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드스톤의 횡설수설) 한국전쟁과 문학에 대한 토론에 참가했다. 그런데...

20171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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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과는 오랫동안 담을 쌓고 살았다. 어릴때 소설가를 지망하기는 했지만 내 삶이 거기로부터 멀어지면서 문학은 남의 일이 되고 말았다. 오히려 보통사람들 보다 문학을 더 멀리하고 지냈다. 가지 못한 길에 대한 동경이 일반적인데 난 반대였던 것이다. 우연히 어떤 대학에서 주관하는 연구에 토론자로 참가해달라는 이야기가 있었다. 주제가 전쟁과 문학에 관한 것이다.

원래의 주제는 태평양전쟁과 한국전쟁의 경험이 동시에 하나의 문학작품에 투영된 경우가 별로 없다는 것을 지목하면서 그런 작품을 분석하는 것이었다. 작가로는 백철과 선우휘, 하근찬이 다루어졌다.

세상 모든 일은 관계로 이루어진다. 거부할 수 없는 관계가 많은 법이다. 내 전공이 아닌 분야에 토론으로 나서야 했다. 문학작품에 대한 분석으로 토론을 할 수는 없는 법이라 고민의 출발점이 된 전쟁문제에 대한 필자의 소견을 제시하는 것으로 대신했다. 아래는 필자가 토론문으로 제시한 내용의 일부분이다. 여기에라도 올리지 않으면 늘 그렇듯이 또 사라질 것 같다.

하루만에 수십페이지에 달하는 논문을 읽고 토론문을 작성해달라고 해서 급하게 썼다. 그래서 제대로 정리되지 못한 내용도 있다.

토론은 어제밤에 끝났다. 읽어보시고 의견이 있으시면 댓글을 달아 주셔도 감사하겠다.
토론문 내용중 일부를 올린다.


한국문학에서 전쟁을 제대로 다루지 않는다는 것은 매우 특수한 현상이다. 전쟁을 치루었던 거의 모든 국가에서 전쟁문학이 발전했다. 패전을 한 국가나 승전을 한 사회 모두 전쟁과 인간의 관계에 대한 문학적 접근은 당연하다 하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에서 전쟁문학이 제대로 나타나지 못한 이유는 무엇일까? 토론자는 한국인들이 겪은 전쟁이 자신이 주인공이 아닌 타자로서 강요된 전쟁이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한국사회가 겪은 전쟁은 자기가 주인이 되는 전쟁이 아니었다. 한국인들은 식민지 시대의 태평양 전쟁에서나 해방이후의 한국전쟁에서나 주인으로 전쟁을 치르지 못했다.

전투현장에 참여했지만 그들에게 전쟁은 강요된 고통이었으며 한국민은 전쟁의 주역이 아닌 길가다 건물위에서 떨어진 벽돌에 맞은 행인에 불과했다.

전쟁은 개인적 삶의 방식과 태도 뿐만 아니라 집단적 삶의 방식에 결정적으로 영향을 미친다. 그런 점에서 한국인이 격은 태평양 전쟁의 경험은 개인적 삶의 영역에 머무르고 말았다. 적극적으로 참여한 사람들은 이미 한국민으로서가 아니라 일본인의 정체성을 가질 것이므로 그들의 경험이 한국문학에 들어올 여지는 없었을 것이다. 또한 전쟁 참여를 거부하고 회피한 사람들의 경험도 개인적 차원에서 머무르고 말았다.

전쟁은 집단적 기억이다. 집단적 기억이 파편화되었을 때 과연 문학이 어떤 역할을 할 수 있을지 알 수 없는 일이다. 아무리 문학이 삶의 개별적인 영역을 다룬다고 하더라도 집단화될 수 없는 기억앞에서는 그 역할이 제한될 수 밖에 없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

세계전쟁사 통 털어 가장 밀도높은 인명피해가 발생했던 한국전쟁조차 한국의 국민은 주인이 아니었다. 전쟁의 결정과정에 참여하지 못했다. 한국민에게 전쟁이란 전쟁이 아닌 난리에 불과했다. 어느날 갑자기 다가온 난리였다.

한국전쟁 자체는 복잡한 성격을 지니고 있다. 통상 내전이자 국제전이라는 성격을 지니고 있다는 평가를 한다. 내전이라고 규정할 경우는 당연히 내부자가 주인공이어야 한다. 그러나 한국전쟁은 내전의 성격을 지니고 있었에도 불구하고 내부자가 주인공이 아니었다. 내전자체도 외부에 의해 강요되었던 것이다. 내전의 형식을 빈 국제적인 대리전쟁이 한국전쟁이었다.

