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드스톤의 느끼는 산사 여행이야기) 내소사 강당아래, 어머니의 위로를 찾을 수 있는 곳

내소사는 부드러운 절이다. 내소사는 주변의 산 때문에 더 부드럽게 느껴진다. 내소사는 절이 멋있어서가 아니라 주변의 산들과 절집이 만들어내는 조화를 즐기러 가는 곳이다. 일주문을 지나 절집에 이르는 길을 아름답게 느끼는 것도 산과 절 그리고 거기로 들어가는 길이 적당하게 조화롭기 때문이다.

정작 내소사의 절 건물은 그리 대단하게 웅장하거나 위용을 자랑할 만한 곳이 별로 없다. 내소사의 대웅전은 이미 소개한바 있는 논산 쌍계사에 비하면 그리 대단하지 않다. 대웅전에 모신 부처님이 보물이네 뭡네 하면서 사진도 못찍게 해놓았지만 어느절에 가나 그부처님이 그부처님이다. 절 집에서 모신 금박한 부처님중에서 예술적으로 압도하는 것을 본적이 없는 것도 이상한 일이다. 나만 그런지 모르겠다.

사람들은 의례 그렇듯이 대웅전 앞에 모여서 이러니 저러니 이야기를 한다. 그러나 내소사의 숨은 곳은 따로 있다. 그것은 나만 아는 곳이다. 아니 나만 안다고 하기 보다는 이리저리 다니다가 피곤한 다리를 쉬고 싶은 사람이면 다 알 수 있는 자리인지도 모른다.

대웅전 앞에 강당이 있다. 많은 사람들에게 법문을 하는 곳이다. 잘 알지는 못하지만 내소사 대웅전 보다 강당에 눈이 많아 갔다. 내소사 강당은 나무 기둥위에다 건물을 만들어 놓았다. 밑에서 보면 건물 다리만 보이고 대웅전에서는 바로 강당으로 들어갈 수 있는 구조다. 비틀진 지형에다 건물을 만들때 쓰는 방법이다.

난 그 강당의 다리와 주춧돌에 관심이 많았다. 강당의 다리는 민흘림으로 깨끗하게 손질을 했다. 내소사가 여성적이라서 그런지 강당을 떠 받치고 있는 기둥도 부드러운 느낌이 들었다. 그리 두껍지 않는 나무를 잘 손질해서 기둥을 세웠다. 기둥의 나무들이 오래되어서 인지 여기저기 보수한 흔적이 보인다. 난 그 보수한 흔적을 사진에 담았다. 그리고 기둥을 떠 받치고 있는 초석 사진을 찍었다.

내소사 강당의 초석들은 그 높낮이가 다 다르다. 그리고 그 높낮이의 차이가 많이 난다. 이렇게 많은 차이가 나는 초석들의 높이를 고려해서 기둥의 높이를 다 달리했다. 목수의 눈대중과 솜씨가 대단하다는 생각을 하면서 그 높낮이를 사진에 담기 위해서 이리저리 살펴보았다. 그러는 와중에 어떤 젊은 새댁이 내가 찍으려는 초석에 “아이구, 힘들다” 그러면서 털썩 주저 앉는 것이 아닌가. 잠시 나는 사진기를 들고 서 있었다. 그러다가 나도 같이 “아이구, 다리야” 하면서 초석에 걸터 앉았다.

순간 난 바로 이곳이 진정 가장 내소사 다운 곳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마치 어릴때 어머니 치마 속으로 들어간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랬다. 난 어릴때 괜시리 어색하면 어머니 치마를 붙잡고 그 안으로 들어갔었다. 내소사 강당의 아래 초석에 앉아 있으면 한여름이라도 시원한 바람이 느껴진다. 위에 강당 건물이 있어서 인지 나도 모르게 안도감을 느끼게 된다.

내소사 강당 아래는 가장 여성스런 곳인 듯하다. 나같은 나이든 사람들은 거기에 앉아 어머니 치마폭에서 놀던 어릴쩍을 생각하기 딱이다. 그냥 그렇게 마음의 위로를 느낄 수 있는 곳이다.

