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

몇년전에 보았던 미국 영화다. 영화를 보면서 제목과 내용사이에 어떤 관계가 있을까를 생각했던 기억이 난다. 그냥 무지하게 죽이는 영화였다. 미국에서는 매우 좋은 평가를 받았으나 우리나라에 수입되었는지는 잘 모르겠다. 그때 그 영화의 제목이 뜬금없이 생각이 난다.

최근들어 노인들이 길가에 많이 보이는 것 같다. 전철에서나 길가에서나 노인들이 점차 많이 보인다. 오래전에 독일같은 선진국에는 낮에 노인들만 돌아다니고 젊은이들을 잘 보이지 않는다는 이야기를 들은 듯하다. 그러나 정작 독일에 갔을때는 젊은이들도 많이 돌아다니는 것 같았다.

길가에서 노인들을 많이 보게 된 것은 태극기 집회때문인 것 같다. 태극기 집회가 열리면 노인들이 여지없이 많이 모인다. 처음에는 주책없고 할일없는 노인들만 모이는 줄 알았다. 그런데 내 주변의 노인들도 많이 참석하는 것을 보았다. 그런데 그 노인들의 면면이 만만하지 않았다. 상당한 학식의 소유자들은 물론이고 사회에서 중요한 직책을 역임했던 분들은 물론이며 유명한 기업의 전문경영인들도 상당수 있었다.

처음에는 한심하게 생각했었는데 내 주변의 그런분들이 그런 집회에 참가하는 것을 보고 매우 의아스러운 생각이 들었다. 왜 그럴까 ? 무엇이 그들을 길가에 나가도록 만들었을까 ? 정말 우리나라에는 세대간 갈등이 심각한 것일까? 이런 저런 생각을 해보았다. 그래서 제가 얻은 결론은 생각보다 간단했다.

노인들이 무시당하고 있다고 느끼고 있었다.

그들은 자신들이 무시당하고 있다고 느끼는 것 같았다. 그들은 젊을때 한국전쟁을 경험했고 산업화시대에 몸을 바쳐 지금의 대한민국을 건설했다고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지금은 그런 자부심은 온데간데 없이 버림받은 신세가 되었다는 것이다. 뼈가 부서지게 일해서 형제자매 공부시키고 시집장가 보냈다. 그리고 자식들에게 모든 것을 다 쏟아 부었다. 그런데 정작 자신은 아무것도 가진 것 없는 비루먹은 늙은 말 같은 신세가 되어버린 것이다.

과거에 노인들은 존경과 존중을 받았다. 농업사회에서는 아무리 책을 읽어도 경험만한 것이 없었다. 일전에 귀농한 사람에게서 들었던 이야기가 있다. 책에서 보고 배운데로 파종을 해도 싹이 잘 트지 않았다고 한다. 그래서 하다하다 동네 노인에게 물었단다. 그랬더니 “아 그거, 그거는 종다리 우지질때 씨 뿌리면 돼” 그러더란다. 그래서 다음해는 그렇게 했더니 정말 신기하게 싹이 잘 나더란다. 그게 바로 경험이다.

과거의 노인들은 나이가 들어서 존경과 존중을 받았던 것만은 아니었다. 그들의 경험은 삶의 전반을 지배하고 있었다. 살아가기 위해서는 노인들의 경험이 중요했다. 그런데 이제 시대가 바뀌었다. 노인들의 경험이라는 것이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잔소리가 되어 버린 것이다.

산업화시대를 지나 정보화 시대에 접어들면서 노인들이 설곳을 잃어 버린 것이다. 요즘 블록체인판에는 40이상 만 되어도 노인 취급을 받는 것 같다. 백서 읽는 모임에 35세 이상은 참여할 수 없다는 공지 사항이 있는 것도 보았다. 정보화시대가 되면서 노인들이 삶에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는 시대가 되어 버린 것이다.

그런 무력감이 그들 노인들을 길가로 내몰지 않았나 모르겠다. 과거에 노인들은 안방에 앉아서 천리를 내다 보았다. 그시대에는 가능했던 이야기다. 그러나 지금은 그럴 수 없다. 노인들이 아무리 설치고 돌아다녀도 지금 돌아가는 상황을 파악하고 이해하기 어려운 세상이 되어 버렸다. 과거에 삶의 지혜라고 했던 것조차도 지금은 어리석은 잔소리로 변하고 말았다.

그러니 노인들은 젊은이들이 당면하고 있는 경제적인 생활이나 삶의 지혜에서나 아무런 짝에도 쓸모 없는 존재가 되고 말았다. 국내 유수의 대학에서 실시한 설문조사에는 자신들의 부모가 돈많이 모아놓고 한 63세 정도에 죽어주었으면 좋겠다고 하는 결과까지 있었다.

여러분들은 돈 많이 모아 놓고 63세 정도에 세상을 버리면 자식들이 가장 좋아 하는 부모가 되는 것이다. 지금의 대학생들이 그러나 앞으로 그 나이가 점점 줄어들어들지도 모르겠다.

자신들이 무용지물이라는 자괴감 그런 것들이 노인들을 길가로 몰아 내는 것 같다. 정말 그들이 박근혜를 지지해서 그럴까? 박근혜는 하나의 상징일 뿐이다. 박근혜는 그들이 젊어서 가장 역동적으로 살았던 시기안 박정희 시대에 대한 향수의 상징일 뿐이다.

세상의 흐름이라는 것은 묘해서 한번 지나간 것들은 다시 돌아오지 않는 경우가 많다. 지금의 노인들은 살아가는 동안 내내 서글픔과 상실감에 벗어나지 못할 가능성이 높다. 갑자기 시대가 바뀌어서 노인의 경험을 높이사고 삶의 지혜를 존경하는 상황은 오지 않을 것이라는 것이다.

길가에 태극기를 들고 지나가는 노인들의 쭈글쭈글한 얼굴에서 서글픔을 느낀다. 오랫 만의 가족 점심 식사를 마치고 멋있는 차림의 아저씨 아주머니가 선글라스를 끼고 태극기 집회로 가는 모습을 보면서 아무말하지 못했다. 그래 그렇게 해서라도 살아 있다는 환희와 뜨거운 가슴을 느낄 수 있다면 그것도 나쁘지 않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무래도 바뀌지 않을 시대의 조류에 저항함으로써 얻는 희열을 구태여 나무랄 필요도 없다. 그냥 잘하고 오세요라고 했다.

얼마 있지 않으면 나도 노인의 초입에 들어간다.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 그래서 지금도 컴퓨터 자판을 두들기면서 블록체인을 공부한다. 젊은 놈들에게 아는 척하기 위해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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