과 벚꽃 나무 이야기 같은 완전히 지어진 이야기가 첨가된 것도 놀라운 일이 아니다. 어쩌면 인간은 실제 삶에서 얻을 수 있는 것보다 더 나은 가장 그럴싸한 신화를 만들기 위해 매진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물론, 신화와 현실을 혼동하고, 콜럼버스가 멋진 인물이었다고 글자 그대로 생각하면 문제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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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이야기(사실인 이야기와 신화인 이야기 모두)는 인간의 성장 모델이 되기도 한다.

어린이와 청소년들은 어떤 한 무리 또는 그룹에 동질감을 갖고, 거기에 속한 이들과 비슷해 지려고 한다. 그렇게 한 사람으로 성장해 나가는 것이다. 이것은 한 종족의 구성원이 되려고 했던 인간의 근본적 욕망에서 비롯된 것이다.

동시에 인간은 종족 내에서 우두머리가 되고 싶어 해 왔다. 스케이트보드 클럽에 가입하는 것만으로 만족하지 못하고, 클럽에서 최고가 되고 싶어 한 것이다.

작가 윌 스토르는 인간은 문화 속에서 이 두 가지 요구를 충족시킬 방법을 찾는다고 말한다.

… 모든 인간 본질적으로 바라는 것은 함께 어울리는 것이고, 또 앞서가는 것이다. 누구나 이런 바람을 공통으로 갖고 있다. 인간의 머리는 태어날 때부터, 이런 원시적 바람을 가장 잘 이루기 위해서는 어떤 사람이 되어야 하는지 갈망한다. 인간이 찾는 것은 문화적 환경 속에 존재하는 자신의 이상적 모델이다.

이런 이상적 모델은 어디 있을까? 아마도 이야기 속에 살고 있을지도 모른다.

자기 롤모델로 신화 속의 영웅을 생각할 수 있다. 절대 그리스도, 잔다르크 또는 슈퍼맨처럼 될 수 없지만, 그 속에서 어떤 지향점을 찾을 수는 있다.

그런 면에서 콜럼버스 이야기가 부지불식간에 우리가 원하는 영웅상으로 편집/각색되어 왔는지도 모른다.

콜럼버스가 용기 있고, 담대하며, 새로운 지역을 탐험했던 좋은 사람이었길 바라지, 금에 대한 욕망으로 원주민을 대량으로 학살하고, 노예로 판 사람이었길 바라지 않은 것이었는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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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까지 포스트모더니즘과 전통, 신화 및 가치의 체계적 해체를 우려하는 대중 지식인들이 있다.

그들이 그렇게 우려하는 이유는 (1) 삶이 중요하다는 느끼는데, (2) 지역 사회와 조화를 이루는데, 그리고 (3) 사람들을 도덕적으로 만드는데 문화적인 이야기와 신화가 중요한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문화적인 이야기를 없애서 얻을 게 있을까? 허무주의? 행복? 우울? 그리고 이야기가 필요할 때 새로운 이야기는 어디서 얻을 수 있을까? 뱀파이어 소설? 만화책? 유튜브?

솔직히, 모르겠다.

다음 글에서는 콜럼버스 신화 중 또 하나의 흥미로운 이야기, 어떻게 지구가 평평하다고 생각하게 되었는지를 살펴볼 예정이다.

자료 출처: Charles Chu, “ Christopher Columbus and the Manufacture of Identit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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