세상살이에 지치고 위안을 얻고 싶으면 찾아와서 내소사 강당 아래 조금 높은 초석에 앉아 절집 마당을 바라보면서 바람을 맞아보라. 말없이 어머니의 위로를 받을 수 있는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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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드스톤의 느끼는 여행이야기) 변산 내소사 엿보기, 그 나무와 산들 그속에서 여인의 모습을 보다.

변산 내소사를 찾았다. 내소사를 찾아 다닌 것은 여러번이었다. 여러번 갔었지만 갈 때마다 뭔가 아쉬운 느낌을 남기고 돌아왔다. 그런 아쉬움이 다시 찾게 했는지 모른다. 유난히 더운 이번 여름 내소사를 찾아가면서 그동안 날 아쉽고 미진한 것이 무엇인가를 분명하게 하고 싶었다.

내소사는 전나무 숲이 유명하다. 그래서 일주문부터 전나무 숲길에 신경이 쓰였다. 이번에는 너무 더워서 초입에서 좀 쉬었다. 일주문 앞에 600년은 된 느티나무가 서 있었다. 그동안 왜 그 느티나무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는지 모르겠다. 일주문 앞의 느티나무는 수백년동안 내소사를 드나드는 사람을 보아 왔을 것이다.

오랜 느티나무앞에는 제사를 지내기 위해 돌로 만들어 높은 탁자가 있었고 반짝반짝하는 동전들이 여기저기 놓여져 있었다. 그동안 나는 전나무 숲만 바라 보았었는데 어떤 이들은 느티나무에게 먼저 인사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렇다. 몇번을 오가면서 그동안 내소사의 터주대감에게 인사도 하지 않고 일주문에 들어가기 바빴으니 어찌 미진하지 않을 수 있었을까 ?

일주문을 지나 예의 그 전나무 숲길을 지나면서 내소사 경내로 들어갔다. 순간 내가 그동안 내소사의 주변을 제대로 살피지 못했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 내소사를 제대로 느끼려면 내소사가 앉아 있는 자리를 잘 살펴야 한다. 내소사 주변의 산들은 악산들이다. 산 중턱 여기저기에는 바위들이 박혀 있었다. 절앞의 공터에서 자리를 잡고 앉아 내소사와 주변의 산들을 바라 보았다. 내소사를 둘러싸고 있는 산들은 변산이다. 변산은 매우 남성적인 모습을 지니고 있었다.

그래서 왜 내소사가 나에게 강한 느낌을 주지 않았는가를 알 듯 했다. 내소사는 주변의 강한 남성적인 힘을 다스리려는 듯 여성적인 자태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그런지 대웅전이나 다른 건물들이 그리 크지 않다. 대웅전을 받치고 있는 기둥들도 다른 절의 기둥처럼 그리 크지 않다. 마치 여인의 팔뚝과 같은 느낌이다. 대웅전 앞의 강당의 기둥들도 그렇다. 내소사의 모든 건물들이 그리 강한 느낌이 아니었다. 그냥 우연은 아닌 듯 하다. 내소사를 둘러싸고 있는 산들의 강한 기운을 부드럽게 보듬기 위해서 여성적인 모습을 하고 있었던 것 같았다. 내소사 절 바로 앞의 넓은 공터도 의미가 있는 것 같았다. 절집 뒤의 산들이 내뿜고 있는 강한 기운을 중화시키는 곳 인 것 같았다.

그러고 보니 내소사를 찾으면서 뭔가 인상적인 느낌을 가지지못한 것도 바로 그런 연유인 듯 하다. 내소사는 주변의 거친 사내들 사이에 다소곳이 앉아 있는 여인의 모습을 지니고 있었다. 다소곳하게 앉아 있는 가녀린 여인에게서 근육이 불뚝한 장정의 모습을 찾으려 했으니 어찌 제대로된 모습을 찾을 수 있었겠는가.