한국민들에게는 태평양 전쟁이나 한국전쟁이나 크게 다를 바가 없었던 것이다. 전쟁이 우리의 삶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가를 회고하고 돌이켜 반성할 수 있는 기회는 아예 없었다. 한국전쟁을 국제전의 성격을 가지고 있다는 설명은 소련과 미국의 대리전이라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서로가 서로를 괴뢰라고 부르는 것은 일면의 진실을 담고 있는 것이다.

남과 북 모두 자신의 정당성을 주장했다. 북한과 남한 모두 소련과 미국의 입장을 대리했다는 점에서 서로 윤리적 도덕적 우위를 주장할 수 있는 입장이 아니었다. 전후의 한반도는 남한이나 북한이나 할 것없이 전쟁의 정당성을 확보하는 것이 가장 중요했다. 남북한 모두 전쟁 정당성의 근거를 남침이냐 북침이냐를 따지는 것에서 찾을 수 밖에 없었다.

남과 북 모두 전쟁전보다 전쟁이후 더 강력한 동원체제를 갖추었다. 이데올로기는 가장 중요한 동원의 대상이었다. 전쟁을 문학적으로 해석할 수 있는 여지는 아예 주어지지 않았다. 문학에서의 한국전쟁은 허용된 이데올로기의 틀 내에서 다루어질 수 밖에 없었다. 한국에서의 전쟁은 국가이데올로기의 해석 대상이었지 문학의 대상이 되기 어려웠다.

동원 체제하에서 남한 문학은 북한의 전체주의를 비틀거나 남한 내에서 허용된 내부비판과 해석의 여지에 적응하는 수 밖에 없었다. 아직 끝나지 않은 전쟁 그리고 휴전이후의 국가 동원 이데올로기체제는 한국전쟁을 문학의 품으로 돌려보내지 않았다. 한국전쟁을 넘어 중일전쟁과 태평양전쟁을 관하는 문학의 부재는 다름아닌 전쟁이 경험이 타자화되어 집단화되지 못했기 때문이 아닌가 한다.


발표와 토론이후 여러가지 이야기가 오갔다. 끝나면 항상 뒤풀이를 한다. 고기에 술을 먹고 집에 들어왔다. 내일 모레 군대갈 아들은 집떠날 시간이 48시간도 남지 않았다고 한다. 내가 뭘하고 하루를 보냈는지 모르겠다. 아들놈 군대가는데 난 고담준론하고 있었다. 젠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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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드스톤의 스팀잇 이야기) 스팀잇에서의 익명 : 또 하나의 인격 ?

20171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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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팀잇과 같은 SNS시도는 처음이다. 그러다보니 여러가지 재미있는 현상이 나타난다. 중앙집권화된 통제의 부재로 인해 스팀잇은 매우 혼란스럽다. 무엇이 가능한지 가능하지 않은지도 명확하지 않다. 가능한 것과 가능하지 않는 것도 다수의 합의에 의해서 이루어진다. 혹자는 스팀파워의 다소에 따라서 방향이 정해지는 것이라고 할 수도 있겠으나 kr코뮤니티의 진행과정을 보면 그렇지 않은 것을 잘 알 수있다.

대부분 문제의 제기는 스팀파워의 보유여부와 상관이 없었다. 오히려 스팀파워가 별로 없는 동지들이 문제를 제기하는 경우가 많았다. 머릿수가 결정했다. 스팀파워를 많이 가진 사람들은 오히려 유보적인 태도를 취하는 경우가 많았다. 필자의 경우도 누가 깃발을 들고 나서서 대충 방향이 정해지면 거기에다 의견을 하나 보태는 소극적인 태도를 취했다. 내가 처음부터 문제를 적극적으로 제기하면 스팀파워 많다고 유세하는 것이냐하는 비판을 받을 수 있어서 행동에 조심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필자만 그런 것이 아니고 대부분 많은 사람들이 그런 것 같다.

스팀잇의 방향성은 그렇게 동지들의 머릿수에 의해서 결정되는 경향이 많다는 것은 현재 우리가 살고있는 민주주의 체제와 매우 비슷하다. 인간들의 속성에 가장 부합하는 정치제도가 민주주의인가보다라고 생각하게 된 것은 스팀잇에서의 경험 때문이다.

