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 중국 관계(박영실) 3 소련과 협정 및 소련군 철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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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영실은 1949년 3월 17일 조소 양국간의 경제적 및 문화적 협조에 관한 협정체결만 언급하고 있으며, <괴뢰군 연혁>에서 기술한 조소방위협정 및 조중 방위협정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고 있다. 조소방위협정은 이미 다른 언급이 있었지만 <조중방위협정>에 대해서는 유일하게 <괴뢰군 연혁>에서만 언급하고 있다.

조소방위협정의 내용을 구체적으로 언급하지 않았으나 소련으로 돌아온 김일성이 최고인민회의 제3차 대회(1949. 4.19-23)에서 소련 방문경과보고를 하면서, 김일성이 방소간 단순히 경제적 문화적 협조에 관한 내용을 뛰어 넘는 이야기를 나누었다는 의미를 주는 발언을 했다

“이 협정들은 조국의 통일과 독립, 자유와 국토의 완정을 위한 우리의 투쟁에 막대한 힘을 주게 될 것이며 이 정당한 투쟁에서 우리의 승리를 일층 촉진시킬 것”이라고 했다.(김광운, 북한 정치사연구 1, 2003, 선인, 687쪽 재인용)(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최고인민회의 제2차회의 회의록, 1949, 217-236)

상기한 김일성의 발언은 통상적인 경제 문화협정의 범위를 넘는다.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의 회의록을 제대로 읽어보지 않아서 알 수 없으나 당시 김일성의 발언만으로도 소련과 군사적 성격의 협의가 있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최고 인민회의에서는 1948년 12월 말 북한에 있던 소련군이 철수했다고 공식발표했다.

그러나 소련의 문서에 의하면 소련의 군사전문가와 군무원이 약 4천명 넘게 남아 있었다는 기록이 있다. 소련군 총참모부의 1949년 2월 18일 보고서 <군 철수 이후 잔류인원>에는 총 4,293 명이 남아 있으며 그중 4020명은 군인이고 나머지 군무원이었다.(박영실, 31)

이에 대해 미 육군 보고서는 소련은 2천명의 군사요원과 1천명의 경비병력이 북한에 남아 있다고 분석하고 있다.

이 당시 미군은 남한에 1개 연대전투단의 병력만 남아 있었다. 이를 비교해 보면 소련은 소련군이 철수했다고 하지만 그 병력수는 오히려 미군보다 더 많았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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