전나무 숲길을 가면서 여인을 찾아가는 마음을 가져야 할 것이다. 절앞의 넓은 공터에서는 한번 크게 숨을 크게 쉬고 아름다운 여인의 품속에 들어갈 준비를 해야 한다. 내소사에 들어가면 조용하게 천천히 다녀야 한다. 큰소리도 삼가야 한다. 잘못하면 변산자락의 험상궂은 사내들이 달려들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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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드스톤의 느끼는 여행이야기) 자연미와 인공미의 조화가 빚어낸 웅장함, 쌍계사 대웅전

논산 쌍계사 대웅전은 무척 크게 보인다. 주변에 건물들이 없어서 더 크게 보이는지도 모르겠다. 대웅전은 계곡 사이에 서 있었다. 들어오는 문에 왜 산이름이 없었나 했는데 이해가 가는 듯 싶었다.

통상 대웅전 뒤에는 산이 있는 경우가 많다. 일주문에도 절이름앞에 산이름을 붙인다. 그런데 일주문 역할을 하는 2층 누각 현판에는 산이름없디 쌍계사라고만 씌여져 있다. 처음에는 그냥 수준이 낮구만 하고 생각을 했다. 그런데 절에 들어와 보니 대웅전 뒤에 산이 없었다.

쌍계사 대웅전은 산의 위용을 빌리지 않고도 충분히 웅장했고 거대했다. 그래서 자신있게 일주문에다 절이름만 썼는지 모르겠다. 산의 위용을 빌리지 않으려니 대웅전은 그 자체만으로 웅장해야 했다. 무엇이 대웅전을 그렇게 보이게 하는지 궁금했다.

그 큰 대웅전에 주눅이 들었다. 넓기도 넓었고 높기도 높았다. 기초부분을 쌓아 놓은 단이 그리 높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내눈 앞의 대웅전은 아주 거대한 산과 같이 보였다. 마치 거인을 앞에 두고 있는 것 같았다. 천천히 걸어서 다가갔다.

대웅전을 한바퀴 돌아 보았다. 그러다가 언뜻 무엇이 대웅전을 이렇게 웅장하게 보이게 했는지를 느낄 수 있었다. 그것은 자연미와 인공미의 조화였다. 건축은 인공의 예술이다. 인간의 손과 노력이 많이 개입하면 할수록 건축학적으로는 의미가 있는 법이다. 그냥 자연그대로 놓아두는 것은 건축이라고도 할 수 없는 법이다.

대웅전은 기둥과 초석이 자연미를 담고 있었다. 그리고 기둥위 처마부터 지붕까지는 인공미를 담고 있었다. 우선 기둥은 손보지 않은 나무인 듯 했다. 그리고 다른 대웅전의 기둥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두꺼웠다. 이렇게 두툼한 기둥을 만든 이유는 지붕이 무겁다는 이야기일 것이다. 대웅전 건물이 크다보니 그 무게를 지탱하기 위한 기둥도 두꺼워야 한다.

대웅전을 떠 받치고 있는 기둥들은 나무가 살아 있을때와 같이 자연 그대로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신라시대나 고려시대의 기둥들은 민흘림이나 배흘림 모양이었다. 그런데 임진왜란때 불타고 나서 다시 지은 절들은 대부분 자연 그대로의 모습을 하고 있다. 배흘림이나 민흘림 기둥을 만들기 위한 나무들이 그리 마땅치 않아서 인지도 모르겠다. 고려시대에 궁궐의 기둥이 되었던 아름드리 느티나무들을 너무 많이 베어서 모두 멸종을 했다고 한다. 임진왜란이후 새로 전각을 지으려 했는데 그만한 나무를 구하기 어려워 아마도 자연 상태의 나무를 그냥 사용한 것 같다.