지금까지 스팀잇 kr 코뮤니티가 지향해온 방향성 살펴보면서 다음과 같이 정리해보았다.

첫째, 고래들이 보상에는 힘을 발휘하지만 중요사안에 대해서는 결정적인 역할을 하지 못한다.

둘째, 중요한 사안의 결정에 스팀파워보다 머릿수가 중요했다.

정말 중요한 것은 스팀잇 kr 코뮤니티가 익명의 자유로움을 제한하는 방향으로 움직이고 있는 것 같다는 것이다. 익명은 우리에게 많은 자유를 보장해준다. 말과 행동에 대한 책임을 지지 않아도 되기 때문이다. 아마 페이스북이나 다른 SNS가 익명으로 운영된다면 심각한 일이 벌어질 것이다. 신문기사의 댓글이 익명으로 운영되면서 어떤 일이 벌어졌는가를 기억하신다면 짐작하실수 있을 것이다.

완전한 익명은 자유를 넘어 사람들에게 방종을 가능하게 했다. 온갖 욕설과 말도 안되는 이야기들이 난무했다. 인간은 복잡다단한 존재다. 내 내면의 깊은 저쪽에 자리잡고 있는 악마는 기회와 여건만 되면 수면위로 튀어 나오려한다. 익명은 그런 악마의 봉인을 해제하는 열쇠인 것이다.

초기 스팀잇에서도 그런 측면이 없지 않았다. 익명이기 때문에 자기 마음대로 행동하려고 했다. 일부사람들은 자신의 이익을 극대화시키기 위해 시스템을 이용했다. 시스템이 문제가 되자 다수의 스팀잇 동지들이 문제를 제기했다. 문제해결 방식은 혁명적이었다. 역사수업에서 보는 바와 같이 스팀잇의 문제는 누적된 모순과 같은 양상을 보였으며 그 해결방식은 혁명적인 방식을 보였던 것이다.

그리 크지 않은 문제는 토론을 통해서 교정되었다. 재미있는 것은 이익을 추구하기 위해 모인 스팀잇 kr 코뮤니티가 묘한 균형을 이루어 가고 있다는 것이다. 전체적인 이익과 개인적 이익의 균형을 모색하는 방향으로 움직이고 있는 것 같다는 것이다. 일정수량 이상의 스팀파워를 보유한 고래는 일정이상의 자본소득을 올리기 쉽지않다. 많으면 많을수록 자본소득을 올리기 어렵다는 것이다.

스팀파워가 적더라도 재미있는 이야기를 쓰거나 활발한 네트워크 활동을 하는 동지들의 경우 자본이익을 상회하는 소득을 올릴 수가 있었다.

필자가 관심을 가지고 있는 것은 그 과정에서 익명으로 문제될 수 있는 많은 부분들이 규제되고 정리되어 간다는 것이다. 익명으로 SNS를 함에도 불구하고 개인의 심연에 자리잡고 있는 악마의 봉인이 해제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오히려 더 강력하게 봉인되는 경향을 보이고 있는 것도 같다.

포스팅을 보면서 내 자신을 비롯하여 많은 사람들이 익명의 세계에서 새로운 인격을 만들어 가는 과정을 볼 수 있다. 현실세계에서는 힘들었던 자신을 스팀잇을 통해 만들어 가는 것이다.
익명을 통해 악마가 투영되는 것이 아니라 천사가 강림하는 것을 보게 된다. 익명을 통해 현실세계에서는 어려웠던 이상적인 세상을 만들어 내고자 하는 스팀잇 동지들의 생각들이 집단이성으로 작용하고 있는 것이다. 그 과정에서 각자 조금씩 새로운 자아가 만들어지는 것 같다. 어떻게 보면 다중인격적인 현상이 발현되고 있는 것 같다.

필자만해도 스팀잇을 통해 그동안 살아오면서 느꼈던 억압과 왜곡, 절망을 극복하는데 많은 도움을 받고 있다. 그과정에서 내가 바람직하다고 원칙을 타협하지 않고 주장했다. 현실세계에서는 불가능한 일이다. 아마 그랬다면 난 그 자리에서 추방되고 말았을 것이다.

스팀잇에서는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한다고 해서 추방당하거나 피해를 당하지는 않는다. 물론 그 이야기가 전체의 이익과 개인의 이익간 일정한 균형을 지키는 선에 있어야 한다.

