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드스톤의 횡설수설) 3.1절을 맞이하여

우리가 어릴때는 3.1절 같은 기념일에는 아침에 학교에 등교를 했다. 그리고 기념식을 했다. 3.1절 노래를 부르고 교장 선생님 훈시를 들었다. 물론 그 이전에는 3.1 절 기념 웅변대회도 했다.

아침에 일어나서 신문을 보니 모두 3.1절에 관한 기사들로 가득하다. 우리에게 과연 일본은 어떤 존재일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일본은 우리보다 아주 먼저 서양학문을 받아 들였다. 네덜란드가 세계를 재패할 즈음 동아시아 끝에 찾아온 곳이 일본이다. 일본은 일찍부터 서양학문을 받아 들였다. 전국시대에 오다 노부나가가 서양학문을 가장 적극적으로 받아들인 인물이다. 그런 바탕아래 토요토미 히데요시가 전국을 통일할 수 있었다. 임진왜란은 그런 일본의 힘이 한반도로 터져 나온 것이다. 도쿠가와 이예야스의 막부도 쇄국을 하면서도 서양학문을 계속 받아 들였다.

이렇게 보면 우리는 이미 1500년 경부터 일본에 뒤져 있었던 것이다. 일본에 여행을 가서 전국시대의 문화재를 살펴본 적이 있다. 그때 일본의 문화재를 보면서 이미 그당시부터 일본이 우리보다 한참을 앞서 갔구나 하는 생각을 할 수 밖에 없었다. 가옥과 각종 유물들의 수준이 우리와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였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한일합방도 그런 힘의 차이가 빛어낸 민족사의 비극이 아닌가 한다. 우리가 스스로 힘이 없음을 한탄하지 않고 남이 나를 해한 것만 비난하는 것은 한심한 일이다. 애시당초 내가 힘이 있었으면 그렇게 당할 일이 없었을 것 아닌가 ? 우리는 조선의 국력이 떨어진 것을 사색당파 싸움으로 이야기 한다. 서로 당파싸움하면서 자기 당파 이익 챙기느라고 국가의 이익을 희생했다고 하는 이야기를 한다. 그런데 당시 어떤 자료에서 당시 한말에 국력이 쇠퇴하게 된 것은 왕실 때문이라고 하는 이야기를 읽은 적이 있다. 국왕이라고 하는 고종이 매관매직을 하였고 부패하기가 이를 데 없었다는 것이다. 군왕이 그럴진데 왕비라고 달랐을까 ? 민씨 일가가 나라를 홀라당 해 먹었던 것이다.

그래서 이래서 안되겠다고 했던 김옥균이 그런 척족들을 몰아내려고 갑오경장을 했다. 물론 그가 일본이라는 외세를 등에 업으려고 했던 것이 잘못이지만 적어도 김옥균은 그럴 수 밖에 없는 상황에 처해 있었다. 이미 당시는 왕정이라는 정치체제가 쇄신의 방해물이었던 것이다. 김옥균이 차라리 왕정을 무너뜨리려고 했으면 개혁이 성공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당시 성리학으로 뭉쳐진 조선의 지식인 사회는 절대로 그런 것을 용납할 수 없었을 것이다.

어떻게 평가할지 모르나 일본이 한국을 식민지화하면서 한국을 2천년 넘은 중국의 속국지위에서 벗어났다. 아마 일본이 한국을 식민지로 삼지 않았으면 중국이 한국을 식민지로 삼거나 아예 티베트화 했을 것이다. 당시 청나라의 원세개는 조선을 식민지로 삼을 계획을 지니고 있었던 것이다. 결국 36년의 쓰라린 일제 식민지 생활을 통해 한국은 중국의 지배에서 벗어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지 않았으면 지금 우리는 어떻게 되었을까 ?