시간이 지나면서 다듬지 않은 나무기둥들이 훨씬 멋있어 졌다. 아무리 인공적으로 다듬는다 하더라도 자연그대로의 모습보다는 못한 법인 듯 했다. 나무기둥들을 받치고 있는 초석들도 자연미를 한껏 내뿜고 있었다. 우리 전통건축에 댕그리 기법이라는 것이 있다. 자연 상태의 초석에 나무기둥의 밑을 칼로 다음어서 세우는 것이다. 울퉁불퉁한 초석의 모습을 기둥밑바닥을 파서 맞추는 것이다. 그렇게 댕그리 기법으로 초석위에 기둥을 세우면 웬만해서는 건물이 무너지지 않는다고 한다.

신라시대의 궁궐터나 고려시대의 건물들을 보면 대부분 초석의 윗면을 평평하게 잘 다듬어 놓은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조선시대 중후반으로 넘어오면서 건물 기둥들은 울퉁불퉁한 초석위에 그대로 세워 놓았다. 지진이 와도 무너지지 않는다고 한다. 순전히 감과 눈대중으로 기둥의 밑을 잘 파서 초석위에 올려야 한다. 쌍계사 대웅전의 기둥들은 댕그리 기법의 진수를 보여주고 있었다.

그렇게 무거운 무게를 감당할 수 있었기에 다포식으로 공포를 쌓아 올릴 수 있었을 것이다. 그 다포의 화려함은 인공미이다. 그 인공미는 다듬지 않은 자연스런 나무 기둥위에서 비로소 그 아름다움을 발하고 있었던 것이다. 연꽃과 용 등 각양각색의 모습들이 조각되어 있었다. 공포를 구경하느라고 하늘을 보면서 다시 한바퀴 돌았다. 구석 구석 마다 용의 모습들이 보인다. 물을 관장한다는 용을 많이 만든 것은 절이 불에 타지 말라는 염원을 담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대웅전 안을 들여다 보았다. 조금은 어두운 분위기였다. 세분의 부처님이 계시고 그 위에 닫집이 있었다. 부처님 상 위에는 지붕모양의 장식이 있다. 그것을 닫집이라고 한다. 그 닫집안에 자세히 보면 용들이 있고 주변에 새가 있다. 제일 처음에는 기러기인줄 알았다. 새발이 크게 만들어져 있어서 물칼퀴인줄 알았다. 기러기가 아니라 학이라고 한다. 천상과 지상을 오가며 소식을 전해주는 전령과 같은 역할을 한다고 한다.

대웅전 전면의 창문의 창살을 살펴보았다. 이제까지 보았던 창살무늬 중 최고의 수준이었다. 연꽃을 비롯한 다양한 문양들이 창살을 꾸미고 있었다. 특히 정면에 열린 창살의 무늬를 대웅전 옆문에서 바라보았을 때의 모습은 환상적이었다. 대웅전 내부의 어두움을 넘어서 보이는 정면의 창살을 입체감까지 느껴졌다.

창살무늬의 은은한 색감에 취해 대웅전에 들어가 않았다. 그리고 조용히 눈을 감았다. 열린 문사이로 들어오는 미풍이 나를 휘돌아 감싸고 지나갔다.

조선후기 대웅전 중에서 최고의 걸작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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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드스톤의 느끼는 여행이야기) 논산 쌍계사, 괜히 쓸쓸해지고 싶을 때 가는 절

전편에 쌍계사라고 했더니 하동의 쌍계사와 혼동하시는 분들이 있는 듯 하다. 필자가 여기서 포스팅하는 쌍계사는 논산에 있는 절이다. 논산지역에 가볼만한 절이 많다. 왜 그런지는 잘모르겠다. 그러나 한군데에 많은 절들이 서로 모여 있으니 구경하기는 편하다. 나같은 경우는 시간이 많은 편이라 이런 곳에가면 며칠을 머문다. 그래도 아직 가보지 못한 곳이 많다. 조그만 나라지만 이곳에서 2000년이 넘는 역사가 지났으니 얼마나 많은 사연들이 숨어 있겠는가 ?