어쨓든 스팀잇에서 나는 새로운 익명의 인격을 만들고 있다. 현실의 세계에서 굴곡된 나보다 가상현실의 내가 더 나 다운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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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rst Snow near My Office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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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rst Snow near My Offi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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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t The End of Autumn : Lonelines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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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드스톤의 코인이야기) 실체와 환상의 세계, 그 가치의 불일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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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즈음 코인시장을 바라보면서 우리가 무엇을 쫓고 있나를 생각해본다. 주변사람들이 암호화폐가 실재로 존재하는가하는 질문을 많이 받는다. 간단하게 대답한다. 당신의 돈도 실체가 없는 전자화된 기호에 불과하다고. 은행이 해킹당하면 당신 재산도 끝이 난다. 그런데 블록체인은 오히려 은행보다 안전하다. 당신이 실체라고 하는 것이 무엇인지 잘 모르겠다. 만일 전자화된 기록을 화폐라고 생각한다면 암호화화폐는 실체가 있다고 말이다.

그런데 난 암호화화폐의 실체를 조금 다르게 생각한다. 통화를 지향하는 화폐를 제외한 대부분의 암호화화폐는 화폐라기 보다는 주식에 가깝다. 어떤 프로젝트를 하겠다고 해놓고 발행한 것이다. 따라서 암호화화폐에서의 실체는 화폐가 존재하느냐 아니냐가 아니라 지향하는 프로젝트가 구현이 되느냐 아니냐의 문제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프로젝트의 실체여부를 기준으로 보면 전체 블록체인 중에서 실재로 가동되고 있는 프로젝트는 스팀잇 밖에 없는 것 같다. 대부분의 나머지 프로젝트는 거의 가동되지 못하고 있다. 문제는 실재 가동되고 있는 스팀잇의 가격은 바닥을 기고 있고 앞으로 될지 안될지도 모르는 프로젝트들은 고공행진을 하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왜 그런 현상이 생길까? 아들놈에게 물어보니 스팀은 실체가 있어서 그렇다는 답을 한다. 환상의 세계에서는 환상이 실체인데 실체가 있으니 소외를 받을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가만 생각해보니 그럴 듯하다. 우리는 환상을 실체처럼 인식하도록 각인된 것이다. 환상의 세계는 환상이 가치이다. 어떤 꿈이냐에 따라 가격이 매겨진다. 훌륭한 꿈일수록 높은 가격이 매겨진다. 그 꿈이 실제로 이루어질 수 있느냐는 별로 중요하지 않다. 꿈 그자체가 문제인 것이다.

꿈의 세계에서 실체란 가치를 부여하기 어렵다. 전혀 동떨어진 가치를 매기기 어려운 존재가 되어버리는 것이다. 우리는 그런 경우를 수없이 많이 볼 수 있다. 투자의 세계에서 많이들 인용하는 튜울립 버블이 대표적일 것이다. 환상에 길들여지면 실체는 하찮게 보이기 때문이다. 인간은 언제나 꿈을 쫓게 되어 있다.

그렇게 프로그래밍 되어 있는 것이다. 아마도 인간의 진화매커니즘에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도 꿈을 쫓는 경향성 때문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

꿈속에서 무엇인가가 이루어지는 법이다. 꿈을 꾸지 않으면 새로운 것이 나오기 어렵다. 그러나 투자자로서의 우리는 환상과 실체의 미묘한 경계를 잘 구분하지 않으면 안된다. 꿈과 실체는 다르다. 꿈은 꿈일 뿐이고 실체는 실체이다. 결국 귀결되는 것은 실체라는 존재이다.

대부분의 경우 투자는 꿈에서 실재로 내려와서 정착하는 곳에서 결실을 거둘 수 있다. 끊임없이 꿈만 쫓다가는 쪽박을 차기가 쉽다.

시간이 지나면 실체는 인정을 받을 수밖에 없다. 비트코인이 지금 가치가 높아지는 것도 꿈에서 현실의 세계로 내려오는 과정에 있기 때문이다. 암호화화폐중에서 화폐를 지향하는 대부분은 아직 꿈과 환상의 세계에 머물러 있다. 현명한 투자자는 그런 곳에 많이 투자를 하지 않는 법이다.

지금 스팀의 문제는 환상의 세계에서 환상에 머물지 않고 너무 빨리 현실에 내려와 버렸다는 것이다. 환상의 세계에서 머물러 있어야 할 때 홀로 현실의 세계로 떨어져 나온 선녀와 같은 신세라고나 할까? 그러나 명심할 것은 항상 결실은 현실의 세계에서 맺는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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