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 중국 관계(박영실) 20, 소련의 북한 지원, 공군

스탈린 김일성.gif

전쟁을 준비하면서 북한은 소련에게 공군 강화를 요청했다. 소련은 북한이 공군을 확보하게 되면 한국전쟁이후 대마도로 진출할 것을 우려해서 공군을 강화시키지 않았다는 것을 <괴뢰군 연혁>을 통해서 알아 보았다.

소련이 공군을 강화하기로 한 것은 낙동강 전선에서의 패배가 가시화 되면서 부터였다. 만일 처음부터 공군력을 충분하게 강화했더라면 북한군이 초반 전투에서 그렇게 어려움을 겪지 않을 수 있었다. 소련이 북한군의 공군을 강화시키지 않은 것에 대한 비판은 별로 없다. 그러나 소련이 가장 크게 잘못한 것 중의 하나로 공군력을 제대로 강화시키지 않은 것이라고 지적할 만하다.

소련 공군 151 전투비행사단은 1950년 7-8월 기지를 연해주에서 션양과 단동으로 옮겨 중국 동북지역을 방어하는 임무를 담당하고 있었다

1950년 9월 소련 정부는 평양을 수호할 목적으로 소련 공군을 파견할 계획을 세웠다.

9월 23일 소련 국방상 바실리예프스키의 스탈린에 대한 보고서에 따르면 소련정부는 연해주 비행장에 주둔해 있는 LA-9 40대로 편성된 304 비행연대를 10월 1-2일 평양에 파견키로 결정했다.

9월 25-30일 비행 정비부대, 적기탐지를 위한 4대의 전파 탐지기 를 평향에 수송하기로 했다.

계획에 따르면 304연대는 10월 3일 평양수비임무에 착수할 예정이었으나 그러지 못했다.(전현수, 소련 공군의 한국전 참전,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한국전쟁사의 새로운 연구 1,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2001, 638쪽)

10월 18일 소련 국방상의 명령에 따라 28전투항공사단이 야오양 비행장에서 새로 편성

11월에는 소련군 상하이 방공작전집단군에 소속되어 있는 50전투 비행사단이 안샨으로 이동

소련은 중국으로 비행사단으로 이동하면서 다음과 같은 사항을 조치했다.

첫째, 중국으로 파견하는 소련 비행사단, 중국에 주둔한 벨로프의 비행사단을 중국 소유로 이전. 소련 비행사단을 중국 비행사단으로 간주하여 중국 국적기의 일련번호를 매김. 중국인들이 비행교육을 완료한 후에는 소련 비행사를 본국으로 돌려보냄

중국과 소련이 비행단 이전 협약을 맺어, 협약에 서명하는 순간부터 모든 물자를 중국 소유로 간주

연료를 포함한 일체의 비용은 중국이 부담. 이 불자에 대한 지불은 1950년 2월 14일 소련정부와 중국 정부간 협정에 따라 무기와 구수기재의 기준 가격을 실제 전달된 날짜로 산정(국편, 1950년 10월, 113쪽)

1950년 11월 15일자 소련군 총참모장 명령에 따라 11월 15-24일 중국 션양에 64 전투비행군단 작전그룹이 창설

11월 20-25일 사이에 전속된 28, 50, 151 전투비행사단, 81 독립통신중대는 64군단 창설의 모태가 됨. 군단 지휘소는 션양, 이후 종전까지는 단동에 위치, 초대 군단장은 베로프 소장(전현수, 643)

제64군단의 역할은 미공군 방어였다. 최초 임무는 중국 지역의 주요시설과 압록강 교량 및 수력 발전소 방어, 이후 작전반경을 평양-원산 라인으로 확대했으나 1953년 7월 27일 전투종료시까지 작전지역은 극히 제한적(기광서, 역비논단: 흐루시초프 회고록과 한국전쟁, 역사비평, 통권 55호 2001년 여름)

소련은 공군이 참전한 이후에도 그들의 활동을 매우 제한했다.이는 소련공군이 참전했다는 사실이 알려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서였다.

올린이:admin2019년 12월 5일


This page is synchronized from the post: ‘북한 중국 관계(박영실) 20, 소련의 북한 지원, 공군’

Your browser is out-of-date!

Update your browser to view this website correctly. Update my browser now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