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9년 이후 육군본부는 북한의 공격을 다음과 같이 예상했다.
제 1안
주공 : 철원 정면(주로 경원선에 연해 철원-전곡-의정부선)
조공
가. 영안 개성 방면 : 견제
나. 옹진 정면 : 전략적 수세
다. 강원도 정면 : 전략적 수세
라. 후방 : 요란 공작
제2안
주공 : 개성 정면 주로 경의서ㅗㄴ
조공 : 연안 정면 철원 정면 : 견제 공격
제3안
주공 : 장단 정면(구화리 서방 – 장단, 문산 선)
이상의 세가지 방안을 놓고 제1안이 가장 가능성이 높다고 판단했다. 이와함께 북한군은 38도선을 돌파한 후 한강선까지 신속히 남하아여 국군의 주력을 서울 이북지역에서 결정을 강요하고 단시일내에 수도 서울을 수중에 넣으려고 할 것이라고 판단했다.
서울 점령후 북한군은 최대 2개월내에 남한 전지역을 완전히 점령하려고 시도할 것이라고 보았다.
전쟁준비를 위해 북한의 참모총장 강건은 1950년 6월 10일 각 사단장과 비상비밀회의를 개최하여 언제든지 전투에 돌입할 수 있는 태세를 갖출것을 지시했다. (55)
이와함께 6월 초순부터 38선 일대에 병력을 배치하기 시작하여 7월 23일 경에는 보병 7개사단 전차 2개 사단을 38도선 일대에 집결완료 시켰다.
이렇게 병력이동 배치를 완료한 북한군은 1950년 6월 25일 05:30분을 기하여 38도선 전지역에서 포천 의정부 정면을 주공으로 주문진, 춘천, 고랑포, 옹진, 개성 정면을 조공으로 서울 점령을 목표로 남침을 개시하는 한편 제766부대 (회령군관학교 생도대)와 유격대를 안인리에 상륙시켰다.(57)
여기서 공격 개시시간을 05:30분이라고 적시한 것은 기존의 04:00 주장과 다르다. 통상 새벽 4시에 공격을 했다고 하는 것은 국군이 기습을 당해서 불가항력이었다는 주장의 근거로 사용된다. 그런데 1958년도에 출간된 육군 정보국의 자료는 05:30분을 공식적인 남침시간으로 지적하고 있다.
만일 그렇다면 새벽 4시 주장은 그 이후에 이루어졌을 경우가 많다.
Sponsored ( Powered by dclick )
우리는 지속가능한 삶을 살고 있는가
모두들 자신의 삶에 불만들이 많다. 그렇지만 하나 분명한 것은 우리는 지금 지나칠 정도로 물질…
This page is synchronized from the post: ‘(괴뢰군 연혁) 18, 북한군 남침 계획에 대한 예측과 남침시간’