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련이 기술한 한국전쟁) 9, 북한군 제2군단의 춘천 홍천 전투 및 전투초기 북한군의 예비대 보충

북한군 제2군단의 춘천과 홍천전투에 대한 기술은 다음과 같다.

“제2보병사단은 이틀간의 전투 끝에 6월 27일 저녁에 춘천을 점령했고, 6월 27일 자정전에 가평에 도착하였다. 같은 시간 산악지역을 통해 공격하던 제6연대 소속 1개 대대가 가평을 우회하여 가평서쪽 2km에서 서울 방향 철도를 차단하였다. 제12보병사단은 천천히 전진하면서 6월 27일 자정전에 홍천 북동쪽 14km의 계선으로 진출하였다.(p.43)”

북한군 제2사단이 6월 27일 저녁에 춘천을 점령했다는 것은 춘천에서 심일이 육탄공격과 대전차포로 북한군 자주포를 파괴했다는 주장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유감스럽게도 이 책자에서는 좀더 자세한 내용이 기술되어 있지 않다. 제12보병사단의 진출을 천천히 전진했다고 한 것은 공격이 성공적이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당시 북한군 제12 보병사단의 공격을 저지하고 있던 부대는 한국군 제6사단 2연대로 함병선이 지휘하고 있었다.

홍천에서 제12사단의 진출지연은 북한군 제2사단이 신속하게 수원방향으로 진출하는데 장애가 되었다.

7월초 인민군의 예비대 편성

인민군은 전쟁직후부터 예비대를 편성해야 했다. 전쟁직후 예비대를 편성하게된 이유는 전투가 예상처럼 수월하지 않았기 때문이리라. 인민군의 예비대 편성에 대한 기록은 다음과 같이 기술되어 있다.

“인민군 사령부는… 7월 1ㅇ리부터 제8, 제9 보병사단(제1, 제3경비여단에 기반)과 2개 보병여단, 2개 해병여단, 2개 전차여단, 2개 독립전차연대, 7개 보충연대, 2개 대전차포대, 5개 독립 고사포대대에 대한 편성을 시작했다. 뒤이어 곧 제7경비여단을 기반으로 제7보병사단의 편성이 시작되었다.

새로 편성된 병력은 이전에 편성된 사단의 편제 인원에 비해 줄었다. 새로운 편제에 따라 소총과 카빈소총의 수량이 줄었고 일부 포와 박격포의 수량은 늘었다. 사단편제에 고사포 대대가 편입되었다.

보병여단들은 3개 보병대대, 포병연대, 강습대전차포병대대, 자주포대대, 120mm 박격포 대대, 자동소총대대, 통신대대, 공볃ㅇ대대와 의무위생대대로 편성되었다. (pp46-47)

장교의 부족

전쟁을 시작하면서 북한군은 장교들이 부족했다. 예비로 투입할 장교들이 없었다. 관련내용을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전쟁 발발 전에 인민군에는 장교급 예비 인원이 없었기 때문에 새롭게 연대를 편성하고 전투 중인 부대에 장교를 보충하는 것은 훨씬 더 어려웠다. 그래서 군 지휘관 직위에 당원이나 공무원들이 진출하였다. 최정예요원은 예전과 같이 과거 빨치산부대 지휘관 출신 장교였다. 초급장교 교육을 목적으로 하는 군사교육시설확대를 위한 대책이 마련되었고, 사관하교 생도를 위한 교육기간이 1년에서 2달까지 줄어들었다. 사단 군단의 지휘관을 위한 고급교육과정이 만들어졌고 제1중앙군관학교 산하에 장교들을 위한 고급교육과정이 확대되었다.(p.47)”




Posted from my blog with SteemPress : http://warandpeace.dothome.co.kr/2019/08/31/sovietview-koreanwar-9/


지소미아 종료결정에 대한 비판을 보면서

미국이 우리정부의 지소미아 종료결정에 불만이 많은 모양이다. 국무부 대변인이 나와서 지소미아 …


This page is synchronized from the post: ‘(소련이 기술한 한국전쟁) 9, 북한군 제2군단의 춘천 홍천 전투 및 전투초기 북한군의 예비대 보충’

Your browser is out-of-date!

Update your browser to view this website correctly. Update my browser now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