쌍계사이야기를 계속하자. 쌍계사의 호젓하고 헛헛한 길을 따라 가면 이층으로 된 누각이 보인다. 이층의 누각에는 쌍계사라는 현판이 달려있다. 쌍계사라는 절 이름을 쓴 것을 보면 이 누각이 일주문과 같은 의미를 지니는 것 같다. 그런데 사실 일주문을 부도탑 보다 미리 나와야 하는 것이 통상적이고 보면 이 이층 누각은 불일문이나 마찬가지의 의미를 지니는 것 같다. 일주문에 절이름이 씌여 있는데 그 경우에는 그 산의 이름을 먼저 붙이고 다음에 절이름을 쓰는 것이 통상적이다. 그런데 쌍계사 앞에는 산이름이 없다. 쌍계사라고 하는 것이 두개의 계곡에 있는 절이라는 뜻인 듯 한데 주변의 산세가 그리 크지 않은 듯 하다.

통상 절마다 있는 사천왕문 같은 것도 없다. 그냥 이 이층 누각이 일주문, 불일문 그리고 사천왕문까지 모두 겸하는 것 같다. 이층 누각 앞에는 사람들이 앉을 수 있는 돌이 여기저기 놓여져 있었다.

절에 들어갔다. 매우 넓은 터였다. 휑한 기분이 들었다. 그 넓은 공터에 있어야 할 무엇들이 없는 듯 했다. 절의 정문에서 대웅전까지는 꽤 넓은 공터가 있었다. 공터의 끝에는 상당한 규모의 대웅전이 있었다. 이 정도의 대웅전이 서 있다면 아마 한때 이 지역 최대의 사찰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대웅전의 왼쪽에는 명부전이 있었다. 이층누각의 왼편에 자그마한 요사채가 하나 있었고 나머지는 아무것도 없었다.

처음에 쌍계사의 길에 들어갔을때 그렇게 넓은 절터가 있으리라고는 별로 생각하지 못했다. 그래서 그렇게 넓은 절터가 있는 것을 보고 놀랐다. 그 절터의 끝에 화려한 대웅전은 나를 더욱 놀라게 만들었다. 이 대웅전의 모습에 대해서는 다음에 자세히 언급을 하겠지만 내가 이제까지 다녀본 충청남도 지역의 대웅전중 최고의 수준이었다. 어떻게 이런 절이 이렇게 잘 알려지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대웅전을 한바퀴돌고 명부전으로 갔다. 명부전은 그리 크지 않았으나 역사는 대웅전과 비슷한 것 같았다. 자장보살을 가운데 두고 사후세계를 관장하는 10명의 왕들이 서 있었다. 10명의 왕들이라고 해서 시왕이라고 한다. 그런데 그 시왕들이 모두 웃고 있었다. 요즘 한참 유행하는 영화 “신들과 함께”에 등장하는 대왕들이 모두 명부전에 있는 왕들이다. 나를 보고 웃고 있는 시왕들을 보고 내가 죽어서 사후세계가면 잘 좀 봐 주실라는가? 하는 생각을 했다.

대웅전과 조그만 명부전까지 다 보았으니 어디 갈데도 없다. 명부전 옆에 있는 나무 주변에 바위가 있었다. 거기에 않자 주변을 둘러 보았다. 상당히 넓은 절터에 덩그라니 서 있는 대웅전이 괜스리 쓸쓸해 보였다. 거기에 명부전이 있었지만 그 쓸쓸해보이는 느낌을 덜어 주지는 못했다. 2층 누각에서 대웅전까지의 텅빈 공터가 마치 공허한 내 마음과 같았다. 너무 외져서 그런지 찾아 오는 사람도 많지 않았다.

너무 넓은 공터와 너무 큰 대웅전이 나를 외롭게 만들어 버렸다. 작은 것들이 옹기종기 있을때는 외롭지 않았다. 그러네 그냥 넓고 큰 것은 나를 외롭게 만들어 버렸다.

조용히 한쪽 구석에 앉아 그 큰 외로움이 주는 울림을 느끼고 있었다. 쓸쓸한 생각이 밀려온다. 그렇게 많던 사람들은 다 어디로 갔는지 이렇게 시간이 지나면 사라져야 하는 것이 우리의 인생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쓸쓸함과 외로움이 참 좋았다. 텅빈 공터에 나 혼자만 있는 것 같았다.

