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전쟁사 연구) 6.25 기습남침의 서사구조가 전사기록에 미친 영향(스미스 특수부대와 제24사단의 대전전투)

한국전쟁의 기습남침으로 인한 초기전투 패배의 불가피성이라는 점에서 전사를 기술하려 했던 서사구조는 그 이후 작전의 의미를 제대로 평가하는데 많은 장애를 초래했다. 그와 관련하여 이전에 홍천 전투와 개화산 전투의 의미를 살펴본 바 있다.

한국전쟁이 한숨을 돌리게 되는 계기는 한강 방어선에서 김홍일 장군이 약 6일정도를 버티어 주었기 때문이다. 북한이 남침하자 마자 김홍일 장군은 서울의 피탈은 불가피하다고 파악하고 천혜의 방어선인 한강선에서 방어를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당시 국군 제1사단, 제7사단은 각각 개성과 의정부 지역에서 지휘계통을 상실할 정도로 타격을 입고 있었다. 국군은 부대단위로 철수하지 못하고 패잔병처럼 흩어져 버렸다. 당시 김홍일 장군이 혼자서 한강이남에서 병사들을 수습해서 한강선 방어선을 구축했다. 그리고 1주일간 방어선을 구축했으며 이는 미국이 한국에 지상군을 파견하기 위해 절대적으로 필요한 시간을 벌어주는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

전투와 작전의 의미를 어떻게 파악하느냐 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작전의 의미를 부여하는 능력이 바로 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는 용병술의 기본이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한국전쟁에 처음으로 투입된 미군인 스미스 특수부대와 대전에서 북한군과 전투를 벌였던 미 제24사단의 전투는 매우 중요하다.

한국전쟁사에서 스미스 특수부대와 미 제24사단의 대전전투는 패전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전체적인 의미에서 작전의 의미를 파악해 본다면 스미스 특수부대의 죽미령 전투와 미 제24사단의 대전전투를 패전으로 보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 특히 한국의 전사에서 스미스 특수부대의 죽미령 전투와 미 제24사단의 대전 전투는 패전으로 엄격하게 규정하는 측면이 있다. 그 배경에는 제2차 세계대전에서 승리한 미군들도 북한군에게 속수무책으로 당했기 때문에 한국군 제1사단과 제7사단이 개성과 의정부에서 패배한 것은 당연하다고 하는 의미가 포함되어 있는 것이다.

그럼 과연 우리는 미군이 참전해서 치룬 죽미령 전투와 대전전투를 어떻게 파악해야 할까? 미국은 지상군 참전을 결정했다. 미국 본토에서 지상군이 참전하려면 상당한 시간이 소요된다. 따라서 미국의 참전 결정이후 작전은 미본토에서 지상군을 투입하기 위한 시간을 버는 것이 가장 중요했다.

당시 미국은 정규사단을 제대로 보유하고 있지 않았다. 전쟁이 끝나면 동원을 해제하고 대규모 군대를 유지하지 않는 것이 미국의 전통이었기 때문이었다. 한국전 참전을 결정했지만 미국은 제대로된 군대를 보유하지 않고 있었다. 맥아더는 우선 일본에 주둔하고 있던 스미스 중령이 지휘하던 1개 대대와 포병 1개 중대를 묶어서 스미스특수부대라고 명하고 한국으로 보냈다. 그리고 제24사단에게 한국에 투입할 준비를 하라고 했다.

다시 말하면 제24사단은 본토의 미지상군 투입을 위한 시간을 벌어주는 것이 임무였고 스미스 특수부대는 제24사단이 일본에서 투입될 수 있는 시간을 버는 것이 임무였다.

맥아더는 6월 30일 24사단을 한국에 투입하라는 지시를 하였고 바로 그날 오후 3시에 스미스 특수부대가 부산에 공수되었다.

7월 3일과 4일에 걸쳐 북한군은 한강을 도하하기 시작했고 스미스 특수부대는 7월 5일 죽미령에서 북한군과 조우하여 약 6시간 정도를 지연시켰다. 이 전투에서 미군 포병대대장이던 페리 중령도 전사했다.

이후 딘소장의 제24사단은 약 20일까지 대전까지 전투를 치루었다. 잘아는 바와 같이 본인도 포로가 되었다. 문제는 죽미령에서 대전까지 15일간 북한군의 주공부대였던 3,4사단과 제105 전차사단을 저지했다는 것이다.

이작전을 두고 미국에서도 성공이냐 실패냐에 대한 평가가 엇갈렸다. 맥아더 원수는 스미스 특수부대와 제24사단의 작전으로 북괴군의 진출을 지연시켰다는 것이다. 한편 맥아더의 후임인 리지웨이는 북한군 정예부대에 맞서 제24사단을 투입하여 중과부적의 전투를 하게 한 것을 맥아더가 잘못했다는 평가를 하기도 했다.

그러나 만일 맥아더가 제24사단을 투입하지 않았다면 본토에서 미 지상군이 미처 도착도 하기전에 북한군이 낙동강을 건넜을 것이다.

러시아는 공간을 양보하고 시간을 번다는 전략을 이용한다고 한다. 광대한 영토를 조금씩 내어주면서 적이 지치기를 기다리고 그사이에 전쟁을 위한 준비를 갖추어 반격에 나선다는 것이었다.

당시 맥아더는 미군 병사들의 생명을 내어주고 시간을 벌었다. 즉 피를 내주고 시간을 벌었던 것이다. 맥아더는 스미스 특수부대와 제24사단을 바둑의 사석과 같이 운용했다. 아마 미국과 같은 문화권에서는 그런 부대 운용은 용납받기 어려울 것이다. 리지웨이 장군은 그런 시각에서 맥아더의 제24사단 운용을 평가했는지도 모른다.

당시의 상황을 고려해 볼때 만일 맥아더가 스미스 특수부대와 제24사단을 사석으로 활용하지 않았다면 전쟁은 9월이전에 종결되었을 가능성을 부정하기 어렵다. 그렇게 보면 한국전쟁에서 맥아더의 가장 빛나는 작전은 제24사단의 운용인지도 모른다.

관점을 달리보면 전투와 작전의 의미가 완전하게 달라진다. 우리가 만든 전사는 그런 해석의 가능성을 완전히 배제하고 있다. 세계 최강의 미군도 북한군에게 패배했다는 것을 강조하는 것이 중요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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