을사오적의 괴두인 이완용을 비롯한 친일파들이 중국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얼마나 몸부림을 쳤는지 생각해 보아야 한다. 그당시 좀 깨인 지식인들은 중국의 지배와 영향력에서 벗어나는 것을 오늘날 친일에서 벗어나는 것 이상으로 중요한 가치로 생각했다는 것을 생각해 보아야 한다. 서대문의 독립문이 청나라에서 독립을 의미한다는 것은 생각할 바 많다.

그래서 일본의 수구지식인들이 한국에게 식민지 근대화론을 이야기하면서 조선을 병탄한 것을 시혜라고 주장하는 것보다 오히려 일본의 지배덕분에 한국이 티베트화나 신강처럼 되지 않고 그나마 민족문화를 유지할 수 있게 된 것이라고 이야기하는 것이 더 설득력 있는 주장이 아닌가 모르겠다.

오늘 우리나라 젊은이들이 중국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 모르겠다. 누구도 중국을 우리의 정신적 조국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백년 전만해도 우리는 중국을 우리의 정신적 배꼽으로 생각했다는 점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지금 중국에는 자신들이 한국의 주인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다는 것이 새삼스런 비밀이 아니다. 김일성의 최대 공적이 있다면 한국전쟁이후에 중공군을 모두 집으로 돌려 보낸 것이라고 한다면 지나친 평가일까 ?

지금 우리는 일본과 싸움을 하고 있다. 일본은 과거 식민지의 향수를 지니고 있는 것 같다. 그리고 우리는 그런 일본의 과거 향수와 싸우고 있다. 재미있는 것은 한반도를 식민지화하는데 앞장선 사람들이 백제유민들이 대거 흘러간 지역이라는 점이다. 샤스마와 조슈지역은 신라가 백제를 무너 뜨렸을때 백제 유민들이 대거 몰려든 지역이다. 지금의 일본 정계를 주름잡는 지역도 샤스마와 조슈지역이다. 역사는 돌고 도는 것 같다. 백제가 망했을때 분루를 흘린 유민들의 영혼들이 우리에게 복수를 한 것인지도 모를 일이다.

아직 우리는 제대로 일제 식민지시대와 결별하지 못했다. 아마도 진정한 결별은 남북이 화해하고 통일을 하는 그 때가 될지도 모르겠다. 정말 그렇게 되어야 우리는 2000 년 역사의 중국의 지배에서 벗어나고 일본의 지배에서 벗어나게 되는 것이다. 우리는 일본에 적개심을 가져야 한다고 배웠다. 그래야 일본의 지배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일 것이다. 지금 자라나는 아이들은 일본에 대한 적대감이나 적개심이 별로 없는 것 같다. 일본에게 꿀릴 것이 별로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리라. 결국 우리가 일본을 극복하는 것도 우리가 일본보다 잘살때 가능한 일이 아닌가 한다. 시끄럽게 떠든다고 될 일이 아니다.

그런 점에서 문재인 대통령이 친일극복이 정의라고 하는 주장에는 찬성할 수 없다. 그렇다면 우리는 중국의 지배에도 정의롭게 따져야 하고, 신미양요와 병인양요의 부당함을 미국과 프랑스에 따지고 사과를 요구해야 한다. 몽골의 침입은 또 어떻게 할 것이며 거란의 침입과 만행은 어떻게 할 것인가 ?

역사에서 우리는 정의와 불의를 따지기 보다 원인과 결과를 규명해서 교훈을 삼아야 한다. 일국의 왕의 아버지인 대원군을 중국으로 죄인 끌듯이 잡아간 것은 왜 사과를 요구하지 않는가 ? 그리고 왜 우리는 월남에 참전해서 월맹의 군인들을 살상하고 민간인들을 희생시킨 것을 사죄하지 않는가 ?

물론 일제의 잔혹한 처사에 대해서는 당연히 항의하고 사과받고 배상을 받아야 한다. 그것은 역사가 아니라 현실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친일문제를 정치적 수사로 사용하는 것에는 반대한다. 역사에서 정의를 구하는 것은 정치적 프로파간다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역사와 정치의 의미에 혼돈을 초래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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