갑자기 외로움을 즐기고 싶거나 쓸쓸함 속에서 시간을 보내고 싶다면 논산의 쌍계사를 찾아보시길. 그리고 명부전 아래쪽의 나무 옆에서 나도 앉아서 외로움을 즐겼다는 것을 기억해주시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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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드스톤의 느끼는 여행이야기) 쌍계사 가는 길

은진미륵으로 유명한 관촉사 앞에 쌍계사가는 푯말이 있었다. 이 지역에 워낙 많은 절이 있어서 인지 가볼 생각을 하지 못하고 있었다. 관촉사에서 문화해설하는 중년의 여성분과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은진미륵상에 대한 생각을 나누었는데 상당한 지식과 식견을 가지고 있는 분이었다. 젊을 때는 내가 세상에서 최고인줄 알았다. 그런데 나이가 들어보니 세상에 고수들은 무지하게 많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나이가 들면서 이야기하는 것이 두려워 진다.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다가 대웅전의 창살 문양에 대한 이야기를 하게 되었다. 그 분 말씀이 이지역 전체를 통털어서 쌍계사 대웅전의 창살문양 만한 것이 없다는 것이다. 궁금증이 발동하여 그 다음날 바로 쌍계사로 다시 찾아갔다.

쌍계사 찾아가는 길은 쉽지 않았다. 아직도 충청도 골짜기는 깊었다. 길어서 벗어나 시골길을 한참 갔다. 어느 이름 모들 마을을 지나서 쌍계사 입구 앞의 주차장에 차를 세웠다. 바로 앞에 저수지가 있었다. 저수지는 꽤 오래된 것 같았다. 양쪽 야산 사이에 저수지의 수변에 서 있는 나무나 풀들이 오랜 역사를 보여주는 것 같았다.

저수지를 돌아가는 길을 따라 쌍계사 가는 길이 있었다. 별로 멀지 않았다. 그러나 그 멀지 않은 길이 너무나 은은한 느낌을 주어서 좋았다. 때는 초여름이었다. 풋풋했던 나무의 향기로움을 머금은 저수지를 돌아가는 길 위에 나무들이 무성하게 서 있었고 별로 넓지 않는 길위에는 나무 그림자가 드리워저 있었다.

사람들을 감동하게 하는 것은 어마어마하게 크고 대단한 것들이 아니다. 있어야 할 자리에 있고 없어야 할 자리에는 없는 것처럼 지극히 당연한 것이 우리들에게 감동을 주는 것 같다. 쌍계사 가는 길이 바로 그랬다. 별로 긴 길은 아니지만 그 길은 그저 절에 가는 길이라는 느낌을 주었다. 그 느낌을 즐기기 위해서 천천히 걸었다. 천천히 가더라도 누가 채근할 사람도 없는 헛헛한 나들이길이니 여유는 내 마음대로 느끼면 될일이다.

조금 걸어가니 왼쪽으로 부도탑들이 자리하고 있었다. 얼핏 보기에도 오래된 부도탑들이었다. 부도탑들이 조금은 아무렇게나 놓여진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앞뒤로 자로 잰듯이 줄을 서 있는 것 같지 않았다. 조금은 삐뚤삐뚤하고 부도탑들간의 거리도 각각 조금씩 달랐다. 분망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절에 들어가는 여행객의 마음을 조금은 누그러 뜨려 주는 것 같았다. 부도탑 앞에 이 부도탑들이 얼마나 대단한가를 보여주는 해설판이 서 있었다.

평소 절에 갈때면 난 먼저 부도탑을 찾아 본다. 그냥 보아서는 누구의 것인지 알길은 없다. 그러나 그 속에 숨겨져 있는 삶의 흔적을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삶이 무엇인가를 생각하는 계기가 되곤했다. 부도탑앞에서서 한참을 구경했다. 쌍계사에 들어가는 길의 헛헛함과 뭔가 어딘지 모르게 허술한 듯한 부도탑은 다른 절의 계산된 듯한 그리고 한참은 손이 많이간듯한 모습과 차이가 있다.

