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사연구 제1의 목적을 다음 전쟁에서 승리하기 위한 교훈을 도출하는 것이다. 원래 전사란 역사학의 영역중 가장 실용적인 측면이 큰 분야다. 대분분의 역사학이란 통찰력과 지혜를 얻기 위한 경우가 많다. 그러나 전사연구는 전쟁과 작전 그리고 전투의 승리와 패배의 원인과 과정 그리고 그 결과를 연구하여 다음 전쟁에 대비하기 위한 것이다. 훌륭한 천재적인 군인들은 과거의 전쟁을 연구하여 새로운 전쟁양상을 만들어 내고 보통의 장군들은 과거의 전쟁을 고려하여 작전을 수행한다. 그리고 수준이 떨어지는 장군들은 과거에 어떻게 싸웠느냐하는 것도 모른채 전장에 나서서 패배를 당한다.
한국전쟁에서 우리 군이 기습으로 인한 패배라는 서사구조를 고착시키다보니 응당 검토했어야 했던 북한군의 작전적 의도에 대한 연구가 소홀해지는 결과를 초래했다. 서부전선의 한국군 제1사단과 제7사단을 패배시킨 북한군 3사단과 4사단 그리고 제105 전차사단의 향방이 제일 중요한 관심으로 대두했다.
한국군이 발간한 각종 전사기록을 보면 북한군의 작전적 의도를 제1단계를 서울 확보 제2단계를 대전 권의 확보 제3단계를 부산확보와 같이 구분했다. 그러다 보니 북한군의 초기 부대 배치와 군사력 운용의 의도와 같은 것은 거의 관심을 두지 않았다.
이번 포스팅에서는 북한군의 초기 부대배치의 의도의 개념에 대해 간략하게 정리해보고자 한다.
북한군은 경부 축선의 공격을 위해 제3,4,1 보병사단과 제105전차사단을 배치했다. 그리고 1950년 3월 중공군에서 전환된 3개의 사단을 각각 서부 동부 중부지역에 배치했다.
먼저 서부지역에서는 중공군에서 전환된 제6사단이 한국군 1사단을 격파하고 임진강을 도하하여 김포반도를 거쳐 영등포로 진출하여 한국군을 한강이북에서 포위 섬멸하고자 했다.
중부전선에는 춘전지역에는 북한에서 창설된 제2사단을 그리고 홍천축선에는 중공군에서 전환된 제12 사단을 배치했다. 춘천지역에서 수원으로 지향하여 한국군을 한강선 이남에서 포위하고자 했다.
동부전선에서는 중공군에서 배치된 제5사단을 배치했다.
서부전선을 담당한 제1군단에게 2개의 사단(제 13, 15사단)을 예비로 편성했다.
그리고 전략예비로 제10사단을 보유하고 있었다.
한국군의 초기전사 연구에서 가장 중요한 내용으로 다루어지고 있는 부분은 춘천에서 한국군 6사단이 북한군 제2사단의 공격을 막아내 수원에서 포위하겠다는 북한군의 의도를 좌절시켰다는 것이다. 이런 평가는 1975년 이후 일본의 자위대 연구관이 조선전쟁이란 전사책을 편찬하면서 소련의 자료를 인용하면서 이루어진 것이다. 그에 따라 우리 군은 그 이전까지 패배했다고 생각했던 춘천전투를 승리로 재평가하고 춘천대첩이라고 기념행사를 하기에 이른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당연한 의문을 품지 않을 수 없다. 그럼 영등포 지역으로 진출하여 한국군을 한강이북에서 포위하려고 했던 북한군 제6사단은 왜 그 목적을 달성할 수 없었을까 ?하는 것이다. 도대체 무슨 일이 있어서 중국대륙에서 수없이 많은 전투경험을 쌓아온 제6사단이 임무를 달성하지 못했을까 하는 것이다. 이미 앞에서 이 문제와 관련하여 개화산 전투의 의미를 언급한 바 있다. 아직까지 우리 전사에는 무엇때문에 북한군 제6사단이 영등포로 제시간에 진출하지 못했을까에 대한 의문에 답하지 못하고 있다.
철저한 전쟁준비를 갖추었던 북한군에 비해 한국군은 그때 그때 상황에 대응할 수 밖에 없었다. 따라서 한국전쟁 초긴전쟁사는 북한군의 작전전 의도가 무엇이었나를 평가하고 한국군이 그 작전적 의도를 어떻게 좌절시켰는가하는 틀로 정리되어야 한다. 그러나 한국군의 전사는 북한군의 의도를 제대로 고민하기 보다는 한국군이 어떻게 전투를 했는가하는 것을 잡다하게 나열하는데 그치고 말았다.
북한군의 작전의도를 파악하는데 있어서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중공군에서 전환된 3개사단을 어떻게 의도로 운용하고자 했는가 이다. 그점은 다음에 정리토록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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