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드스톤의 느끼는 산사 이야기) 경주 분황사 모전석탑의 수호상 앞에서

분황사 모전석탑은 신라시대 선덕여왕때 만들어졌다는 이야기기 있다. 모전석탑은 기구한 운명을 겪었다. 임진왜란때 무너졌다. 그리고 1915년엔가 일제시대에 일제총독부에 의해 다시 지금과 같은 3층의 모습을 갖게 되었다고 한다. 그러니 지금 우리는 분황사 모전석탑의 진정한 모습을 잘 모르는 것이다. 일제시대에 모전석탑을 정비하면서 많은 유물들이 나왔다고 한다. 기록에 의하면 고려시대 유물도 나왔다고 한다. 그러고 보면 고려시대에도 정비를 했었는지 모를 일이다.

임진왜란때 무너진 것을 다시 일제시대에 정비했다고 하니 모전석탑도 기구한 운명이다. 모전석탑보기가 부끄럽다. 그리고 모전석탑을 만들었던 신라시대의 선조들에게도 면목이 없다. 결국 민족의 문화와 역사를 제대로 보존해 가려면 힘이 있어야 한다. 그 힘의 근본은 정신력이다. 아무리 돈이 많고 경제력이 강하며 군사력이 대단하다하더라도 자기의 문화 그리고 자신의 근본을 소중하게 여기는 생각이 없으면 모든 것이 사상누각이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폐쇄적이어야 한다는 것은 아니다.

일제시대에 모전 석탑을 3층으로 정비했다고 하는데 원래는 어떠했는지 전혀 알 수가 없는 것 같다. 아마 그 이전의 기록이 있었다면 원 모습을 추정하는데 도움이 될것이나 그런 기록은 존재하지 않는 것 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전석탑은 참 아름답다.

지금의 분황사는 그터가 그리 크지 않다. 그 옆의 황룡사는 그터가 어마어마하게 크다. 난 그것을 볼때마다 의문스러운 것이 있다. 그리고는 나는 나대로 추리를 하곤한다. 황룡사의 구층목탑이 불탄 것은 고려시대 몽고군들이 침입해서라고 한다. 그때 몽고군들이 황룡사를 모두 불태웠다. 그이후 황룡사는 영영 폐허가 되고 말았다. 다만 모전석탑은 화마를 면할 수 있었다. 몽골의 영향력이 워낙 강했던 고려시대에는 황룡사를 복원하는 것을 포기했고 다만 남아 있는 모전석탑을 중심으로 불타버린 분황사만 다시 지은 것으로 말이다.

분황사와 황룡사는 담하나를 사이게 두고 있었다. 그런데 절을 두개나 바로 옆에 붙여서 세웠을 이유가 어디에 있었을까 ? 그것은 매우 비경제적인 일이다. 아마도 분황사는 나름대로 특별한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

조금 떨어져서 모전석탑을 찍어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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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층을 제외하고 2,3층은 제모습이 아닌 듯 하다. 아마 모전석탑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높았는지도 모른다.

지금의 분황사는 아마도 원래의 분황사보다 그 터가 줄어들었을 것이다. 분황사 출입구를 지나서 바로 모전석탑이 서 있는데 그 터가 협소하다. 출입구와 모전석탑이 너무 가깝다는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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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전석탑에 가까이가면 가장 인상적인 것은 탑의 네모서리에 서 있는 동물상이다. 정확하게 뭔지 모르겠다. 사자같기도 하고 해태같기도 하다. 불교건물에 사자상이 많을 것을 보면 사자일 수도 있다. 모전석탑 주변에 나쁜 기운에 접근하지 못하도록 하는 수문장 같은 역할을 하는 것이리라. 마치 천왕문에서 볼 수 있는 사천왕상 처럼 말이다. 그런데 그 네 동물상의 모습이 다 조금씩 다르다. 똑바로 서 있는 것이 있는가 하면 조금 자세를 숙이고 있는 것도 있다. 아마도 각자 그 이유가 있을 것이다. 그런 조금의 차이가 훨씬더 자연스럽고 부드럽게 여겨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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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는 추운 날씨였지만 이리저리 방향을 바꾸어가면서 사진을 찍었다.


점심 회식으로 스시히또는 탁월한 선택이었다

주방은 열일하고, 손님은 열먹하며, 조명은 열밝하는 스시히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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