워낙 외진 곳이라 많은 사람들이 찾아오지 않는 절이라서 그런지 한가로이 길을 걸을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쌍계사는 나를 행복하게 만들었다.

팍팍해진 삶에서 잠시 여유를 찾으려면 쌍계사 초입을 걸어보기 바란다. 10분도 채 걸리지 않지만 그 한가로움은 어디서 쉽게 구하기 어렵다. 그리고 마치 아무렇게나 서 있는 듯한 부도탑을 한번 보기 바란다. 그럼 삶에 지친 팍팍한 마음들이 조금은 가라 앉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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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드스톤의 느끼는 여행이야기) 임진왜란 때 불에 탄 절들 이야기(충청도와 전라도 지역을 중심으로)

직장 일로 충청도에 3년정도 있었다. 덕분에 이곳 저곳 다닐 기회가 있었다. 충청도와 전라북도 지역의 절 집을 찾아 다녔다. 혹시 백제의 흔적이라도 느껴 볼 수 있을까하는 기대를 가지고 말이다. 이곳 저곳을 다니면서 하나같이 정유재란때 이쪽 지역 절들이 모두 불에 탔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백제시대에 만들어젔던 유서깊은 절들이 이때 모두 불에 타고 없어졌던 것이다.

충청도나 전라도 지역이외에도 삼남지방의 절집 거의가 모두 소실되었다. 불국사도 그때 불에 타고 말았다. 충청도와 전라도 지역의 절 집들이 임진왜란 때 모두 불에 타버렸다는 사실이 특히 안타까웠던 이유는 그때 남아 있던 백제의 흔적이 모두 사라졌기 때문이다.

임진왜란 당시 불에 타지 않고 남아 있는 절이라고 한다면 예산의 수덕사 대웅전, 안동의 봉정사 극락전, 영주의 부석사 무량수전 등에 불과하다. 그나마 모두 고려시대에 지은 절집이다. 신라시대와 백제시대의 절모습은 영영 알 수가 없는 것이다. 그저 불타고 남은 흔적을 보고 상상만 할 뿐이다.

당시 왜군들은 왜 절을 모두 불태웠을까 궁금했다. 왜군들의 상당수가 불교를 믿었다고 하는데 절을 불태운 이유를 알 수가 없었다. 임진왜란 당시 왜장으로 가톨릭 신자였던 고시니 유키나가가 고의적으로 절을 불태웠나 하는 생각도 해보았다. 그런데 그것도 아닌 듯 하다. 만일 고시니 유키나가가 가톨릭 신앙때문에 절을 불태웠다면 당시 삼남의 대부분 지역에서 사찰 방화가 일어난 사실을 설명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고시니 유키나가 혼자 삼남지방의 모든 절에 불을 지를 수는 없는 노릇이니 말이다.

왜군들이 절에 불을 지른 이유는 아마도 승병때문이 아닌가 한다. 임진왜란 당시 승병들은 관군과 함께 많은 전투에 참가했다. 승병들은 거의 정규군과 같은 위상을 지녔던 것 같기도 하다. 충무공 이순신도 작전을 구상할때 승병장들을 불렀다고 임진왜란에 기록하고 있다.

왜군들은 저항의 근원을 제거하기 위해 절에 불을 질렀을 것이다. 왜 우리나라 불교는 임진왜란 때 전쟁에 참가했을까 ?하는 의문이 떠올랐다. 우리 역사에서 승려 출신으로 국가를 세운 인물이 있다. 잘 아시는 바와 같이 궁예다. 어떻게 일개 승려에 불과한 궁예가 국가를 세울 수 있었을까? 혹시 당시의 불교는 우리가 생각하는 지금의 불교와 다르지 않았을까 ? 하는 생각이 떠 올랐다.

여행을 하다가 우연히 논산에서 대전가는 길에 있는 개태사라는 곳에 들렀다. 논산에서 일을 보고 다시 대전에 가는 길이었다. 우연히 개태사라고 하는 절이 있는 것을 보았다. 오래된 듯 얼마 되지 않은 듯 묘한 분위기의 절집이어서 차를 세우고 들어가 보았다. 원래는 고려 태조 왕건이 건립했다고 하는데 이후에 퇴락했다. 최근에 들어 어떤 스님이 개태사를 다시 세우겠다는 발원을 하고 불사를 일으켰다고 한다. 그 와중에 어머어마하게 큰 철확을 발견해서 개태사에 옮겨 놓았다. 절 한쪽 구석에 철확이 있었다. 아주 큰 가마솥이라고 보면 된다. 너무 크기 때문에 그것으로 밥을 했을 것 같지는 않고 된장국 같은 것을 끓였을 것이라는 설명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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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도 큰 철확으로 된장국을 끓였다면 아마도 5백명 이상 분은 되었을 것이다. 아무리 절이 커도 그렇지 500명 이상되는 밥과 밥찬을 해댈 정도로 절에 승려들이 많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마침 절에 있는 스님에게 왜 이렇게 큰 철확이 절에 필요했을까요 ? 하고 물어 보았다. 스님 답변이 고려시대에는 절에 있는 승려들이 수양도 하면서 군사훈련도 했다고 한다. 당시의 절은 마치 군대와 같은 역할도 했다고 하는 것이었다.

그말이 맞는 말인지 아닌지는 모르겠으나 그러고 나니 그 때까지 지니고 있던 의문들이 풀려가는 것 같았다. 불교계에서 왜 호국불교라고 하는 지 말이다. 그냥 나라 잘되라고 기도만 하는 정도라면 호국불교라고 유난을 떨 이유는 없다. 정말로 변란이 발생하거나 외침이 발생하면 승병들이 나서서 무기를 잡고 싸웠다는 것이다. 고려시대에도 승병들이 몽골에 대항해서 싸웠다는 기록이 있다. 고려사 열전에 승려 김윤후에 관한 기록이 남아 있다. 김윤후는 1232년 몽골의 제2차 침입당시 처인성에서 활을 쏘아 몽골군 총사령관 살리타를 죽였다. 살리타가 죽자 몽골군은 철수 하고 만다. 이후 1253년 몽골의 제5차 침략 당시에는 충주성에서 몽골의 공격을 격퇴하기도 했다. 이렇게 고려의 호국불교는 팔만대장경을 만들고 기도를 하는 수준을 넘어 전투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조선시대에 들어서면서 숭유억불의 상황속에서도 불교는 호국의 전통을 그대로 지니고 있었다. 임진왜란이 발생하자 적극적으로 전쟁에 참가한 것이다. 불교계에서는 임진왜란 당시 승병 중 약 3만명이 전사했다고 전해진다. 관군들이 거의 모두 붕괴된 상황에서 조직체계를 지녔던 승병은 관군을 대신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당연히 왜군들은 승병의 근거지가 되는 불교사찰을 모두 불살랐던 것이다.

임진왜란때 소중한 사찰들이 모두 불에 타버렸지만 그 이후에 중창불사 사업이 지속적으로 이루어졌다. 조정에서도 임진왜란때 불살생계를 파계하고 생명을 버리면서 싸워준 승려들의 공덕을 무시할 수 없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게 생각을 하면서 절을 보니 그 이전에 보던 것과 다른 느낌이 들었다. 내가 보는 절 하나하나가 모두 역시의 아픈 흔적을 지니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더 각별한 마음으로 절을 돌아다녔다. 쌍계사, 내소사, 금산사, 법주사, 개암사 등등이었다.

앞으로 몇번에 걸쳐 임진왜란때 불탄 사찰중 충청도와 전라북도 지역의 사찰을 다니면서 생각하고 느꼈던 점들을 써보려고 한다.


This page is synchronized from the post: ‘(올드스톤의 느끼는 여행이야기) 임진왜란 때 불에 탄 절들 이야기(충청도와 전라도 지역을 중심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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